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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꼬꼬무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 사주 자녀 부도 사망 근황 72회 게스트 재방송

by 충격대예언 2023. 3. 31.

꼬꼬무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 사주 자녀 한보철강 부도 사망 근황
72회 게스트 재방송

[글 포스팅 순서]

1. 흙과 철의 사나이-정 회장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2. '부자'가 보이는 관상
3. 말단 공무원에서 대기업의 총수가 된 정태수
4. '역술 경영' 한보, 재계순위 14위까지
5. 알고보니 운보다 강했던 '로비'의 힘
6. 부도 맞은 '꿈의 제철소'
7. 사적 용도와 뇌물로 쓴 엄청난 돈
8. 한보 사태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고통으로
9. 정태수 말년

10. 꼬꼬무 정주영 회장 소떼 방북사건 명언 이봐 해봤어 71회 게스트 재방송
11. 권인숙 의원 프로필 조영래 변호사 문귀동 근황 사건 부천 경찰서 성고문 꼬꼬무 70회 게스트
12. 꼬꼬무 C-123기 추락사건 봉황새 1호 작전 한라산 군용기 수상한 비밀작전 69회 게스트

 

 

흙과 철의 사나이-정 회장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3월 30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꼬꼬무 시즌3, 시청률: 3.4%)' 72회에서는 '흙과 철의 사나이-정 회장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편으로 부제로는 한보 정태수 회장을 조명했습니다.

이야기 친구 게스트로는 웹툰작가 주호민, 그룹 에이핑크 멤버 보미, 개그맨 김용명이 출연했습니다.

 

'부자'가 보이는 관상

1960년대 서울, 종로 5가 뒷골목.
오전 9시만 되면 사람들이 줄을 쫙 서는 곳이 있었습니다.
오래된 여관인데, 사람들이 늘어선 긴 줄이 여관의 정문을 지나 안채로 이어졌습니다.
그 안에는 영롱한 빛깔의 한복을 입은 남자가 책상 앞에 정좌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백선생'이라 불렀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야.

당대 최고의 역술인, 백운학.
특히 관상을 기가 막히게 잘 봐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얼굴만 척 보면 탁이라고 합니다.
백선생이 관상 쪽에서 정말 레전드로 불리는 일화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뒤흔들 어떤 사건을 미리 예견한 적이 있었습니다.

1961년 4월, 어떤 한 남자가 백선생을 만나러 왔습니다.
마루에 이 남자가 앉아 대기 중이었는데, 방문이 잠깐 열린 사이 백선생이 이 남자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더니 백선생은 다짜고짜 "그거 됩니다! 계획대로 진행해요! 당신이 준비하는 그거, 분명히 된다고!"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백선생을 만난 그 손님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백운학이 얘기했던가? 이 사람이 큰 소리로 '그거 됩니다!' 하길래 '뭐가 된다는 거야?' 했지. 
'지금 혁명 준비하고 있잖아요' 하는 거야. 
'그거 말리는 사람 없고, 탓할 사람 없습니다'라고 백운학이 그랬어."

-김종필 전 국무총리-


초대 중앙정보부장이자 최연소 국무총리를 지낸 JP,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생전 증언입니다.
그가 백선생에게 '혁명은 성공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그 혁명이 뭐냐, 5.16 군사정변입니다.
육사 출신 예비역 중령 김종필은 육군 소장 박정희와 함께 군사 쿠테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성공하면 권력을 손에 넣겠지만, 실패하면 사형이었습니다.
극소수의 사람들끼리 극비리에 진행하고 있었는데, 백선생은 김종필의 얼굴만 보고 그 계획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리고 백선생의 예언대로 이 거사는 성공했습니다.

이 용한 백선생에게 문제의 남자가 찾아온 건 1969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허름한 행색의 40대 남자가 여관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47세의 정태수 씨입니다.


태수 씨는 세무서에서 일하는 말단 공무원입니다.
경남 진주의 가난한 시골마을 출신으로, 초등학교만 겨우 나오고 엄청 힘들게 살았습니다.
이 무렵 태수 씨는 공무원 박봉에 아들 공부나 제대로 시킬 수 있겠나, 걱정이 많았습니다.
드디어 태수 씨 차례가 왔고, 백선생 앞에 인사를 하고 앉았습니다.
그런데 백선생이 다짜고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냐"고 물었습니다.
세무서에 다니는 공무원이라고 대답했더니 백선생은 "당신 사업할 운이야. 공무원 당장 때려치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대한민국 첫째 둘째 가는
부자가 될 상이야.

