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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진시황 불로초 수은 암살 죽음 진시황제 업적 아방궁 제주도

by 충격대예언 2022. 12. 1.

진시황 불로초 수은 암살 죽음 진시황제 업적 아방궁 제주도 

[글 포스팅 순서]

1. 진왕 정을 암살하라!
2. 6국 평정 후 진시황의 업적
3. 진시황의 최후, 죽음
4. 진시황 여불위 출생의 비밀 조희 (진시황제 어머니 아버지)
5. 춘추전국 시대 지도 진나라 춘추오패 뜻

 

 

진왕 정을 암살하라!


BCE 227년 바람이 소슬하게 부는 어느 날. 
진나라 정궁 함양궁咸陽宮은 온통 기쁨에 싸여 있었다. 
조복朝服을 차려입은 진왕 정은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방금 막 도착한 두 명의 사신을 정중하게 영접하고 있었다. 두 명의 사신들이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선물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행사는 순식간에 살벌한 광경으로 바뀌면서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비극이 되어 버렸다. 
연나라에서 보낸 두 명의 사신은 정사인 형가荊軻와 부사 진무양秦舞陽이었다. 
사실 이 둘은 진나라를 배신하고 연나라로 망명한 장군 번어기의 목과 연나라 영토인 독항 지역(지금의 허베이성河北省 구안현固安县과 줘저우시涿州市 일대의 비옥한 땅) 지도를 가지고 오는 것을 미끼로 하여 진왕 정을 암살하려는 목적을 가진 자객들이었다. 

이들을 사주한 사람은 연나라 태자 단丹이었다. 
조나라 멸망 이후 진나라의 군세는 역수易水까지 이르러 연나라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본래 태자 단은 조나라에 이질로 잡혀 있었을 때 그곳에서 태어난 진왕 정과 함께 어울려 놀며 지냈었다. 
이후 진왕 정이 진나라 왕이 되었을 때 태자 단은 진나라의 인질이 되었다. 
그때 고국을 보내주길 원한 태자 단의 뜻을 진왕 정은 외면하였다. 
이에 원한을 품은 태자 단은 풍전등화와 같은 연나라의 운명을 걸고 진왕 정 암살에 모든 것을 거는 모험을 감행했다.

이날 형가는 번어기의 목이 든 함을, 진무양은 독항의 지도를 들고 진왕 정 앞에 나서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진무양은 위세 등등한 진나라의 위용에 눌려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형가 홀로 지도를 건네받고 진왕 정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독항의 지도를 펼쳐들면서 안에 감춰 둔 비수를 꺼내 들었다. 
이 비수는 단조할 때 극독을 넣은 약수藥水에 수차례나 담금질한 제품으로 피가 한 방울만 나더라도 즉사할 수 있도록 만든 무기였다.

당시 진나라 어전에는 왕 이외에는 그 누구도 어떤 병장기도 휴대할 수 없었고, 단 아래 호위무사들은 명령 없이는 어전에 올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진나라 어전에서는 죽이려는 형가와 도망가는 진왕 정의 숨 막히는 대결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당시 진왕 정에게는 7척 길이의 장검이 있었는데, 이를 뽑을 여유가 없었다. 

이때 시의侍醫 하무저夏無且가 손에 들고 있던 약주머니를 있는 힘껏 형가에게 던졌고 형가는 이를 피하면서 잠시 틈이 생겼다. 일순간 숨을 돌린 진왕 정은 신하들의 조언을 받아서 칼을 등에 옮겨 매 겨우 칼을 뽑을 수 있었다. 
칼을 뽑아 든 진왕 정은 형가의 왼쪽 다리를 찔렀고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바로 달려들어 형가를 죽여 버렸다.

진왕 정은 왕위에 오른 이후 함양궁 미행 중 발생한 암살 시도와 천하 순행 중 박랑사에서 장량張良과 창해 역사에 의해 감행된 암살 시도 등 여러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이번 형가의 암살 기도는 바로 눈앞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로, 지옥문 앞에까지 갔다가 살아 나오는 충격과 공포를 안겨 준 사건이었다. 
진왕 정의 분노는 연나라의 조속한 멸망으로 이어져 BCE 226년 연의 수도 계성薊城이 진나라 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듬해인 BCE 225년에는 황하의 물을 대량으로 끌어 모아 위나라의 수도인 대량을 수공법水攻法으로 파괴하여 멸망시켰다.

