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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꼬꼬무 김득구 권투선수 사망사건, 레이 맨시니와 아들 근황 1982 최후의 도전 영화

by 충격대예언 2023. 1. 19.

꼬꼬무 김득구 권투선수 사망사건, 레이 맨시니와 아들  근황
1982년 최후의 도전 영화

[글 포스팅 순서]

1. 김득구: 내 꿈은 가난하지 않았다-1982 최후의 도전
2. 김득구金得九 프로필
3. 김득구 과거 에피소드
4. 김득구 복싱 경력
5. 김득구 생애 마지막 경기
6. 밥 애럼 프로모터의 농간으로 인한 매치업
7. 김득구 사후, 아내(부인)과 아들 그리고 레이 매시니 근황
8. 꼬꼬무 시즌3 62회 게스트 이야기 친구


9. 꼬꼬무 4천만 대국민 인질극 독극물 협박 사건 식품회사 범인 신길현 글리코 모리나가 사건
10.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이토히로부미 암살 저격 이유 안중근 후손 자녀 우덕순 유묵 꼬꼬무
11. 김명철 실종 사건 꼬꼬무 증발한 남자와 쌍둥이 이관규 형제 사라진 약혼자

 

 

김득구: 내 꿈은 가난하지 않았다-1982 최후의 도전

1월 19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꼬꼬무 시즌3)'에서는'내 꿈은 가난하지 않았다 ‘1982 최후의 도전’'이 방송되었습니다.
62회에서는 전 권투선수 김득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1955년생 김득구는 1978년 프로복싱 입문한 프로복서입니다.
당시 무명임에도 WBA 챔피언에 도전해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당시 김득구는 라이트급 챔피언 레이 맨시니와 경기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그는 승부를 벌이던 중 14라운드에서 강타를 맡아 패했습니다. 

턱을 맡고 쓰러진 김득구는 시합이 끝난 후 뇌수술을 받았지만 뇌사 상태에 빠져 나흘 뒤 사망했습니다. 
이후 그는 장기를 기증하고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김득구와 경기를 펼쳤던 레이 맨시니는 이후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렸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한 WBC는 사망 사건을 계기로 복싱 경기 횟수를 15라운드에서 12라운드로 줄였습니다.

아래에서 권투선수 김득구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김득구金得九 프로필

생년월일(출생): 1956년 8월 10일
고향(출생지): 강원도 고성
사망일: 1982년 11월 18일
나이: 향년 26세
키: 168cm
종목: 복싱
전적: 20전 17승(8KO) 2패 1무
수상: OPBF(동양-태평양 복싱기구) 전 라이트급 챔피언

 

김득구 과거 에피소드

대한민국의 前 권투 선수입니다.

1956년 강원도 고성에서 다섯 자녀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2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어머니는 3번 결혼을 했습니다. 
원래 이름은 이덕구였으나 1967년 어머니가 김호열과 결혼해 그의 호적에 입적하면서 김득구로 개명했습니다.

호적상으로는 1955년 1월 8일 전라북도 군산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묘비문에는 1956년 8월 10일 출생 강원도 고성 출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난하게 자라났으며, 1972년 이부형제들과의 갈등으로 17살 나이로 가출하여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권투 선수가 되기 전에는 구두닦이, 투어 가이드 등의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았으며 검정고시에 붙어서 천호상업전수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세계 타이틀에 도전하게 되는 1982년 이영미 씨와 약혼했으며, 그 해에 비극적인 사고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김득구 복싱 경력

동아체육관에 입문해 아마추어 선수로서 활동하다가, 1978년에 프로로 전향했습니다. 
1980년 12월 이필구를 10회 판정으로 이기고 한국 챔피언 타이틀을 얻었습니다.

이후 1982년 2월 28일 OPBF 챔피언 전에서 김광민에게 심판 전원일치 판정으로 승리하여 동양 챔피언이 되었으며 이 경기 결과로 인해 세계 복싱 협회에서 그의 세계 랭킹을 1위로 정했습니다.

