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보물선 꼬꼬무 1976 보물을 찾는 사람들
침몰선 해저유물 도굴꾼 157회 재방송 시즌3
[글 포스팅 순서]
1. 보물을 찾는 사람들 - 1976 신안 보물선
2. 신안 앞바다서 건진 도자기
3. 보물이 묻힌 마을
4. 도굴꾼의 등장
5. 보물을 찾는 사람들
6. 신안 해저 유물 발굴단
7. 보물의 발견
8. 700년 만에 나온 보물
9. 바닷속 보물선
10. 보물을 훔치는 사람들
11. 발굴단 vs 도굴꾼
12. 모두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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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을 찾는 사람들 - 1976 신안 보물선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시즌3)에서는 '보물을 찾는 사람들 - 1976 신안 보물선'이라는 부제로 700년 동안 바닷속에 잠들어있던 보물을 찾아낸 그날의 이야기를 공개했습니다.
이야기 친구 게스트로는 가수 겸 배우 이준호, 배우 김국희, 그룹 오마이걸 멤버 유빈이 출연했습니다.
신안 앞바다서 건진 도자기
때는 50년 전인, 1976년 1월.
전라남도 신안군에 있는 검산마을.
몇 명의 어부들이 사는, 작고 조용한 마을입니다.
목포의 한 초등학교 교사였던 최평호 씨는 오랜만에 고향인 검산마을에 갔습니다.
형제들이 아버지 묘를 벌초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벌초를 마친 후 고향에 있는 셋째 형님 집에 모였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형제들이 모여 회포를 풀고 있는데, 갑자기 형님이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 거시기 말여, 내가 얼마 전에 물질을 하다가 뭘 하나 건졌는데, 그것이 꽤 볼만하단 말여.
시방 함 보여줘야 쓰겄네."
그러면서 형님이 가져온 건 이거였습니다.
형님이 집 앞에 있는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건졌다는 것입니다.
높이 44cm, 둘레가 65cm나 되는 큰 청자였습니다.
보니까 색깔도 좋고, 무늬도 너무 예뻤습니다.
그런데 최평호 씨가 가만 보니까, 이거 왠지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암만 봐도, 그냥 도자기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최평호 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자기를 목포 집으로 가져갔습니다.
집에 모셔놓고 보니까, 이거 볼수록 엄청난 작품 같았습니다.
최평호 씨는 이 도자기를 들고 목포시청으로 갔습니다.
"시청 공보실에 가면 혹시 무슨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갔어요.
갔더니 공보실에서도 전혀 감감하더라고요."
-최평호, 당시 국민학교 교사
그런데 목포 시청에도 문화재 담당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아쉬운 대로, 신고서라도 쓰고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신고 서식 양식이란 것도 딱히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평호 씨가, 신고 양식을 직접 손으로 그려가며 신고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직원이 신고서를 보더니, 신안에서 건진 거면 거기다가 신고해야 한다며, 기껏 가져왔는데 신안으로 다시 가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최평호 씨는, 도자기를 가지고 다시 신안군청으로 갔습니다.
거기선 뭐라고 했을까요?
"신안군청에서 하는 이야기가 신안군 안전면에서 밭갈이를 하다가 돌도끼를 하나 발견했는데, 서류가 왔다 갔다 한 것이 200매가 왔다 갔다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보상금이 얼마가 나왔냐면, 500원이 나왔대요.
그때 돈으로. 500원이 나왔는데 그 왕복 선비가 700원이래요.
그래서 안 찾아가고 포기를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제발 좀 신고 안 했으면 쓰겠습니다' 그런 이야기예요. 신안군청에서 하는 이야기가."
-최평호, 당시 국민학교 교사
최평호 씨는 포기하지 않고 사정사정했습니다.
그때, 신안 군청에 근무하던 남상률 씨가 그 도자기를 본 것입니다.
보니까, 남상률 씨도 이 도자기에 대해 궁금해졌습니다.
남상률 씨는 그 도자기를 받아서, 광주에 있는 국립박물관에 감정을 의뢰했습니다.
"최평호 씨가 어느 날 가져왔는데, 저것이 몇 년도 유물인지도 모르고 이제 그랬는데.
그분도 오셔서 내 기억으로는 가지도 않고.
우리보다 더 귀하게 얘기하더라고 신기하게.
그래서 달라고 해서 우리가 확인서 받아 놓고 광주에 있는 국립박물관으로 가지고 갔어요.