공무원으로 거의 20년을 살았는데, 갑자기 때려치고 사업을 하라니까 태수 씨는 깜짝 놀랐습니다.
사업은 무슨 사업, 태수 씨는 백선생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세무서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백선생의 말이 계속 귀에 맴돌았습니다.
태수 씨는 신년 운세를 본다는 핑계로 다시 백선생을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백선생이 또 일을 그만 두라고 했습니다.
백선생은 3년 동안 찾아온 태수 씨에게 계속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태수 씨도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태수 씨는 자신의 엄청난 운명을 몰랐습니다.

태수 씨는 대한민국 경제사에 길이길이 남을 인물이 됐습니다.
40대 후반 말단 공무원에서 재벌 총수로, 맨주먹의 신화를 쓰는 것입니다.


이름 정태수. 그룹 계열사 22개. 매출 5조 4천억원. 재계랭킹 14위까지 올랐던 전설의 기업인. 
바로,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입니다.
한보그룹, MZ세대에겐 생소한 기업일 것입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정태수 회장이 사업을 시작할 과거로 돌아가 볼겠습니다.

 

 

말단 공무원에서 대기업의 총수가 된 정태수

백선생은 태수 씨에게 "토(土)의 기운을 태어났어. 흙을 만지면 큰 부자가 될 거야"라며 사업 방향까지 구체적으로 알려줬습니다. 흙이 좋다는 말을 듣고, 정회장은 돌을 주우러 등산을 다녔습니다.
첫번째 사업 아이템이 '광석'입니다.

"토요일, 일요일 되면 배낭 메고 산으로 돌아다니고 말이야. 
돌멩이 주워가지고 광산 분석하고 말이지."

-정태수 회장, 한보그룹


어디 싸게 나온 광산이 있나 물색하다가 일제 때 폐광된 광산 하나를 단돈 2만원에 샀습니다.
당시 태수 씨의 한달치 월급 정도였다고 합니다.

두번째 사업 아이템은 흙과 관련된 또 다른 사업, 흙으로 가장 큰 돈을 벌 수 있는 '부동산'이었습니다.
태수 씨는 전재산이었던 9평짜리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친구들을 설득해서 300만원씩 투자를 받고, 아내가 모은 곗돈 200만원도 보탰습니다. 그렇게 천만원 조금 넘게 모은 돈으로, 서울 구로동에 땅 1200평을 샀습니다.
완전 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니던 세무서에 사표를 던졌습니다.
그 때 나이가 52세였습니다.

태수 씨는 1200평 땅에 아파트를 짓기로 했습니다.
허가가 필요하니 관공서를 찾아간 태수 씨는 지방 세무서 출신이면서 자신이 국세청에서 23년 근무했다고 과장해 말하며 건설 허가를 받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땅에 180세대 저층 아파트를 지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으로 아파트는 완판됐습니다.
은행 대출금, 친구들 투자금을 다 갚고도 수천만원이 남았습니다.
그 뒤로도 태수 씨는 아파트를 짓는 족족 완판시켰습니다.
그 중에 1977년 신림동에 지은 '미도 아파트'가 초대박이 났습니다.
분양 경쟁률이 무려 10대 1이었다고 합니다.
정회장이 미도 아파트로 번 돈은, 순이익만 20억원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180억원 정도 되는 것입니다.
퇴사한 지 4년만에 그 돈을 번 것입니다.

"공무원 생활하며 아무 돈도 없는 사람이 20억 원을 벌어놨더니 이제 그만하고 싶더라고. '백선생, 관상 잘 봐줘서 나 돈 벌었는데 그만두고 싶다 사업' 그랬지. 이 사람이 펄쩍 뛰는 거야. '이제 시작인데 뭔 소리냐'고 말이야. 
'끝까지 해라. 무슨 소리냐, 늙어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고."

-정태수 회장, 한보그룹


정회장의 '운빨'은 그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앞서 2만원에 사들였던 광산은, 몰리브덴이란 광물이 나오는 광산이었습니다.
철이랑 합금하면 강도가 아주 세집니다.
탱크, 미사일 등 군수품 제조에 쓰이는 광물인데, 정회장이 처음에 광산을 인수할 때만 하더라도 국제적으로 철강 경기가 안 좋아서 몰리브덴 수요가 감소했습니다.
그런데, 해외 광산 몇 곳이 문을 닫으면서, 이 몰리브덴이 엄청 귀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70년대 말부터 갑자기 수요가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가격이 10배가 뛰었습니다.
단돈 2만원짜리 폐광산이 황금알을 낳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회장의 사업 운은 하늘이 돕고 신이 거드는 거 같았습니다.


정회장의 다음 계획은 이 동네, 어디 같습니까?


