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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꼬꼬무 시즌3 이용운 이애란 탈북 김천홍 기자 47년만의 탈출 상봉 검은강을 건너라 재방송 48회

by 충격대예언 2022. 10. 7.

꼬꼬무 시즌3 이용운 이애란 탈북 김천홍 기자 
47년만의 탈출 상봉 검은강을 건너라 재방송 48회

[글 포스팅 순서]

1. 47년 만의 탈출-검은 강을 건너라
2. 은밀한 접선
3. 목숨 건 탈출의 시작
4. 물거품이 된 계획, 다시 북으로
5. 탈출, 반쪽의 성공
6. 47년 만에 만난 모자
7. 드디어 완전체가 된 가족
8. 완벽한 해피엔딩일 수 없는 이유

9. 꼬꼬무 대전 신탄진 백합다방 종업원 살인사건 DNA와 검은점퍼 시즌3 47회
10. 꼬꼬무 비행기 납치사건 칼기(KAL) 1971년 속초 납북미수 범인 김상태, 전명세 이강흔 기장 대한항공 46회
11. 꼬꼬무 이방인 엄마의 살인고백 송종순 노스캐롤라이나 친아들 살인 사건 295호 비밀 시즌3 45회

12. 꼬꼬무 시즌3 재방송 시간,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3. 이애란 박사 탈북, 근황 정치 활동
14. 이용운, 이애란 김탈북 이후 가족들의 근황

 

 

47년 만의 탈출-검은 강을 건너라


10월 6일 목요일 10시 30분에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3 (꼬꼬무 시즌3, 시청률: 4.4%) 48회에서는 '
꼬꼬무-47년 만의 탈출-검은 강을 건너라'로 이용운 씨 가족의 탈북기를 재조명 했습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멜로망스 김민석, 배우 정이랑, 가수 장예은이 출연했습니다.

 

 은밀한 접선


때는 1997년 7월 27일, 중국.
택시 한대가 비포장 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뒷자리에는 당시 SBS보도국 소속 김천홍 기자가 탑승했습니다.
김 기자의 표정이 심각했습니다.
달리던 택시는 허름한 시장 앞에 멈췄고, 기자는 택시에서 내려 갑자기 쇼핑을 했습니다.
바지, 티셔츠, 슬리퍼, 러닝 셔츠 등 풀세트로 구매했습니다.
그런데 김 기자는 제일 낡은 물건들만 골라 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변장해서 자신의 신분을 감추려고 한 것입니다.
허름한 차림의 김 기자는 마치 현지인처럼 보였습니다.


김 기자의 목적지는 장백 조선족자치현이었습니다.
조선족이 모여 사는 곳인데, 북한이랑 엄청 가까웠습니다.
압록강을 경계로 딱 맞닿아 있어서 중국 공안의 감시가 엄청 심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수상해 보이면, 잡혀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현지인처럼 위장을 한 것입니다.

김 기자는 다시 택시를 타고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한밤중이 되어 도착한 곳은 장백의 한 작은 마을.
어둠 속에서 주변을 살피며 골목을 걷다가 어느 허름한 집 앞에 멈춰 섰습니다.
김 기자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고 어둠 속에서 어떤 사람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60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와 갓난 아기를 업은 젊은 여자입니다.

오셨습네까?
기다리고 있었습네다.


남자가 악수를 청하는데 손을 덜덜 떨었습니다.
두 사람이 김 기자한테 이걸 내밀었습니다.
낡은 신분증이었었습니다.


