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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석씨 시조 석탈해 유리왕 삼국유사 설화(신화)

by 충격대예언 2023. 1. 18.

경주 석씨 시조 석탈해 유리왕 삼국유사 설화(신화)

[글 포스팅 순서]

1. 경주 석씨慶州昔氏의 연원
2. 석탈해에 대한 삼국유사 기록과 임나·안라의 위치
3. 환단고기의 임나와 안라국 위치
4. 경주 석씨의 씨족사(시조, 희성이 된 배경)
5. 역사 속 주요 인물

 

 

경주 석씨慶州昔氏는 신라 시대 때 왕을 여덟 명이나 배출한 왕족이지만 2015년 인구 총조사에 의하면 10,276명(월성 석씨 1,536명, 경주 석씨 8,740)으로 희성이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대문장가로 유명한 강수(본명: 석강수昔强首) 등을 배출한 명문이다.

경주 석씨慶州昔氏의 연원

시조는 유명한 신라 제4대 왕인 석탈해昔脫解이다.
서기 57년 왕위에 올랐고, 서기 81년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석탈해는 제2대 남해왕의 유언과 제3대 유리왕의 뜻에 따라 왕에 즉위하고 왕비는 박씨를 맞이했는데 남해왕의 딸 아효왕후阿孝王后이다.

석탈해가 반월성에 정착하게 된 연유에 대한 전설이 있다.

동해안에서 살았던 탈해가 토함산에 올라 서라벌 땅을 내려다보며 살 집을 찾았다. 
신라 중심부에 초승달 모양의 땅이 눈에 들어왔다. 초승달은 반달이 되고, 또 차올라 보름달이 되는 것처럼 복과 운이 차는 곳이라 하여 명당 중의 명당이라 여겨지는 터였다. 
그곳이 호공이라는 귀족의 땅임을 안 탈해는 기지를 하나 생각해 냈다. 
그의 집 근처에 숫돌과 숯을 묻어 두고는 당당하게 찾아가 ‘대장장이였던 우리 집안이 대대로 살던 곳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호공은 황당해하며 관아로 찾아가 시시비비를 따졌는데 이 행동이 오히려 독이 됐다.

증거를 대라는 관리의 말에 탈해는 집 주변에 선조들이 쓰던 숯과 숫돌이 묻혀 있을 거라고 말했고, 과연 물건이 나왔다. 반월성 집터는 탈해의 차지가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들은 남해왕은 그가 총명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사위로 삼았다. 
훗날 그는 남해왕의 아들이었던 유리왕의 뒤를 이어 제4대 왕이 되었다. 
[출전 - 서라벌 신문]


① 탈해왕의 고향

탈해왕의 고향에 대해서는 고구려 황해도설, 연해주설, 울릉도설, 규슈九州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현재까지의 자료에 의하면 규슈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三國遺史』 기이奇異 제일第一 제사第四 탈해왕脫解王 편에 보면 석탈해는 용성국(일명 정명국正明國) 사람이라고 한다.
용성국은 왜의 동북 일천 리에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정명국은 다파나국多婆那國, 완하국琓夏國, 화하국花廈國이라고도 한다.
또 『환단고기桓檀古記』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의하면 고주몽 성제의 친구이기도 한 협보陜父가 유리왕에게 파직되어 한반도의 남부를 거쳐 일본 열도의 아소산 부근에 다파라국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② 탈해왕에 대한 전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는 탈해왕에 대한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용성국龍城國(일명 다파나국多婆那國, 정명국正明國, 완하국琓夏國)의 왕이 여국女國의 딸을 왕비로 맞아 아들을 구했는데, 7년 만에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마땅히 버려야겠다.”고 하자, 여자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웠다.

처음에는 금관국 해변에 닿았는데 금관국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취하지 않았다. 다시 진한辰韓의 아진포阿珍浦에 닿았다. 이때가 기원전 19년(박혁거세 39년)이었다.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배를 해안으로 끌어 올려서 보니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데리고 가서 길렀다.

그런데 처음 배가 올 때, 까치가 울면서 따라왔으므로, 까치 작鵲 자에서 새 조鳥 자를 떼어 버리고 석昔을 성으로 삼고, 포장된 궤 속에서 나왔다고 하여 탈해脫解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삼국유사』에도 그대로 전한다.

