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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안중근 의사 가족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저격 암살

by 충격대예언 2022. 11. 28.
[글 포스팅 순서]

1. 기억해야 할 안중근 집안 이야기
2.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 1841∼1909)
3. 김훈 하얼빈, 소설 줄거리 청년 안중근 마지막 일주일을 작가 소설과 영화

 

 

기억해야 할 안중근 집안 이야기


본 작품의 후기에서는 안중근 집안의 박해, 시련과 굴욕, 유랑과 이산과 사별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간략히 정리해 본다.


안중근은 1910년 뮈텔 주교의 판단에 따라, 이후 80년 동안 한국 천주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살인죄를 범한 죄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1993년 8월 21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은 안중근 추모 미사를 집전했다.
이는 한국 천주교회가 안중근을 공식적으로 추모하는 최초의 미사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안중근의 행위가 ‘정당방위’이고, ‘국권 회복을 위한 전쟁 수행으로서 타당하다고 보아야 한다.’고 했다.

1945년 광복 직후 김구金九는 뤼순旅順 감옥 공동묘지에 묻힌 안중근의 유해를 발굴해서 봉환하려는 노력을 시작했고, 이후 지속되었으나 유의미한 정보는 없다. 현재 서울 용산구 효창 공원에 가묘가 마련되어서 유해가 봉환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안중근의 자녀들은 암살되거나 일제의 선전 도구에 이용당하는 등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다.
장남 안분도安芬道의 본명은 우생祐生이다.
1909년 11월 7일 관동도독부 검사 미조부치는 5살 분도를 신문하였다.
안중근 일가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서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으로 이주했는데, 분도는 7살에 암살로 추정되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차남 안준생安俊生은 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다. 
안중근 역시 차남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안준생은 1939년 10월 15일 박문사를 찾아 이토의 위패에 분향하고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대신 속죄한다.”는 담화를 발표했고, 이튿날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차남 이토 분키치伊藤文吉를 만나 사죄하는 쇼(이른바 박문사 화해극)에 이용되었다. 조선총독부의 기획과 연출에 이용된 안준생을 김구는 교수형에 처해 달라고 중국 관헌에 부탁할 정도였다. 
1952년 한국전쟁 중 부산에서 죽었다.

장녀 안현생安賢生은 안분도와 안준생의 누나이다. 
안현생 역시 1941년 3월 26일 아버지 안중근의 기일에 박문사를 참배했다. 
궁핍하게 살다가 1959년 사망하였다. 

부인 김아려金亞麗는 러시아 극동 지역과 만주滿洲, 상하이上海를 옮겨 다녔다. 
중일전쟁 이후 상하이에 남아 있다가 1946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김아려의 생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기억이나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어머니 조마리아(조성녀趙姓女) 여사는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 
생애에 대해서 상세한 기록은 없지만, 여러 항일 혁명가들은 조마리아의 애국심과 희생정신과 용기를 기리고 있다. 
1927년 상하이에서 사망하였다.

동생 안정근安定根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였고, 잡화상을 경영해서 독립운동을 위한 물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25세 무렵부터 대가족의 가장 역할을 떠맡았고 북만주 독립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독립운동 자금 모금과 모병, 교육에 헌신했고,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다. 
그의 딸 미생美生은 김구의 장남 인仁과 혼인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지 못하고 1949년 망명지 상하이에서 사망했다.

동생 안공근安恭根은 상해에서 구미 공사관의 통역과 정보원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김구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며 이봉창, 윤봉길 의거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1939년 5월 충칭重慶에서 실종되었다.

사촌동생 안명근安明根은 안중근의 거사에 감화받아서 무장 독립 투쟁의 길로 나섰다. 
북간도에서 독립군을 양성할 군사학교를 세우려고 황해도 일대 부호들을 설득해 기부금을 받아 내는 과정에서 검거되었다. 일제는 이를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 사건(이른바 안악安岳 사건, 또는 105인 사건)으로 부풀리고 관련자들에게 내란미수죄를 적용했다. 이후 만주로 망명해서 독립투쟁을 계속하다가 지린성吉林省에서 죽었다.

안중근 장군의 집안은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사십 명이 넘고, 독립유공자 훈장을 탄 사람도 열 명이 넘는 명문가이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이들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이후 득세한 친일파들에 의해 소외되고 박해받았다.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伊藤博文, 1841∼1909)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일본이 봉건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이끈 인물 중 하나로, 대일본제국 헌법 초안 작성, 현 일본 내각제 시행 및 의회 제도 확립, 일본 민법 제정 등에 기여한 일본 근대화의 주역이며 현대 일본의 기초를 쌓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일각에서는 한국 합병에 대해서 반대하고 간접 지배를 하자고 한 온건한 인물로 알려진 그가 하얼빈에서 사살당해 한일 강제 병합의 시기가 앞당겨졌다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일본 육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강경파 인물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이토가 사살당한 후 적극적으로 한국 직접 지배를 추진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를 통감統監으로 올렸고, 결국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倂合하였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급진적인 강제 병합을 반대했던 것이지, 병합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부정적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스스로 한복을 입기도 하고, 본 작품 3장에서 언급한 순종 황제의 전국 순행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이토는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여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고,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통감부統監府를 설치, 초대 통감이 되어 한국 병탄倂呑의 기초 공작을 수행했다.

이후 헤이그 특사特使 사건을 빌미로 대한제국군 강제 해산, 고종 황제 강제 퇴위 등을 주도하였다. 
1909년 4월에는 조선 병합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하며 통감 자리를 사임하고, 추밀원枢密院 의장이 되어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Kokovsev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을 방문하였다가 안중근에게 사살당하였다.

만약 이토의 계산대로 온건하게 강제 병합이 이루어졌다면, 당시 근대화된 일본의 발전 모습에 감화된 한국 젊은이들이 병합에 별다른 거부감을 지니지 않았을 가능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어차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하면서 광복이 이루어졌으리라 볼 수 있으나,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팽창주의를 주장하는 급진적인 군부 세력과 정치적으로 대립되는 위치였다.

무조건 전쟁보다는 협상을 우선시하면서 해당국 주민들의 지지를 얻는 방식이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모른다. 역사의 아이러니인데, 이토의 죽음으로 가속화된 강제 병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강경 노선, 그리고 걷잡을 수 없어진 일본의 군국주의화에 의한 폭거는 대한국인들의 지속적인 항일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토와 같은 영리한 정치인의 부재로 말미암아 일본은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여 미국을 공격하는 등 그들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게 된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토 히로부미 사후 1932년 이토의 명복을 빌고 그 업적을 기리는 사찰 박문사博文寺가 서울 장춘단奬忠壇 공원 동쪽 언덕에 세워졌다. 장충단은 1895년 일제에 의한 명성 황후明成皇后 살해 사건 때 순국한 무관들을 제사하던 최초의 국립묘지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이때 조선 왕궁인 경희궁의 흥화문을 옮겨서 박문사 정문으로 삼았다. 마땅히 이곳은 원형으로 복원되고 안중근 기념관이 들어섰어야 했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해방 후 박문사 부지는 삼성 재벌에 매각되었고, 이 자리에 신라 호텔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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