신분증에는 '공민증', '녀자', '평양 시민' 등이 적혀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북한 사람이었습니다.
남자의 이름은 이용운, 당시 62세.
여자는 그의 딸 이애란.
갓난 아기는 애란 씨의 아들이었습니다.
이제 태어난지 100일 정도 됐습니다.
이 사람들은 김 기자를 만나려고 압록강을 건넌 것입니다.
왜냐하면, 6.25때 헤어진 이용운 씨의 어머니를 만나려고, 북한을 탈출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북한에 가족이 7명이나 더 있다고 합니다.
이 7명의 가족까지 다 데리고 탈출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일가족 10명의 탈출이라니 거의 불가능하고 위험한 계획이었습니다.
운 좋게 북한 땅을 빠져나와도 중국 땅에서 걸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위험한 일인데, 왜 김 기자는 여기에 꼭 와야만 했을까요?

 

 

 목숨 건 탈출의 시작


때는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989년. 
북한 양강도 혜산시에 있는 이용운 씨의 집입니다.
혜산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장백과 맞닿은 곳입니다.


어느 날 교포총국에서 '동생이 이용운 동무를 찾고 있음'이라는 메시지가 왔습니다.
용운 씨는 6.25 당시 남쪽으로 피난 가던 길에 부모님과 동생들과 헤어졌고, 전쟁통에 가족이 다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40년만에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접한 것입니다.

용운 씨는 단숨에 평양에 있는 교포총국까지 찾아갔습니다.
동생이 사는 곳을 알려달라 하니, 미국 캘리포니아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동생 넷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두근두근 가슴이 뛰는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이용운 씨의 딸 애란 씨 였습니다.
그 당시 북한의 경제 상황은 최악이었었습니다.
여기저기 굶어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널부러져 있던, 아무런 희망이란 것이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애란 씨는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 이건 어쩌면 기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애란 씨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미국에 있는 할머니한테 편지를 썼습니다.

자나깨나 꿈결에도 그리운 나의 할머님께 드립니다.
 할머님을 비롯한 일가족 모두가 살아 계신다니 기쁜 이 마음 반가운 이 마음 말로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평양이 고향이긴 하지만, 집도 없고 부모님들도 없고 하니까, 군사복무를 마치면서 량강도에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루라도 한시라도 더 가기 전에 보고 싶습니다. 조국에서 할머님의 손녀 애란 삼가 올립니다.

-애란이 미국 할머니에게 보낸 편지 내용 中


이 편지, 미국까지 잘 전달 됐을까요?
편지를 보내고 몇 달이 지났습니다.
기대를 저버릴 때 쯤, 드디어 답장이 왔습니다.

용운아, 40년이나 지났는데 네가 살아있다니 마치 꿈만 같다.

가족이 너를 버렸다고 생각하며 많이도 울었겠구나.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다.

-미국에서 온 편지 내용 中

 


펴지를 보내신 분의 성함은 백홍용, 당시 85세.
백 할머니는 그동안 아들 찾겠다고 안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살아있다면 당연히 남한에 있겠거니 하고 아들 친구들, 지인들 다 만나봤는데 아무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산가족찾기 방송도 나갔는데, 소용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북한까지 수소문했다가, 드디어 아들의 소식을 알게 된 것입니다.
40여년 만에 아들을 찾았지만, 북한에 사니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백 할머니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애란 씨의 집 문을 막 두드렸습니다.
나가보니 처음 보는 남자가 서있었습니다.
남자는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건넸습니다.
카세트 테이프였습니다.
카세트 테이프에는 무슨 내용이 녹음돼 있었을까요?

현재의 애란 씨를 만나 직접 들어봤습니다.

녹음테이프를 보내주셨어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혹시 우리집에 도청장치 같은 게 돼있는지 모르니까, 이불 세 개를 쌓아놓고 그 안에 들어가서 듣고 나온 거죠.

우리 할머니가 그때 '다 서울에 데려가려고 그러니까 서로 서로 의지해서 다같이 압록강 건너 오라'고.
그런 메시지를 보내신 거예요.

-2022년, 현재의 애란 씨


백 할머니가 책임 지고 서울로 데려갈 테니 용운 씨 가족들에게 북한을 탈출하라고 한 것입니다.