그런데 여태까지 알려졌던 주장 중에는 월성(경주) 석씨의 시조가 석재흥昔載興이라는 설이 있었다. 그 까닭은 〈기묘보己卯譜〉를 간행할 때에 석탈해의 22세손인 석재흥을 중조中祖로 하여 세대를 작성한 데 있었다. 그러나 〈임인보壬寅譜〉 발간을 계기로 이 주장은 바뀌었다. 공주公州의 석덕경昔德經 가家에서 발견된 구보舊譜 내용이 석탈해를 시조로 하여 석재흥까지 22대의 소목昭穆이 명료하게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월성 석씨의 시조는 석탈해왕이며, 고려조에 교서랑校書郞을 지낸 석재흥이 아님을 〈임인보壬寅譜〉에서 확실히 하고 있다. 월성月城(경주의 옛 이름)은 시조왕의 탄강지이기에 후손들이 관향으로 삼았다.

 

 

석탈해에 대한 삼국유사 기록과 임나·안라의 위치

① 삼국유사의 기록 

『삼국유사』의 기록에서도 석탈해의 탄생에 대해 ‘난생설화卵生說話’와 유사한 이야기를 전해 준다.
난생설화는 북방 동이족에서 많이 보이는 탄생 설화(신화)이다.
대표적으로 박혁거세와 고주몽의 탄생 이야기가 있다.
석탈해 역시 북방계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탈해치질금(한편 토해니사금이라고도 한다.)은 남해왕南解王 때[고본에 임인년壬寅年에 도착하였다는 것은 오류이다. 가깝게는 노례왕의 즉위 이후이므로 양위를 놓고 다투던 일이 없게 되며, 그 이전에는 혁거세의 재위기이므로 임인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가락국의 바다에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가락국의 수로왕이 신하 및 백성들과 더불어 북을 치고 환호하며 맞이해 장차 가락국에 머무르게 하려 했으나 배가 급히 나는 듯이 달려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지금도 상서지촌과 하서지촌의 이름이 있다.]에 이르렀다. 
당시 포구의 해변에 한 할멈이 있었으니 이름은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 하였는데, 이가 바로 혁거세왕 때의 고기잡이[海尺] 모母였다. (아진의선이) 배를 바라보며 말하기를 “본시 이 바다 가운데에 바위가 없는데 어찌해서 까치가 모여서 울고 있는가?” 하고 배를 끌어당겨 살펴보니 까치가 배 위로 모여들고 배 안에 상자 하나가 있었다. 
길이는 20자이고 넓이는 13자였다.

그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밑에 매어 두고 이것이 흉한 일인지 길한 일인지를 몰라 하늘을 향해 고하였다.
잠시 후 궤를 열어 보니 단정히 생긴 사내아이가 있고, 또 일곱 가지 보물과 노비가 그 속에 가득하였다.
7일 동안 잘 대접하였더니 이에 (사내아이가) 말하기를 “나는 본시 용성국[한편 정명국正明國 혹은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완하는 혹 화하국花廈國이라고도 한다. 용성은 왜의 동북 일천 리에 있다] 사람으로 우리 나라에 일찍이 이십팔 용왕이 있는데, 모두 다 사람의 태胎에서 태어나 5~6세 때부터 왕위에 올라 만민을 가르치고 정성正性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팔품八品의 성골姓骨이 있지만 선택하는 일이 없이 모두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때 우리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를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는데 오래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자식 구하기를 기도하여 7년 만에 커다란 알 한 개를 낳았습니다.
이에 대왕이 군신들을 불러 모아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니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넣고 더불어 일곱 가지 보물과 노비들을 함께 배 안에 실은 후, 바다에 띄워 놓고 축언하여 이르기를, ‘인연이 있는 곳에 닿는 대로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脫解齒叱今 [一作吐解尼師今]. 南解王時 [古夲云壬寅年至者謬矣. 近則後於弩礼即位之初無爭讓之事, 前則在於赫居之世, 故知壬寅非也]. 駕洛國海中有舩來泊. 其國首露王與臣民鼓譟而迎将欲留之, 而舡乃飛走至於雞林東下西知村阿珎浦 [仐有上西知下西知村名]. 時浦邉有一嫗名阿珎義先, 乃赫居王之海尺之母. 望之謂曰 “此海中元無石嵓何因鵲集而鳴” 拏舡尋之, 鵲集一舡上舡中有一樻 子. 長二十尺廣十三尺. 曳其舩置於一樹林下而未知凶乎吉乎向天而誓爾. 俄而乃開見有端正男子, 并七寳奴婢滿載其中. 供給七日迺言曰 “我夲龍城國人 [亦云正明國或云琓夏國琓夏或作花厦校勘 國龍城在倭東北一千里] 我國甞有二十八龍王, 從人胎而生自五歳六歳継登王位教萬民修正性命. 而有八品姓骨然無棟擇皆登大位. 時我父王含逹婆娉積女國王女爲妃, 久無子胤禱祀求息七年後産一大卵. 於是大王㑹問羣臣, ‘人而生卵古今未有, 殆非吉祥.’ 乃造樻 置我并七寳奴婢載於舡中, 浮海而祝曰 ‘任到有縁之地立國成家.’ 便有赤龍護舡而至此矣.” (삼국유사 기이 편)