바로 압구정 현대아파트입니다.
과수원, 논, 밭 뿐이었던 이 강남 땅에, 1970년대부터 아파트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정회장은 이 강남에 주목했습니다.
강남 땅에 인생 한 번 걸어보자 했고, 강남 중에서도 정태수 회장이 선택한 곳은 바로 대치동이었습니다.
백선생이 말한 강한 흙의 기운을 느꼈다고합니다.

바로 여기, 앞에 초가집이 있는 이 곳은 바로 '은마아파트'입니다.
재건축 시장의 뜨거운 감자, 대치동 은마아파트, 강남 집값의 바로미터, 한 채에 수십억씩 하는 곳.
이 대치동 은마아파트를 세운 사람이,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입니다.


70년대만 해도 대치동은 그리 주목받는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비만 오면 잠기던 곳입니다.
그런데도 정회장은 거기에 과감하게 투자했습니다.
정회장이 사들이 부지가 무려 7만 2천평.
그 땅에 4천세대가 넘는 대단지를 지을 원대한 계획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아파트는 12평, 15평 같은 소형 평수의 서민 아파트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은마의 전략은 고급 아파트였습니다.
30평대 넓은 평수에, 엘리베이터를 갖춘 14층짜리 프리미엄 고층 아파트를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1978년 8.8부동산 투기 억제 정책, 정부에서 부동산 투기를 잡겠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복부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개발붐과 함께 투기붐도 일어서, 복부인들이 활개를 칠 때였습니다.
투기 때문에 부동산 값이 너무 오르니까, 정부는 토지나 부동산 거래를 더 까다롭게 하고 세금도 올리겠다는 것입니다.
은마아파트도 그 여파로 안 팔렸습니다.
분양하우스엔 파리만 날렸습니다.
사업을 너무 크게 벌인 정회장은 자금난이 시작되더니, 부도 위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은마아파트가 분양되지 않았을 때 자살할 생각도 했어요. 
4500가구를 지어 놨는데 모델하우스에는 정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어요. 
밤 12시에 한강다리를 건너면서 빠져 죽으려는 생각도 했지요."

-정태수 회장, 한보그룹


하지만 백선생이 장담한 정태수 회장의 운명은 이대로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제2차 오일쇼크'라고 들어보셨는지요?
1970년대 말, 중동 산유국의 석유 수출 중단 조치로 인한 유가 폭등과 세계 경제의 혼란 사태입니다.
당연히 우리나라도 피해를 엄청 봤습니다.
2022년 대한민국 물가 상승률이 5.1%인데, 1980년 물가 상승률은 무려 30%였습니다.
그런데 이 글로벌 위기가 정태수 회장에겐 절호의 기회가 됐습니다.
물가가 오르고 화폐가치가 떨어지니까 믿을 건 땅 밖에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안전자산인 부동산으로 눈을 돌린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건, 부동산 중에서도 대치동이 대박이 났습니다.
대치동, 하면 '강남 8학군'이 떠오르지요? 이전에는 강북에 몰려있던 명문고들이 대치동 주변으로 하나 둘 이사를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덕에 미분양 상태였던 은마아파트가 불티나게 팔리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교육열이 오일쇼크를 이기는 나라였습니다.
그렇게 한강다리까지 갔던 정회장은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습니다.

"그때 돈 20억원 남은 것 가지고 1350억원 공사를 했어. 
수익금이 1350억원이야. 천문학적인 숫자야 그게."

-정태수 회장, 은마아파트 건축


1350억원, 지금 가치로 6900억원에 달했습니다.
정회장은 사업 시작 6년만에, 천억원대 거부가 된 것입니다.
이 정도면, 정말 정태수 회장은 하늘이 점지해준 사람 같았습니다.
정회장은 그 후로도 손대는 것마다 기막히게 운이 따라 왔습니다.
1984년, 부산에 있던 금호철강이란 회사를 인수했는데 그때만 해도 창고에 재고만 쌓인 회사였습니다.
그냥 공사 부지를 싹 밀어버리고 아파트를 지을까 했는데, 회사를 인수하자마자 국내외 건설경기가 엄청 좋아졌습니다.
중국 수출길이 열리고, 아시안게임, 올림픽 등 국제 이벤트 특수를 누리며, 애물단지로 쌓여있던 철강 재고 60만톤이 2개월만에 싹 팔렸습니다.

손 대는 것마다 승승장구하던 한보. 
작은 건설회사였던 한보는, 제철소, 골프장, 대학교까지 거느린 한보그룹으로 변신했습니다.
정회장은 사업시작 불과 10년만에, 말단 공무원에서 대기업의 총수가 된 것입니다.

