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철혈광복단-역사를 뒤바꿀 비밀 작전 2. 윤준희 생애와 철혈광복단 3. 최봉설(최계립)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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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광복단-역사를 뒤바꿀 비밀 작전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 시즌3)가 일제강점기 시절의 비밀결사단 '철혈광복단'의 베일을 벗겼습니다.
'꼬꼬무'는 '철혈광복단-역사를 뒤바꿀 비밀 작전' 편으로, 일제강점기 때 현 시세 약 150억 규모의 천문학적인 자금을 탈취하려 했던 비밀 결사단 '철혈광복단'의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특히 영화 '놈놈놈'을 연상시키는 3인의 독립군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최계립의 친필 수기가 방송 사상 처음으로 공개되었습니다. 이야기 손님 게스트로는 배우 추상미, 코미디언 신기루, 야구 해설위원 이택근이 출격한다.
일제 침략 당시 대한독립을 위해 20대 초반의 나이로 목숨을 바친 독립 무장단체 '철혈광복단'.
당시 '철혈광복단'은 일제가 우리나라 국민으로부터 수탈했던 15만 원, 현 시세로 150억에 준하는 일본-간도 철도 자금을 탈취하는 작전을 벌였습니다. 특히 주요 멤버 독립운동가 중 생존자였던 최계립이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해 후세에게 남긴 친필 수기가 '꼬꼬무'를 통해 방송 사상 최초로 공개될 예정이라 관심을 집중시켰습니다.
'철혈 광복단' 단원 중 윤준희, 박웅세, 김준, 최봉설, 임국정, 한상호 등 20대 초반의 최정예 멤버들은 독립 무장 운동을 위해 일본의 돈을 수탈하기로 결심하고, 간도 철도 자금을 위해 조선은행으로 향하던 당시 돈 15만 원, 현 시세 150억 원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들은 무려 150억 원에 달하는 자금으로 총, 탄환, 기관총뿐 아니라 언론사를 세우고, 군사학교를 만들어 대한 독립을 이루겠다는 계획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치밀한 작전 끝에 의거는 성공했지만 뜻하지 않게 모두 일본 경찰에 잡히고 말았습니다. 일본 경찰이 기습했을 당시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후 최봉설은 새로 태어나 싸운다는 의미로 최계립으로 개명한 후 독립운동을 이어가며 당시 사건을 친필 수기로 남겼습니다.
이 같은 이야기에 신기루는 "어떤 마음으로 이 수기를 썼을까 너무 간절했을 것 같다"라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추상미 역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라며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번 '꼬꼬무'에서는 최계립의 수기를 통해 공개되는 당시의 생생한 현장 모습과 함께 이 모든 계획을 일본에 알린 밀정이 누구였을지, 또한 최계립의 후손이 직접 인터뷰에 응해 증조부의 활약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윤준희 생애와 철혈광복단
윤준희는 1892년 12월 26일 함경북도 회령군 보을면 남산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한 것을 지켜본 후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가서 이상설이 설립, 경영하던 서전서숙(瑞甸書塾)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습니다.
이후 용정에 있던 영신학교(永新學校) 교원으로 봉직하였으며, 한상호, 임국정, 최이붕 등 동지들과 함께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을 조직하고 북로군정서에 가입했습니다.
철혈광복단의 결성 및 활동 철혈광복단은 일제의 수탈에 맞서 독립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결성된 비밀 결사단체입니다. 주요 단원으로는 윤준희, 박웅세, 김준, 최봉설, 임국정, 한상호 등이 있었으며, 모두 20대 초반의 청년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일본이 조선에서 수탈한 자금 15만 원(현 시세 약 150억 원)을 탈취하는 대담한 작전을 계획했습니다. 이 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하고, 언론사를 설립하며, 군사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후 북로군정서의 특파대장에 임명된 그는 동지들과 함께 간도 와룡동에 소재한 김하석(金河錫)의 집에서 군자금을 모을 방법을 논의했습니다. 이때 김하석이 조선은행 화령지점에서 조선은행 용정출장소로 수시 송금하고 있다며, 이를 습격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에 윤준희 등은 송금하는 일시를 알아낸 뒤 이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충당하기로 결의하고, 조선은행 회령 지점원인 전홍섭을 포섭하여 동지로 가입시키고 박웅세, 김준(金俊)을 새 동지로 포섭했습니다. 셋이 포섭되고 얼마 뒤에 포섭되고 김강, 계봉우가 가담했습니다.
얼마 후, 전홍섭이 1920년 1월 4~5일에 조선은행이 15만원을 용정으로 송금하려 한다고 알렸습니다. 이에 윤준희는 1월 4일 김준, 박웅세와 함께 1조가 되어 각기 권총과 마승(麻繩)·철봉 등을 갖고 먼저 떠났습니다. 그리고 한상호, 최이붕, 임국정 등은 2조가 되어 역시 무기를 휴대하고 용정촌 쪽으로 2리 쯤 떨어진 화룡현 동양리 버드나무 숲에서 매복했습니다.