진나라는 나라의 역량을 집중하여 이웃 나라의 수도를 순식간에 함락시키는 방식으로 6국을 하나씩 멸망시켜 나갔다. 
중원의 나라들을 멸망시킨 진의 창끝은 남방의 초나라로 향했다. 초나라는 북으로는 황하, 남으로는 지금의 푸젠성福建省과 광둥성廣東省 일대인 민월閩越, 동으로는 지금의 저장浙江, 서로는 파촉巴蜀 땅 일대까지를 차지하고 있어 땅 넓이만으로는 전국칠웅 중 단연 최고였고, 서초패왕 항우의 할아버지인 항연項燕이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진나라는 나라 안이 텅 빌 정도인 60만 대군을 동원하여 지구전을 폈고, 기회를 보아 초나라 도성인 수춘壽春(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 서우현壽县)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고 진나라 군은 초나라 왕 부추負芻를 사로잡았다(BCE 224년). 
파죽지세였다. 하나 남은 제나라는 싸움도 하지 않고, 제나라 수도 임치를 기습한 상태에서 제나라 왕이 항복을 하였다. 
이로써 6국 통일의 중원 통일 대업이 완성되었다. 
진나라 건국 후 약 500년이 지난 BCE 221년이다. 
진나라에 의한 중원통일은 진왕 정 이전 선대왕 때로부터 차근차근 추진해 온 변혁 정책의 총체적 결과물이었다.

 

 

6국 평정 후 진시황의 업적


중국 역사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는 영토 분쟁으로 겹겹이 포개져 있다. 
20세기 초 중국 역사학자 후스胡適는 “기원전 841년 이전의 중국 역사는 못 믿겠다”고 선언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정사의 첫머리로 꼽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는 황제부터 하, 상, 주나라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하면서 정확한 연도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나라 제18대 마지막 려왕勵王의 폭정에 민란이 일어나 왕이 축출되어 대신들이 다스리던 BCE 841년 공화 원년부터를 중국의 역사라고 여겼다. 이 시기부터 보면 중국이 정식으로 통일되던 기간은 1,374년으로 전체 역사의 반도 안 되는 시기였다.

처음으로 중국을 중국답게 통일한 제국이 진秦나라로 BCE 221년 진왕 정이 중원을 통일하여 제국의 시대를 열었다. 
진왕 정은 이전의 왕들과 자신을 구별하여 황제皇帝라는 호칭을 사용한 최초의 황제, 시황제始皇帝가 되었다. 
진나라와 그 뒤를 이은 한漢나라는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밀접하여 진한제국이라 말한다. 
이 진한제국은 현재의 중국을 형성하게 한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을 구성하는 56개 민족 중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의 뿌리이기도 하면서 중앙집권체제의 기틀과 화폐, 토지개혁을 통한 경제적 부흥의 초석을 다지기도 하였고, 여러 법제의 기초가 마련된 시기이다. 

춘추 전국시대의 난세를 겪는 동안 사람들 마음속에는 통일에 대한 염원이 싹트고 있었다. 
그중 최초로 중국이 통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는 유교의 아성亞聖 맹자孟子였다 그는 천하는 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천하가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평화를 맞이할 수 있다는 대일통大一統 사상을 주장하였다.

황제가 되다 진왕 정은 33세 때 형가의 암살미수 사건을 겪고, 마침내 39세에 중원을 통일하였다. 
통일은 그에게 새로운 무대를 열어 주었고 거대한 성취감을 느끼게 했다. 
진왕 정은 자신만만한 자세로 만인을 굽어보며 통일 후 첫 번째 정책을 취한다. 

그것은 스스로를 황제라 참칭僭稱하는 것이었다. 
전국시대 이전의 제帝는 지극히 높은 신(至上神)을 가리키는 말로 하늘과 인간, 사회와 자연의 최고 주재자를 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상고시대 기록을 보면 상제님(帝)의 명으로 비를 내린다, 바람을 불게 한다는 기록들을 보게 된다. 

황皇은 본시 제帝의 형용사였고, 후에 군주의 칭호가 되었다(황皇에는 하늘이 낸 사람의 통칭이라는 의미도 있다). 
황은 셋으로 흔히들 복희씨, 여와씨, 신농씨를 가리키며 본래 동방의 성왕聖王들을 말하고, 제는 다섯으로 황제, 전욱, 제곡, 요, 순으로 중국 민족을 지도한 왕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그래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본래 삼황에 대한 기록은 없고, 오제본기五帝本紀부터 시작한다). 
이들은 상당히 훌륭한 인품을 지닌 군주의 모범으로 여겨졌다. 
흔히 삼황오제라 일컬어지는 이들에 대해 순차적으로 제왕의 자리를 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진왕 정은 이들의 공업을 능가한다 하여 스스로를 황제라고 참칭하게 된 것이다. 

