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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서태후 실제얼굴 동태후 죽음 악행 남자 최후 청나라 후기 실질 통치자

by 충격대예언 2022. 10. 31.

서태후 실제얼굴 동태후 죽음 악행 남자 최후 청나라 후기 실질 통치자

[글 포스팅 순서]

1. 권력욕과 주도면밀함을 갖춘 여인
2. 삼두체제로 이끈 동치중흥
3. 권력의 독점이 부른 몰락의 신호탄
4. 서태후에 대한 역사의 평가
5. 광서제 서태후 진비 청나라 변법자강 운동 캉유웨이 위안스카이

 

 

‘오늘은 남원南苑, 내일은 북해北海로…… 그렇다면 장안에는 언제나 도착할까? 국민들의 피를 쥐어 짜내고 자신은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구나. 나이 50에는 유구流球를 내어주고, 60에는 대만臺灣을 내어주더니, 이제는 동북 3성까지 내어주다니. 무릇 조정 관리들이라는 무리들이 제멋대로 나라의 땅을 내어주고도 만수무강을 바라는가.’

-중국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장태염章太炎이 서태후가 자신의 사치향락만 추구하고 민생을 돌보지 않음을 생동적이면서도 통쾌하게 폭로한 시

 

권력욕과 주도면밀함을 갖춘 여인


청나라 후기는 아편전쟁을 시점으로 해서 내우외환의 혼란한 시대였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노래를 잘 부르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몸짓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사랑스럽고 영리한, 하지만 권력욕이 강했으며 권모술수에 능한 한 여인이 청제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바로 자희태후 또는 서태후西太后로 불리는 인물이다.

1835년생인 서태후의 본명은 엽혁나랍葉赫那拉 난아蘭兒로 만주 양남기(만주의 팔기군 체제 중 하나) 출신이며 부친은 엽혁나랍 혜정으로 이부에서 필첩식筆帖式(인사부의 비서에 해당)을 지내다 승진되었다. 증조부 지랑아는 일찍이 호부에서 원외랑을 지냈는데 부채만 잔뜩 남기고 세상을 떠났고, 조부 경서는 형부 산동사에서 낭중을 지냈다.

서태후는 이런 성장배경 아래에서 어린 시절부터 관직 사회의 생리를 터득하며 자랐다. 어려서는 유복하게 생활했으나, 도광 27년(1847) 아버지가 호부에 재직할 때 진 빚을 갚지 못해 파직되어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허드렛일로 생계를 꾸려나갔고 수려한 외모로 열여섯 살 때 하위계급의 궁녀인 수녀秀女로 선발되어 황궁에 들어갔다. 
이때부터는 자희慈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청제국은 9대 함풍제咸豊帝 혁저奕詝의 치세였다. 함풍제는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백성을 위한 좋은 군주가 될 수 있었겠지만, 침략열에 불타는 서구 열강들에 맞서기에는 유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희는 처세에 능했고, 고속으로 승진하여 의빈懿嬪(1854년), 의비懿妃(1856년)가 되었다가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인 재순載淳을 스물한 살에 낳았다. 

재순은 후에 동치제同治帝가 된다. 1857년 의귀비懿貴妃로 책봉되어 그 지위가 황후인 유호록씨(紐祜錄氏: 자안태후慈安太后) 바로 다음이었고, 함풍제의 총애를 받아 정사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책을 많이 읽었으며 글 짓는 솜씨도 뛰어났고,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에서 움직이기를 좋아하던 여인이었다.

이 시기 청은 급속한 몰락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자희가 입궁했던 시기는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이 일어나, 한때 무적을 자랑하던 팔기군八旗軍(주5)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이에 증국번曾國藩과 이홍장李鴻章 등의 한족 출신들이 지휘하는 군대로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중이었다. 

1860년에는 영국 상선 애로Arrow호 사건을 빌미로 제2차 아편전쟁이 터졌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한 것이다. 영불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점령당하고 원명원까지 침략당했다. 
북경의 인후咽喉에 해당하는 천진을 개방하여야 했고, 홍콩 섬을 마주보고 있는 주룽반도까지 영국에 할양하고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하고 나서야 북경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자포자기에 빠진 함풍제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잡기에 몰두하다 열하에서 31세로 병사하기 전에야 조서를 내려 장남인 재순을 황태자로 삼고 재원, 단화, 숙순肅順 등 8명을 찬양정무대신으로 임명해 보좌하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사후 여러 세력들이 서로 견제하게 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삼두체제로 이끈 동치중흥


당시 26세의 자희는 이 찬양정무대신들의 특권에 불만을 품었다. 그리하여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으며 추종자도 많이 거느리고 있어 제위에 도전할 가능성이 큰 함풍제의 동생 공친왕 혁흔 등 귀족관료들과 합세하여 북경에서 신유정변辛酉政變을 일으켜 숙순을 대표로 하는 재원, 단화를 죽이고 나머지 5명은 실각시켜 버렸다. 