학예사한테 감정의뢰를 맡긴 겁니다."
-남상률, 당시 신안군청 공무원
그리고 일주일 후, 이 도자기의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감정 결과, 이건 고려청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럼, 뭐였을까요?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지난 1월 9일 전남 신안군에서 고기잡이를 하다 대형 청자를 하나 건져냈는데, 이 청자가 국제 시세로 10여만 달러에 상당하는 원나라 청자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당시 신문 기사 내용 中
고려청자가 아니라, 700년 전 중국 원나라 때 청자였던 것입니다.
"한 일주일 있다가 송원대 유물이라고 판명돼서 온 거예요.
그러니까 보물이라고 해서 저희들이 깜짝 놀랐죠.
이렇게 귀한 것이 나온다고."
-남상률, 당시 신안군청 공무원
무려 시가 10만 달러로 추정됐습니다.
그 당시, 3천만 원이 넘는 금액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3억 원짜리 도자기인 것입니다.
이걸 처음 발견한 최평호 씨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정말 큰일을 했다. 지금도 그런 것을 위안하고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그렇지 않았으면 영원히 파묻혔을지도 몰라요.
지금까지도."
-최평호, 최초 신고자
보물이 묻힌 마을
이 소식은 곧바로 마을 전체에 퍼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왜일까요?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그물에서 크고 작은 것 할 거 없이 잘 걸려 나왔죠.
그래서 옛날 어르신들이 우리 아버지도 그랬지만 '옛날 그릇 귀신 난다' 그래서 그걸 다 버린 거예요."
-김정석, 당시 검산마을 주민
"옛날부터 그 지역에서 많이 그 어부들이 고기잡이하면서 발견이 됐어요.
굉장히 많은 양이 걸려 나왔는데 심지어는 개밥그릇 또는 재떨이. 또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엿장수들 오면 엿장수하고 엿 바꿔먹고 그런 상황이었어요."
-최평호, 최초 신고자
"누구 집에 뭐가 있겠다, 누구 집에 가면 뭐가 있겠다, 그때 떠들썩했죠.
거기서 보물 나왔다고 하니까."
-남상률, 당시 신안군청 공무원
아주 오래전부터 신안 앞바다에서 도자기들이 나왔다고 합니다.
근데 어부들은 바다에서 그릇 같은 걸 건지면 바다에 던져 버렸다고 합니다.
잡히라는 고기는 안 잡히고, 오히려 깨진 그릇 조각 때문에 그물이 찢어지기 일쑤였던 것입니다.
깨서 버리기도 하고, 개밥그릇으로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 집 앞마당에 있는 개밥그릇이, 몇 억 원짜리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그릇들이 700년 전 유물일 수도 있다니, 가치가 억대일 수 있다니, 난리가 나겠어 안 나겠어요?
작고 조용하던 이 마을에,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습니다.
도굴꾼의 등장
이 일이 있고 약 9개월 후인 1976년 10월.
이번엔, 목포경찰서였습니다.
40대 조모 씨라는 사람이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도자기, 접시, 이런 것들을 도굴해 비싼 값에 팔다가 검거된 것입니다.
근데 들어보니까, 신안 앞바다에서 도굴을 했습니다.
이 조 씨가 도굴했다는 유물, 한두 개가 아니였습니다.
총 117점, 당시 돈으로 5억 원 이상이었습니다.
조 씨는 유물 하나에 500만 원을 넘게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 씨는 경찰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따, 그 최 씨 말이요.
신고하고서 포상금 쥐꼬리만큼 받았다는데, 그럼 거 팔아 재끼는 게 낫지, 누가 신고한답니까?"
당시 유물 최초 신고자 최평호 씨에게 지급된 포상금 금액은, 36만 5천 250원이었습니다.
도굴꾼이 팔던 금액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금액이긴 했습니다.
사실 원래 포상금은 100만 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안 앞바다라는 국유지에서 나온 유물이라 절반은 국가에 반납해야 했던 것입니다.
100만 원의 절반 50만 원, 그리고 나머지는 세금이었습니다.
"그 100만 원도 어떻게 됐냐 하면, 국가 수면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50% 본인한테 50%.
그 50만 원도 다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 불로소득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세금 떼고 얼마가 나왔냐 하면 36만 5천 250원."
-최평호, 유물 최초 신고자
신고하면 약 36만 원, 몰래 팔면 500만 원이었습니다.