북한을 탈출하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이 희망 없는 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이 말을 들은 애란 씨는 심장이 막 뛰었습니다.
애란 씨는 '내 아들이 다른 세상에서 살 수만 있다면'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백 할머니도 대단하셨습니다.
40년만에 찾은 아들을 만날 수 없으니 그 곳에서 탈출 시켜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입니다.
그것도 일가족 전체를.
백 할머니는 곧바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우선 이들이 중국을 빠져나오는 걸 도울 수 있도록 현지 사정에 밝은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게 바로 김천홍 기자였습니다.
김 기자는 보도국 내에서 '중국통'으로 불렸습니다.
지인을 통해서 김 기자를 알게 된 백 할머니가 김 기자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김 기자는 잘못하면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일이란 걸 알았지만 백 할머니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이산가족이라 그 아픔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 친누나도 지금 현재 북한에 계십니다.
누님하고 누님 가족을 탈북시켜야 되겠다, 그렇게 작정을 했어요.
그런데 저희 아버지는 북에 살아계신 누나랑 연결하다가 연락이 딱 닿기 열 달 전에 돌아가셨어요.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이용운 씨 모친 백 할머니는 살아 계셨고. 살아계신 할머니의 원을 풀어드리자 했죠.

-김천홍 기자


누구보다 백 할머니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아니까 운명적인 만남이었습니다.
김 기자는 그동안 쌓아둔 인맥과 정보를 모두 모아 계획을 세웠습니다.
준비 기간만 약 1년이 걸렸습니다.
그렇게 김 기자는 장백으로 가서 이용운 씨 부녀를 만난것입니다.

 

 

 물거품이 된 계획, 다시 북으로


그런데 왜 나머지 7명의 가족들은 용운 씨와 같이 압록강을 건너지 않은 걸까요?
다른 가족들은 탈북을 망설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이용운 씨 가족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장백에 와 있는 건 이용운 씨와 첫째딸 애란과 그의 어린 아들.
북한에는 이용운 씨의 아내 이재관 씨, 둘째 아들 학철, 셋째 아들 상철, 막내 딸 미란이가 있었습니다.
또 애란의 남편, 학철의 아내, 그리고 두살 된 아들까지. 이렇게 가족은 총 10명이었습니다.

가족들이 북한에서 나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든가, 아니면 다시 돌아가서 가족을 설득하든가 이제 결정을 해야했습니다. 다들 침묵을 지키고 있는 그 때, 애란이 자신이 다시 돌아가서 가족들을 설득해 데리고 나오겠다고 말했습니다.

애란은 곧장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간단하게 짐을 꾸리더니, 갑자기 어린 아들을 들쳐 업었습니다.
아이랑 같이 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안된다고 말렸지만 말을 안 들었습니다.
만에 하나 일일 틀어져 자신이 못 나오면, 아들을 다시 못 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절대 아들을 두고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애란은 아들을 업고 압록강을 건너겠다고 말했습니다.


중국 장백-북한 혜산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까웠습니다.
압록강 강폭이 가장 좁은 곳은 20미터 밖에 안되고, 수심도 깊지가 않았습니다.
충분이 건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강변을 따라 배치된 국경 수비대였습니다.
허가 없이 건너다가 들키면 처형될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의 경우 실수한다면 그 자리에서 자살이라도 하는게.. 죽음을 각오해야 하니까.

-북한 복귀를 앞둔 이애란 씨


7월 31일 밤. 
아들을 업은 애란이 강 건너편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사방이 깜깜하고 고요했습니다.
건너가서 발각됐다가 옷에서 물이 떨어지면 의심을 살 수 있으니까 심호흡을 한 애란은 바지를 벗었었습니다.
하의를 몽땅 벗은 애란은 숨소리도 조심하며 강물에 발을 넣었습니다.
차가운 물이 등까지 차오르던 그때, 업은 아이가 움찔했습니다.
그런데 그 뿐이었고 아이는 옷이 젖었는데도 신기하게 울지도 않고, 꼬물거리다가 다시 잠들었습니다.

