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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진시황 여불위 출생의 비밀 조희 (진시황제 어머니 아버지)

by 충격대예언 2022. 11. 29.

진시황 여불위 출생의 비밀 조희 (진시황제 어머니 아버지)

[글 포스팅 순서]

1. 13세의 소년 영정嬴政, 진나라의 왕이 되다
2. 여불위를 제거하고 역사의 무대에 오르다

3. 춘추전국 시대 지도 진나라 춘추오패 뜻

 

 

13세의 소년 영정嬴政, 진나라의 왕이 되다


BCE 247년 중원대륙 서쪽 변방의 강국 진나라 장양왕 자이子異(성은 영嬴, 이름은 이異로 공자라는 의미로 자이라고 했고 초나라 출신의 화양부인의 양자가 되면서 초나라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자초子楚라고도 한다. 
이하 익숙한 호칭인 자초라고 칭한다)가 죽었다.

진나라 왕들 가운데 재위 기간이 가장 길어 총 56년간 집권했던 진 소양왕昭襄王이 죽고 그의 아들 효문왕孝文王이 53세로 즉위했으나 3일 만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 아들 자초 역시 즉위한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4년 사이에 진나라 왕이 4명이나 바뀌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새로 즉위한 이는 자초의 13세 된 아들 영정嬴政이었다. 
그가 중원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진시황제), 바로 그 사람이다.

진왕 정政이 왕위에 등극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이는 바로 여불위呂不韋였다. 사실 진시황의 부친인 자초는 조부인 효문왕의 여러 공자 중 한 명이었다. 자초는 왕위 계승권을 가진 장자도, 쉽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막내둥이도 아니었다(이에 대해서 둘째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자초의 생모인 하희夏姬 역시 크게 총애를 얻지 못했기에 당시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던 상황이었다. 인질로 가게 되는 사람은 대개 왕실의 직계이지만, 왕실 내에서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자초를 진나라 왕으로 만든 이가 천하 대상인 여불위였다. 여불위는 양적陽翟(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우현禹縣)지방에서 태어난 거상이었다. 그는 축재에만 힘쓰는 다른 상인들과 달리 정치에 뜻을 두고 있었고, 그런 능력도 갖춘 비상한 인물이었다. 그는 상인 특유의 말로 “이 진귀한 물건(奇貨:자초를 두고 한 말)은 창고에 간직해 둘만하다(奇貨可居)”며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거금을 자초에게 주어 조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을 사귀게 했고, 값비싼 물건들을 들고 가서 당시 진나라 태자인 안국군이 총애하는 화양부인에게 접근하였다. 화양 부인은 초나라 출신으로 안국군 뒤를 이을 군왕의 자리를 잇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은 있었으나, 자기 소생의 아들은 없었기에 노후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여불위는 화양부인과 정치적 거래를 하게 된다.

 즉 자초가 화양부인의 양자가 되게 하여 안국군의 후계자가 됨과 함께 화양부인의 부귀영화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이 거래는 그대로 적중하여 후계자 지위를 얻은 자초의 앞길에는 서광이 비추기 시작했다. 
그사이 자초는 여불위의 경제적 후원을 받으며 제후들과 빈객들 사이에서 점차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점에서 훗날 진시황의 혈통에 얽힌 의혹이 제기되는 일이 일어난다. 
자초는 여불위의 애첩 조희趙姬를 아내로 맞아 들였고, BCE 259년 정월에 건장한 아들이 태어났다.
정월에 태어났다 하여 이름을 정政이라 하였고, 조나라에서 태어났다 하여 조정趙政이라고도 했다.

일각에서는 진시황이 아버지 장양왕 자초의 아들이 아니라 여불위의 사생아라는 속설이 있으며, 이는 역사상 풀 수 없는 수수께끼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기』 <여불위 열전>에는 여불위가 임신 사실을 숨긴 채 애첩 조희趙姬를 자초에게 주었고, 달이 차서 낳은 아들이 바로 진왕 정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학자들은 대체로 그다지 믿을게 못 된다고 보고 있다.