진시황이 자신의 호칭과 관련한 일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자신의 명분을 바로 세우는 정명正名에 대한 것이었다. 
이는 논어에 나오는 정명 사상이 바탕이 되었다. 
논어 자로편에서 공자는 “명분을 바로 세우지 못하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이 이뤄지지 않는다. 일이 이뤄지지 않으면 예악이 흥성하지 못하게 된다. 
예악이 흥성하지 못하면 형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그러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어진다”고 하며 명분을 바로 세우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황제, 짐, 조서 등의 용어는 자신의 신격화와 신성화를 이끌어 냈다. 
황제를 용龍으로 비유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진시황은 자신이 천하제일의 지존이라는 사상을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정명, 신격화, 신성화 등)은 현실 정치를 강화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천하가 자신의 통치에 완전히 복종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신하들이 군주의 행위를 평가하는 시호법을 폐지하여 스스로를 처음이란 의미로 시始황제라 칭하였다. 
이후 황제는 2세, 3세라 칭하기로 했는데 3세만에 진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또한 진시황은 황제와 관련된 특별한 글자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아예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도록 한 피휘避諱제를 시행하였으며, 나라의 상징을 오행 법칙에 따라 물(水)로 정했다.

진나라는 왕조의 상징으로 오행 가운데 수덕水德을 채택했다.
주왕실을 대신한 왕조로 정통성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황제는 토덕으로 이를 극剋한 하나라는 목덕으로, 상나라는 금덕, 주나라는 화덕으로 보고 상극 원리에 따라 나라의 제도를 정하였다.

계절로는 겨울, 숫자는 6, 색은 검은색으로 하여 모든 의복을 검게 하였고, 길이의 기준을 6으로 하였으며 황화를 덕수德水라고 개칭하고 수덕은 음형陰刑을 관리하기 때문에 엄격한 법집행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또한 백성(民)을 검수黔首라는 호칭으로 했는데 이는 검은 머리라는 뜻으로, 관리가 관을 쓸 때에 두발이 노출되는 것을 따왔다고 한다.


군현제와 중앙집권 관료체제(정치 행정적인 면) 진시황은 전국을 군현으로 나눠 철저한 중앙집권제를 실시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상당히 완비된 행정기구와 이에 상응하는 관료체제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이 둘은 황제의 의도를 관철시키는 제도적 장치로 활용하였다.

즉 전국을 등급에 따라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황제가 파견한 관리가 황제를 대신하여 직접 다스렸다.
이로써 정치적 권한을 황제에게 고도로 집중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이를 위해 진나라는 내정을 총체적으로 관리하는 승상丞相(政), 최고 군사장관으로 태위太尉(國尉,軍) 그리고 감찰장관인 어사대부御史大夫(監察)를 두었다.
중앙기구로 이 삼공을 설치하되 서로 독립적인 기구로 최후의 결정권은 황제에게 두어 권력이 집중되도록 했다.
또한 조정의 조직체제에는 황실의 사사로운 업무와 국가의 공적 업무가 함께 뒤섞여 있게 하였는데 이는 가천하家天下적 황제체제의 기본 특징이었다.

여기에 지방은 군과 현의 두 등급으로 나누어졌고 조정에서 임명된 관리가 황제의 의도를 각계각층에 실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앞선 주나라 천자도 진시황과 같이 이름은 천하의 주인이었지만 실제 다스리는 영역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런 차이로 진 제국은 중국 역사상 일대 분수령을 이룬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진 제국이 두 세대 만에 멸망하였지만, 제도는 그대로 한나라로 계승 발전되었다. 군현제는 상, 주 이래 줄곧 시행된 분봉제를 종식시켰고, 이에 따라 제후가 각기 주관하는 정치 국면도 막을 내렸다.

