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포스팅 순서]
1. 김해 김씨의 계통과 분파
2. 김해 김씨의 시조, 김수로왕
3.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
4.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신비로운 인연
5. 인도 아유타국 공주 출신의 김수로왕비, 허황옥
6. 김해 김씨의 역사적 인물
1) 김일손
2) 김홍도
3) 김원봉
7. 훈족의 왕자, 제천금인 투후 김일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이것은 구지가의 한 구절로 금관가야를 비롯한 6가야의 건국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이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금관가야의 수로왕을 시조로 모시고 있는 김해 김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씨는 김金씨이며 약 1,069만 명으로 국내 인구의 21.5%를 차지합니다. 5명 중 1명이 김씨일 정도로 상당히 많은 수를 점유합니다. 김씨는 크게 김알지의 신라계와 김수로왕의 가야계로 나누어지는데 수로왕계의 김해 김씨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김알지의 신라 김씨 계통입니다.
김해 김씨의 계통과 분파
그렇다면 수로왕으로부터 시작되는 김해 김씨는 어떤 성씨인지 살펴보겠습니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김해 김씨는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9%에 해당하는 445만 6천여 명이 살고 있습니다. 전체 김씨 중 무려 41.7%가 김해 김씨입니다. 김해 김씨에서 김해 허씨가 분적하고, 또한 김해 허씨에서 인천 이씨가 분적하게 되는데, 모두 김수로왕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1964년부터는 기존 종친회를 확장하여 ‘가락중앙종친회’로 하고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 이씨 등 모든 수로왕의 후손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김해 김씨는 크게 3개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고려 충정왕 때 인물인 김목경金牧卿을 중시조로 하는 경파京派(김녕군파金寧君派), 동생인 김익경金益卿을 중시조로 하는 사군파四君派(감무공파監務公派) 그리고 고려말 김관金管을 중시조로 하는 삼현파三賢派(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가 있는데, 모두 김유신의 직계 종파입니다.
3개파 이외에도 다수의 계파가 있고, 또한 이들 아래에는 각각 여러 개의 파로 다시 나누어져 있는데 모두 합하면 총 148개파가 됩니다.
이외의 계통으로는 사성賜姓*1) 김씨와 귀화한 김씨가 있습니다. 사성 김씨로는 임진왜란 때 귀화한 일본인 장수 김충선金忠善의 우록 김씨友鹿金氏와 김성인金誠仁의 함박 김씨咸博金氏가 있고, 귀화한 김씨로는 당나라에서 귀화한 영양 김씨英陽金氏와 명나라에서 귀화한 태원 김씨太原金氏가 있습니다.
*1) 사성賜姓 : 임금이 신하에게 성을 하사하는 것
김해 김씨의 시조, 김수로왕
제주도의 고高·양梁·부夫 삼성三姓과 신라의 박혁거세, 김알지와 마찬가지로 김해 김씨의 시조인 가야의 김수로도 건국신화가 전해져 옵니다. 김수로는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인터뷰】
“수로대왕의 왕릉을 납릉納陵 또는 수릉首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봉분의 높이가 6m 정도 되고 직경이 22m 되는 원형 봉토분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잘 조성되어 있는 수로왕릉에 대해 서술한 조선 시대 때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보면, 왕릉 속에 있는 두개골은 구리로 만든 동이만 하고 수족이 굉장히 컸다는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20대로 보이는 여자 유구遺柩가 두 구 있었는데 그 유구를 무덤 밖으로 내놓으니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기록이 『지봉유설』에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 원형 봉토분 속에는 또 다른 석곽으로 된 무덤이 있었지 않았나 추정됩니다.
가락국에는 4전殿이 있습니다. 숭선전崇善殿에는 수로대왕님과 허황후님의 위패를 모시고 있고, 숭안전崇安殿에는 가야(가락국) 2대 왕부터 9대 왕까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10대 양왕(구형왕)은 산청에 있습니다. 산청에 가면 덕양전德讓殿이라고 양왕과 계화왕후의 위패를 봉안하고 봄, 가을로 큰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끝으로 경주에 있는 숭무전崇武殿은 김유신 장군과 부인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숭선전, 숭안전, 덕양전, 숭무전에서는 봄, 가을로 큰 제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가야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김수로대왕님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나와 있는 『삼국유사』 「가락국기」 내용을 보면, 수로대왕님은 구지봉에서 서기 42년 김해 지역에 있는 구간들의 추대에 의해서 3월 15일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백성을 위한 정치, 그리고 나라의 부강에 신경을 많이 쓰신 임금님으로 현재 파악되고 있습니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생각해 보면 건국 2년째에 궁궐도 짓고 성도 쌓고 무기고와 창고 등을 지어야 할 시점에 농번기를 피해 궁궐과 성을 짓도록 한 점으로 봐서 백성을 위하는 정신이 대단한 분이시며, 가락국이 전기 가야의 맹주국으로 자리매김하고 나라가 뻗어 나가는 데 큰 역할을 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김성문 가락대구광역시종친회 회장
수로왕릉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에 춘추제례*2)를 올리고 있으며, 종친과 시민들이 함께하는 큰 행사로 2천여 명 이상이 참여한다고 합니다.
