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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대순진리회/길거리 도인/ 도를 아십니까?에 대해 궁금해하실 분들

by 충격대예언 2019. 9. 17.

대순진리회/길거리 도인/ 도를 아십니까?에 대해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참고하시라고 올립니다. 태극도는 대순진리회의 뿌리.

 

 

 


▣ 조철제의 태극도와 박한경의 대순진리회

대순진리회의 뿌리는 정산(鼎山) 조철제(趙哲濟,1895~1958)가 만든 태극도이다. 조철제는 을미(1895)년에 태어나 상제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는 15세의 소년이었다. 그의 말로는, 이 때(1909.4.) 그 자신의 종용으로 부모와 함께 기차를 타고 창원에서 만주로 이민을 가게 되었는데, 대전을 지나다보니 하늘에서 증산 상제님의 성령이 나타나서 “네가 앞으로 만인의 진인이 되니, 철제야. 특히 몸조심하거라. 나는 시루이고 너는 솥이니 증정(甑鼎)은 일체(一體)니라”(태극도 진경 330쪽)고 했다는 것이다.(계시를 통해 종통전수 됐다고 조작.)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누구로부터 도를 받았는가 하는 도의 연원에 얽혀있는 사실성이다. 정사(1917)년에 그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보천교 신도 오석(烏石) 김혁(金赫)을 만났다. 그는 용인 사람으로, 국내에 들어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러 다니다가 정읍에서 보천교를 만나 신앙하게 된 것이며, 조철제의 가족들에게도 상제님을 믿으라고 누차 권유하였다. 이 때 조철제의 누이인 봉귀, 종제인 길룡이라는 사람이 함께 보천교의 신도로서 입도를 하고, 주문과 신앙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므로 조철제의 뿌리는 보천교에 입도시켜 상제님 신앙의 다리를 놓아준 김혁이다. 그리고 조철제는 국내에 돌아와서 이치복 성도를 만나 상제님의 진리 말씀을 듣기도 하고 김형렬 성도를 만나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상제님의 기행 이적에 대해 한동안 도담을 전해 듣고 영웅심리가 동(動)한 조철제는 “야아 이것이다! 사나이로서 해볼 일은 이것밖에 없구나”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종통을 주장하기 위해, 아이를 못 낳고 친정집에 은신해 있던 상 제님의 여동생(선돌부인)에게 접근하여, 상제님이 “을미생에게 봉서를 전하라 하셨다”는 종통조작의 시나리오를 쓰게 된 것이다. 그리고 기미(道紀 49,1919)년 8월에는 심복 깡패들을 동원해서 복면을 하고 몽둥이를 든 채 고수부님의 법소를 습격해 약장을 도적질해 가려고 오래전부터 음모해 온 간계를 실천했다. 야밤에 차경석 성도의 동생 차윤칠이 이들 떼강도들에게 습격당해 방망이로 머리를 얻어맞고 까무러쳤다 잠시후 깨어나 살펴보니 도둑들이 약장을 훔쳐갔음을 확인하고 “강도야!” 하고 소리치며 쫓아갔는데, 철제 부하들이 약장은 무거워서 놓고 가고 궤짝만 가지고 달아났다. 조철제는 후에 그 궤에다 이름하기를 ‘둔궤(遁櫃)’라 하였다. 그런데 훗날 다시 그의 부하 조주일이 그 궤를 강도질해가자 조철제는, “둔궤의 둔(遁)이란 도망할 둔자이니 도망가는 것이 당연하니라. 이제 도수가 되어서 그것은 소용이 없느니라”고 했다. 그런데 수십 년 전에 대순진리회에서 그 궤짝이 다시 돌아왔다며 도통이 나온다고 거짓을 행하다 그것도 안 되자 그 후로는 때와 장소를 바꿔 도통이 나온다고 하고 있다.