 

 

전국 도로망 정비 진시황은 천하통일 이후 여러 측면에서 다른 ‘통일’의 업적을 세운다. 
우선 중국이라는 개념을 확립시켰다. 중국의 영문 번역이 차이나 China는 바로 진秦을 음역한 것이다. 
지리적 정치적 통일을 바탕으로 경제와 문화 영역에서도 통일을 촉진하였다. 
진시황은 전국 교통 발전을 매우 중요한 정책으로 삼아, 수레의 양쪽 바퀴 사이의 거리를 통일하고, 천자의 전용도로인 치도馳道(도로 넓이 50보)를 건설하였으며, 북으로 향하는 직도直道와 촉한 지역으로 가는 오척도五尺道(폭 5척 도로)와 동남쪽으로 직통하는 신도新道를 건설하는 등 함양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통하는 교통망을 구축하였다.

화폐 및 도량형 통일과 문자 통일(사회 경제적인 면) 그리고 모양과 관리가 제각각인 화폐를 진나라의 진반량秦半兩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도량형(도度는 길이, 양量은 부피, 형衡은 무게를 의미한다)을 통일하였다. 명칭과 단위, 쓰임새 등을 통일하였다. 도량형은 계량의 도구일 뿐 아니라 왕이 천하를 다스리는 일종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도량형의 표준을 확립하는 일은 왕이 백성들의 신임을 얻는 중요한 시책이었다. 이와 함께 진시황은 문자를 정리하라는 명을 내렸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진나라 법정 서체를 소전小篆체(현재 인감도장으로 주로 사용되는 서체)를 기본으로 예서隸書의 사용을 허가하는 방식이었다. 진왕조의 문자 규범화는 단지 알기 쉽고 쓰기 쉬운 문자로 통일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한자 정형의 기초를 다진다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각 지방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고 지방간 원활한 교류가 가능해졌으며, 정부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었고, 통일된 문자는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진시황이 직접 정사를 돌본 시기에는 줄곧 모든 게 순조로웠다. 중원을 통일했고, 새로운 정치 개혁을 성공적으로 단행하였고, 일련의 통일 정책은 중국 2천 년 정치제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진시황의 공과 진시황은 천하의 모든 일을 직접 결정하였고, 공문서를 무게로 계산하여 매일 밤낮으로 자신이 처리할 문서의 양을 정해두고(呈), 정해진 양에 차지 않으면 쉬지도 않았다고 한다.
 당시 상주된 문서는 죽간이었을 것이고 그 문서의 상당한 양은 1일 1석(120근, 1근=250g)이었다고 한다. 
이런 근면함은 그를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그러나 이런 진시황의 위대한 업적 이면에는 중대한 과오도 함께 수반되었다. 
즉 통일을 이루기 위한 방법(進攻)에서 그 성과를 지속적으로 지켜야 하는 쪽(守成)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통일을 실현하고 나서 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 그 이전과 구별되는 근본적인 조정이 없었다.

전쟁 시기에는 적국의 인적자원을 파괴하기 위해 그들을 핍박하고 적국의 물질을 빼앗아서 스스로 강해져야 했다.
이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진나라가 통일제국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분열된 6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필요했던 정책이 아닌 근본적인 형세 변화를 모색해야 할 시점이었다. 과거 대적하던 관계는 통일된 제국 내에서는 다양한 관계로 변화했다.

계급간의 대립이나 서로 다른 집단과 다른 계급간의 이익 대립이 있는가 하면, 서로 공존공영하고 의지해야 하는 관계가 필요하기도 했다. 진시황은 이런 관계를 잘 조정하여 안정된 사회 질서를 건립하였어야 했다.

하지만 진시황은 이런 변화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이 거의 없었다. 통일 후에도 전쟁 시기와 변함없는 방식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였고, 다양한 관계의 조정에는 힘쓰지 않았다. 진시황은 백성들의 민생을 돌보지 않고 잔혹하게 억압하여 그들의 비난을 샀다. 근본적으로 그의 통치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통일 사업을 추진해야 할 때는 시대의 명에 따라 이를 충실하게 잘 따랐지만(順天), 통일 이후에는 덕을 바탕으로 한 인정仁政을 펼쳤어야 했으나 그런 인식 자체가 없었고 가장 중요한 민심을 잃고 말았다(逆民).

진시황은 백성의 노동력을 남용하여 북으로는 만리장성 건설을 위해 30여 만 명의 백성을 동원했고, 남으로는 백월을 정벌한 후 오령五嶺을 수비하는 데 50여 만 명을 파병했다. 아방궁 건립(주7)과 여산驪山에 능을 건설하는 데에는 70만 명을 징발하였다. 이에 도로. 교량 등의 건설에 동원된 총 인력은 200만 명에 달했다. 

