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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푸는 암호(예언)

역병] 아테네문명 몰락시킨 천연두, 중세 유럽 페스트(흑사병)로 문닫다!

by 충격대예언 2022. 2. 11.

역병] 아테네문명 몰락시킨 천연두, 중세 유럽 페스트(흑사병)로 문닫다!

 

서양의 역병사례1 천연두, 아테네문명을 몰락시키다

서양의 역사에서 이런 무시무시한 역병이 언제 있었는가. 역병은 대부분 전쟁과 함께 옵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들이 밀집한 상태에서 단체생활을 하잖아요. 서로 다른 곳에 거주하던 각국의 군인들이 수만, 수십만 명이 한 장소에 모여서 전투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각자 가지고 있던 풍토병을 교류하는 그야말로 질병의 교환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전투나 전쟁이라는 것이. 그래서 어느 시기의 전쟁이라도 질병 특히 전염병이 만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다른 지역의 군사들이 가지고 온 풍토병은 우리 지역에는 없던 새로운 전염병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면역체계가 발달하지 않은 것일 수가 많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갑자기 전쟁터에서 역병이 터져나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최초의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이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에 벌어졌던 역병입니다. 이 전쟁은 기원전 431년에서 404년에 걸쳐 오랜 기간 일어났는데 수차례에 걸친 전투가 있었으며 장기간에 걸친 전쟁이었는데, 바로 그리스의 종주권을 놓고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맞선 전쟁입니다. 그런데 이때 전쟁 초기에 기원전 430년에서 429년에 아테네에서 역병이 발생했습니다. 

역사가에 따라서 해석이 조금 다르기도 합니다만 3분의 1이 죽었다, 4분의 1이 죽었다 하는데 하여튼 상당수의 군인들이 한꺼번에 몰살한 것은 확실합니다. 이로 인해 아테네가 제대로 싸우질 못하게 됐고 스파르타에 패하게 됩니다. 결국 아테네의 영광의 시대는 가고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패자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는데요. 이때 전염병이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됐느냐 하면, 모든 것은 기록이 있어야 알 수 있습니다. 

아니면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서 질병을 연구하기도 하지만 사실 뼈에 흔적을 남기는 질병(전염병) 이외에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뼈에 흔적을 남기는 질병은 척추결핵이라든가 몇 가지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인골 연구를 통해서 역병을 알기는 쉽지 않고요. 바로 투키디데스[그림]라는 사람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이분 덕분에 알 수가 있는데요. 투키디데스의 전염병 기록을 보면, 펠레폰네소스 전쟁에 대한 아주 장기간에 걸친 기록을 쭉 썼는데 그중 전염병 기록만 소개를 해드리면 이렇습니다.


사실 이것만 가지고 무슨 질병인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질병에 발진성 질환들이 많거든요. 발진티푸스도 종기발진이 나타나고, 수두도 발진이 나타나고, 스몰팍스smallpox라고 하는 무서운 천연두(두창)도 발진이 나타나고, 홍역도 발진이 나타나고, 하여튼 고열에 시달리면 발진이 나타나는 질병들이 아주 많습니다. 중간에 사라지는 것도 있고 끝까지 가는 것도 있고 그런 차이가 있는데, 그것을 알기에는 너무 애매모호하게 적은 것이죠.

이렇게 역병에 걸린 환자가 생기니까 감염을 두려워하여 병자들에게 가까이 접근하려 하지 않아서 대부분의 집이 빈집처럼 돼서 간호사도 없이 병자 홀로 남아 죽어갔다. 즉 환자는 병 때문에 아파서 죽은 것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굶어죽은 거예요. 다 도망가버리고 돌봐주는 사람이 없는 거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어나가고, 또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람들은 ‘지금 살아있을 때 즐기자’는 막가파식 삶의 태도를 갖게 된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거죠. 그래서 가장 찬란하고 뛰어났던 아테네의 문명, 아테네의 문화가 거의 붕괴되다시피 해버렸다는 거죠.

이에 대한 학자들의 학설이, 나중에 농포가 생기고 검푸르고 하니까 아, 이것은 천연두다 하는 사람도 있고 이게 딱지 얘기도 없고 하니까 이건 발진티푸스다, 그리고 어떤 학자는 아니다, 이건 탄저병이다, 뭐 아주 학설이 분분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천연두일 가능성이 높다’고 얘기합니다.