애란은 드디어 건너편 강가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애란을 발견한 국경수비대가 달려왔습니다.
애란은 서둘러 바지부터 입었습니다.
애란은 "중국에 돈 받을게 있어 건너가려던 참이었다"고 둘러대며 한 번만 봐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국경수비대는 애란을 막 발로 차고 때렸습니다.
그리고 취조실 같은 곳으로 끌고 갔습니다.
애란이 울며 불며 매달렸지만 안 통했습니다.
순간 뭔가가 떠올랐습니다.
애란은 보따리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습니다.
바로 담배와 술이었었습니다.

중국 담배가 한 갑에 35원이에요.
10개가 들어있으니 350원짜리 두 개를 줬어요.
술 두 병이랑.


애란이 술과 담배를 주니, 국경수비대는 그제야 못 이기는 척 보내주었습니다.
뇌물로 건넨 술과 담배가, 사람 목숨 값인 것이었습니다.

장백에 있던 김 기자는 날이 밝자마자 압록강으로 나갔습니다.
애타게 강 건너만 계속 주시하고 있는데, 드디어 애란이 나타났습니다.
애란은 손가락 세 개를 펼치고 동그라미를 그리며 의문의 수신호를 보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8월 3일에 나오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다행히 가족들을 설득한 거 같았습니다.
드디어 약속한 그 날이 됐고, 김 기자는 대낮부터 강변에 나가서 애란을 기다렸습니다.
해가 저물 무렵, 건너편에 애란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또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엔 다섯 손가락이야.
오늘 말고, 5일에 나오겠다는 계획 변경이었었습니다.

8월 5일이 됐고, 김 기자 일행은 아침부터 강변에서 애란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다시 또 강으로 나갔어. 한참을 기다리는데 드디어 애란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한동안 주변을 살피며 눈치를 보더니, 손짓을 했습니다.
이번 일을 도와주고 있는 조선족 안내인을 호출한 것입니다.
그 친구는 장사하느라 장백-혜산을 수시로 건너 다니는 사람이라 압록강을 건너도 크게 의심을 안 받았습니다.
그는 단숨에 강을 건너서 애란에게 다가갔습니다.
애란은 그에게 조심스럽게 편지 한 통을 건넸습니다.

편지에는 "우리의 계획은 다 틀어졌다"고 적혀 있었었습니다.

애란의 이모가 탈북 계획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모가 "움직이면 즉시 보위부에 보고하겠다"고 해서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한바탕 난리를 친 이모는 이들이 못 떠나게 감시하려고 그냥 자리를 피고 드러누워 버렸다고 합니다.
편지를 본 이용운 씨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40년 만에 찾은 어머니, 그리고 북에 있는 아내와 자식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말없이 담배만 계속 피우던 이용운 씨가 드디어 입을 열었었습니다.

내레 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래도 가족들한테 가야지요.


용운 씨는 어머니에게 인사라도 남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김 기자를 통해 용운 씨가 어머니에게 남긴 실제 음성이 있습니다.

어머니 용운이라요.
나 장백에 왔다 어머니 못 보고 가요.
내 불효자식입니다, 어머니.
계속 마음 속에 두고두고 살겠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장수하셔야 돼요.


이용운 씨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김 기자는 철수해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탈출, 반쪽의 성공


