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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산악인 고미영 대장 꼬꼬무 철의 여인과 매니저 김, 목숨을 건 약속 67회 게스트

by 충격대예언 2023. 2. 23.

산악인 고미영 대장 꼬꼬무 철의 여인과 매니저 김, 목숨을 건 약속 67회 게스트

[글 포스팅 순서]

1. 목숨을 건 약속-철의 여인과 매니저 김
2. 고미영 프로필
3. 공무원에서 스포츠 클라이밍 선수로
4. 여성 클라이머에서 산악인으로, 그녀의 안타까운 마지막
5. 꼬꼬무 67회 이야기 손님 게스트

6. 우장춘 박사 꼬꼬무 우범선 매국노가 낳은 애국자 우장춘과 씨 없는 수박 66회
7. 꼬꼬무 베트남 대탈출 1975 베트남 탈출기 사이공 최후 안희완 영사 65회 재방송 시즌3
8. 꼬꼬무 뒤바뀐 딸 20년 만의 재회 향미 뒤바뀐 쌍둥이 신생아 기른정 낳은정 시즌3 64회 재방송

 

 

목숨을 건 약속-철의 여인과 매니저 김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가 산악인 故고미영 대장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꼬꼬무'는 '목숨을 건 약속-철의 여인과 매니저 김' 편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발 디뎌볼 일조차 없을 8,000m의 세계에 꿈을 둔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때는 2007년 봄, 에베레스트 원정을 준비하던 김재수 대장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이번 원정대에 국내 스포츠클라이밍 분야 최고의 선수 고미영을 합류시킬 수 있겠냐는 전화였습니다.

하지만 김재수 대장은 고미영 선수의 합류에 걱정이 앞섰습니다. 
스포츠클라이밍 선수가 고산등반에 도전한다는 것은, 단거리 선수가 마라톤에 도전하는 것처럼 무모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김재수 대장이 그녀의 합류를 반대하자, 이번엔 고미영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고미영은 "저 할 수 있어요! 에베레스트 원정 꼭 같이 하고 싶습니다!"라며 강하게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2007년 당시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한 여성은 인류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고미영은 아무도 이루지 못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김 대장에게 부탁했습니다. 
혼자 에베레스트에 도전했다가 경험 부족으로 실패를 맛본 고미영은 고산 등반 경험이 많은 김 대장에게 자신의 등반 매니저가 되어줄 것을 부탁한 것입니다.

그렇게 14좌 완등의 여정을 함께 하게 된 두 사람은 목숨을 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산소가 희박해서 한 걸음을 떼는 것조차 어려운 8,000m. 
거센 눈보라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눈사태 등 숱한 위기를 넘기고 14좌 완등을 향해 도전하는 고미영과 김재수 대장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놀라운 속도로 등반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히말라야 낭가파르트 산에서 큰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고미영과 김 대장은 단 둘이 서로의 몸을 이어주는 안전장치만 매달고 산에 탔습니다. 
과연 위험천만한 위기에서 이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리고 14좌 완등의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직접 찍은 생생한 현장 영상들로 이뤄진 감동적인 대여정을 '꼬꼬무'가 전했습니다.

 

 

고미영 프로필

생년월일(출생): 1967년 7월 3일
고향(출생지): 전라북도 부안군
사망 2009년 7월 11일(향년 42세), 파키스탄 히말라야 산맥 낭가파르바트
직업: 산악인
등반경력: 히말라야 8,000m 11좌 등정, 세계 7대륙 최고봉 3좌 등정

 

공무원에서 스포츠 클라이밍 선수로

전라북도 부안군 출신의 여성 산악인. 
오은선과 더불어 한국 여성 산악계의 양대산맥이었습니다. 
160cm의 작은 키, 몸무게 50kg가량의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국내 여성 산악인 최초로 8,000m급 봉우리 연속 3개를 등정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산악인으로 더 알려졌지만 실제 활동해온 기간이나 더 뚜렷한 업적을 남긴 적은 클라이밍 분야였습니다.
김자인 선수 이전에 클라이밍에서 가장 유명했던 여성 클라이머였습니다.
실제 그녀의 업적과 죽음을 기리는 뜻에서 그녀의 든든한 서포트였던 코오롱스포츠에서는 고미영컵 청소년스포츠클라이밍 대회를 매년 열면서 클라이머들의 양성을 돕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고교 졸업 후 곧바로 농림수산부 공무원에 임용되어 공직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클라이밍이나 등반과는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다가, 89년 우연한 기회로 등산하게 된 북한산에서의 첫 산행이 산악인으로서의 첫 걸음이었습니다. 

가볍게 오른 산행이었지만 등산 중간에 나타난 갈림길에서 남들이 자주 다니는 안정적인 백운대 대신 거칠고 가파른 만경대능선을 택하였습니다. 등반을 마친 후에는 실내 암벽 등반장을 찾음으로써 클라이머로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대한민국은 클라이밍의 불모지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등반장에 가서 연습하고 책도 사서 보고 조언도 들어가며 배웠습니다.
 당시만 해도 70kg이 넘는 몸무게에 160cm의 단신이었기에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던 클라이밍 장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도 없었던 덕택에 클라이밍에만 몰두 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후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끝에 체중도 20kg 감량하고 코오롱 등산학교도 수료하면서 점점 이름을 알려갔습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처음으로 출전한 93년 국내 클라이밍 대회에서 6위를 기록하였고 2년뒤에는 정상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5~6년전만해도 평범한 공무원이었던 한 여성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애초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고 클라이밍에 대한 사랑이 엄청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아무대에서 95년부터 04년까지 10년간 6회의 우승과 4회의 준우승을 하는 최강자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세계무대에선 우승기록은 없었으나 손꼽을만한 탑랭커중에 한 명이었다. 세계 랭킹 5~6위의 성적을 기록하였는데, 남성 클라이머의 세계도 불모지에 가까운 한국에서 여성 클라이머가 세계 랭킹 5위권의 최강자가 나타났으니 그야말로 놀랄일이었습니다.