 

② 환단고기의 임나와 안라국 위치

『환단고기』에서는 임나가 대마도를 말하며 고구려 광개토열제 때 모두 고구려에 귀속되어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를 임나에서 통제하여 10개 나라를 연정으로 다스렸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의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도 임나라는 말을 10개의 소속 나라를 통칭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23년 봄 정월에 신라가 임나관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어떤 책에서는 21년에 임나가 멸망하였다고 한다. 통틀어 말하면 임나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손국乞飡國, 임례국稔禮國 등 모두 열 나라이다.]
(廿三年 春正月. 新羅打滅任那官家[一本云, 廿一年, 任那滅焉. 總言任那. 別言加羅國·安羅國·斯二岐國·多羅國·卒麻國·古嵯國·子他國·散半下國·乞飡國·稔禮國, 合十國.]) (일본서기 흠명 23년 562년 1월)

任那者(임나자)는 本在對馬島西北界(본재대마도서북계)하니 北阻海(북조해)하고
有治曰國尾城(유지왈국미성)이오 東西(동서)에 各有墟落(각유허락)하야
或貢或叛(흑공흑반)이러니 後(후)에 對馬二島(대마이도)가 遂爲任那所制故(수위임나소제고)로
自是(자시)로 任那(임나)는 乃對馬全稱也(내대마전칭야)라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에 위치하여 북쪽은 바다에 막혀 있으며, 다스리는 곳을 국미성國尾城이라 했다. 
동쪽과 서쪽 각 언덕에 마을이 있어 혹은 조공을 바치고 혹은 배반하였다. 
뒤에 대마도 두 섬이 마침내 임나의 통제를 받게 되어 이때부터 임나는 대마도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

任那(임나)가 又分爲三加羅(우분위삼가라)하니 所謂加羅者(소위가라자)는
首邑之稱也(수읍지칭야)라.
自是(자시)로 三汗(삼한)이 相爭(상쟁)하야 歲久不解(세구불해)하니
佐護加羅(좌호가라)는 屬新羅(속신라)하고 仁位加羅(인위가라)는 屬高句麗(속고구려)하고
雞知加羅(계지가라)는 屬百濟(속백제)가 是也(시야)라
永樂十年(영락십년)에 三加羅(삼가라)가 盡歸我(진귀아)하니
自是(자시)로 海陸諸倭(해륙제왜)가 悉統於任那(실통어임나)하야
分治十國(분치십국)하니 號爲聯政(호위연정)이라
임나가 또 나뉘어 삼가라가 되었는데, 이른바 가라라는 것은 중심이 되는 읍[首邑]을 부르는 이름이다. 
이때부터 삼한三汗(삼가라의 왕)이 서로 다투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화해하지 못하였다. 
좌호가라佐護加羅가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仁位加羅가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雞知加羅가 백제에 속한 것은 이 때문이다. 영락永樂(광개토열제) 10년(단기 2733년, 서기 400년)에 삼가라가 모두 고구려에게 귀속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倭를 모두 임나에서 통제하여 열 나라로 나누어 다스리면서 연정聯政이라 했다.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

