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노스트라다무스 유백온의 우한폐렴 전염병 예언
유기 (Liu Ji : 劉基 : 1311-1275)
유기의 자는 백온이다. 그는 제갈량과 비견될 정도로 재지가 탁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유백온은 중국역사상의 탁월한 군사전략가, 정치가, 문학가, 철학가이다.
그는 어려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뜻을 품고 23세에 진사가 되어 벼슬길에 나섰다.
그러나 당시의 원나라 정권은 황제가 무능하고, 관리는 부패하였다.
그는 나름대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고자 하였으나 곳곳에서 그의 뜻은 막혀버렸고, 결국 그는 48세 되던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서 은거하며 <<욱리자>>2권을 지었다.
당시, 후에 명나라를 건국하는 주원장은 유기의 명성을 흠모하여, 산을 나와 도와주기를 간청하였다.
이 때 유백온은 이미 50세였는데, 금릉으로 가서"시무18책"을 올려, 천하를 얻는 방책을 제시하였다.
"먼저 진우량(陳友諒)을 멸하고, 다음에 장사성(張士誠)을 멸하며, 그 후에 북으로 중원으로 올라가서, 천하를 통일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보고 주원장이 매우 기뻐하여 예현관(禮賢館)을 따로 지어 그로 하여금 거주하게 하였다.
이 때부터 유백온은 주원장의 주요한 참모가 되었으며, 큰 뜻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유백온은 명개국의 최대공신중의 하나이지만, 주원장이 공신들에게 작위를 줄 때, 유백온은 명리를 탐하지 않고 겸양하여 다른 공신들보다는 훨씬 낮은 작위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성격이 강직하여 당시의 승상 이선장과 호유용등으로 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았으며 결국 유백온은 스스로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물러났다.
이 때 그의 나이 61세였다.
후에 승상인 호유용은 유백온의 조상이 "왕기"가 있는 묘지를 잡았다는 모함을 하였으며, 이에 주원장은 유백온으로 하여금 남경으로 오도록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후 유백온이 병에 들었을 때 호유용이 보낸 태의의 약을 마신후 병이 악화되었다.
주원장이 사람을 보내 유백온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게 하였는데, 귀향도중에 사망하였다. 나이 65세때였다.
그와 관련하여서는 여러가지 전설들이 많이 전해지는데, 그가 하였다고 하는 말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고도 한다.
금일등화조상, 내일등화조하 (今日燈火朝上, 來日燈火朝下)
오늘은 등이 위로 불을 비치지만, 내일은 등이 아래로 불을 비칠 것이다.
금일활우경지, 내일철우경지 (今日活牛耕地, 來日鐵牛耕地)
오늘은 살아있는 소가 땅을 갈지만, 내일은 쇠로된 소가 땅을 갈 것이다.
그가 지었다고 하는 예언서《유백온소병가(劉伯溫燒餠歌)》에는 원의 운명이 다하고 명이 흥성하리라는 것뿐만 아니라 약 700년 후의 신해혁명과 항일 전쟁 등이 모두 예언되어 있다고 전한다.
그의 또 다른 저서로는《성의백문집(誠意伯文集)》, 명리학 저서《적천수(適天髓)》, 병법서《백전기략》 등이 있다.
유백온과 제갈공명에 얽힌 야사
유백온: 명나라 주원장의 1등책사
제갈량(공명) : 촉나라 유비의 1등책사
유백온이라는 인물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을 도와 명나라를 세운 개국공신입니다.
그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제갈공명의 모델이 될 정도의 인물이라고 한다.
전조군사제갈량(前朝軍師諸葛亮) : 전 황조의 군사는 제갈량이요
후조군사유백온(後朝軍師劉伯溫) : 후 황조의 군사는 유백온이다
삼분천하제갈량(三分天下諸葛亮) : 천하를 셋으로 나눈 것은 제갈량이요
일통강산유백온(一統江山劉伯溫) : 강산을 하나로 통일한 것은 유백온이다.
유백온이 어느 날 촉땅에 갑니다.
촉땅은 옛적 유비가 세웠던 촉한이다.
유백온은 그 곳의 제갈공명의 사당에 가는데 평소 유백온은 제갈공명보다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위에 있는 글귀를 보듯이 제갈공명은 천하의 삼분지일을 차지하도록 했지만 자신은 천하통일의 주역이 되었으니 말이지요.
그런 생각으로 그는 말에 내리지 않고 제갈공명의 사당을 참배하게 됩니다.
참배를 마친 후 사당을 떠나려 하는데 말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유백온은 사람을 시켜 말 발굽밑을 파보게 합니다.
그러자 그 곳에는 두루마기에 글자가 쓰여있었는데 "때를 만나면 천지가 함께 도와주워 만사가 순조롭지만 운이 없으면 영웅의 계책도 들어맞지 않는다" 고 씌여 있었습니다.
날이 저물어 유백온은 절에 숙박하게 됩니다.
