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조씨 시조 조지수 본관과 인물 조광조, 조지훈
우리나라에서 강씨에 이어 일곱 번째로 큰 성씨가 조趙씨이며, 약 105만 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조씨의 본관
우리나라 조趙씨는 본관마다 유래가 다르고 다른 시조를 모시고 있어 계통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이 중 ‘배천 조씨’와 ‘임천 조씨’는 중국 송태조 조광윤의 후손이 귀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충청남도 천안의 세거 성씨인 ‘직산 조씨’는 백제의 개국공신을 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현재 조씨의 본관은 35본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중 대표적인 본관은 한양, 함안, 풍양 조씨를 비롯한 10여 본입니다.
중국에는 조趙씨가 약 2천만 명 살고 있고, 성씨 순위로는 8위라고 합니다. 촉한의 장군 조자룡趙子龍과 북송을 개국한 조광윤趙匡胤이 대표적인 조씨 인물입니다.
한양 조씨
우리나라 조씨에서 가장 큰 본관은 한양 조씨입니다. 한양 조씨는 어떤 성씨인지 살펴보겠습니다.
한양 조씨 현황
한양 조씨는 토착 성씨로 현재의 서울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입니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약 33만여 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데, 전체 조씨에서 31.5%를 차지합니다.
한양 조씨 집성촌
집성촌으로는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저전리와 영양군 영양읍 상원리, 하원리, 예천군 감천면 돈산리 등의 세거지가 있습니다. 또한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 마을도 한양 조씨의 집성촌인데, 이곳은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1519년(중종 14년), 조광조가 개혁정치를 하다 훈구파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기묘사화가 발생하자 한양 조씨 일족들은 화를 피하기 위해 전국으로 흩어지게 되는데, 1630년경 호은壺隱 조전趙佺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형성된 집성촌이 주실 마을입니다. 실학자들과의 교류로 일찍이 개화한 마을이며, 일제 강점기에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지조 있는 마을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이 주실 마을은 작은 시골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14명의 박사를 배출하는 등 많은 문인, 학자를 배출한 마을로도 유명합니다.
한양 조씨의 시조, 조지수
한양 조씨의 시조는 고려 때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낸 ‘조지수趙之壽’라고 합니다. 조지수는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한양 조씨는 한양에 세거해 온 사족士族의 후예로서 고려 중엽에 조순대부 첨의중서사를 지낸 조지수 할아버지를 모시고, 약 10만 가구 30여만 명의 종인이 충과 효를 가훈으로 삼아 이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첨의중서사는 첨의성과 중서성을 합한 관청으로 지금으로 보면 총리직에 해당하는 고위 관직입니다.
한양 조씨 시조부터 5세조까지 단소와 묘소가 모두 북한에 모셔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손들이 2004년부터 이곳 충남 홍성군 홍북읍 대인리 매산 마을에 시조 이하 5세조의 단소를 마련하여 설단을 짓고 제향을 모시고 있습니다. - 조병수 한양 조씨 대종회 홍보부회장
조지수 가문과 이성계 가문
함경도 덕원에 정착한 조지수는 아들 대에 이르러 큰 변화를 맞게 됩니다. 동북면 지역을 점령한 원나라가 이곳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조지수의 아들 ‘조휘’를 쌍성총관에 임명한 것입니다. 이후 4대에 걸쳐 총관직을 세습하면서 이 지역의 실력자로 부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쌍성총관부가 공민왕 때 수복이 되면서 조지수의 가문은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함경도 덕원 : 지금의 원산 일대
조지수 가문은 4대에 걸쳐 쌍성총관부 총관직을 세습했지만, 또한 조선을 개국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조선 건국 이전부터 한양 조씨의 조지수 가문과 전주 이씨의 이성계 가문은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쌍성총관부의 천호 벼슬을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두 가문은 혼인으로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돈의 아들 조인벽이 이자춘의 딸인 정화 공주와 혼인을 하면서 이성계는 그에게 처남이 됩니다.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수복할 때 마지막 총관 조소생은 도망가지만 그의 숙부인 조돈은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고려의 통치권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후에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을 건국할 때도 적극 참여하면서 한양 조씨는 조선 개국과 더불어 크게 번성하게 됩니다.
한양 조씨의 인물, ①조광조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있습니다. 그는 중종반정 이후 유교적 이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불꽃같은 짧은 생애를 산 개혁가였습니다.
한양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함경도의 지방관으로 파견됐을 때, 17세의 나이로 마침 인근에 유배를 와 있던 김굉필을 찾아가게 됩니다. 김굉필은 조선조 사림의 연원인 김종직의 문인입니다.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배운 그는 관직에 나가기 전부터 명성이 있어 사림의 영수로 인정받았습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 때 잘못된 정치를 일신하는 분위기를 맞이하자 사림들 또한 정계에 재진출하게 되는데, 이 중심에 선 인물이 조광조입니다. 조정에 출사한 이후 만 3년 만에 대사헌까지 초고속 승진한 조광조는 중종의 신임 아래 조선을 성리학적 이상 사회로 만들기 위해 정치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이에 공신들은 조광조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결국 돌아선 중종의 지지를 업고 사림의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키게 됩니다.
정국공신 개정이 선포된 지 나흘 뒤 한밤중에 갑자기 죄인 신세가 된 조광조는 다음 날 바로 유배형에 처해지고 그로부터 한 달 뒤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38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당대에는 실패한 개혁가였지만, 그가 널리 보급한 향약鄕約은 서원과 함께 사림의 튼튼한 기반이 되어 선조 대에 이르러 사림은 정국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또한 그를 사림의 도통道統 맥을 후대에 이어준 인물로 추앙하여 문묘에 종사하고,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습니다.
*주초위왕(走肖爲王) 나뭇잎
한양 조씨의 인물, ②조지훈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 「지조론志操論」 中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불린 조지훈은 한국의 문화와 멋을 탐구해 《승무》와 같은 우아하고 섬세한 시를 썼지만, 시대에 대한 비판은 매섭고 대쪽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1920년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한양 조씨 집성촌인 주실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일제식 교육은 받지 않고 전통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키 180cm가 넘는 육 척 장신에 언제나 당당한 기풍을 가진 그는 시인으로서만 활동한 게 아니라 한국학의 기틀을 다진 학자이며 한학에 조예가 깊은 교수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 냈습니다. 또한 명문 「지조론」과 각종 논설을 통해 시대의 병리를 질타하며 올곧게 바른길을 추구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병을 얻어 48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고, 고향인 주실 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지훈문학관’이 들어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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