 

 

'역술 경영' 한보, 재계순위 14위까지

"국세청이 발표한 83년, 귀속종합소득세 신고 상황에 따르면 작년 돈을 가장 많이 번 사람은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으로 16억 2700만원 소득을 신고했다.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은 82년 100위에도 들지 못했다가 이번에 11위에 들었고,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은 26위에서 59위로 처졌으며 이건희는 51위에 머물렀다."

-당시 기사 中


정회장은 삼성 이병철 회장보다 더 많이 벌었습니다.
그렇게 재계순위 100위권 밖에 있던 한보는 단숨에 랭킹 43위로 올라왔습니다.


이 사진은 은마아파트 상가 건물입니다.
여기 옥상에 한문으로 써 있는 '한보'.
놀랍게도, 이 상가 건물이, 한보그룹의 본사입니다.
정태수 회장은 대성공을 거두고도 그룹 분사를 은마아파트 상가에 두는 걸 고집했다고 합니다.
돈도 많이 벌었는데 왜? 은마 터가 명당 중에 명당이라고, 돈 벌었다고 으리으리한 사옥 짓고 사무실 옮겼다가는 좋은 기운이 다 빠져 나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는 집도 풍수지리를 깐깐하게 따졌습니다.
방배동에 큰 저택을 지었는데, 본채에는 아들들만 살게 하고 자신은 대문 앞에 문간방에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그쪽 터가 노인의 기를 보양하는데 더 좋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니까, 재계에는 '정회장이 역술 경영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백선생 말고도, 정회장이 신봉하는 역술인이 한 명 더 있었습니다.
일명 '부산 박도사'라 불린, 박재현이라는 역술가입니다.

"세간에서는 '도사'라고 불렸죠. 
명리를 연구하면서 '도사' 소리를 들은 분은 우리 선생님 밖에 없어요. 
정·재계 박재현 선생님을 안 거쳐 간 사람이 없어요. 
삼성의 이병철 회장님이 올 정도 됐으니까, 다른 데서는 안 왔겠습니까? 
박태준 회장(포항제철 창립자)님이 박재현 선생님 보고 '살아있는 토정 선생'이라고 사석에서 말씀하신 적도 있어요. 
그냥 본인들이 알고 있는 그런 분들이 실제 다 다녀갔습니다. 
한보그룹에도 고문을 하셨죠 선생님이. 약 3년간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투자하는 것, 땅 사는 것부터 큰일들이 있잖아요. 
그런 거를 물어보려 고문을 모시는 거죠."

-역술인 노상진, 박재현의 제자


종로 백선생이 관상 전문가였다면, 부산 박도사는 사주, 명리의 대가였습니다.
정태수 회장은 부산 박도사를 그룹의 고문 자리에 앉혔습니다.
역술인한테 실제 직책을 내어준 것입니다.

"이 회사 인수하려는데 기운이 어떻습니까", "이 사람 임원으로 앉혀도 괜찮을까요, 배신 안 할 사주입니까"라며
회사에 큰 일이 있으면 역술가부터 찾았습니다.

그런데 정태수 회장은, 그렇게 믿고 따르던 이 박도사와 결별하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박도사가 정회장의 끝을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60세 전후로 해서 운이 다할 거다. 
그러니 무리하게 하지 마라' 조언을 했단 말입니다."

-노상진, 박도사의 제자


너무 잘나가던 정회장은 박도사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정회장이 환갑을 넘겼을 때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했습니다.
몇 년 후에는 재계순위 30위까지 올라갔습니다.
대한하키협회 회장에, 여당 재정위원까지 맡으면서, 정회장은 돈, 명예, 권력 다 가지게 됐습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는, 한보그룹의 명성이 정점을 찍었습니다.
부동산, 건설 뿐만 아니라 정보통신, 제약, 관광, 신용금고, 손 안대는 분야가 없었습니다.
계열사는 어느덧 22개까지 늘어났습니다.

60대 중반이 훌쩍 넘었는데도 승승장구한 정회장. 
그의 나이 73세였던 1996년, 마침내 한보는 재계랭킹 14위까지 올랐습니다.
정말 타고난 팔자 때문에 이렇게 잘 나갔을까요?
모든 게 운명이고 운일까요?
세상사를 이렇게 순진하게 바라보면 안 되겠지요.
이제 정회장의 추락과 그로 인해 대한민국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알고보니 운보다 강했던 '로비'의 힘

드라마에서 로비할 때 사과상자에 현찰을 가득 남아 넘기는 장면들 봤지요?
로비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그 사과상자.
바로 사과상자를 로비 수단으로 대중화 한 사람이 정태수 회장입니다.
정회장은 이거 때문에 박도사의 경고를 무시할 수 있었습니다.