아침이 되자 닭이 우는 소리에 유백온은 자리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닭이 아닌 흙으로 만든 닭이 있는 것입니다.
놀란 유백온이 주지스님에게 물어보니 촉한의 승상 제갈무후(제갈공명)가 만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궁금해진 유백온이 주지 스님의 만류에도 흙닭을 깨트리게 되는데 그 속에 역시 쪽지가 있는 것입니다.
"유기(백온은 유기의 자입니다.)가 내 닭을 깨트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백온은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유백온은 제갈공명의 묘를 참배하는데 풍수지리에 능한 유백온은 웃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제갈공명의 묘자리는 볼품없고 바로 근처에 제왕의 자리인 명당자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속으로 제갈공명을 비웃으며 그는 자리를 뜨려고 하나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유백온은 자신의 다리 밑을 파보니 쪽지가 있어 이런 글귀가 있는 것입니다.
"충신은 제왕의 곁을 떠나지 않는 법이오. 내 어찌 풍수지리를 모르겠는가!"
이 글귀를 본 유백온은 탄식하면서 '전무후무 제갈공명이로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주원장과 유백온의 야사
이번에는 주원장과 유백온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겠습니다.
명나라의 처음 수도는 남경이었습니다.
영락제의 정난의 변때 북경으로 천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명태조 주원장과 유백온이 남경을 굽이 보면서 유백온에게 묻습니다.
주원장 : 금릉(남경)이 함락될 수 있다고 보는가?
유백온 : 오직 제비만이 날아올 수 있습니다.
(* 짜맞추기 일 수 있겠지만 제비는 한자로 연(燕)입니다.)
그 후 연(燕)왕 주체가 남경을 함락하면서 우리가 잘 아는 영락제가 됩니다.
주원장 : 주씨의 천하가 어디까지 이어지겠소?
유백온 : 당연히 만자만손(萬子萬孫)입니다.
( *만자만손의 뜻은 영원토록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만자만손은 중국 만력제의 손자라는 의미로도 해석된다고 합니다. 중국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만력제의 손자라고 합니다.)
유백온이 실제로 그런 상황을 예언을 하여서 이렇게 말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봐서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나 싶습니다.
주원장을 도와 명나라를 세운 개국공신들 대다수는 주원장에게 척살당합니다.
(십만단위로 척살하면서 관료들이 출근할 때 죽음의 작별인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무사히 퇴근하면 가족들은 안심하고요)
이를 통해서 유래없는 황제독재체제를 구축하게 되는데 척살당하지 않는 개국공신중 유백온이 있습니다.
일설에는 같은 개국공신이었던 호유용이 유백온을 독살시켰다는 말이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사후 2백년 뒤를 내다 본 명나라 재상‘유백온(劉伯溫)’
유백온(劉伯溫)이라고도 불렸던 유기(劉基)는 명나라 개국공신으로 재상을 지냈다.
중국 삼대 민간 예언의 하나로 전해 내려오는 '소병가(燒?歌)'는 유백온이 지은 것이다. (명혜망(明慧?)
유백온(劉伯溫) 사후 2백년이 지난 어느 날, 양(楊)씨 성을 가진 관리가 민심을 살피러 다니다 큰 강가에 다다랐다.
강가에는 한 무덤이 강물에 휩쓸려갈 듯 보였는데 물어보니 이는 명나라 재상을 지낸 유백온의 무덤이었다.
관리는 혼자 웃었다. '전설에 따르면 유백온은 신묘한 계책을 가지고 미래의 화와 복을 예측할 수 있었다는데 어찌 이런 곳에 묻혔는가? 강물에 자신의 무덤이 쓸려갈 것을 몰랐을까? 전설이 완전 틀렸구나.'
관리는 유백온이 명나라 개국공신이었다는 점을 들어 사람을 시켜 유백온의 무덤을 파‘안락와(安樂窩)’라는 이름을 지어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도록 명했다.
무덤을 파내자 도자기 항아리가 하나 나왔는데 안에는 진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항아리를 부하에게 챙기라고 한 후 관을 보니 이러한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양(楊) 형님 감사합니다.
저를 안락와에 옮겨 주시니
당신께 진주 80알을 선물해드립니다.
진주가 하나라도 적다면
부하의 소매를 더듬어보세요.
관리는 부하에게 도자기 항아리를 꺼내 진주를 한 알씩 세어보게 하니 정말로 한 알이 적었다.
부하들에게 추궁해 보아도 모두 없다고 했다.
항아리를 거두어갔던 부하의 소맷자락 안을 더듬어보니 과연 바로 그 한 알이 있었다.
관리는 그를 꾸짖고 "유백온은 2백년 전에 네가 진주 한 알을 훔쳐갈 것을 예견했는데 그래도 잡아떼는 것이냐? 이 관 위에 뭐라 써져있는지 봐라"고 하며 문구를 큰 소리로 읽었다.