며칠 후, 김 기자는 장백에 있던 조선족 안내인 김 씨한테 급하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탈북의 걸림돌이었던 이모가 집에 돌아갔으니, 이용운 씨 가족이 전부 압록강을 건너오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 기자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애란은 다시 탈출을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가족들끼리 아직 합의가 안 됐습니다.
탈북을 찬성하는 사람은 아버지 용운 씨와 첫째 딸 애란.
그런데 애란도 아직 남편한테는 말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둘째 학철이는 탈북에 찬성했습니다.
그런데 그 역시 아내한테 얘기를 못했습니다.
아내가 반대할까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가족들이 다 가면 자신도 가겠다는 입장이고, 막내 미란이는 어머니가 가시면 가겠다고 했습니다.
제일 큰 문제는, 셋째 상철이었습니다.
상철이는 나고 자란 조국을 어떻게 배신할 수 있냐며 절대 못 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상철이는 북한에서 나름 엘리트였습니다.
형제들 중에 유일하게 입당했고, 대학교를 추천 받아서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군대를 전역했습니다.
북한에서 당원이 됐다는 건 나라에서 앞날을 보장해 준다는 것입니다.
또 상철은 약혼까지 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래저래 떠나기 싫은 상황이었습니다.

애란 씨는 고민 끝에 일단 저지르기로 했습니다.
바로 조선족 안내인한테 연락했고, 탈출 날짜를 잡았습니다.
탈출 하루 전, 애란 씨는 남편한테 "어떤 중국 사람이 나한테 쌀을 팔아달라고 하는데 당신이 같이 가줄 수 있냐"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사실은 나중에 말하더라도 일단 중국에 같이 넘어가고자 생각한 것입니다.
남편은 알겠다며 외출을 했습니다.
그런데 밤 12시가 넘어 돌아온 남편은 만취 상태였고 그대로 뻗어 잠들어 버렸습니다.
새벽 2시가 넘어가는데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애란 씨는 잠든 남편을 그대로 두고 아이를 업었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땐 냉정하게, 감정에 휘둘리면 안된다고 독하게 마음 먹고 집을 나서 친정으로 갔습니다.


친정에서 만난 어머니는 "난 못 간다"며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셋째 상철이가 집에 안 왔다고, 상철이만 두고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옆에 있던 막내 미란이도, 그럼 자기도 안 가겠다고 했습니다.
시간은 새벽 3시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조선족 안내인과 약속한 시간이 다 됐습니다.
이제 시간이 없었습니다.
애란 씨는 어머니와 갓난 아들 중에,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애란은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리고 집을 나섰습니다.
아들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 뒤를 동생 학철이와 아버지 용운 씨가 따랐습니다.
용운 씨도 결국엔 40년 넘게 떨어져 지낸 어머니를 선택한것입니다.

새벽 3시 30분. 
불빛 하나 없는 압록강 강변에 도착했습니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심호흡을 하고, 애란 씨부터 발걸음을 뗐습니다.
바로 그 때, "거기 멈추라! 간나 새끼들 어디 가는거네?" 국경수비대에 발각됐습니다.

뭔가 변명할 새도 없이 무차별한 폭행이 이어졌습니다.
애란은 아들을 꼭 끌어 안으며 '이제 끝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불빛이 깜박깜박했습니다.
그걸 보고 병사 하나가 그 쪽으로 막 뛰어갔습니다.
잠시 후 돌아와서는 "날래 건너가라"며 그냥 가라고 했습니다.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걸까요?

병사의 양손에는 술과 담배가 잔뜩 들려있었습니다.
기다리던 조선족 안내인이 급히 손을 쓴 것이었습니다.
애란 일행은 정신없이 강물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 때 모습을 찍은 영상이 있습니다.
세계 최초로 촬영된, 실제 탈북 장면입니다.


1997년 8월 16일 새벽.
누구 하나 떨어지지 않도록 꼭 손을 붙잡고, 아들을 업은 애란, 아버지 용운 씨, 아들 학철이 압록강을 건너왔습니다.
마침내 도착한 장백의 은신처에서 용운 씨는 소리 죽여 눈물을 쏟았습니다.
국경수비대한테 얼마나 맞았는지 학철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살아남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김 기자는 가족 일부만 넘어온 것을 보고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생이별을 한 어머니와 아들을 만나게 해주려 시작한 일인데, 또 다른 이산가족이 생겨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여기서 더 지체하면 안 됐습니다.