정회장은 서울의 한 유명 호텔, CCTV가 없는 19층 객실을 장기로 빌려놓고, 그 곳을 로비장소로 이용했습니다.
정회장의 뇌물 컬렉션에는 나름대로의 룰과 등급이 있었습니다.

첫번째 찻잔 세트는 3천만원, 적당한 인사치레용이었습니다.


다음, 007가방에는 5천만원 정도 들어갔습니다.
이건 비중있는 인물이나 입막음이 필요한 대상한테 전달됐습니다.
특히 국회의원들한테.
일단 식사자리를 마련해 밥부터 먹었습니다.
그리고 헤어질 때, "왜 가방을 두고 가시냐"며 건넸습니다.
이 007 가방은 워낙 자주 써서, 똑 같은 걸 대량으로 주문했습니다.

이 다음부터는 단위가 뛰었습니다.
골프 옷가방은 1억원이었습니다.
억단위는, 고위 공직자들한테 갔습니다.


대망의 사과박스는 무게만 26kg이었습니다.
2억원 이상 전달할 때 사용됐습니다.
꽉 채우면 2억 4천만원까지 들어갔습니다.
정회장의 사과 맛을 본 사람은, 실세 중에 실세였습니다.
장관급이나, 최고 권력자의 핵심 관계자, 그리고 은행장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정회장은 이렇게 거액의 뇌물을 건네고도, 입을 꾹 다무는 걸로 유명했습니다.
소문을 전혀 안냈습니다.
그래서 '정 회장의 돈은 먹어도 소화가 잘 된다'는 말도 돌았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뇌물계의 모범 답안이었습니다.
알고보니 운을 믿은 게 아니라, 돈의 힘을 믿은 것입니다.

한보가 그린벨트를 사면, 개발제한이 풀리고, 주변에 고속도로가 뚫렸습니다.
이게 가능한 건? 뇌물 먹은 공무원들이 허가를 내주고 개발 정보를 미리 알려줘서입니다.
로비에 공을 들이니, 애초에 다른 기업들과 출발점부터 달랐습니다.
그러니 하는 사업마다 수익이 보장되었습니다.

 

 

부도 맞은 '꿈의 제철소'

한보가 철강기업을 인수했습니다.
정회장한테는 '철강 재벌'이 되고자 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규모의 제철소를 만들어서, 재계 톱10에 들어가려는 야망을 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땅이 없었습니다.
제철소를 지으려면 엄청난 부지가 필요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바다를 메우는 간척사업, 충남 당진 앞바다를 메워서 지도에 없던 땅을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땅을 갖고 싶다고 너도나도 바다를 메우면 안 되니, 바다 매립 허가는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하지만 '로비의 귀재' 정회장은 쉬웠습니다.
갑자기 경제장관 회의가 열리더니, 무려 100만평이나 매립 허가를 받았습니다.
여의도만한 면적입니다.
당진 앞바다에 흙과 자갈을 쏟아 부으며, 정회장은 '여기는 꿈의 제철소'가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꿈의 제철소가,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들의 운명을 바꾸게 됐습니다.

"1979년도에 부산에 있는 금호산호철강이라는 데에 입사를 했습니다. 
1984년도에 한보철강으로 인수가 됐어요. 
정태수 회장님이 '꿈의 제철소'라 해서, 당진 제철소를 건설하는 현장에 투입이 됐죠…
원대한 계획이라면 원대한 계획인데, 이런 것들이 실행되는 것을 직접 체감할 수 있었으니까. 
기대는 조금 있었던 거 같아요."

-손일만, 당시 한보철강 직원


한보가 당진에 새 제철소를 만든다고 해서 가족들을 두고 홀로 당진으로 올라왔습니다.
'우리 회사 잘됐으면', '우리 가족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3천명이 넘는 직원들이 황무지 같은 땅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1990년부터 시작한 이 대공사가 끝나고 1995년 6월 23일, 당진 제철소 준공식이 열렸습니다.
시설 일부가 완공되자 화려하게 문을 열고 생산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제철소가 가동되고 채 2년도 되지 않은 1997년 1월 23일.
손일만 씨는 아침 신문을 보고 경악했습니다.

한보철강 부도처리

회사가 갑자기 부도가 난 것입니다.
아무것도 몰랐던 직원들은 신문을 보고 회사의 부도를 알게 됐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꿈의 제철소가 갑자기 부도가 난 이유는 뭘까요?
한마디로 '모래성'이었습니다.
제철소가 온통 빚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대규모 사업에 은행 대출이 따르긴 마련인데, 이 대출은 좀 이상했습니다.
한보철강의 자기자본은 900억원인데, 이런 회사가 은행에서 무려 5조 7천억원을 빌렸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대출을 받았을까요? 
정회장의 '뇌물 컬렉션' 때문입니다.
은행장들이 정회장으로부터 2억원의 현금이 꽉꽉 찬 사과상자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 후 정회장이 은행장에 거는 전화 한 통으로, 수백억에서 수천억원의 대출이 뚝딱 이뤄졌습니다.