물론, 이걸 돈으로 비교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건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이니까, 이대로 도굴을 하게 둬서는 안 됐습니다.
보물을 찾는 사람들
그래서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문화재관리국.
지금으로 치면 국가유산청, 얼마 전까지 문화재청으로 불리던 곳입니다.
당시 문화재관리국은 이미 유물 발굴작업으로 큰 성과를 얻은 적이 있었습니다.
5년 전인 1971년, 백제 25대 무령왕릉에서 국보급 유물을 발굴한 적이 있었습니다.
1973년에는 경주 천마총에서 유물 11,526점을 발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유물에 있어서는 우리나라 최고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1976년 10월 27일, 신안 해저 유물 발굴단은 유물이 나온다는 신안 도덕도 앞바다로 갔습니다.
눈앞에, 넓은 신안 앞바다가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이거 너무 막막했습니다.
왜였을까요?
"발굴단을 문화재관리국에서 하려니까 인재가 없어요.
우리가 수중고고학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단 말이에요.
책으로만 봤지.
배에 나가서 수중고고학 할 사람이 없거든 우리나라에."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 부장
아까 말한 무령왕릉, 천마총은 전부 육지에 있습니다.
바다에서 발굴작업을 해본 경험이 전혀 없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잠수 장비도 없었습니다.
조사단은 어딘가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바로 SSU, 해군 해난구조대였습니다.
"SSU는 말 그대로 해상 사고 나면 처리해 주는 그런 구조대입니다.
유물 발굴요? 부대 내에서는 그런 건 없죠.
없는데 정부에서 출동 공문이 내려오면 위에서 검토해서, 저희 부대로 지시가 내려옵니다.
군인들이야 위에서 명령 내려오면 뭐 이유불문이죠.
무조건 그냥 출동, 쫓아나가는 거죠."
-이복성, 당시 SSU 잠수부
SSU 부대가 신안 앞바다에 도착했습니다.
3천톤급 함정 'TA3함'을 타고 온 해군들이 고무보트로 옮겨 탔습니다.
온갖 전문 잠수 장비들에, 수중에서 쓸 수 있는 카메라도 한가득 가져왔습니다.
그렇게 문화재 전문가, 베테랑 잠수부로 구성된 특수부대원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수중유물발굴단인, '신안 해저 유물 발굴단'이 탄생했습니다.
이거 완전 어벤져스였습니다.
신안 해저 유물 발굴단
근데 기대와 달리, 시작하기 전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습니다.
"슈트 갈아입고 물 보면, 아이고 저거 정말..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겁이 좀 나요.
서해안 쪽은 특히 유속이 빠르다 보니까 펄이 일어나서 아무것도 안 보여서 그런 걸 걱정을 하면서 갔었어요.
시야도 없고 유속이 빠르니까, 줄 놓쳤다 하면 완전히 실종이죠.
못 찾는 거예요.
그냥 어디로 뜨는지도 모르고요.
그 당시 저도 한 6년 이상 다이빙을 한 상태인데도, 겁이 나더라고요 솔직히."
-이복성, 당시 SSU 잠수부
신안 앞바다는 바닥이 펄입니다.
바로 코 앞도 안 보였습니다.
손을 뻗으면 자기 손도 안 보일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조류가 너무 셌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두 번, 밀물과 썰물이 바뀔 때 바다가 잠깐 멈추는 단 한 시간, '정조시간'을 노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서클라인을 이용해 수색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굵은 밧줄에 큰 돌을 묶어 부표를 띄웠습니다.
그 밧줄을 잡고 천천히 물속으로 내려갔습니다.
바닥에 도착하면 또 다른 밧줄을 큰 돌에 묶고, 반대쪽을 자기 몸에 묶었습니다.
그렇게 이 큰 돌을 중심으로 사람이 원을 그리면서 일일이 손으로 바닥을 수색하는 방법입니다.
만약에 작업 도중에 밧줄을 놓치면, 그대로 떠내려 가는 것입니다.
"큰일 나죠. 어떻게든 실수로 줄을 놓쳤다면, 유속 빠르고 떠내려가면 끝나는 겁니다."
-이복성, 당시 SSU 잠수부
잠수부들이 탄 고무보트 위에는 긴장감이 가득했습니다.
한번 잠수할 수 있는 시간은 단 20분.
그 안에 반드시 보물을 찾아야 했습니다.
드디어 첫 번째 잠수부가 바다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다시 바다 위로 올라온 잠수부는 빈 손이었었습니다.