만 30살이 되어서야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었는데, 만 23살에 클라이밍 세계에 입문했다는 점과 그 이후로도 공직생활과 클라이머로서의 생활을 병행하면서 국내와 아시아를 제패했던 점을 보았을 때 조금만 더 이른 시기에 공직생활을 접었더라면 세계도 제패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성 클라이머에서 산악인으로, 그녀의 안타까운 마지막

이후 한국나이로 39살이 된 2005년 클라이머가 아닌 알피니스트로 전향하였습니다. 
체력적인 문제도 있었고 클라이머보다는 엄홍길, 박영석등으로 대변되는 알피니스트들이 좀 더 대중에게 친숙하고 인기를 누리는 시기여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타고난 재능은 어디가지 않았는지 2005년 파키스탄의 드리피카를 오르고(6447m) 한국나이로 40살이 되던 시기인 2006년 8,000미터 14좌중 가장 쉬운 난이도인 중국의 초오유를 등반하며 14좌 등반의 첫 시작을 알렸습니다.

한국 산악계 최대의 사건중 하나인 여성 14좌 완등 경쟁의 서막이 열렸습니다. 
다만 이 때 당시만 해도 나이도 많았고 여성 알피니스트로의 시작은 알렸지만 산악계에서도 본인도 뭔가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그 당시엔 14좌 정복에 대한 욕심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당시 여성으로써 14좌를 모두 정복한 사람이 전 세계에 없었고 클라이머로 보여준 그녀의 신체적 재능이 매우 뛰어났고 노력하는 자세나 끈기가 보통 수준이 아니었던 탓에 그녀가 강사로 속해있던 코오롱 등산학교의 운영 주체였던 코오롱 스포츠가 그녀의 스폰서로 나서면서 일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코오롱의 전격적인 지원이 더 강화되면서 2007년엔 단숨에 14좌중 세개인 에베레스트, 브로드피크, 시샤팡마를 등정해버린 것이다. 알피니스트로 전향한지 2년 밖에 안된 상태에서 14좌중 3좌 등정을 1년만에 이뤄낸 대단한 업적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언론에서도 슬슬 여성 최초 14좌 완등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본인 또한 크게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등반가로서도 발군의 활약을 펼쳤던 그녀는 2009년 7월 11일,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 산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 하던 중, 안타깝게도 C2부근에서 로프가 없는지점을 지나다 절벽 아래로 떨어져 실족사하였습니다.

사진출처: 연합뉴스

향년 42세.
1,000m 이상을 떨어졌으며 중간에 튀어나와 있던 바위에 머리를 부딪혔다고 합니다.
실제로 발견 당시 머리 쪽 손상이 굉장히 심했고 피도 상당히 많이 흘린 상태였습니다.
정부에서는 고인에게 체육훈장 맹호장을 추서하였고, 대학산악연맹과 그녀의 고향인 부안군에서는 고인을 애도하며 부안스포츠파크에 '고미영 동상'을 세웠습니다.

2012년에 대한산악연맹 50주년을 기념하여 선정한 '산악계를 빛낸 50인'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고인은 상명대학교 일반대학원 체육학과에 진학중이었는데, 자신의 뒤를 이을 후학을 양성하기 위한 진학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고산 14개봉을 모두 정복하고, 자신의 등정이야기를 책으로 써내는 것을 계획하였으나, 안타까운 죽음으로 인해 이 책은 영영 출간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꼬꼬무 67회 이야기 손님 게스트

이번 이야기에는 배우 유이, 김범, 카라 한승연이 이야기 손님 게스트로 출연했습니다.

유이는 장성규의 이야기 친구로 자리했습니다. 
최근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 등정에 성공한 경험이 있는 유이는 여성 산악인 고미영의 도전기를 들으며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중 직접 경험한 고소 증상을 떠올리고는 "소주 세 병을 원샷으로 먹은 느낌"이었다며, 고산 등반의 어려움과 공포에 대해 한마음으로 공감했습니다.

장도연의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김범이 등장했습니다. 
'꼬꼬무' 첫 방문에 온몸으로 어색함을 표출했지만, 어색함도 잠시 금세 이야기에 빠져드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고미영 선수의 이야기에 깊은 공감을 하며 "두 사람 사이의 약속, 그 책임감의 무게가 너무 크고 대단해서 감히 이야기하기 어렵다"며 감동의 소회를 전했습니다.

장현성의 이야기 친구로는 '꼬꼬무' 단골손님 한승연이 등장했습니다. 
특히 한승연은 이번 출연으로 '꼬꼬무' 정규 편성 이후 최다 출연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습니다. 
이날 오프닝부터 한승연은 '꼬꼬무'에 대한 애정을 한껏 드러내며 단골손님다운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한승연은 두 사람의 약속의 여정을 함께 하면서 목이 메어 말을 이어가지 못할 만큼 감정이 북받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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