이후 같은 해에 네 번의 경기를 더 가지면서 OPBF타이틀도 3차 방어전까지 해냈지만, 그때까지도 비 동양권 선수와의 경기는 커녕 아시아 내 원정 경기조차 단 한 번에 불과했을 정도로 세계 무대와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는 경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세계랭킹 1위가 되었다는 부분이 석연치 않습니다.

이후 김득구는 WBA 라이트급 챔피언인 레이 "붐붐" 맨시니(Ray Mancini)와 타이틀전을 할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김득구 측에서는 어렵게 생긴 기회인 만큼 필승을 다짐하며 맹훈련에 들어갔습니다.

 

김득구 생애 마지막 경기

레이 맨시니와 김득구의 타이틀전은 1982년 11월 13일(한국 시간 14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Caesars Palace)에서 열렸습니다.

김득구는 비장한 각오로 "관을 준비해 놓고 가겠다, 패한다면 절대 걸어서 링을 내려오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고, 실제로 미국으로 건너갈 때 성냥갑으로 모형관을 만들어서 가지고 갔습니다. 
해당 인터뷰 그리고 그 말은 현실이 되었고, 기뻐하는 사람 없이 슬픔만이 가득한 비극만을 남긴 최악의 시합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경기상황을 보면 9회까지는 김득구가 맨시니와 호각에 가까운 멋진 승부를 펼쳤지만, 10회 때부터 체력 고갈로 난타를 허용하였습니다. 그 후 11~13회에 걸쳐 계속 수세에 몰리면서도 정신력으로 버텨냈습니다.
이 때 허용한 집중타로 김득구의 눈 주위가 크게 부어올랐습니다.

운명의 14회, 이미 패색이 짙었지만 김득구는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공이 울리자 마자 맨시니에게 다시 달려들어 펀치를 섞었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아 유효타를 날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후 지칠 대로 지쳐 가드를 완벽하게 올리지 못한 김득구의 왼쪽 머리에 맨시니의 라이트가 강하게 적중했습니다.

이에 놀란 김득구가 뒤로 물러났으나 맨시니의 따라붙는 속도가 더 빨랐습니다.
이어지는 맨시니의 왼손 훅은 일단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긴 했으나 후속타가 계속 나올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이미 체력이 완전히 바닥난 김득구는 가드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스텝도 넓게 밟지 못해 안면을 그대로 노출했고, 달려들던 맨시니가 뻗은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김득구의 턱에 제대로 적중해 버렸습니다.
김득구는 이 충격만은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다운되고 말았습니다.

김득구는 필사적으로 로프를 붙잡으며 몸을 일으키고 결국 다시 일어서기까지 하지만, 이미 경기 속행은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이에 심판이 KO을 선언하며 맨시니의 승리가 확정되었습니다.

맨시니가 승리의 세리머니를 하는 동안 김득구는 다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뇌출혈에 대한 처치와 혈전 제거를 위해 두 시간 반에 걸친 뇌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뇌사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5일 뒤 당시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해 있었던 어머니의 동의를 받아 산소 마스크를 떼어내고 장기기증을 하면서 향년 26세를 끝으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습니다.

 

 

밥 애럼 프로모터의 농간으로 인한 매치업

김득구는 전적은 괜찮았지만 세계무대 경력이 없어 세계 복싱계에선 무명인 선수였는데 WBA 세계랭킹 1위가 되고 동급 최강으로 평가받는 챔피언과 매치업이 이루어진 부분을 이상하게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이런 의아한 매치업이 이루어진 것은 프로모터 밥 애럼(Bob Arum)의 농간 때문이었습니다.
김득구는 세계적인 강자들과 싸울만한 기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복싱계의 일관된 평이었고, 김득구의 프로모터인 김현치 관장도 김득구의 기량이 세계적인 수준에 못미친다는 것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정한 바 있습니다.