윤준희 등은 회령에서 은행 돈 수송대가 오는지를 정찰하던 중 무장한 일본 경찰 3명이 2필의 말 잔등에 현금을 싣고 마부를 재촉하면서 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에 윤준희는 박웅세, 김준과 함께 그들을 향해 권총을 10여 발 발사하여 일본인 순사 장우가상차(長友嘉相次)와 진길풍(陳吉豊)을 사살하고, 그들이 지니고 가던 현금을 탈취했습니다. 그 돈은 5원권 10만원과 10원과 5만원으로 합계 15만원에 달했습니다.
이후 윤준희는 1월 5일 최이붕과 함께 의란구 유락구로 이동해 김사헉과 만났다. 그리고 1월 10일 그 돈을 가지고 각처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들어가서 체코슬로바카이 제 총기류들을 다량 구입하여 북로군정서에 제공했습니다. 그 결과 북로군정서는 상당히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 일본군에 대항해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선전할 수 있었습니다.
용정의 일본 영사경찰은 중국 경찰과 합동으로 이 사건을 수사했습니다. 윤준희는 동지들과 함께 이를 피해 각저를 피신했습니다. 그러나 1920년 12월 밀정 엄인섭의 밀고로 인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상호, 임국정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1) 현재 많은 대중매체에서 이 간도 15만원 사건을 다룰 때 주도자들을 일본총영사관에 밀고한 밀정은 엄인섭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 사건과 관련된 밀정이 정말 엄인섭이었는지는 현재까지도 불분명하다.
보통 일본 기밀문서에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 밀정의 신분을 기록하곤 했는데 정작 이 사건과 관련된 기밀문서에는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한 사람을 그냥 우리 밀정(我 密偵)이라고만 지칭하고 있다. 당시 국내외에는 엄인섭 말고도 일제가 파견한 수많은 밀정들이 산재하고 있었으므로 이 우리 밀정이 꼭 엄인섭만을 가르킨다고 보기에는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 엄인섭의 경우 다른 밀정들과 비교해서 유독 돋보이는 정탐 활동을 하고 그에 상응하는 유력한 정보들도 많이 제공하여 수많은 밀정들 사이에서 단연 거두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우리 밀정이 엄인섭을 지칭하는 단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론은 간도 15만원 사건의 배후를 밀고한 밀정의 정체는 엄인섭이 유력하긴 하지만 그걸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다소 빈약하다. 2) 이 사건과 관련해서 일제정탐으로 지목된 또다른 사람은 당시 대한국민의회의 군무부장 대리였던 김하석이다. 김하석은 바로 이 간도 15만원 사건을 주도한 사람이다.
간도 15만원 사건이 발생한 후 30여년 후인 1950년 후반에 이인섭과 최계립은 당시 김하석이 일제정탐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정작 간도 15만원 사건 직후에 작성된 일본 첩보자료나 장도정 등 한인민족운동가들이 남긴 기록에는 김하석을 일본 정탐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1920년 2월 2일자 일본 정보문서에는 김하석이 수배대상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윤준희는 일본헌병대에서 악형을 당하고 청진으로 압송된 뒤 청진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에서 잇달아 사형판결을 받고 1921년 8월 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윤준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그리고 1966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습니다.
최봉설(최계립) 독립운동가
최봉설(崔鳳卨, 1897년~1973년)은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입니다. 호는 이붕(以鵬)이며, 다른 이름으로 최계립(崔溪立)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중국 연길현 지인향 와룡동(현 연길시 소관향 민생촌)에서 태어났습니다.
ⓛ 철혈광복단과 15만 원 사건 1920년 1월 4일, 철혈광복단의 일원으로서 최봉설은 북간도 룽징촌 동량리 어구에서 조선은행의 현금 수송대를 습격하여 15만 원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자금은 당시 소총 5,000정과 탄환 50만 발을 구입할 수 있는 거액으로,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될 예정이었습니다.
② 체포와 탈출 그러나 이 사건은 밀정의 밀고로 인해 일본 당국에 발각되었고, 많은 동료들이 체포되거나 희생되었습니다. 최봉설은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으나,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이름을 '최계립'으로 바꾸고 독립운동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③ 이후의 활동과 유산 탈출 후 러시아로 이주한 최봉설은 1930년대 소련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독립운동을 지속하며, 자신의 경험을 담은 친필 수기를 남겨 후세에 그들의 투쟁을 전했습니다.
최봉설의 삶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한 청년의 뜨거운 열정과 희생을 보여줍니다. 그의 용기와 헌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며, 역사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새기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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