"제일은행이 (한보의) 주거래 은행이 되다 보니까 저희 은행에 와서 계속 자금 요청을 하고.
제일은행의 채권만 1조원이 넘어간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때부터 조짐이 불안했어요."

-정암수, 당시 제일은행 직원.


은행은 고객에게 받은 예금으로 금융사업을 하는 곳입니다.
은행이 대출로 내어주는 그 돈 모두, 우리 국민들에게서 나온 돈입니다.
그런데 은행이 무책임하게 그 돈을 막 대출해주고, 한보는 그 돈을 대책없이 막 쓰다가 부도를 맞은 것입니다.

1997년 1월 27일, 정회장이 머무는 서울의 한 호텔에 방송사 카메라가 들이닥쳤습니다.
취재진이 "한보철강 어떻게 할 거냐" 물으니 정회장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자금이 6조원이나 투자한
한국 기간산업을 갖다가
이 부도를 냈다는 건.
난 누구한테 책임이 있는지
그건 모르겠어요."

황당한 말이었습니다.
부도가 누구 책임인지 경영자가 모른다니요.

 

 

사적 용도와 뇌물로 쓴 엄청난 돈

1997년 1월 30일, 한보철강이 부도나고 1주일 뒤, 정태수 회장이 구속됐습니다.
혐의는 공금횡령 및 뇌물 수수, 충격적인 소식 때문에 민심이 들끓는데, 정회장은 이런 희한한 모습으로 등장했습니다.


구속 전만 해도 노익장을 과시하던 정회장이, 검찰 수사가 시작되니까 여기저기 아프다며 입원하고 난리였습니다.
회장님들의 '휠체어 투혼', 이 원조가 바로 정태수 회장입니다.

1997년 4월 7일 정회장이 수감중인 서울 구치소에서 부도의 책임을 묻고 뇌물을 어디까지 줬는지 밝히는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증인은 OOO호텔 객실을 2년간 장기 예약하고 끼니마다 1인당 20만원짜리 최고급 식사를 했다는데 사실입니까?"(이규정 의원)

"쓰기는 썼습니다. 같이 밥 먹은 사람을 어떻게 일일이 기억을 하겠습니까?"(정태수)

"저한테 약 300명의 명단이 있는 이른바 '한보 리스트'라는 것이 있습니다.
추석 때라든지 명절 같은 때 선물을 돌리거나 또는 정치 자금을 전달하고 그런 적이 없습니까?"(맹형규 의원)

"전혀 없습니다."(정태수)

 

"어려울 때 국회 관계 일을 상의했던 사람은 없느냐 이겁니다."(이신범 의원)

"기억이 안납니다."(정태수)

"여기를 쳐다보고 눈을 뜨세요. 왜 눈을 감고 답변을 합니까? 떳떳치 못하니까 눈을 감고 있는 거 아니에요?"
(이상만 의원)

"내가 시력이 약해서 그랬습니다."(정태수)


정회장은 청문회 도중 주섬주섬 약을 꺼내 먹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왜 대출을 끊어 멀쩡한 회사 부도를 내게 하냐며, 적반하장식 답변들도 늘어놨습니다.

"마치 어린애가 크는데 젖을 주다가 젖을 떼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래서 부도가 났다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심지어 이런 표현도 썼습니다.

"'3천억원을 빌려줬으면 부도가 안 난다'라고 얘기하는데, 증인의 직원은 말입니다. 
'3천억원이 나와봤자 두 달을 버틸 수 있는 돈입니다' 얘기했어요."(이상수 의원)

"자금이라는 건 주인인 내가 알지, 머슴이 어떻게 압니까!"(정태수)


'머슴' 발언보다 더 충격적인 건, 대출금의 행방입니다.
한보가 빌린 5조 7천억원 중, 당진 제철소에 투입된 건 2조 4천억원이었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어디로 간걸까요?

"세 살배기 손자한테 15억 원짜리 집을 줬죠?"(이상수 의원)

"손자한테는 증여한 겁니다…내 돈으로 했습니다."(정태수)

"금융 자금을 빌려서 부인하고 이혼하는 위자료 40억 원도 냈죠?"(이상만 의원)

"네"(정태수)


나머지 돈은 사적인 용도로 쓰고, 뇌물로 쓰고 그런 것입니다.
빚이 너무 많으니까, 1년에 이자만 5천억원 씩 나갔습니다.
회사 돈을 그렇게 쓰는 건 배임이고 횡령입니다.
검찰은 또 하나의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 듣고 싶은 이야기', 김영삼 대통령의 둘째 아들 김현철 씨가 쓴 자서전입니다.
그런데 이 책이 한보그룹의 창고에서 만권 넘게 발견됐습니다.