당시 전국 인구 2천만 정도였는데 약 10분의 1 정도가 스스로 도구와 식량을 준비해서 국가의 노역에 종사했으니 그 부담이 막중하기가 실로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또한 진나라 법의 가혹성은 역사상 보기 드문 것이었다. 
그 중 하나를 들어보면 진시황 36년 동군東郡 경내에 운석이 떨어지는 일이 있었는데 여기에 진시황이 죽으면 나라는 분열된다는 저주의 말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에 진시황은 진상을 조사하지 않고 운석 주변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진나라 사람들에게는 갑자기 죽게 되거나 가족이 멸문하는 재앙이 수시로 일어날 수 있었다. 

진나라 멸망의 서막인 진승, 오광의 봉기 역시 이들이 큰 비로 규정된 시간에 지정된 노역 장소로 갈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봉기를 일으킨 것이었다. 도망가도 죽고 늦게 가도 죽으니 봉기라도 일으켜 보자는 심산이었고, 한나라 고조 유방도 이런 봉기군의 일원이었다.

진시황의 최후, 죽음


왕王이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라면 지상의 제帝는 나라가 아닌 천하라는 개념을 다스리는 존재이다. 
국경에 의해 제한되는 통치자는 국경 밖 다른 나라에는 ‘또 다른 통치자’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존재한다. 
이런 국경이라는 개념이 배제되는 천하의 일인자로 인식한 진시황은 상제님이 수레를 타고 천극天極을 순회하는 것처럼 천하를 순시하기로 하였다. 통일한 다음 해부터 온량거轀輬車(작은 창을 열고 닫으면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되는 상자 형태의 수레)를 타고 천하를 순회하였다. 
그는 순시하면서 경치를 즐기며 유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면서 민심의 동태를 살피고 관찰하였다.

진시황은 통일 후 10년간 다섯 차례에 걸쳐 전국을 순시하면서 가는 곳마다 “진시황의 덕을 찬양하고 의기양양함을 밝힌다”는 비문을 새겨 놓았다. 이런 비문들은 진시황의 득의양양한 기세를 충분히 드러내 준다. 
하지만 말년의 진시황은 대단히 우울한 생활을 보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진시황이 즐겁지 않다”, “진시황이 묵묵히 있다.”, “진시황이 화를 내다” 등의 심경 변화를 나타내는 기록들이 자주 보인다. 정작 진시황을 가장 심란하게 한 것은 죽음에 대한 예감이었다. 

말년의 진시황은 자신에게 닥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불사의 신선이 되기 위해 단약丹藥(일반적으로 외단에서 사용하는 단약에는 수은과 납 성분이 들어 있어 수은 중독, 납 중독의 위험이 있었다. 도교가 성행한 당나라 때에는 이런 단약을 먹고 죽은 황제가 꽤 있다)을 복용하였을 것이고, 장생불사의 불로초 약을 구하기 위해 방사인 서불徐市(서복徐福)을 어린 남녀 아이들과 함께 동방으로 보내기도 한다(이때 서불 일행이 도착한 곳이 제주도 어귀로 서불이 돌아갔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 서귀포西歸浦이다).

아마도 진시황은 동방 단군 조선에서 수련의 묘법과 생명 연장의 비법을 배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모든 노력이 대부분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고, 시황제가 죽을 것이라는 소문이 전국에 떠돌아다녔다.
이는 민심 이반의 징조를 보여 주는 것이고, 시황제의 죽음은 곧 진나라가 멸망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결과로 분서焚書와 갱유坑儒 같은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진시황 37년 BCE 210년 시황제는 마지막 순행을 떠난다. 
이 유람에 막내아들 호해胡亥를 데리고 갔다. 
이것은 그가 죽음을 맞이할 뿐만 아니라 진 제국의 몰락을 예고하는 운명의 전주곡이었다. 
진시황 일행은 10월에 출발하여 11월 운몽에 도착하여 배를 타고 강을 따라가면서 적가籍柯를 돌아보고 해저海渚를 건너 단양丹陽을 지나 전당錢塘을 거쳐 절강浙江에 도달했다. 강을 건넌 다음에는 회계會稽로 가서 오나라 땅을 거쳐 돌아가 북쪽의 낭야琅琊에 도착했다. 다시 낭야로부터 서쪽으로 순행한 시황제 일행이 평원진平原津을 건너 황하를 건넜을 때 드디어 진시황은 병이 들고 말았다. 말없이 서쪽으로 이동하던 중 사구沙丘의 평대에서 세상을 떠났다.