*2)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에 춘추제례 있음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
김수로왕은 김해의 금관가야를 건국한 왕입니다. 어떻게 가야를 건국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천지가 처음 열린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 없고 군신의 칭호도 없다. 다만 구간九干들이 백성들을 통솔할 뿐이다. 북쪽 구지龜旨에서 무엇을 부르는 이상한 소리가 난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으므로 일부러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고 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놀게 될 것이다.”
구간九干들은 이 말을 따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다가 얼마 안 되어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이 하늘로부터 땅에 닿아 있었다. 줄 끝을 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합金合이 싸여 있어 열어 보니 해와 같이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알 6개가 화하여 사내아이로 되었는데 모두 왕위에 올랐다.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휘諱를 수로首露라 하고 혹은 수릉首陵이라 하였는데, 수로는 대가락大駕洛의 왕이 되고 나머지 5인도 각기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 『삼국유사』 「가락국기」
이처럼 수로왕은 아홉 명의 족장들인 구간九干의 추대에 의해 금관가야의 초대 왕이 됩니다. 그리고 알에서 나온 나머지 다섯 사람은 고령의 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상주의 고령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고성의 소가야의 왕이 됩니다.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신비로운 인연
그런데 김수로왕과 더불어 꼭 알아야 할 인물이 왕비 허황옥입니다.
【인터뷰】
“수로대왕님의 왕비이신 허왕후님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출신으로 서기 48년 7월 27일 가락국 땅에 도착하게 됩니다. 허왕후님과 김수로대왕님의 혼인 관계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잘 나와 있습니다.
허왕후님이 인도에서 왔다는 증거가 무엇이냐고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증거는 허왕후 후손으로 추정되는 왕족 유골에 대해 DNA 검사를 한 결과 우리나라 여성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DNA가 많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주로 인도 남방부 여성의 DNA가 많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허왕후님은 인도 계통의 여성이었다는 것으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허왕후님은 수로대왕님보다 10년 일찍 돌아가셨습니다.*3) 허왕후님은 157세, 수로대왕님은 158세를 사셨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사시면서 가락국이 번영, 번창하고 강한 국가로 발전하는 데 큰 밑거름을 만드셨습니다.”
- 김성문 가락대구광역시종친회 회장
*3) 허황후 생몰년 33년~189년, 수로왕 생몰년 42년~199년 [위키백과]
김해시 구산동에는 아주 신비로운 석탑이 있습니다. 허황옥이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파사탑인데, 국내에서 볼 수 없는 재질로 이루어져 있고, 신기하게도 이 돌 위에 닭의 피를 떨구면 굳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다를 건너올 때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싣고 왔는데, 어부들이 파도를 막아 준다고 하여 석탑을 깨어 가 지금은 많이 훼손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수로왕릉에 있는 태양 무늬와 쌍어문雙魚紋을 통해 아유타국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왕릉과 숭선전 등을 중수하였음을 알리는 ‘중건신도명비’의 이수螭首 부분에 수로왕비가 인도 출신이라는 것을 알리듯 인도 사원에서 볼 수 있는 태양 무늬가 새겨져 있고, 왕릉 바로 앞 납릉정문納陵正門 양쪽 문 위에는 흰색의 석탑을 사이에 두고 두 마리의 흰색 물고기가 마주 보고 있는 쌍어문雙魚紋이 있습니다. 이 쌍어문雙魚紋은 인도 아유타국의 용왕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쌍어문은 인도에 가면 힌두교 사원 정문마다 조각되어 있고 생활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문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김해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문양입니다.