그리고 두 태후는 재순載淳을 제위에 올리고 황제의 연호를 동치同治로 하였으며 양심전養心殿에서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이 시기부터 자안태후는 동태후東太后로, 자희태후는 서태후西太后로 불리게 된다. 
함풍제의 정실 황후였던 자안황태후는 동쪽의 종수궁鍾粹宮에 기거했고, 자희 태후라 불리던 서태후는 서쪽의 저수궁儲秀宮에 기거했기 때문이다. 공친왕은 의정왕議政王 겸 군기대신으로 임명하고, 새로 설립된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을 책임지며 대외 업무를 총괄하도록 했다. 이로써 세 사람이 권력을 분점해서 서로 균형을 유지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두 태후의 갈등을 강조하는 갖가지 소설이나 영화에서와는 달리 정사의 기록에 의하면, 자안과 자희 두 사람의 사이는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공친왕 혁흔까지 가세한 이 삼두체제의 리더는 서태후가 아니라 동태후 자안이었다. 서태후는 분주하게 갖가지 정사에 직접 관여하고 사람을 모아 파당도 만들었지만, 자안의 경우에는 가만히 있어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어 강력한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공친왕조차 그녀를 어려워하고 있었다. 

자안은 평소에는 온화하고 자애로운 성격이었고 정사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정도를 벗어난 경우에는 가차 없이 처단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순간에 결정을 내리는 일은 항상 그녀의 몫이었다. 
그녀는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신유정변의 와중에 황실의 종친인 숙손의 신병을 처리하면서 자희와 공친왕은 그의 신분 때문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자안은 그가 황실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단호하게 참수형으로 다스렸다. 역사적으로 유래가 매우 드문 두 황후의 동시 수렴청정, 여기에 실질적으로는 공친왕까지 세 사람이 동시에 국가를 이끌던 시기는 무려 20년간이나 유지되었다. 이 시기를 역사는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고 부른다.

이 기간 동안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했던 증국번과 이홍장을 필두로 장지동張之洞, 좌종당左宗棠과 같은 개방주의자들이 발탁되어 양무운동洋務運動이라고 하는 개혁정책을 주도했다. 이 개혁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한계는 있지만, 서양열강의 산업을 받아들이는 근대적이고 점진적인 변혁이라는 특징이 있다. 

동치제 치세인 1860년대를 기점으로 하여 광공업, 해운, 조선 등의 분야에서 근대적인 산업을 도입하였다. 새로운 교육체제가 도입되고 해외유학생들이 파견되기 시작했다. 아편전쟁에서 쓰라린 패배를 당하며 서구의 근대적 포함砲艦에 놀랐던 경험이 있기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해군 함정 도입과 같은 군비확충이었다. 서구 열강들도 양무운동에 우호적이었으며 특히 영국은 세 사람의 권력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권력의 독점이 부른 몰락의 신호탄


그렇지만 동치중흥은 동태후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갑자기 방향을 잃고 말았다. 동태후 자안이 급작스럽게 사망한 시기는 광서 7년(1881년). 당연히 서태후의 암살 배후설이 제기되었으나, 밝혀진 바는 없었다. 만약 동태후의 죽음에 서태후가 관련이 있다면 이는 권력축의 이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동태후와 공친왕은 점점 더 긴밀해져 가고 있었으며, 서태후는 서서히 밀려나고 있었다. 

그것은 두 여인의 성격 차이에 기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치제조차 철이 들고 나서는 친어머니인 서태후와는 소원해지면서, 동태후와 가까워져 문안인사를 가서도 오래도록 그녀와 함께 머물곤 했다고 한다. 동태후의 죽음을 계기로 권력은 서태후에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권력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서태후는 공친왕을 제거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당시 청나라는 서구 열강들의 눈치만 보고 있었고, 공친왕은 20년 이상 외교 책임자로 일하면서 영국을 위시한 서구 열강들의 신뢰를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러던 중 동태후가 사망하고 3년 후에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공하면서 그곳에 주둔 중이던 청나라 군대가 쫓겨나자 프랑스와의 전쟁이 발발했는데, 이 전쟁과 관련해서 서태후는 공친왕에게 책임을 물어 그를 해임하고 권력을 독점하는 데 성공했다(1884년). 