이들은 택시를 나눠 타고 심양으로 향했습니다.
장백에서 700km를 달려가야 했습니다.
두렵고 혼란스러운 상황이지만 차 안 분위기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100일된 아기 때문이었었습니다.
중간에 검문소 때문에 차에서 내려 산길을 도보로 이동하기도 했지만, 무사히 심양에 도착했습니다.
그 시각 심양에는 특별한 사람이 와있었습니다.
바로 백홍용 할머니입니다.

 

 

47년 만에 만난 모자


백 할머니는 한 허름한 건물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한걸음 한걸음 힘차게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문이 열렸고, 눈 앞에 백발의 노인이 한 명 서있었습니다.
16살에 잃어버린 아들이었습니다.
백 할머니와 용운 씨, 47년만에 모자가 드디어 만났습니다.


백 할머니는 아들도 끌어 안고, 처음 보는 손녀, 손자도 끌어 안았습니다.
이들은 할머니의 품에서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런데 백 할머니의 표정이 막 환하지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울먹이는 아들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울지 말라.
못나온 아이들 얼른 데려오라.
절대로 포기하면 안돼.


북한에 남아있는 며느리와 손주들이 걱정이 되었기 때문에 할머니는 그들을 어떻게든 꼭 데려오라고 신신 당부하셨습니다. 당연히 애란의 마음도 아팠습니다. 애란은 다시 한 번 어머니를 설득해보기로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어머니 우리는 이번에 가지 않으면 다 죽은 목숨입니다.
저 혼자서는 도저히 갈 수도 없거니와 가지도 못합니다.
비가 쏟아지면 끝장입니다.
빨리 서둘러야 합니다.


늦어질수록 위험했습니다.
언제 탈북 소식이 알려질지 모르고, 장마가 시작되면 강물이 불어서 압록강을 건널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편지를 보내고 애란 씨는 계속 안절부절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만에 인편을 통해 답장이 왔습니다.
막내 미란이가 보낸 것입니다.

보고싶은 언니에게.

우리가 통째로 떠나 집이 텅 비어 있으면 아버지 언니 오빠 할머니 곁에 가기도 전에 들킬 거예요.
저희들이라도 여기에 있어야 아버지를 비롯한 언니 오빠가 일 없으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할머니 곁으로 가면 우리 인사도 함께 전해주세요.
언니 오빠 아버지 모두 그 곳에서 행복하게 사세요.


오지 않겠다는 답변이었었습니다.
차라리 북한에 남아서 다른 가족들이 중국을 빠져나갈 때가지 시간을 벌어주겠다는 것입니다.
떠난 가족을 위한 남은 가족의 선택이었었습니다.
애란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내가 여기 옴으로 인해서 우리 남은 가족들이 불행해지고 비참해질 걸 생각하니.
내가 가족들 시체 위에 올라서 만세를 부르는 거 같은 죄악감이 들었어요.


하지만 더 이상 설득할 수도, 기다릴 수도 없었습니다.
이젠 떠나야했습니다.
애란 일행은 심양에서 기차를 타고 중국-베트남 국경지대로 이동했습니다.
국경을 무사히 넘었고, 베트남 주재 한국대사관에 가서 망명 신청까지 마쳤습니다.
그렇게 애란 일행의 북한 탈출은 무사히 마무리 됐습니다.

 

 

드디어 완전체가 된 가족


김 기자는 멀쩡한 가족을 찢어놨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또 조선족 안내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고, "이용운 씨 가족이 압록강을 건너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김 기자는 다시 중국으로 날아갔습니다.
막내 미란, 셋째 상철, 학철의 부인과 아들, 어머니 이재관 씨까지 모두가 중국으로 넘어오긴 했습니다.
그런데 표정이 다들 편해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의심과 경계의 눈빛이 역력했습니다.