또한 수로왕비릉 바로 옆에는 수로왕의 탄생 신화가 깃들어 있는 구지봉龜旨峰이 있습니다. 수로왕비릉이 있는 평탄한 위치가 거북의 몸체이고, 서쪽으로 쭉 내민 봉우리 형상이 거북의 머리 모양과 같다 하여 구지봉이라 합니다. 그리고 정상에는 아주 오래된 고인돌이 있는데, 그 위에 한석봉이 쓴 ‘구지봉석龜旨峰石’이라는 한자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인도 아유타국 공주 출신의 김수로왕비, 허황옥
수로왕은 멀리 떨어진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를 어떻게 왕비로 맞이하게 됐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수로왕이 가락국을 연 지 7년째가 됐지만, 아직 왕후를 세우지 못하고 있다. 하늘의 명에 의해 이 나라의 왕이 됐듯이 왕후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이 있을 것이라며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날 붉은 빛깔의 돛을 달고 검붉은 빛의 깃발을 휘날리면서 북쪽으로 향해 오는 배 한 척이 나타난다. 아유타국의 공주 일행이 탄 배다. 구간九干들로부터 소식을 들은 수로왕은 친히 나아가 공주를 정중히 맞이한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皇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제가 본국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를 보고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황천상제皇天上帝를 뵈었는데 상제의 말씀이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보내어 왕위에 오르게 한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이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어 짝을 짓도록 하라 하시고는 도로 하늘로 올라가셨단다. 꿈에서 깬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아직까지 귀에 생생하니 너는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거라.’고 하셨답니다. 이리하여 저는 배를 타고 이렇게 감히 용안을 뵙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성스러워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오. 그래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오셨으니 이 몸은 매우 행복하오.”
- 『삼국유사』 「가락국기」
이렇게 하여 김수로왕은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왕후로 맞아들이게 되고, 10남 2녀의 자녀를 둡니다.
첫째는 2대 거등왕이 되고 둘째와 셋째는 왕비의 요청에 따라 김해 허씨가 됩니다. 나머지 7왕자는 허왕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의 인도로 출가하여 하동 칠불사*4)에서 성불했다고 합니다.
*4) 하동 칠불사: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길 528
김해 김씨의 역사적 인물
김해의 금관가야를 건국한 김해 김씨는 6세기 신라에 편입되면서 중요한 시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후 김해 김씨는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수로왕이 건국한 김해의 금관가야는 5세기 광개토태왕의 남정 이후 급속히 쇠퇴하게 됩니다. 결국 서기 532년 10대 구형왕에 이르러 신라에 항복하고, 금관가야의 왕족은 신라의 진골로 편입하게 됩니다. 구형왕의 세 아들 중 막내 김무력은 장군이 되어 신라의 영토 확장에 큰 역할을 합니다. 신라의 한강 유역 지배를 확정 지었던 관산성 전투에 큰 공을 세우고 후에 최고 관등인 각간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김무력의 아들 김서현은 신라 왕족인 만명부인과의 사랑 이야기로 유명합니다. 망국의 왕족과 신라 왕족의 만남이었지만 신분을 뛰어넘어 두 사람은 혼인을 하게 됩니다.
또한 김서현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건 전우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바로 폐위된 진지왕의 아들 김용춘입니다. 왕이 될 운명이었지만 아버지의 폐위로 권력에서 밀려난 왕족과 망국의 왕족은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는데, 훗날 김서현의 아들 김유신과 김용춘의 아들 김춘추가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김유신은 수로왕 이후 김해 김씨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입니다. 여동생을 태종무열왕 김춘추에게 시집보내고 삼국통일의 업적을 이루어 사후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된 유례없는 인물입니다.
이처럼 김해 김씨는 망국의 왕족이었지만 신라의 지배층으로 자리 잡았고, 고려 시대에도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며 위세를 떨치게 됩니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무오사화戊午士禍’를 비롯한 정치적 사건들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외 어떤 인물들이 더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①김일손
조선 시대 인물로는 김일손이 있습니다. 김일손은 영남 사림파의 중심 인물로 연산군 때 성종실록을 쓴 사관입니다.
강직한 그는 사초史草에 훈구파의 거두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었는데, 이것이 발단이 되어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게 됩니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진나라 말 숙부인 항우에게 살해당한 초나라 의제를 조문한 글인데, 선왕인 세조의 단종 시해를 중국의 사례로 비판한 글입니다. 이것을 빌미로 훈구파는 사람파를 공격했고, 그 결과 김일손은 극형에 처해지고, 그의 스승인 김종직마저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는 등 영남 사림파는 몰락하게 됩니다. 중종반정 이후 김일손은 신원되어 도승지에 추증되고 목천의 도동서원과 청도의 자계서원에 배향됩니다.