빠른 조류와 코 앞도 안 보이는 시야도 문제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저 넓은 바다에 어디에 보물이 있는지 위치를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맨손으로 찾겠습니다.
"해군이 굉장한 장비를 갖췄다고 하는 군함들이 와서 다이버들이 들어갔는데 못 찾았어요."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 부장
다들 머리를 맞대고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어. 이들은 고민 끝에, 어디론가 급하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한참 뒤, 급하게 차 한 대가 도착했습니다.
차에서 한 남성이 내리는데, 그의 손엔 수갑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앞서 잡혔던 도굴꾼, 조 씨였습니다.
최후의 방법으로, 도굴꾼에게 자문을 구해보자 했던 것입니다
"이건 안 되겠다, 그러면 도굴꾼을 데리고 와라.
그래서 현장에 데리고 왔지.
수갑 찬 채로 데리고 왔어요."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 부장
일단 유물 발굴이 최우선이니, 도굴꾼의 도움이라도 받으려 한 것입니다.
설득 끝에, 조 씨도 유물 발굴에 협조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최고의 문화재 전문가들과 최고의 특수부대, 그리고 전문 도굴꾼까지 한 배를 타고 다시 바다로 떠났습니다.
보물의 발견
도굴꾼 조 씨는 함장 옆에 서서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해군이 가져온 최첨단 장비들은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리저리 가라고 지시하는 것입니다.
한 시간 움직였나? 갑자기 도굴꾼이 말했습니다.
여기, 여기에 부표 띄우쇼.
대충 눈짓으로 보더니, 갑자기 부표를 띄우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는 거냐 물으니, 하늘의 별을 보면 딱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 믿을 수 있겠어요?
근데,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의심 반 기대 반으로, 도굴꾼이 짚어주는 세 곳에 부표를 내렸습니다.
일단 첫 번째 포인트에 해군 잠수부가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실패, 못 찾았습니다.
이번엔 다른 부표에서, 두 번째 팀이 잠수했습니다.
그런데 또 실패였습니다.
그러자 배 위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래서 사기꾼 말을 믿을 수가 있나.
그놈 나중에 출소해서 또 한탕하려고 거짓말한 거 아냐?"
어수선한 가운데, 마지막 부표에 세 번째 팀이 잠수를 준비했습니다.
이때, 이복성 중사가 들어갔습니다.
유속도 세고, 온통 펄밭이라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서클라인을 연결한 후 한 손으론 줄을 꽉 잡은 채, 다른 한 손의 감각에 의해서만 유물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복성 중사가 주변을 더듬으며 유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세 번째 팀 우리가 들어갔을 때, 안 보이니까 눈으로는 볼 수가 없고요.
눈 감은 상태죠.
손을 쭉 펄을 누르면서 훑으면서 쭉 가다 보니까, 술잔 비슷한 접시 같은 동그란 게 잡히더라고요.
이제 잡히니까 이거 같다라고 딱 감이 잡히더라고요."
-이복성, 당시 SSU 잠수부
곧바로 손에 든 물건과 함께, 바다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복성 중사가 바다 위로 솟구치자 그 순간, 배 위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바로 그때 찍힌 사진입니다.
발굴단이 최초로 발견한 유물.
연꽃무늬가 그려진 약 700년 전 원나라 접시입니다.
"진짜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너무 기분 좋았죠.
야 내가 유물을 건졌어?"
-이복성, 당시 SSU 잠수부
근데, 아직 놀라긴 일렀습니다.
그 이후에도 잠수부들이 들어갔는데, 들어가기만 하면 손에 도자기든 접시든 뭐든 잔뜩 들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기 한두 점 있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이버들이 들어가서 확인하니까 무진장이라는 거예요. 무진장."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 부장
"그때는 다들 몇 개씩 들고 올라왔습니다.
두 번째 할 때는. 여기가 틀림없이 그 자리라고 하니까, 전부 다 열심히 했겠죠.
그러다 보니까 항아리도 들고 올라오고."
-이복성, 당시 SSU 잠수부
바닷속에서 보물들이 계속해서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발굴단은 10월부터 총 32일 동안 발굴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약 2천 점의 유물을 건져 올렸습니다.
"다이버들이 놀랬지. 도굴꾼 말을 들을 수 있나?
그래도 들어가 보자, 한건데.. 들어가 보니, 있다…"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 부장
아직도 바닷속엔 수많은 유물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발굴 작업을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작업하는 사이 겨울이 찾아왔기때문입니다.