"김현철 씨 책이 장지동 창고에서 1만권 가량 발견이 됐는데?"(맹형규 의원)

"비서실장 신OO 실장이라고 있습니다. '적당히 네가 사서 처리하라', 이 지시한 것 밖에 없습니다."(정태수)


그 당시 김현철 씨의 별명은 작은 대통령, '소통령'이었습니다.
공직자 인사 과정에 개입했다는 의혹, 기업들에게 뇌물을 받아왔다는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특히 정태수 회장의 둘째 아들이 '소통령' 김현철 씨와 굉장히 가깝게 지냈다고 합니다.
한보의 특혜 대출이 집중된 시기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이후였습니다.
결국 김영삼 대통령이 나서서 대국민 사과를 하게 됐습니다.

"나라 전체가 한보사건으로 인한 충격에 휩싸여 있습니다… 
저를 더욱 괴롭고 민망하게 하는 것은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제 자식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1997년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 담화 발표


한보철강의 부채가 5조 7천억원. 
그런데 한보그룹 전체가 빌린 자금은, 거의 10조원에 달했습니다.
이건 갚을래야 갚을 수가 없는 빚이었습니다.
이 시한폭탄이 터지며, 한보그룹은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97년 재판에서, 정태수 회장은 징역 15년형을 받았습니다.
정회장의 몰락, 이른바 '한보 사태'라 불리는 이 사건은, 우리나라 경제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됐습니다.

 

 

한보 사태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고통으로

1997년하면 '외환위기'가 떠오르지? IMF, 국제통화기금을 우리나라로 불러들인 게 사실상 이 한보야. 8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 경제는 호황이었어. 국민소득 1만달러를 넘기고, 경제개발이 한창이었어. 우리나라는 좋은 투자처라, 해외로부터 대규모 자본을 투자 받곤 했어. 하지만 90년대 중반부터는 수출이 감소하고, 세계적으로 경기도 불황이야. 그런데도 우리나라 기업들은 무리하게 빚을 내서, 문어발처럼 사업을 확장했어. 외국의 투자자들은 가장 먼저 무너진 한보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대. 1997년 말, 외국의 한 증권사가 자기네 투자자들한테 이런 메시지를 보내.

"Get out of Korea, right now(한국을 탈출하라, 지금 즉시)"
-홍콩 페레그린 증권 보고서 中

한국은 안심하고 투자할 나라가 아니니, 빨리 투자금을 회수해서 탈출하라.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 일명 '뱅크런'이야. 해외 자본이 급작스럽게 빠져나가기 시작해. 나라 전체가 빌린 돈은 막대한데, 갚을 돈이 없는 국가 부도 사태. 이 국가부도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IMF 자금 지원을 요청하게 되는 거야.

돈을 빌리는 대신, IMF는 부실한 금융권, 기업들을 구조조정 하고 직원들을 정리해고 하라고 요구했어. 한보철강의 부도는 정리해고로 이어졌어.

"1,100여 명에 대한 정리해고를 통지하며 대대적인 감원에 나섰습니다.
주인을 잘못 만나 머슴들이 고생하게 됐습니다."

-1997년 10월 13일 뉴스 中
"허망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다 사표를 썼으니까. 
유곡리에 사원 아파트가 다섯 동 있었어요. 
퇴사하니까 한 동만 남았습니다…. 
새벽 2시 되면 쨍그랑 하고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납니다. 
돌을 던진 거죠. 
퇴직 통보 받은 사람이 술 한 잔 먹고.
 무슨 기분이겠습니까."

-손일만, 당시 한보철강 직원


수차례에 걸친 해고 끝에, 3000명의 직원이 580명으로 줄었습니다.
대부분이 어린 자녀들 키우는 가장이었습니다.

"(우리 팀원) 두 명이 자살했어요. 
'꿈의 제철소'라고 해서 당진에 안 올라왔으면 평범하게 잘 살았을 분들이. 
스스로 선택을 그렇게 한 게 너무 가슴 아프죠."

-손일만, 당시 한보철강 직원


한보그룹을 시작으로 재계 서열 26일 삼미그룹, 재계순위 8위 기아그룹, 12위 한라그룹 등 굴지의 대기업들, 중소기업, 협력업체까지 연쇄 도산이 이어졌습니다.
그 수가 1만 개를 넘어. 작은 식당을 하는 자영업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건설 노동자들, 사무직 노동자들도 너나 없이 실업자가 됐습니다. 1998년 1월 19일, 제일은행에서는 1849명 희망퇴직 했습니다.