레이 맨시니가 챔피언으로 활동할 때 이미 세계 랭킹엔 하워드 데이비스나 에드윈 로자리오 등의 쟁쟁한 복서들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레이 맨시니와 챔피언 자리를 두고 일합을 겨루기에 부족함이 없는 선수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뛰어난 외모로 흥행성을 갖춘 레이 맨시니가 패배하는 꼴을 볼 수 없었던 밥 애럼은 랭킹을 조작하여 맨시니의 타이틀전 상대로 위협적인 상대들을 모두 거르고, 떡밥이나 다름없던 김득구를 WBA 랭킹 1위로 만드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리하여 밥 애럼은 김득구를 레이 맨시니의 타이틀 유지를 위한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김득구 사후, 아내(부인)과 아들 그리고 레이 매시니 근황

김득구가 죽은지 몇 달 후인 1983년에 유복자 아들 김지완이 출생했습니다.
아들 김지완은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김득구가 세상을 떠난 뒤 김득구의 모친은 우울증에 빠졌다가 3개월 뒤 "내가 가난해서 아들이 복싱을 시작했다. 결국 내가 아들을 죽인 것이다"라고 쓴 유서를 남긴 채 농약을 마시고 아들의 뒤를 따랐습니다. 
새아버지는 맨시니가 보상금으로 뭘 준다는 사기전화에 걸려 당시로서는 꽤 큰 돈인 3백만원을 갈취당했다고 합니다.

 


김득구의 사망 이후 맨시니는 1983년 1월에 AP통신과의 회견에서 금년말 안에 한국을 방문해 "김득구의 모친을 만나 위로하고 김득구의 묘앞에 참배하고 싶다."고 밝혔으나 얼마 뒤 김득구의 모친이 자살했다는 사실을 접하자 호텔안에 틀어박혀 두문불출 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맨시니의 대변인이 위 정보를 전면 부인하자 UPI통신은 허위보도를 한 이탈리아 언론을 탓하며 정정보도를 냈습니다.
 
경기 심판 리처드 그린은 선수가 위험한 상태임에도 계속 시합을 강행시킨 끝에 김득구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7개월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상대였던 레이 맨시니는 김득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고도 알려졌으나, 실은 이탈리아 가제타 델 스포르의 가짜 뉴스입니다.

이후에도 맨시니는 1984년까지 WBA 라이트급 타이틀을 두 번 더 지켰으나, 1984년 6월 1일 리빙스턴 브램블에게 타이틀을 상실했습니다. 1985년 2월 복수전에 실패한 뒤 잠정 은퇴했다가 다시 복귀해 1989년 헥터 카마초와 WBO 라이트웰터급 챔피언 결정전, 1992년 그렉 호건과 NABF 라이트웰터급 챔피언 결정전을 치렀으나 모두 패한 뒤 최종 은퇴했습니다. 복싱 선수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자기가 원하던 영화배우로 데뷔했습니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지금도 활동 중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레이 맨시니는 김득구의 사망으로 인한 죄책감으로 심한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김득구와의 경기 이후에도 계속 복싱 선수로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김득구의 사망이 맨시니의 선수 생활에 큰 타격을 가했다는 점은 틀림없습니다. 
맨시니는 김득구와의 시합 이후로 자책감에 빠져 시합간의 공백기가 길었으며, 전과 같은 패기있는 복싱 스타일을 구사하지 못한 채 치고 빠지는 히트 & 런 전법의 조심스러운 복싱으로 스타일이 변했습니다.
맨시니에 대해서 다룬 다큐에서는 불행했던 시합이 한 복서의 아까운 생명, 전도유망한 천재 복서의 선수 생활을 일찍 마감하게 했다고 말할 만큼 그의 복싱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합니다.
맨시니 자신의 입으로도 "그 시합 이후로는 복싱이 싫어져서 복싱을 하는 것이 괴로웠다"고 술회할 만큼 크나큰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경기심판과 김득구의 어머니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 경기후에 3명이 사망했으니 그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김득구를 소재로 한 영화 '챔피언'이 개봉할 당시 한국을 찾았던 맨시니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득구를 '강인한 전사'였다고 칭찬하면서, 그의 죽음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바뀌고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려왔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하늘에서 김득구와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해줄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맨시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무 말 없이 끌어안아 주겠다"는 말로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살인 복서'로 낙인찍힌 자신을 오히려 위로해 준 한국인들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함을 표하기도 하였습니다.