先是(선시)에 陜父(협보)가 奔南韓(분남한)하야 居馬韓山中(거마한산중)하니
從而出居者(종이출거자)가 數百餘家(수백여가)라 未幾(미기)에 歲連大歉(세련대겸)하야
流離遍路(유리편로)어늘 陜父(협보)가 乃知將革(내지장혁)하고 誘衆裹糧(유중과량)하야
舟從浿水而下(주종패수이하)하고 由海浦而潜航(유해포이잠항)하야
直到狗邪韓國(직도구야한국)하니 乃加羅海北岸也(내가라해북안야)라 居數月(거수월)에
轉徙于阿蘇山而居之(전사우아소산이거지)하니 是爲多婆羅國之始祖也(시위다파라국지시조야)라
이에 앞서 먼저 협보陜父가 남한南韓으로 달아나 마한산(지금의 평양)에 은거하고 있을 때, 따라와서 사는 자가 수백여 가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해 흉년이 들어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길에 가득하였다. 
이때 협보가 장차 변란이 있을 줄 알고 무리를 꾀어 양식을 싸서 배를 타고 패수를 따라 내려왔다. 
해포海浦(대동강 어귀의 진남포)를 거쳐 몰래 항해하여 곧장 구야한국狗邪韓國에 이르니, 곧 가라해加羅海(일본 규슈의 남쪽 바다)의 북쪽 해안이었다. 
몇 달 지내다가 아소산阿蘇山으로 옮겨 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다파라국多婆羅國의 시조이다.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

 

 

경주 석씨의 씨족사(시조, 희성이 된 배경)


① 씨족사 개요

경주 석씨(월성 석씨)의 시조는 신라 제4대 왕 석탈해 이사금이다. 
탈해왕은 기원전 5년에 탄생하였으며 학문이 뛰어나고 예의와 용맹이 남달라 남해왕이 대보大輔(신라 초기 국무총리 격)로 등용하여 정사를 맡게 되었다. 
그로부터 석씨는 신라 56대 왕 중 4대 탈해왕脫解王을 비롯하여 9대 벌휴왕伐休王, 10대 내해왕內解王, 11대 조분왕助賁王, 12대 첨해왕沾解王, 14대 유례왕儒禮王, 15대 기림왕基臨王, 16대 흘해왕訖解王까지 173년간 왕통을 이어 갔다. 
석씨는 여덟 명이 왕위에 올랐으니 박씨⋅김씨와 함께 신라를 다스린 왕족이다. 
그러나 박씨와 김씨의 자손이 번성하여 역사적으로 대성을 이룩한 데 반해 석씨는 희성稀姓이 되었다.

② 희성稀姓이 된 배경

그런데 2015년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석씨는 108위로 10,276명에 불과하다. 
왕성인 석씨가 106위인 봉씨奉氏, 107위인 정씨程氏, 109위 사씨史氏나 110위 부씨夫氏와 같은 희성이 된 것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한 역사학자 박병식朴炳植씨는 미발표 논문 ‘석씨왕족의 600년 비사秘史’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박병식씨는 석씨가 희성이 된 단서를 삼국사기 문무왕 조로부터 풀어 가고 있다. 
“본피궁本彼宮의 재화財貨, 전장田莊, 노복奴僕을 갈라서 그 반을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나누어 주었다.” 
문무왕 2년(662) 2월 조에 적힌 내용이다. 
본피궁은 최초의 석씨 왕인 석탈해 집안의 근거지 반월성 근방을 가리키거나 석씨 집안을 관리했던 관청으로 추정된다. 
문무왕 조의 이 문장이 김씨 왕조에 의한 석씨 탄압과 학살, 추방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후에도 문무왕이 석씨 집안의 재산과 땅과 종들까지도 다 압수하여 부하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것이다.

석씨족은 석탈해 이후 173년간 8대의 왕을 배출하면서 신라를 다스리다가 4세기 초 김씨족에게 왕권을 빼앗긴 뒤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자 목숨만이라도 건지기 위해 산지사방散之四方으로 흩어져 성姓도 철저히 숨기고 살다 보니 몇 대 지나지 않아 무성무적無姓無籍이 되었다는 것이다.

김씨 왕권은 석씨 세력을 언젠가는 제거해야 한다고 벼르고 있다가,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2년 뒤 행동을 개시하여 석씨족을 전국적으로 학살하고 멸족시켰다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일본 측의 기록이 있다고 한다.