겨울에 잠수하는 건 무리였습니다.
또 다른 문제는, 작업 가능한 시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바다의 유속과 날씨까지 모두 고려해 보면, 신안 앞바다에서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는 기간은 1년에 한 달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하루 중에 작업 가능한 '정조 시간'. 정조 시간은 하루에 2번, 하지만 이것도 어두운 밤일 땐 잠수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일 년에 약 한 달, 그리고 하루에 한 시간 남짓만 안전하게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700년 만에 나온 보물
본격적인 유물 발굴 작업은 그다음 해인 1977년에 다시 시작했습니다.
신안 바다는 도깨비방망이처럼 유물들을 쏟아냈습니다.
바다에서 나온 유물들, 한 번 봐봤습니다.
접시에 항아리, 장식품까지 종류도 다양했습니다.
어떻게 이 보물들이 형태를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을까요?
"바닷속에 있는 펄, 그 펄층에 가라앉아서 부식이 되지 않고 보존되어 있었던 것 같고요.
그리고 도자기 같은 경우는 워낙 강한 불에 구워졌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강도가 세고, 특히 유약까지 입혀서 훼손되지 않고 보존이 잘 되었던 것 같습니다."
-장성욱 학예연구사, 국립중앙박물관
거기엔 청자, 그릇 말고도, 별에 별 것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700년 전 중국에서 쓰던 주사위, 바둑알, 장기말 등, 특히 엽전만 무려 800만 개, 28톤이나 되는 양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온갖 향신료, 비싼 목재 이런 것들이 쉴 새 없이 나왔다고 합니다.
대체 이 신안 앞바다에서 왜 이런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걸까요?
그때, 발굴 현장에 있던 이호관 발굴부장이 해군잠수부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웬 유물이 이렇게 많이 나오냐는 의심은 했지만 이렇게 한군데서 많이 나올 수가 없단 말이야.
이게 뭔가 좀 이상하다 했는데.
다이버들이 '배가 있습니다' 놀랐지 우리는. 배가 있다니.
그 펄 바닥에 배가 아직 살아있다니.
이게 믿어지질 않지. 몇 백 년이 지났는데.
펄에 묻혀있는 바람에 배가 남았어."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부장
바다 아래에, 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설로만 들었던 보물선이, 대한민국 바다에 실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닷속 보물선
대체 이 배의 정체가 뭘까요?
바다 아래서 건진 것 중에, 이런 게 있었습니다.
청동 저울추.
배에 걸어놓는 저울 추라고 합니다.
잘 보면, 한자로 '경원로'라고 적혀있습니다.
'경원'은 중국 저장성의 '닝보'라는 지역입니다.
당시 원나라의 주요 무역도시였습니다.
이 배가 중국 닝보에서 출발한 무역선이었던 것입니다.
이건 뭘 것 같아요?
종이가 없던 시절, 나무에 글씨를 쓴 건데, 이걸 '목간'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 목간을 보면, 한자로 '지치 3년'이라고 쓰여있습니다.
이건 중국 원나라 연호로, 서기 1323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른 목간을 보면, 한자로 '동복사', 그리고 '조적암'이라고 적혀있습니다.
바로 일본에 있는 절 이름입니다.
이 배가, 일본을 오가던 무역선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지요.
바다에서 나온 도자기와 그릇들, 모두 일본으로 보낼 무역품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일본에서 중국 도자기가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럼 일본으로 가던 배가, 왜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했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일본으로 가던 중 태풍을 피하려다 신안 앞바다에서 좌초됐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합니다.
정리를 해보자면 이렇습니다.
1323년, 중국 닝보에서 도자기, 청자 등 무역품들을 싣고 가던 원나라 무역선이 일본으로 가던 중,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것입니다.
게다가 어느 날 동네 주민이 허겁지겁 오더니 이런 걸 보여주더라고 합니다.
배가 정박할 때 쓰는 닻.
4년 전 그 어부가 닻을 건져 올렸는데, 어장의 그물추로 사용하다가 발굴단에 신고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닻의 크기가 엄청 컸습니다.
길이만 2m 20cm, 무게는 300kg.
이걸로 볼 때, 배의 길이만 최대 34m, 당시 적재량 200톤이 넘었을 거라 추정됐습니다.
엄청 큰 배입니다.