중국의 사학자이자 극작가인 궈모뤄郭沫若는 이러한 기록이 사기에만 보이고 전국책에는 실려 있지 않으며 사실 여부를 추론해 볼 수 있는 다른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이야기 줄거리가 마치 똑같이 인쇄되어 나온 소설처럼 초나라 때 춘신군과 여환女環의 고사와 너무나 흡사하다는 점과 사기 본문의 기록들이 서로 모순되어 신빙성과 설득력을 잃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자초와 영정을 진나라 왕위에 오르게 한 여불위는 상국相國에 임명되어 국정을 보좌하였다. 
진나라의 모든 군사와 정치 대권은 진왕 정이 친정親政하기 전까지 여불위 수중에 있었다. 
여불위에 대한 평가를 공정하게 내린다면 그가 집정 기간에 쌓은 업적은 상당히 훌륭하였고, 뒷날 진왕 정의 천하 통일 사업에 초석이 될 만하였다. 단지 진왕 정의 친정 이후에도 권력을 놓고 떠날 줄 몰랐기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잠시 여불위의 업적을 살펴보는 건 진시황의 중원 통일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여불위는 진 장양왕 원년 이름뿐인 동주를 멸망시켰다. 
이어 전략적 요충지인 삼천군三川郡(황하黃河, 이하伊河, 낙하洛河 물줄기가 지나는 곳으로 동방 6국으로 향하는 관문에 해당한다)을 얻기도 하였다. 이 당시 진나라의 주 공격 대상은 조, 위, 한의 3진 세력이었다. 

진왕 정 6년인 BCE 241년 6국 연합군을 함곡관 앞에서 격파하여 합종 책략을 완전히 깨뜨려 버렸고, 이제 동쪽으로 진군하는 일만을 남겨 두었다. 여불위가 집정한 12년 동안 진의 군사력은 크게 신장하여 새로 얻은 영토가 15개 군 이상이었고, 통일의 비전을 제시한 『여씨춘추呂氏春秋』라는 저작물을 만들기도 하였다. 

당시 전국시대 말엽에 위나라의 신릉군, 초나라의 춘신군, 조나라의 평원군, 제나라의 맹상군 등 이른바 전국 4공자들이 선비들을 양성하고 식객들을 우대하며 인재등용을 하여 정국을 주도하는 풍조가 있었다. 
이에 문화적인 열등감이 있던 진나라에서도 여불위가 식객 3천명을 우대하면서 인재를 모았다. 
이는 여불위의 개인적인 영향력뿐 아니라 나날이 커져가는 진나라의 국력과 생기 넘치는 사회 분위기, 그리고 미래에 대한 진나라의 야심찬 희망 때문이었다. 다른 4군자들은 식객들의 호평을 얻어 자신의 명예를 높이려 했으나, 여불위는 그들의 능력을 빌리고 이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통일을 어떻게 하고, 통일 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대한 연구 결과물로 나온 게 『여씨춘추呂氏春秋』였다. 
여불위는 통일이라는 대업을 위해서는 군사적인 힘도 중요하지만, 사상과 문화, 교육적인 힘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장 좋은 통치 방법은 형벌과 덕을 함께 사용하되 덕을 우선하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 점에서 진왕 정과 견해가 달랐다. 진왕 정은 한비자의 엄중한 형벌 이론을 편애하였고 통일 후 진 제국의 통치 이념은 가혹한 형벌에 기초한 폭압적인 통치였다.

 

 

여불위를 제거하고 역사의 무대에 오르다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진왕 정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 국사를 여불위를 중심으로 한 대신들에게 맡겨 처리했다. 
하지만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는 법.

진왕 정은 자기주장이 강했고,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으며, 거만하고 난폭한데다 모든 일을 자신의 생각대로 처리하는 인물이었다.

진왕 정과 여불위의 대립은 친정을 시작하면서 폭발하였다. 
표면적으로는 태후와 관련된 궁중 추문이 도화선이 되었다. 
당시 여불위는 진왕 정의 모친인 진 장양왕의 부인과 사통하고 있었다. 
점점 성장하고 있는 진왕 정이 두려웠던 여불위는 노애嫪毐라는 비상한 성 능력을 지닌 남자를 불러들여 자신을 대신하게 했다. 태후는 남의 눈을 피해 노애와 사통하고, 아들을 두기도 하였다. 
태후의 총애를 받은 노애의 세력은 점점 커져 마침내는 난을 일으켰지만 이미 철저히 준비하고 있던 진왕 정에 의해 진압되었다.

노애의 난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도 있다.
당시 진왕 정이 등극한 후 진나라는 3대 세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즉 진왕 정의 양조모인 화양태후를 위시한 초나라계 외척 세력, 친조모인 하태후夏太后를 위시한 한나라계 외척 세력, 그리고 모후인 제태후帝太后의 조나라 세력이었다.