②김홍도
조선 최고의 화가라 불리는 단원檀園 김홍도는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7, 8세 때부터 경기도 안산에 있는 강세황姜世晃의 집에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다고 합니다. 스승 강세황의 추천으로 일찍이 도화서 화원이 되었고, 영조의 어진과 정조의 초상을 그릴 정도로 당대 최고의 화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김홍도는 회화의 모든 장르에 능하였지만, 특히 산수화와 풍속화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③김원봉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 의열단 단장인 약산若山 김원봉*5)은 독립운동가 중 일제가 가장 무서워한 인물입니다. 경남 밀양 출신인 김원봉은 1919년 3.1운동 이후 신흥무관학교 출신 13명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합니다. 이후 의열단은 부산경찰서와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동양척식회사 폭탄투척 등 맹렬한 활동을 벌이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임시정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고 해방 후에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하게 됩니다. 일각에서 김원봉이 월북한 이유는 악덕 친일 형사인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큰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5) 독립 무장 부대인 조선의용대 창설(1938), 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부사령관(1944)
훈족의 왕자, 제천금인 투후 김일제
김수로의 선조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이 있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중국 진나라와 한나라 시기 북방 초원 지역에서는 강성한 흉노가 대제국을 세우게 됩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는 흉노의 공격에 시달렸고, 한 고조 유방은 흉노와의 전쟁에서 포위당했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오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후에 한나라 7대 황제인 한 무제에 이르러 또 흉노를 공략하게 되는데, 이때 한국사와 관련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흉노 좌현왕인 휴도왕의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한나라의 포로가 된 사건입니다. 포로가 된 흉노 왕자는 궁궐의 말을 돌보는 일을 맡았는데, 품위 있는 거동과 성실함에 한 무제의 눈에 띄어 그의 측근이 됩니다. 이 흉노 왕자가 바로 김일제金日磾입니다. 그 후 김일제는 망하라莽何羅의 반란을 막은 공으로 ‘투후秺侯’로 봉해지고 사후에는 무제의 무덤인 무릉茂陵 곁에 묻힐 정도로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후손 중에는 왕후(전한 11세 원제元帝의 비 효원왕후)도 배출되고, 김일제의 현손玄孫인 왕망*6)이 정권을 잡으면서 최고의 권세를 누렸습니다. 왕망은 전한을 무너뜨리고 새 왕조 신新을 세웠지만 16년 만에 몰락하게 됩니다. 하루아침에 위험한 처지에 몰린 일족은 정확한 경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반도로 망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의 문무왕 비문과 중국 서안西安에서 발견된 당나라 시대의 묘비명에 김일제가 신라 김씨 왕가의 조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6) 서동인, 『흉노인 김씨의 나라 가야』
“문무왕비文武王碑에는 김일제라는 이름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투후제천지윤秺候祭天之胤’이라고 해서 투후라는 칭호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천제를 지내던 왕의 후손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7대까지 한나라 황실을 섬겼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김일제가 문무왕의 조상이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김일제는 흉노의 왕자였는데 한나라 군대와의 전쟁에 패하여 어머니, 동생과 함께 포로로 끌려오게 됩니다. 이후 한 무제가 김일제를 높이 평가하여 높은 직위의 관직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 성姓도 내려 주게 되는데 그 성이 김金씨입니다. 왜 김씨를 내려 주었는지에 대해 『한서』에 기록이 있습니다.*7)
김일제의 아버지인 흉노 왕이 제천행사를 할 때 금상을 세워 놓고 제천행사를 행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금인金人에서 김金이라는 성이 나온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김일제의 김씨는 한 무제가 내려준 성씨였던 것입니다.”
- 김현일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위원
*7) 『한서』 ‘김일제전’ : 本以休屠作金人爲祭天主, 故因賜姓金氏云 - ‘본시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제천祭天한 까닭으로 한 무제가 김씨 성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김일제가 한나라에 포로로 잡힐 때, 동생 ‘김윤’도 함께 잡혔는데, 김일제의 후손이 신라 김씨 왕의 시조인 김알지이고, 김윤의 후손은 금관가야를 세운 김수로라고 합니다.
실제로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는 기마민족의 유물이 대거 발견되고 있는데, 특히 청동제 솥인 동복銅鍑은 흉노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제사 의식을 치르기 위해 말에 싣고 다니던 제기입니다. 이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가야와 신라의 김씨는 북방 초원의 제국, 흉노의 후예가 됩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내용은 흉노의 시조가 단군조선의 인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고려 말 이암이 저술한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의하면 흉노의 시조는 열양의 욕살 ‘삭정索靖’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가야의 수로왕과 허왕후의 세기적 만남을 간직한 김해 김씨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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