그런 다음 공친왕 혁흔 자리에 광서제의 아버지인 순현친왕醇賢親王 혁현을 앉혔다. 
백성 및 서양 대표들과도 친분이 있고 자신의 군대를 갖고 있던 공친왕보다는, 성격도 심약하고 아들이 볼모나 다름없는 상태로 황위에 있는 순현친왕 쪽이 다루기 쉽다는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서태후의 권력 독점은 청제국의 몰락의 신호탄이 되었다.

서태후는 첫 위기부터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을 전적으로 두 나라의 문제로 간주한 다른 열강들은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이때 청나라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단결하여 놀라운 투지를 발휘해서 근대적인 프랑스군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며 전쟁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서태후는 갑자기 이홍장에게 서둘러 종전 협상을 벌이도록 지시했다. 

비록 이 전쟁에서 청나라의 궁극적인 승리를 원하지 않았던 서구 열강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라고 해도 자신의 안위, 자신과 서구 제국과의 관계만을 생각해 이기고 있는 전쟁에서 굴욕적인 협상을 선택한 것이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권력이 민족적인 자긍심보다 우선이었던 것이다. 
이 전쟁의 여파로 서태후는 민중들로부터의 신망을 잃게 되었지만, 달콤한 권력의 맛에 빠진 그녀는 이 점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녀는 끼니마다 100가지의 요리를 차리도록 했다. 
그러니 매일 그녀의 식비로만 은화 200냥이 지출되었는데, 당시 서민들 100명의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이 하루의 식비로 책정된 것이다. 또한 프랑스와의 전쟁이 클라이맥스에 있을 때, 서태후는 거금을 들여 자신의 거처인 저수궁을 신축했다. 

또한 자신의 은퇴를 위해 광서제에게 명 왕조부터 조성되어 있던 황실의 휴양지인 서원西苑을 대대적으로 확장해 줄 것을 요구했다. 서태후의 은퇴 이후를 대비한 건설공사에 당시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은 혼신의 노력으로 확보한 북양함대에 투입된 비용의 4배 이상을 지출해야 했다. 이 부담은 훗날 청일전쟁의 참패를 가져오게 되었다.

 

 



1895년은 서태후가 환갑을 맞이하는 해였다. 2년 전부터 거국적으로 행사 준비를 하였지만 이해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이홍장의 북양함대는 일본 해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하였고, 일본군이 대련항에 상륙해서 대대적인 민간인 살육과 약탈행위를 벌이고 있는 동안, 서태후는 청나라 역사상 가장 호화스러운 축하연을 그것도 3일 동안이나 즐기고 있었다. 

청일전쟁에서 당한 참패는 전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거액의 전쟁 배상금과 함께 요동반도까지 일본에 할양하는 조건으로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비록 요동반도는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돌려받았지만 백성들은 분노했다. 
이제 민중들은 청나라를 도와 서양을 물리치자는 부청멸양扶淸滅洋의 기치를 내걸고 의화단義和團운동을 전개하였다. 
중국의 민중은 이 패전을 계기로 각성하기 시작했지만, 당연히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하는 서태후는 각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태후에 대한 역사의 평가


광서 11년에 황제는 열다섯 살이 되었다. 
청나라 황실의 전통에 따르면, 이 시기가 되면 당연히 수렴청정을 거두어야 했다. 하지만 훈정訓政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정치에 관여하던 서태후는 광서제가 장성해서 혼례를 치른 이후에도, 또 그 이후에도 계속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자신이 직접 재가를 하고 있었다. 청일전쟁 당시 광서제의 나이는 스물네 살이었다. 그는 열혈청년이었다. 

황제의 권위에 대한 의식도 뚜렷했고 백성들에 대한 애정도 강했던 이상주의자였다. 
다만 그 이상을 실천할 만한 실질적인 권력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광서 24년인 1898년 황제는 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 담사동譚嗣同과 같은 개혁주의자들을 중용하면서 자신의 이름으로 변법變法에 대한 조서를 발표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뜬 급진적인 무술변법자강운동戊戌變法自疆運動이었다. 
하지만 이 개혁은 불과 100일 만에 좌절되었다. 서태후는 야심가인 위안스카이遠世凱를 움직여 쿠데타를 일으켜 개혁파를 모두 숙청하고, 광서제를 삼해三海(자금성 서쪽의 황실 정원) 가운데에 위치한 조그마한 섬 영대瀛臺에 감금해 버렸다. 서태후는 또 다시 훈정을 선포하고 광서제를 폐위시키려 했지만, 지방의 총독과 순무, 그리고 외국 사신들의 반대로 단왕 재의의 아들 부준을 황태자로 삼는 데 그쳤다.

1900년 의화단 운동이 확산될 당시, 서태후는 진압 명령을 내렸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마지못해 진압에서 회유로 정책을 바꾸었다. 또한 의화단의 반제국주의 애국 열정을 이용해 대외 전쟁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이런 선전포고는 서구 열강의 힘으로 의화단을 분쇄하려는 비열한 노림수였다. 