서양의 역병사례2 페스트, 유럽의 중세시대를 문닫다

다음에 등장하는 병은 정말 무시무시한 역병이었습니다. 하나의 도시국가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전 유럽사회를 다 파괴했고 마침내 사회체제가 완전히 붕괴되어 중세사회가 무너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 바로 흑사병입니다. 왜 흑사병이라고 하냐면, 환자들이 나중에 검푸르게 변해서 죽어가거든요. 그래서 흑사병이라고 하는데 영국에 남아 있는 기념비에 써 있습니다. 

1348년도에 흑사병이 영국의 항구를 통해 들어와 30 내지 50%에 달하는 인구를 살해했다 라고 기념비에 씌여 있는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전 인구의 50%라면 어마어마한 거죠.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30%인 데도 있고 50%인 데도 있고 어떤 데는 80%인 데도 있고 지역에 따라 차이가 많았어요. 최초의 발생기록은 1347년, 카파라는 도시에서 발생해서 제네바, 베니스를 거쳐서 전 이탈리아에 퍼진 다음, 다시 유럽으로, 북부 아프리카로, 나중에는 북유럽까지, 정말 수많은 유럽인들을 사망하게 만든 흑사병은 1700년대까지 100여 차례나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흑사병이 지금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몽고라든가 베트남이라든가 미국에서도 흑사병 환자가 간헐적으로 발생합니다. 물론 지금은 방역을 잘해서 중세와는 다른 생태조건 때문에 무시무시한 역병으로 발전하지 않는 거죠. 그러므로 바이러스 입장에서 봤을 때는 제일 좋은 것이 공생관계입니다. 인간의 몸에서 같이 조화롭게 지내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감기처럼 그냥 앓고 지나가고, 또 앓고 지나가고, 매년 감기 앓아도 인간이 죽지는 않거든요. 감기바이러스로서는 인간과 사이좋게 같이 공생하는 게 가장 바람직한 생존법인데, 흑사병처럼 독성이 너무 강한 병균일 경우는 자기 숙주를 다 죽여버리는 거죠. 그럴 경우에 사실은 자기도 공멸하죠.

대부분의 역병은 처음에는 무시무시한 역병으로 나타났지만 이것이 100여 차례 이상 역사상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인간이 면역력을 갖게 되면 서로 사이좋게 공생관계로 지내는 질병으로 정착하죠. 우리는 이것을 지역에만 있는 풍토병, 또는 어렸을 때 한번 앓고 마는 소아전염병으로 정착하는 것이 바이러스 입장에서는 가장 바람직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흑사병 같은 경우는 조절에 실패해서 인간과 공생을 못하게 된 것이죠.

■14세기 유럽의 페스트 발생 및 확대과정 (약5년)

[그림] 연구에 따르면 전유럽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죽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럼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당시 킵차크한국의 몽골군이 카파 시를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중세 도시는, 여러분 잘 아시겠지만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에서 침략하면 문닫고 농성을 합니다. 바깥으로 못 나가고 자기네가 갖고 있는 식량으로 침략군이 물러날 때까지 버티는 거죠. 이걸 농성이라고 하는데 그 와중에 몽고군에서 페스트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몽고군이 더 공격할 수 없어 퇴각하면서 죽은 몽고군의 시체를 저런 투석기(돌을 던지거나 여러 가지 물질을 던져 성을 파괴하는데 씀)에다 시체를 쏴서 성 안에다 던져넣고 가버렸다는 겁니다.

[그림] 처음에는 카파 시민들이 ‘이게 뭐지? 왜 죽은 놈들을 여기다 쏘고 갔나’ 그랬는데 그 시체에서 페스트가 전염돼서 전 유럽에 퍼졌다는 것이죠. 여기 있는 크리미아 저쪽 동그란 데가 카파 시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이태리 제노바 시의 상인이 와 있었습니다. 몽고군이 가버리자 얼른 성을 빠져나와 배를 타고 본국으로 간 거예요. 그런데 이미 페스트에 감염된 사람들이 있었던 거죠. 이탈리아로 돌아가자마자 이미 뱃속에서부터 죽기 시작해서 도착하자마자 대부분 많이 죽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을 묻고 장례 치르고 하면서 이것이 제노바 시에 퍼지게 되고 인근 베니스에도 퍼지게 되면서 전 이탈리아로 퍼지게 됐다는 거죠.

[그림] 제노바와 베니스의 기록에 보면, 1347년과 1348년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기록들이 나옵니다. 빠른 속도로 유럽으로 전파하는데요. 이것은 흑사병의 사망연도를 갖고 학자들이 만든 그림입니다. 정말이지 전 유럽으로 다 퍼져나가죠. 영국의 경우는 1348년 착륙하여 1349년 북쪽으로, 아일랜드까지 가고 다시 이것이 노르웨이나 스웨덴으로 넘어간 후 1352년에는 러시아에 도착합니다.