발굴단은 유물을 찾으면서, 배를 인양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먼저 유물이 나오는 포인트에 철제로 만든 그리드라는 걸 설치했습니다.
그리드에 번호를 매겨서 유물들의 위치를 기록한 뒤, 부서진 배의 조각을 하나씩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발굴단의 발굴작업은 1984년까지, 9년에 걸쳐 이뤄졌습니다.
힘들었던 발굴 과정.
그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뱃멀미였다고 합니다.
"사람이 노래져요. 멀미 때문에.
그 파도가 넘실거리는 데서 작업을 하는 거예요."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부장
또 펄과 조개껍데기 투성이었던 유물들을 일일이 손으로 씻어내느라 항상 온몸이 지저분했다고 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이제 그 유물을 펄이 묻었으니까 펄을 먼저 세척한 다음에 유물을 분리하고 하는 작업을 하는 거죠. 유물 발굴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상당히 청자가 빛깔이 좋아요.
그래서 그걸 보고 상당히 감탄을 했죠."
-강신태, 당시 문화재관리국 소속 직원
그 배에서 무려 2만 4천여 점의 유물을 발굴했습니다.
한 장소에서, 이렇게 많이 유물이 발견된 건 세계적으로 이례적이라고합니다.
세기의 발견이자, 엄청난 성과를 이룬, 최초 해저 유물 발굴인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정말 꿈같은 일을 해냈구나 라는 생각 들고.
내가 근무하던 그 부대에서 이렇게 큰 일을 했기 때문에 부대도 자랑스럽기도 하고 그랬었습니다."
-이복성, 당시 SSU 잠수부
"문화재에 대한 애정과 사명감이 없으면 이건 할 수가 없어요."
-강신태, 당시 문화재관리국 소속 직원
"공무원으로서 학예직으로서 내게 놓인 일을 한 것뿐이죠.
유문 있으면 됐지 뭐. 그냥 그것뿐이지. 추억이지."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부장
보물을 훔치는 사람들
그렇게 발굴이 마무리되던 1984년.
강신태 반장에게 긴급하게 연락이 한 통 왔습니다.
전화가 온 곳은 문화재관리국 사범단속반.
문화재 도난이나 도굴 사건을 수사하는 전담 부서입니다.
누군가 문화재를 암거래하려고 한다는 첩보였습니다.
근데 그 문화재가, 바로 신안 유물이라는 것입니다.
강신태 반장이 신안 유물 발굴을 담당했으니, 감정 요원으로 함께 가 달라는 것입니다.
밀매꾼들, 어떻게 잡아야 할까요?
강신태 반장은, 덫을 놨습니다.
구매자인 척, 밀매꾼에게 접근한 것입니다.
종로에 있는 한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약속한 날,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서 남성 두 명이 두리번 두리번 대며 걸어오는 것입니다.
딱 봐도, 그놈들이었습니다.
광주에서 판매책 2명이 올라온 거였습니다.
이들과 대면한 강신태 반장이 입을 열었습니다.
아이고, 식사는 하셨고?
그래서 어떻게... 물건은?
그랬더니 남성 한 명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쓱 꺼냈어. 신안 유물, 맞았을까요?
"사진을 보여주는데 보니까 이제 신안 유물이 맞아.
그래서 이건 얼마나 요구를 하느냐 몇 점 있냐니까, 한 30점 있는데 한 1억 5천만 원 된다는 거야."
-강신태, 당시 문화재관리국 소속 직원
30점을 1억 5천 만원에 팔겠다고 했습니다.
강신태 반장은 유물을 직접 보고 사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유물들, 광주에 있다고 했습니다.
곧바로 강신태 반장은 밀매꾼들과 함께 광주로 내려갔습니다.
일당들은 강신태 반장을 광주의 한 호텔로 데려갔습니다.
밤 9시쯤 됐나? 호텔 방문이 열리더니, 한 남성이 들어왔습니다.
딱 보니까 이놈이 바로 주범 같았습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놨습니다.
가방에서 꺼낸 건 신안 유물 3점.
그걸 본 강신태 반장은 범인들에게 "이거 가지고는 택도 없다. 이건 뭐 돈 안 나가는 거다. 1억 5천만 원짜리 거래를 하면서 장난할 수가 있느냐"라며 화를 냈습니다. 그러자 범인들이 내일 아침에 만나자며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10시.
근처에서 다시 주범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강신태 반장이 일당들의 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차를 타고 주변을 계속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것입니다.