진왕 정 8년 배다른 동생인 장안군 성교의 난을 진압하면서 한나라계 외척 세력이 숙청되었고, 최대 세력인 초나라계는 이제 조나라계 세력을 제거하려 했다.
이에 제태후와 노애 등의 조나라계는 자기 방어 성격으로 화양태후와 여불위를 제거하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여불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사람을 잘못 추천한 것인지, 태후와 사통한 행각 때문인지 사서에서는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당시 전국시대에 태후나 공주가 공개적으로 사통한 일은 많았다. 대표적으로 진왕 정의 고조모 선태후 역시 서북 지역의 의거왕義渠王과 사통하여 아들을 둘이나 낳았고, 한 소제漢昭帝의 손위 누이도 정외인丁外人이라는 사통하는 이를 거느렸다. 
어찌 보면 남자들이 첩을 두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무튼 노애의 난으로 여불위는 면직되어 쫓겨났고 얼마 후 진왕 정의 엄중한 경고를 받고 독주를 마시고 자살하였다. 
표면적으로는 ‘음탕한 태후와 그의 총애를 받은 노애 그리고 전 애인 여불위’로 인해 대규모 숙청이 일어난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진왕 정 자신이 ‘백성들을 혼자 다스리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권력욕이 자리하고 있었다. 
진왕 정은 이겼다. 
친정을 한 지 2년도 안 되어, 여불위와 노애 같은 큰 세력을 일거에 제거한 뒤 진나라의 권력을 한 손에 완전히 움켜쥐고 역사의 무대에 올랐다.

진왕 정은 역사적인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었다. 
선대왕들이 쌓아 온 물리적인 힘과 진나라 정치의 향방을 결정하는 절대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제 역사가 그에게 부여한 임무는 바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수중에 있는 물리적인 힘으로 방대한 규모의 전쟁을 일으켜 6국 통일을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진왕 정은 그런 일을 수행하기에 제격인 뛰어난 인물이기는 하였다. 

그는 매우 근면한 군주로 결재서류의 무게를 달아 밤낮으로 결재해야 할 양을 정하고 이를 처리하기 전에는 쉬지 않는 워커홀릭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절대 권력자의 이런 모습에 백관들이 감히 나태할 수 있을까? 
훗날 진왕 정을 비판하는 이들도 그의 사치향락이나 음탕한 행위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지는 않다. 
사실 그럴 만한 일도 거의 없었다. 너무 일을 열심히 한 게 잘못이라면 잘못일지 모른다.

진왕 정은 자기의 근면을 내세워 질서정연하고 효율적인 사회를 만들어 갔다. 
여기에 진왕 정은 인재를 대함에 있어 국적이나 출신 성분, 빈부귀천 등을 가리지 않고 누구라도 어질고 현명하기만 하면 등용하는 진나라의 전통을 중시하였다. 

그를 보좌한 왕전王翦, 왕분王賁, 위료尉繚, 이사李斯, 요가姚賈, 돈약頓弱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진나라 사람은 아니지만 진나라를 위해 온 힘을 모아 적을 이기기 위한 정치 책략과 군사 계획을 만들고 자신들이 직접 실천에 옮겼다. 진왕 정은 이들이 역량을 충분하게 발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진왕 정은 과감하게 스스로의 잘못을 바로 잡는 자세를 지니고 있었다. 역사에 나타난 유아독존적 이미지는 통일 이후의 모습이다. 그 이전에는 간언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잘못된 점은 과감하게 바로잡는 자세를 지니고 있었다.

진왕 정의 6국 통일을 위한 첫걸음은 먼저 한나라를 향했다. 
지리적으로 진나라와 가까웠을 뿐 아니라 국력이 가장 약했기 때문이다. BCE 230년 한왕 안安을 지산吱山에 안치하고 한나라 영토에 영천군潁川郡을 설치하였다. 이듬해인 BCE 229년 진나라는 주력군을 정비하고 명장 왕전의 지휘 하에 조나라를 공격하여 BCE 228년 조나라 수도 한단을 함락시키고 조왕을 포로로 잡았다. 실로 욱일승천하는 기세였다.

춘추전국 시대 지도 진나라 춘추오패 뜻
 

춘추전국 시대 지도 진나라 춘추오패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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