2012년 김득구 사망 30주기를 맞아 비운의 복서 김득구와 불운의 복서 맨시니의 스토리가 재조명되었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 마크 크리걸의 ‘레이 맨시니 전기’(『The Good Son: Life of Ray ‘Boom Boom’ Mancini』)와 이 전기에 바탕한 동명의 다큐멘터리(감독 제시 제임스 밀러)를 통해서입니다.
책과 다큐멘터리의 클라이맥스는 2011년 6월 이뤄진 김득구의 약혼녀(와이프) 이영미(2012년 기준 나이, 53)씨와 아들 지완(29)씨, 그리고 맨시니(51)의 만남이었습니다.

2011년이 되어서야 맨시니는 김득구의 유족과 만남을 가졌는데,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맨시니와 한평생 죄책감에 시달려온 맨시니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김득구의 아들에게 이제야 오랜 세월동안 가졌던 마음속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겠다고 한 맨시니의 말은 많은 올드 복싱팬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맨시니는 매년 복서를 꿈꾸다 세상을 떠난 형의 기일과 김득구의 기일에는 빼놓지 않고 조의를 표한다고 합니다.

김득구의 죽음은 세계 복싱계와 스포츠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복서의 안전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미국 하원에서는 복싱의 안전을 위하여 청문회까지 열렸으며, 종합격투기를 포함한 모든 격투기 대회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래서 생긴 룰이 바로 다름 아닌 '닥터스톱'으로 각 선수들마다 할당된 주치의의 판단으로 심판 판정과는 상관없이 경기를 종료시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계권투평의회(WBC)에서는 김득구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15라운드 경기를 12라운드로 줄였습니다. 
라운드 사이의 휴식시간도 60초에서 90초로 늘렸고, 스탠딩 다운제를 도입했습니다. 
김득구가 사고를 당한 복싱기구인 세계권투협회(WBA)에서도 1988년에 그 뒤를 따랐으며, IBF 역시 1989년에 변경을 시행했습니다.
김득구 사망사건은 마피아와 연계된 당대 최고의 복싱 프로모터 돈 킹을 추적하던 FBI의 수사가 엎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꼬꼬무 시즌3 62회 게스트 이야기 친구

'꼬꼬무' 62회 이야기를 함께 한 친구는 배우 박명훈, 가수 박혜원(HYNN), 그룹 위아이 멤버 김요한입니다.

박명훈은 장현성의 이야기 친구로 '꼬꼬무'를 찾았습니다. 
박명훈은 그날의 경기 영상들이 플레이되자 쓰러져도 포기 하지 않는 김득구 선수와 그 속에 담긴 절절한 사연을 들으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자칭 '원조 꼬물이' 박혜원은 장성규의 이야기 친구로 등장했습니다. 
드디어 '꼬꼬무'에 오게 됐다며 기대감을 보이던 박혜원은 노래 실력만큼 시원시원한 리액션으로 장성규와의 찰떡 호흡을 보여줬습니다. 특히 박혜원은 집을 떠나는 김득구에게 어머니가 내민 '이것'을 보고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김요한은 장도연의 이야기 친구로 함께했습니다. 
김요한은 본인의 태권도 선수 시절을 되돌아보며 김득구의 도전과 불굴의 정신력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누구보다 김득구의 마음을 잘 아는 김요한이었기에 녹화 내내 진지한 눈빛으로 장도연의 이야기에 빠져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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