일주일 전 북한의 혜산에서는 며칠동안 집에 오지 않던 상철이가 불쑥 나타났습니다.
그러더니 "어머니, 우리도 갑시다"라고 말했습니다.
탈북을 완강하게 거절하던 상철이 마음을 바꾼 것입니다.
가족이 탈북했단 게 알려지면 당국에서 가만 놔둘까요?
캄캄한 앞날이 뻔하니까, 그럴 바엔 그냥 떠나자고 결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어머니가 안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친정을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언니네가 얼마나 피해 당할까, 오빠네는 얼마나 피해를 당할까, 그런 생각 하니까 정말 떠날 생각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마음은 아마, 내 새끼들이 다 건너가는데 내가 안 간다는 것도 또 그렇고.
이것저것 고민이 많고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이용운 씨 부인 이재관 씨


또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친정 식구들과 자식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했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자식들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북한에 남았던 용운 씨네 가족들이 다같이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하지만 압록강을 건넌 후에도 여전히 불안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조국을 배신했다는 죄책감도, 미지의 낯선 땅 한국에 가야 한다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상철은 술을 먹고 원망을 쏟아냈다가 어머니와 크게 싸우기도 했습니다.

제일 안타까운 건 학철의 아내였습니다.
계속 울고만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시댁 식구들을 따라온 것입니다.
잠깐 시할머니 만나러 가는 줄 알고 왔는데, 압록강을 건너고 나서야 한국으로 간다는 걸 알았습니다.
북에 있는 친정 식구들과 생이별을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매 순간순간이 원망과 갈등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대로라면, 한국에 가는게 무슨 의미일까 싶었습니다.

바로 그때, 백 할머니가 나타났습니다.
며느리와 손주들을 만나려고 한달음에 중국으로 오셨습니다.
처음으로 마주한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서로 끌어안고 눈물을 쏟았습니다..


이를 지켜보며 상철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놀랍게도 이날 이후로 거짓말처럼 가족 모두가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상철이는 "이런 게 바로 혈육의 정이구나" 싶었다고 느꼈습니다.

상철 일행의 탈북 소식에 가장 기뻐한 사람들은, 당연히 먼저 나온 가족들이었습니다.
가족들은 다시 완전체가 됐습니다.

그때는요.
세상의 모든 만사가 다 감사하고.
정말 홀라당 벌거벗겨서 그 겨울에 밖에 내쫓아도 부러울 게 없었어요.
가족이 있다는 게 그렇게 감사했어요.
이 세상 최고의 선물이었어요.

-현재의 이애란 씨

 

 

완벽한 해피엔딩일 수 없는 이유


1997년 12월 30일, 대한민국 서울. 
이용운 씨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무려 150일간의 탈북 드라마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습니다.
가족의 운명을 바꾼 백 할머니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애란씨는 아들을 위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호텔 청소부, 보험 설계사를 거쳐 지금 현재의 근황은 요리연구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압록강 건널 때 등에 업혔던 갓난 아기의 근황은 벌써 어엿한 20대의 대학생이 됐습니다.
대한민국 여느 청년들처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셋째 상철 씨, 넷째 미란 씨의 현재의 근황은 그들 모두 직장을 구하고 알콩달콩 가족을 꾸렸습니다.
47년만에 만난 백 할머니와 이용운 씨는 각별한 모자의 정을 나누면서 행복한 여생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날의 선택이 해피엔딩으로 남을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오빠는 추방을 보냈다는 거예요.
나 때문에 2월에 집도 없는 한지에다가 추방을 보냈다잖아요.
난 잘 살겠다고 여기로 오고, 오빠는 그렇게 정말 몇 십년을 군대 생활하고 제대했는데.
그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죠.

-어머니 이재관 씨


김천홍 기자는 북에 있는 누님을 데려오는 걸 포기했습니다.
왜냐하면 누님의 자식들이 결혼해서 가족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산의 아픔을 만들 수는 없으니까 아예 포기한 것입니다.