청군과 의화단은 연합해서 서구의 군대와 전면전을 벌일 것처럼 보였지만, 그 전에 밀사를 각국 공사관으로 파견하여 공사관을 보호할 것을 확약하고 경친왕과 이홍장을 시켜 서양 연합군과의 화의를 교섭하게 했다. 
7월 20일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공격해 오자, 21일 서태후는 변장한 채 광서제만 데리고 서안西安으로 도피하면서 다시 의화단 진압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1901년 신축년에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스페인,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의 국가와 신축조약을 맺고 각 국에 4억 5천 냥을 배상하였다. 이를 위해 주요 재정원인 관세와 염세鹽稅는 모두 차압당했고, 외국군이 주요 도시에 진주하게 되었다. 이런 중에 광서제는 영대에 또다시 감금되었고, 서태후는 예전의 호사스럽고 안락한 생활로 돌아갔다. 

한편 그동안의 쇄국정책 노선을 변경하여 근대화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는데, 만주족과 한족의 혼가混嫁를 허용하였고 여인들의 전족纏足을 금지시켰다. 남자들의 단발이 허락되었고 인신매매와 아편을 금지한다는 등의 각종 개혁내용이 속속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너무 늦은 것이었다. 
영대에 감금되어 산송장처럼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비운의 황제 광서제는 유폐 10년 만인 1908년 무신년 11월 14일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에 서태후는 순친왕醇親王 재풍의 세 살 먹은 아들 부의溥儀를 선통제宣統帝로 세웠다. 
세 번째 수렴청정을 시도하기 위해서였지만, 그녀는 광서제를 따라가듯 자신처럼 여인이 정사에 관여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유조를 남기고 이튿날인 11월 15일 오후 5시 지병인 이질로 사망하였다. 향년 74세.

서태후의 장례는 120만 냥에 달하는 금액을 들여 성대하게 치러졌고 수천 명의 사람이 동원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신해혁명에 의해 1912년 2월 12일 종말을 고했다. 
이는 대청제국 뿐 아니라 동양의 제왕문화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서태후가 권력을 잡고 있던 기간은 48년으로 청 제국 268년 역사에서 보면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 권력을 독점했던 기간도 무려 28년이나 되었다. 

실질적으로 청제국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서태후西太后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당唐제국의 측천무후와 비교되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측천무후가 ‘사악한 찬탈자’인 동시에 ‘훌륭한 통치자’였던 반면, 서태후는 ‘사악한 찬탈자’라는 점은 마찬가지였지만 국익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개인적인 사치에 우선한 ‘탐욕스러운 통치자’였다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그렇지만 서태후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아직 진행 중이다. 
일단 그녀로 인해 청 제국의 붕괴가 가속화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긴 하다. 
천박하고 덕이 없는 부녀자가 중국의 운명을 50여 년간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거나 원래 여우같은 외모에 범과 이리 같은 마음을 가진 악독하고 무지막지한 여자라는 혹평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녀로 인해서 왕조의 몰락이 반세기 정도 늦춰졌다는 견해도 있다. 
즉 서태후는 동치중흥이라는 역사적 시기에 있어서 동치중흥을 이끈 사람 중 한 명이었고, 부녀자 해방 문제에 대해서도 진취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만주족과 한족을 평등하게 대해 국초부터 제약하던 통혼을 허락하게 한다든지 여성의 인권을 유린하는 전족을 금지하게 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 강조되는 입장이다. 

또한 광서제 유폐 후에는 진심이었든 부득이한 것이었든 개혁정치를 표방하였다. 
구체적으로는 과거제 개편, 학당 설립, 군사제도 개편, 상업과 광산업 추진 그리고 1916년에 입헌군주제 실시를 공개적으로 선포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사람을 대할 때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측면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50여 년간 노련한 정치인으로 살았던 서태후. 
그녀가 자신의 능력과 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일보다는 좀 더 공적인 일에 사용하였다면, 자신이 세운 동치제나 광서제와 협력하여 나라의 중흥을 이끌었다면 그녀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달라지지 않았을까?

 

광서제 서태후 진비 청나라 변법자강 운동 캉유웨이 위안스카이
 

광서제 서태후 진비 청나라 변법자강 운동 캉유웨이 위안스카이

[글 포스팅 순서] 1. 중국의 지배자가 된 만주족 2. 청조의 부패와 서세동점의 개막 3. 소년 천자의 즉위와 자희태후(서태후)의 그림자 4. 뛰어난 황제가 되고 싶었던 광서제 5. 황제파와 태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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