17세기의 고문서 〈온좌발기穩座拔記〉는 천무천황 시절(672~686)에 일본과 한국에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고, 신라 사람으로서 일본으로 귀화해 오는 수효가 매우 많아서, 일 년에 수백, 수천 명이나 조난당한 숫자도 많았지만 오키섬에 도착하는 사람도 아주 많았다고 적고 있다. 
박씨는 이 기술이 죽임과 박해를 피해서 석씨들이 일본 서해안으로 탈출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이때의 일본 천황 천무神武는 신라계인 이즈모出雲國 세력 출신이었다. 
그는 일본 내 도래인 세력의 결정적 도움을 받고 쿠테타(임신의 난)를 일으켜 집권한 다음에는 친신라 반당 정책을 썼다. 
천무천황은 대규모 사절단을 신라에 보내 통일 국가를 이룩한 선진국의 제도를 배워 가서 일본의 고대 국가를 완성한다.

신라에 남아 있던 석씨족은 김씨 왕권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거나 탄압을 받으면서 석씨 왕손의 신분이나 혈통을 감춘 채 산촌 벽지에 숨어 살게 되었고 일부는 동족 출신이 일본의 천황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거 탈출하여 일본에 귀화했다는 학설과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서 석씨 성이 희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출처 : 경북신문]

③ 삼국사기에 기록된 석씨들

역사상 나타난 사람으로 여덟 명의 왕 이외에 『삼국사기』에 보이는 인물로는 석간노昔干老가 있다. 
〈종가宗家〉 제1집에 의하면, “그는 탈해왕의 6세손이며, 내해왕奈解王의 아들이다. 
조분왕助賁王 때에 감문국甘文國을 정벌하여 군현을 삼았고, 첨해왕沾解王 때에는 사량벌국沙粱伐國을 토벌하여 신라 국토를 넓혔다. 또한 왜구가 침입했을 때는 바람을 이용하여 전멸시키는 등 고구려 및 백제와의 싸움에서 크게 활약했던 명장이다.”라고 쓰여 있다.

16세손 석오원石五源은 뛰어난 천문과학자로 선덕왕조에 첨성대瞻星臺를 세웠고, 불교를 숭상하여 분황사芬皇寺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석오원昔五源의 차남이 석체昔諦로 강수强首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19세손 석제만昔濟萬은 무열왕 때 삼국 통일을 도운 공신이다. 
석씨가 월성 단본임에도 불구하고 서천舒川⋅서산瑞山에서만 탈해왕의 23세손으로 고려조에 시랑을 지낸 석재흥을 중시조로 인정한다. 
석씨 가문은 고려조까지는 대관, 거유 등이 나왔으나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한두 분의 부호군, 상호군 말고는 이렇다 할 벼슬이 없고 자손 역시 번성하지 못했다. 
1983년에 반월성 안에 있던 숭신전을 경주시 동천동 탈해왕릉 남쪽으로 이전하여 보전하게 되었다. 
신라 태종무열왕 당시 토함산정(동악산)에 탈해사를 건립하고 탈해왕을 호국대신으로 받들어 왔다.

 

 

역사 속 주요 인물

석강수昔强首 - 탈해왕의 18세손인 석강수(?~692년)는 역사적으로 알려져 있는 대문장가이다.
6두품 출신으로 태종무열왕 당시 당나라의 사신이 가져온 외교 문서를 막힘없이 풀이하여 능력을 인정받았고, 뛰어난 문장력으로 당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답서를 작성하였다.

무열왕은 석강수를 강수 선생 또는 임생(임나가라 출신의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부를 정도로 총애하였다.
『삼국사기』 강수전强首傳에는 “중원경사량인야中原京沙梁人也.”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강수가 충주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은 본래 임나가라 사람입니다(臣本任那加良人).”라는 표현도 나온다.
여기서 본은 그의 조상의 출생지를 말한다. 임나가라는 대마도를 말한다.
그 뒤 무열왕이 당나라에 파병을 요청할 때 외교 문서를 작성하여 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석강수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분적으로 미천한 부곡의 대장장이 딸과 결혼할 정도로 진취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석시종昔時宗 - 고려 때 병부령兵部令을 역임하였다.
석운니昔運尼 - 밀직사密直使를 역임하였다.
석정민昔貞敏 - 좌복야 한일漢一의 아들 정민貞敏은 예의시랑禮儀侍郞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올라 크게 명성을 떨쳤다.
경주 석씨의 주요 현대 인물로는 석태근(법무부 인천공항지원국장), 석희대(삼척시 총무사회국장), 석정수(농림수산식품부 국장), 석기영(석탈해왕릉전보존회 이사장) 등이 있다.

[참고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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