흑사병이 전 유럽에 퍼졌을 때는 길거리에 사망자가 굉장히 많았다 합니다. 처음에 가족이 죽었을 때는 애도하면서 장엄한 장례를 치러주는데 가령 일가족이 몰살했을 경우는 묻어줄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렇지만 시체가 썩어가니까 이웃들이 해주는데 장례식이고 뭐고 없는 거죠. 그냥 구덩이를 파고 묻었는데 나중에는 구덩이를 팔 사람도 없는 거예요. 시체가 집안에서 썩거나 아니면 밤에 몰래 뒷골목에다 갖다버리는 거죠.[그림]

길거리에 사망자의 시체가 널리게 되고 가족이 갑자기 다 몰살당하는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치미는 분노는 정치적인 지도자에게 가기도 하지만 보통은 어떤 특수한 사회집단에 뿜어내게 됩니다. 그래서 이때에는 거지나 유대인, 한센병 환자, 외국인, 이런 사람들이 역병을 가져왔다고 생각하기 쉽고, 그 중에서도 유대인은 자기네들끼리 집단으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박해가 굉장히 심했다 합니다. 즉 이들이 다른 신을 믿기 때문에 이런 질병을 갖고왔다 해서 이교도들을 불태워서 많이 죽였다고 해요. 그런 그림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그림]

치료를 하기는 해야 되니까, 의사들이 온몸을 다 감싸고, 새의 가면을 쓰고 몸을 아무 데도 드러내지 않고 치료를 하러 다녔다 합니다.[그림] 일단 흑사병이 발생하면 대부분 가난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많이 발생하잖아요. 그럼 일단 거기는 딱 블록을 치고 못 나오게, 죽든 말든 그렇게 했고. 그리고 어떤 지역이 안전한가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해 먼저 가난한 여자를 들여보내 살아있는지 확인하고나서 그 지역에 다시 들어가는 방법으로 대처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흑사병이 왜 이토록 사회적인 영향이 컸나 살펴봤을 때, 물론 쥐가(쥐벼룩) 페스트균을 옮기기는 하지만 단지 병균이 있다고 병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거든요. 

여기에는 바로 14세기 초의 기후변화가 있었다 합니다. 기후가 급격히 한랭화하는 시기여서 날씨가 굉장히 추웠다고 해요. 인체가 약체화된 거죠. 지금 매년 기온이 조금씩 평균기온이 올라가고 있지 않습니까? 반대로 매년 기온이 조금씩 내려가면, 이 추세대로 한 10년, 20년 돼서 평균기온이 3,4도 내려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인체가 감당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굉장히 면역력이 약해진대요.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기후가 계속 추워지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흑사병이 침입한 것이죠. 더욱이 1315년과 1317년에 대기근이 발생하여 굶어죽은 사람이 많았답니다. 그러니까 영양이 불량하고 한랭화로 인해서 인체면역력 자체가 이상상황에 있을 때 흑사병이 도착을 한 것이죠. 이렇게 여러 가지 조건이 조합을 이뤄서 맞춰졌을 때 이런 대폭발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때 또 한몫을 한 것이 비위생인 유럽의 도시환경이라고 합니다. 유럽의 중세도시는 화장실이 없었어요. 오물을 그대로 길거리에다 내다버려서 파리의 거리가 똥오줌으로 질퍽거렸기 때문에, 여러분 하이힐의 유래를 아시죠? 높은 구두를 신지 않으면 길거리를 걸어다닐 수가 없었다 합니다. 그래서 귀족들은 남자나 여자나 하이힐을 신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만큼 유럽의 도시가 비위생적이었다는 거죠.

초기 4년간 인구가 엄청나게 죽은 거죠. 인구의 거의 절반이 처음에 죽었고, 궁극적으로 1700년 전까지 전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감소하면서 노동력이 감소했겠죠. 그러니까 일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중세에는 영주한테 귀속된,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는 농노들이 생산을 전부 담당했는데 이 사람들이 다 죽어버렸으니까 농노의 지위가 향상된 거예요. 경작할 땅은 많아지고 그래서 이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게 되어 자영농이 증가하였고, 그러면서 근대 시민사회로 가는 시민계급이 성장하게 됐다는 거죠. 이렇게 중세 장원제가 붕괴하면서 서양의 중세 지배체제가 아주 근본적으로 붕괴하는, 그런 시대변혁의 결정적인 계기를 흑사병이 제공했다고 합니다.

자, 여기까지는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던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에 나타난 두창으로 추정되는 역병과 중세유럽을 붕괴시켰던 흑사병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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