누가 주변에 있나, 따라오는 사람이 있나, 감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이들은 또 다른 호텔에 들어갔습니다.
근데 이 주범이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안 나타났습니다.
강신태 반장,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던 그때, 문이 탁 열리더니, 주범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 순간!
꼼짝 마, 경찰이다!
근처에 있던 경찰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습니다.
강신태 반장은 딱 주범만 노렸습니다.
"딱 들이닥치니까 후닥딱 이제 튀는 거지.
그래서 나는 안 되겠다 그래가지고 주범, 유물 가져온 놈만 딱 잡 은 거지.
난 오직 이 친구만 잡으면 유물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일을 한 거죠.
그래서 머리 뒤를 잡고 뒤에 허리띠를 잡은 거예요.
잡고는 얼마나 힘이 센지, 나도 힘이 세지만.
5층부터 1층까지 같이 굴렀어요."
-강신태, 당시 문화재관리국 소속 직원
신태 반장은 주범을 향해 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주범의 손에 드디어 수갑을 채웠습니다.
그렇게 일당 세 명을 체포하고, 이들이 가지고 있던 신안 유물 32점을 회수했습니다.
이건 전부, 신안 유물을 훔쳐서 팔다가 검거된 '신안 유물 도굴 사건'을 정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날짜를 보면, 좀 묘했습니다.
모두 국가가 발굴 작업을 하던 그 기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바다에 발굴단과 특수부대 요원까지 있었는데도 도굴을 했던 것입니다.
처음에 유물을 신고했던 최평호 씨, 기억나나요?
신고한 뒤부터 근무지로 그를 찾는 전화가 계속 왔다고 합니다.
돈을 줄 테니, 유물이 나오는 위치만 알려달라면서.
발굴단 vs 도굴꾼
당시 문화재관리국에선 발굴 지역 2km 반경을 항해 금지구역으로 정했습니다.
인근에는 감시 초소까지 설치됐습니다.
초소에서 교대로 24시간 동안 감시를 했습니다.
바다 위에서 발굴단이 파도와 전쟁을 하고 있을 때, 육지에서는 도굴꾼들과 전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굴꾼은 팀을 어떻게 꾸릴까요?
먼저 물주가 팀원을 모집했습니다.
바닷길을 잘 아는 주민, 경력이 많은 잠수부 등으로.
그럼 감시를 피해 바다로는 어떻게 나갈까요?
이들은 모터 소리가 나지 않는 배까지 직접 만들었습니다.
처음에 발굴단은 유물이 가라앉은 위치를 알아내려고 애를 먹었잖아요.
그럼 도굴꾼들은 유물을 어떻게 찾았을 것 같아요?
사실 이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발굴단이 표시해 놓은 그리드 부표가 딱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생할 필요도 없이 그것만 딱 들어가면 바로 유물 위치가 나오니깐.
그냥 장님이 눈 감고 들어가 건지다시피 했죠."
-이호관, 당시 문화재관리국 발굴부장
부표에 도착하면, 은밀하게 잠수를 시작했습니다.
신안 바다 물속은 유속도 빠르고, 도굴하는 시간이 밤이라 앞은 더 깜깜했습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악으로 깡으로 도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훔친 도굴품을 누군가는 비싼 값에 팔았고, 누군가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은밀하게 숨겨놨습니다.
그 뒤로 문화재 사범단속반에서 쭉 일하게 된 강신태 반장은 경찰 검찰과 합동 수사를 하며, 신안 유물 도굴꾼들을 잡는 데 사활을 걸었습니다. 근데, 그의 수사방법이 대단했습니다. 그에게 이런 전화가 왔습니다.
"아유 반장님, 접니다.
왜 그때 광주에서 잡혔다가 얼마 전에 나온 놈 있잖아요.
걔 이번에 또 작업 들어간다네?"
강신태 반장이 잡았던 밀매꾼 중 한 명이 이렇게 정보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 친구와 차 타고 가면서 대화를 해보니까 대화가 통하는 친구더라고.
그래서 '이제는 이걸 없애야 되지 않느냐' 했더니, 자기도 이번 기회에 많은 걸 느꼈다, 수사에 또 협조하겠다 그래. 그래 검사하고 약속을 해서 구속을 안 하고 불구속했죠.
그다음에 정보를 주기 시작한 거죠.
내가 단속반에 갔더니 정보가 오는 거예요.
이런 정보가 없으면 안 되죠.
그게 수사의 기법이에요."