☯조철제의 신앙 편력
•을미(乙未,1985)년 음력 12월 4일 경상도 철원군 서면 회문리 출생
•기유(己酉,1909)년 4월 28일 만주로 이민
•신해(辛亥,1911)년 10월 15일 청주사람으로 한주 방풍현에 망명한 지사 예한기의 장녀 종린 을 맞아 결혼
•임자(壬子,1912)년 5월 중국본토 유력
•정사(丁已,1917)년 2월 용인사람 오석(烏石) 김혁(金赫)을 만나 도를 전수 받고 누이 봉귀, 종제 길룡과 함께 보천교에 입도 4월 환국, 김형렬, 이치복 성도로부터 가르침 받음. 안면도에서 이정률을 만나 포교의 기초를 다짐
•기미(己未,1919)년 상제님의 누이동생(선돌부인)을 만나 종통 조작. 고수부님의 본소에 잠입, 약장과 궤를 도적질함
•신유(辛酉,1921)년 4월 독자적으로 무극도 창립(구태인 도창골). 8월 상제 님의 성골 도굴사건 자행(목적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패륜)
•임술(壬戌,1922)년 1월 23일 문공신 성도에게 성골을 다시 빼앗김. 이 사건으로 인해 문공신 성도는 7년 징역을 언도 받고, 정산은 오히려 피해자로 인정되어 풀려남. 상제님이 일찍이 이러한 일을 문공신 성도에게 말씀하셨음.(진주 천자도수 집행시 고부 경무청 안에서)
•기해(己亥,1935)년 8월 무극도 해산
•병자(丙子,1936)년 4월 총독부로부터 증산계 각 교단에 해산과 대폭압령을 내림
•무인(戊寅,1938)년 마산 교방동에 공석(工席) 정함
•기묘(己卯,1939)년 가을 회문리 희롱재로 이거
•을유(乙酉,1945)년 7월 3일 태극도 창립
•무자(戊子,1948)년 태극도 도명 공표. 부산 보수동으로 이거
•경인(庚寅,1950)년 6월, 6.25남북전쟁 발발
•을미(乙未,1955)년 자칭 옥황상제(玉皇上帝)로 즉위
•무술(戊戌,1958)년 2월 23일 박한경을 도전으로 임명함. 3월 6일(양력 4월 24일) 64세로 사망.

조철제는 원칙적으로 김혁을 통해 입도를 하고 보천교의 신도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도의 연원은 [보천교]이다. 그리고 위로는 상제님의 정씨부인을 한 때 모시고, 옆으로는 상제님의 여동생에게 접근해 손잡았다. 그리고 신유(1921)년 4월에 구태인 도창(道昌)골에 자리 잡고 무극도를 열었다. 그 후 1변 부흥기 난법 헛도수가 끝나 월곡 선생이 병자(道紀66,1936)년에 죽은 후, 세운에서는 상제님의 총각판 공사에 의해 제 2차 세계대전이 전개되고 일본은 민족종교 대탄압령을 내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 때에 증산계열 신앙단체들이 모두 지하로 숨고 사멸에 가까운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아것이 바로 제1변 도운이 끝나고 제2변 도운의 새 시대를 준비하는 생장염장의 장(藏,휴게기)의 단계인 것이다.

이후 기묘(1939)년에 조철제는 고향 회문리로 내려가 9년간을 지냈는데, 이것을 그는 9잠복도수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 만이 잠복했던 것이 아니다. 당시에 상제님을 믿는 전 신도들이 교단을 중심으로 신앙할 수 없었던 탄압받던 비상시국이었다. 그리고 을유(道紀75,1945)년 해방이 되자 그는 부산 감천동으로 이주하여 태극도를 열었다. 그리고 무술(道紀 88,1958)년에 "포교 50년 공부 종필이 올해이므로 나는 간다. 잘해라” 하고 죽었는데, 이로부터 조철제의 아들과 시봉원(侍奉院)의 도전이었던 박한경이 10년 동안 교권을 다투었다. 그리고는 기유(道紀 99,1969)년에 박한경이 서울에 올라가 임자(1972)년에 세운 것이 대순진리회인데, 이 대순진리회라는 교명을 사용하기까지 그동안 일곱 차례나 교명을 바꾸어 왔다. 그러나 대순진리회의 추종신도들은 물론 박한경부터 그들 자신의 역사조차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관통증산도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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