병세가 악화된 시황제는 장자인 부소扶蘇에게 편지를 써서 함양으로 돌아와 장례를 주관하라고 했다. 
생전에 태자를 책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의미는 부소가 후계자임을 명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옥새를 관장하던 중거부령中車府令 조고趙高의 주도하에 음모가 진행되었다. 
승상 이사, 호해에 의한 음모는 마침내 성공하였다. 

장자 부소는 자결하고, 진시황의 뒤를 이은 호해는 진시황의 과오를 고치기는커녕 오히려 더 극단으로 몰고 갔다. 
이후 일어난 반진反秦 세력 중 하나인 한고조 유방에 의해서 BCE 206년 함양이 함락되고 초왕 항우에 의해 이미 투항한 3세 자영子嬰이 죽으면서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진시황 사후 3년이 지났을 때였다.


진시황의 인생사는 100여 년 뒤 사마천이 기록한 『사기』에 남아있다.
이미 1세기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시황제는 전설 속 인물이 되었다.
역사적 진실에서 멀어진 다양한 이야기가 생긴 이유는 그가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이자 최초로 통일된 제국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진 제국은 대륙 서쪽에 위치한 진나라가 그 동쪽에 위치한 여섯 나라를 정복한 결과 탄생한 것이지만, 불과 15년 만에 잔존한 유민 세력에 의해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런 탓에 시황제를 ‘폭군’ 으로, 혹은 ‘유능한 군주’로 평가하는 양 극단의 평가가 내려졌다.

 

 

진시황에 대해 폭군이라는 평가가 생긴 이유는 과도한 군사 및 노동력 동원으로 인한 백성들의 반발에서 찾을 수 있다. 
장수한 다른 왕조의 경우를 보면 오랜 전란이 끝나고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면 그간 전란에 지친 백성들을 쉬게 하고 노동력 징발을 자제하며 세금을 감면해 주는 등 어진 정치를 통해 내부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반해, 진시황은 대규모 군사행동과 대형 토목공사를 끊임없이 추진하였다. 북으로 흉노와 대치하고 남으로 남월을 공략하는 등 계속된 전시체제는 백성들을 지치고 고통스럽게 했다. 

거기에 만리장성이나 직도, 치도 등의 방대한 토목공사와 지배계층이나 향유가 가능했을 호화, 사치의 대명사인 아방궁 신축, 능묘 조성 등을 무리하게 진행하여 서민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즉 오랜 전쟁에 시달려온 백성들은 평화와 행복한 삶을 염원하였는데, 정작 통일된 제국이 백성에게 가져다 준 것은 과중한 조세와 부역, 가혹한 형벌과 굶주림뿐이었다. 아마 백성들은 나라 전체가 캄캄한 감옥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여기에 황제가 절대 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지나치게 집중된 권력이 오히려 부작용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권력의 권權 자는 ‘저울추’ 권으로 힘의 저울, 즉 힘의 균형된 분배를 뜻하는데 힘의 균형을 이뤄야 할 권력이 특정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어 예상치 못한 위기를 불러왔다. 그래서 진시황의 급작스런 사망과 2세 호해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리더십 공백이 생기면서 작은 충격에도 쉽게 무너져 버린 것이다.

시대는 영웅을 낳고 영웅 또한 시대를 만든다. 
시대는 진왕 정에게 6국 통일을 완성할 수 있도록 역사의 무대 위에 올려놓았고, 진시황은 이 무대 위에서 성공적으로 6국 통일의 웅장한 연극을 연출해 냈다. 그렇기에 진시황을 ‘폭군’이라는 두 글자로만 규정하는 건 일종의 모욕이 될 것이다. 그가 폭군의 이미지를 뒤집어쓰게 된 건 집권 후반기의 여러 실책들로 인해 진나라가 너무 쉽게 망해 버렸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이루어 놓은 것들 중 영토, 도량형, 문자, 화폐의 통일만으로도 그를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로 평가할 여지는 충분하다. 하-상-주로 이어지는 유가문화 전통을 겉옷으로 치장하고 진나라의 법가 통치술을 속살로 채워 넣은 것이 유방이 세운 한나라의 문물제도인데, 이것은 이후 청나라 때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지금의 중국인들이 항상 염두에 두는 통일의 관념을 최초로 구체화시킨 인물이 진시황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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