-강신태, 당시 문화재관리국 소속 직원
이게 보니까, 서로 다 연결이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명을 잡으면 줄줄이 잡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일망타진을 해도, 암거래한다는 첩보가 계속 들려왔습니다.
도굴꾼들의 일종의 '보험' 때문이었습니다.
1980년, 광주에서 수상한 소문이 하나 돌았습니다.
2년 전, 신안 유물을 도굴해서 팔다가 검거된 이 씨 형제가 있는데, 그 형이 출소한 뒤부터, 동생의 장인 집, 그러니까 사돈집을 매일 들락날락한다는 것입니다. 사돈집에 매일 갈 이유가 뭐가 있을까요?
뭔가 일을 꾸미는 것 같지요?
그래서 형사들이 사돈집에 온 이 씨를 덮쳤습니다.
그런데 이 씨가, 형사들을 보자 오히려 하소연을 하는 것입니다.
"형사님, 제발 저 좀 도와주십쇼, 내가 이놈의 유물인지 고물인지 때문에 아주 돌아가시겄소."
들어보니까 이렇습니다.
같이 도굴하다 잡힌 동생이 먼저 출소했는데, 그때 형한테 훔친 유물들을 잘 숨겨놨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 달 뒤 형이 출소를 했는데,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글쎄 동생이 사망한 것입니다.
팔아넘긴 유물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홧병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럼 형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걸 찾아야지요.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동생이 숨겼다는 유물을 못 찾은 것입니다.
결국 찾다 찾다, 동생의 장인 집까지 왔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형사들이, 이 형과 함께 동생의 처갓집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경찰은 집을 샅샅이 뒤지기로 했다.
유물이 상하지 않도록 도굴꾼들이 사용하는 쇠꼬창이로 땅속을 찔러갔다.
6시간에 걸친 수색 끝에 "여기다" 하는 함성이 터졌다.
헛간 잿더미 밑바닥에서 청자접시 90점 등 2백 40점의 송원대 유물이 가마니에 싸인 채 묻혀 있었다."
-당시 기사 내용 中
이뿐만이 아니야. 근처 유채밭 한복판에 묻힌 220점의 유물을 또 발견했습니다.
이때 회수한 유물만 460점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도굴꾼들은, 도굴한 유물을 여러 군데 묻어두고 필요할 때 꺼내서 팔아먹은 것입니다.
마치 적금이나 보험처럼.
이런 식으로 검거된 도굴꾼은 300여 명이었습니다.
모두의 보물
도굴범으로부터 회수한 유물만, 무려 2천 점이 넘는다고 합니다.
발굴품과 도굴품까지, 신안 앞바다에서 모두 2만 6천여 점의 유물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 보물들, 지금은 어디 있을까요?
박물관의 철통보안 속에, 잘 보관돼 있습니다.
현재는 국립광주박물관에 있다고 합니다.
"신안해저유물은 발굴 이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지속적으로 관리를 해왔고요.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서 전시, 보존, 관리 중에 있습니다."
-장성욱,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
"신안해저유물은 수중고고학의 처음, 효시가 되었는데요.
이 효시를 기반으로 해서 그다음부터 우리나라의 수중고고학의 발전, 그리고 조사를 위한 토대가 마련되었고요.
내 눈앞에 있는 손도 식별이 안되는 곳에서 잠수하는 기술은 우리나라가 제일 뛰어난 수준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장성욱,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
모두가 힘쓴 덕분에, 신안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유물들은 이제 우리가 원하면 언제나 볼 수 있는 소중한 보물로 빛나고 있습니다. 아마 이건 그 어떤 화폐로도 값을 매길 수 없을 것입니다.
1984년도, 신안 발굴작업이 끝나고도 도굴한 신안 유물을 밀매하는 사건은 계속 발생했습니다.
언제까지 사건이 있었을 것 같나요?
마지막 사건이, 바로 2019년. 불과 6년 전입니다.
30년이 넘게 신안 유물 57점을 보관하다가, 일본에 반출하려던 남성이 또 검거된 것입니다.
"피의자는 30여 년 동안 자택과 친척 집에서 유물들을 보관하다가 사회적으로 신안 유물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고 판단되자 지난해 8월부터 국내와 일본에서 밀매를 시도했습니다."
-2019년 뉴스 보도 中
역사를 증명하는 문화재가 살아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문화재를 소중히 보호하는 건, 국민으로서 지켜야 할 권리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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