모두가 듣고 놀라며 "아이고, 유백온은 정말로 신묘한 자이구나!"라고 외쳤다.
그리고는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연신 이마를 땅에 조아렸다.
숭정제의 자진과 명나라의 멸망, 그리고 유백온의 예
유백온은 기문이술에 능통하고, 풍수상술의 고수로, 주원장을 보좌하여 명나라를 건립합니다.
명조의 개국 원로 공신으로, 세인들은 전사의 제갈량, 후사의 유백온이라 칭하며, 서로를 비교하기도 합니다.
유백온은 명리에 정통하여,<소병가>라는 일종의 앞날을 예측하는 책을 한권 남기게 됩니다.
그 안에는 정확하게 주체(명 성조, 1360∼1424년)의 제위 찬탈,
뒷날 명 왕조의 교체에 관한 일들을 예측합니다.
유백온은 기문이술에 정통하였기 때문에, 주원장이 명조를 건립할 때, 유백온으로 하여금 명조의 앞날을 점쳐보게 합니다.
<주역 이편>에 나오는 성어,
"반군여반호(伴君如伴虎 : 군주를 모시는 것은 호랑이 옆에 있는 것과 같다)처럼, 유백온은 일의 정황을 알아도 명쾌하게 이야기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원장이 이렇게 집착하니, 신하된 도리로서, 시키는대로 할수 밖에요.
나중에 유백온은 추정한 앞날의 예측 결과를 보물함에 넣어 봉존하면서, 명조의 생사존망의 시기가 오기 전에 절대로 열지말 것을 당부하니, 이 보물함은 봉존해 오게 됩니다.
명 성조 주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난후, 어쩌다 이 보물함을 발견하게 되어, 개봉하여 안을 살펴보려 하였으나, 시중이 이것은 유백온이 남겨둔 대명왕조의 미래예언이고, 왕조의 긴급 상황이 일어나기 전에는 절대 열어서는 안되는 것이라 하니, 주체는 아주 존중하고 숭배하여 잘 보관하니 2백년간 숨겨져 내려 옵니다
명조의 제일 마지막 황제 숭정이 제위에 오른후, 황제의 국정 방법을 바꾸어 힘을 다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무너지는 명조를 구하려고 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이 시기의 명조는 이미 뼈속까지 썩어 있어, 나라는 내우외환에 처하여, 북쪽에는 청나라의 만주족이 호시탐탐 엿보고 있고, 남쪽에는 이자성(李自成)의 봉기군이 세력을 확대하여 북으로 진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1644년 3월 이자성의 봉기군은 창의문을 통하여 북경성으로 진격해 오고 있어, 숭정제는 선조가 전해준 보물함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 보물함이 기사회생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함을 열어보니 안에는 한장의 종이가 있고, 종이위에는 세폭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첫번째 그림은 황제와 신하가 궁중에서 가무를 즐기고,
두번째 그림은 사병과 백성이 성안에서 가무를 즐기고,
마지막 그림은 한사람이 나무에 목을 메 죽어있는 장면입니다.
숭정의 마음속에는 만감이 교차하며, 손이 떨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고, 이 마지막 한폭의 그림이 짐의 최후란 말인가 하고 탄식을 합니다.
200년전에 이미 오늘이 운명으로 정해져 있었단 말인가!
명조의 대다수 황제들은 모두 아둔한 군주로, 우매하고 황당하여, 향락만 탐하고 선조의 가르침을 소홀히 해왔습니다.
당시 자신의 선조 주원장이 원나라의 부패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과 봉기하여 조반한 사실을 모르고, 오늘 이 주씨 가문의 후대가, 결국은 주원장이 가장 증오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원래부터 파국의 결과가 운명으로 정해져 있었는지,?
1644년 3월 19일, 숭정은 북경 매산(현 경산)에서 황급하게 나무에 목을 매고 죽게 됩니다.
죽을 당시 얼마나 긴급하게 산을 올랐는지, 왼발은 맨발이고 오른발만 붉은 신발을 신고 있었으니, 향년 3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죽기전에, 그는 조서를 남깁니다.
"짐이 스스로 제위에 오른지 17년, 비록 짐이 박덕하고 경망하여, 위로 하늘의 노여움을 사서 모든 신하들을 잘못 이끌어, 역적들이 이제 경사 북경에 육박해 오는구나.
짐이 죽어 지하에 계신 선조들을 볼 면목이 없어, 계관을 내려놓고 복면을 쓰고 싶은 심정이구나.
역적들이 마음대로 짐의 사체를 훼손하더라도, 백성들은 한사람이라도 상해를 입히지 말도록 하라."
숭정의 조서중 마지막 말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비록 명조의 선제들과 탐관에 의한 실정이 누적되어,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이 북경으로 진공하면서, 숭정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지만, 그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백성들을 생각할줄 아는 좋고 어진 황제였네요.
또한 기문이술과 명리에 정통한 유백온의 신묘한 지략과 선견지명은, 다시한번 후대의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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