내가 그 프로그램을 했던 25년 전, 그리고 지금. 바뀐 건 아무것도 없어요.
무관심 혹은 남, 이게 오히려 더 심해진 거 같아요.
그게 저는 좀 안타깝고 그거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할 수 없을까…

-김천홍 기자


2022년 현재 공식 집계된 이산가족 숫자는 4만 7천명입니다.
남북 이산가족 생존자 중 67%가 80대 이상 고령자이고 매년 약 3천여 명이 서로의 가족을 상봉하지 못하고 사망하고 있습니다.

백 할머니와 이용운 씨 가족은 왜 이렇게까지 목숨을 걸고 만나야 했을까요?
가족이니까. 살면서 맺는 수많은 인연 중에 가장 기적과 같은 인연은 가족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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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란 박사 탈북, 근황 정치 활동


북한이탈주민 출신으로 대한민국의 요리연구가이자 정치인입니다.

조모가 6.25 전쟁 당시 월남한 사실이 밝혀져 출신 성분에 불이익을 받았고 한지로 추방 당하였습니다.
수학에 두각을 드러내었고 대학 진학을 희망했지만 출신 성분으로 인해 교사의 추천서를 받지 못해 북한 신의주경공업대학 발효공학과를 졸업, 량강도 혜산시 과학기술위원회에서 주류 생산 공장의 품질감독원으로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소설가 활동을 하던 친척이 쓴 소설이 문제가 되어 정치범으로 몰릴 위기에 처하였고, 결국 생후 4개월 된 아들을 비롯한 가족들과 함께 1997년 8월 탈북을 선택했습니다.

이후 중국과 베트남을 경유하여 결국 남한 입국에 성공하였으나, 한창 IMF 한파를 겪던 남한에서 어떻게 정착해야 할지 고민했다고 합니다.

1999년 4월 한 생명보험사의 보험설계사로 취직하였습니다.
자존심이 강했던 이애란은 초기 보험설계사로서 영업을 하는 것에 괴로움을 느끼기도 하였으나, 1년 만에 '프로급'으로 승진하는 등 남한 사회에 잘 적응하였습니다. 이애란의 남한 사회 적응기는 연합뉴스 기사로 보도되기도 하였습니다.

보험설계사 일을 하면서 번 돈으로 본격적으로 북한 음식 관련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2000년 연말 사당동에 토끼고기 전문점 '씀바귀네'를 개업하였습니다.
2009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 탈북자 여성으로서 최초로 박사가 되었다.

경인여자대학교 겸임교수, 신흥대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또한 2008년 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을 설립, 한국에 북한 음식 문화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능라밥상'이라는 북한 음식 전문점을 경영하는 등 탈북민으로서는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탈북 이후 가족들의 근황


BBC 등 외국 언론까지 주목했을 정도로 엄청난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으나 그렇다고 이용운씨 가족들이 돈방석에 앉았다거나 원활히 적응했던 것은 아닙니다.
정부가 제공한 임대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가족들은 이용운씨는 경비원으로, 장녀 이애란 씨는 호텔 청소부로 처음 남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으며 모든 가족들이 적응에 상당 부문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특히 차남 이문철씨의 경우는 탈북 이후 3년간 체제에 대한 혼란으로 방황하였다고 다큐멘터리에서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노력 끝에 10여년 후에는 그래도 남한 사회에 각각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애란 씨는 보험업에 뛰어들어 연봉 1억을 받는 '보험왕'이 되었으며, 자신의 전공을 살려 이화여대 식품영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탈북자 1호 박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생역전이 신문 특집 기사로 소개되었을 정도이다. 

아들들 역시 정규직으로 취직하였으며, 북한에서 고등중학교 수학 교사였던 큰며느리 천정숙씨는 북한의 교원 자격증이 인정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지만 대안학교에 교사로 취직하였습니다.
이문철씨와 차녀 이미란씨는 한국에서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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