"1998년 2월에 명예퇴직을 했죠. 
그 당시에, 절대 안 망한다, 은행은 망하지 않는다, 그랬죠. 
한보 사태 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절대 안했습니다. 
준비도 안했고 아무도. 인생을 바꾼거죠 완전히."

-정암수, 제일은행 퇴직


수백만 실업자와 가족들은, 꽤 오랫동안 처절하고 혹독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 때의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새벽부터 일거리를 찾아 길거리에 나선 사람들. 
일거리를 가진 차량이 들어서면 너도나도 달려가서 차량 창문에 매달렸습니다.

부도가 난 기아 직원들의 자녀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 
한 학생은 이런 일기를 썼습니다.

"아빠는 부도가 난 뒤 말씀은 적어지시고 뉴스와 신문만 보셨다. 
가끔씩 속이 상하시다면서 약주를 하시면서 우리에게 '기아는 좋은 회사다. 
기아는 꼭 정상화되어서 좋은 차를 만들 것이다' 라고 절망에 빠진 우리 가족을 우리보다 더 힘든 아빠가 위로해주셨다…. 
하루빨리 기아가 정상화되어서 절망에 빠졌던 우리 아빠가 다시 희망을 되찾아 오셨으면 좋겠다"


아동 보호소나 보육원에는 아이들이 넘쳐났습니다.
주로 5세 미만의 어린 아이들이 많았던 이곳에 초등학생 아이들도 들어왔습니다.

경제가 풀리면요. 
아빠가 같이 살자고 했어요.

'부도'라는 단어의 뜻도 제대로 모를, 한 어린 아이는 "아빠가 부도 나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부도에 대해 묻자 "갚을 거 안 갚아서 경찰서에 있대요"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빠를 계속 기다릴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IMF를 겪었던 그 시기, 직장을 잃은 가장들에게는 가혹한 겨울이었고, 가장을 잃은 아이들에겐 긴 겨울 밤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7년을 표류해 왔던 한보철강의 매각 작업이 드디어 완료됐습니다.

"그렇게 길지는 생각을 못했어요. 
7년의 세월이 갈 줄은 정말로…
재입사 권유를 받았을 거 아닙니까? 
우선적으로 (해고된) 그 분들을 초청해야죠 당연히. 
7년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고혈압도 있고 다른 지병들이 생겨서, 우선순위를 줬는데도 신체검사에서 많이 못 들어온 거 보고 너무 마음이 미어졌죠. 
정말 안타깝더라고요."

-손일만, 당시 한보철강 직원


그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우리 국민들은 '금 모으기 운동'을 펼쳤습니다.
나라에 달러가 부족하니까, 애기 돌반지, 어머니 금비녀, 목걸이 등 집 안의 모든 금붙이는 다 들고 나왔습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그렇게 다같이 힘을 모은 국민들.
IMF에서 빌린 돈을 우리나라는 단 3년 8개월 만에 다 갚았습니다.
IMF 조기졸업, 평범한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국민들이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에 정태수 회장은 어떤 시간을 지나왔을까요?


2002년 12월 정회장은 고령에 건강이 안 좋다는 이유로 특별 사면됐습니다.
그 15년 징역 중에 5년도 채 살지 않은 것입니다.
빈털터리라던 정회장은 또 한 번 법정에 서게 됐습니다.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대학에서 72억원을 빼돌려 개인적인 용도에 쓰다가 검찰에 적발된 것입니다.
그 중 4억 8천만원은 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살던 가회동 저택을 2년간 빌리는데 사용됐습니다.

이번에도 감옥에 갈 거 같으니, 정회장은 어떻게 했을까요? 
이번엔 휠체어도 아니였습니다.
해외로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몸이 아파서 일본에서 치료를 받겠다고 출국했는데, 그 때부터 12년 동안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그러다가 2019년 6월 22일.
함께 도피 중이던 막내 아들이 체포 되면서, 정회장이 드디어 한국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정태수 회장의 사망 진단서입니다.
2018년 12월 1일.
남미 에콰도르에 살다가, 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12년간 중앙아시아, 남미,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살았는데, 해외에서도 꽤 호화롭게 생활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경제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도망자로 생을 마감한 재벌, 정태수 회장. 
마지막 순간,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정태수 말년

이후 5년 5개월 동안 복역하다가, 2002년 10월 고혈압과 협심증을 이유로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나 2005년 강릉영동대학의 교비 72억 원을 횡령하여 또 잡혔고, 1심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2심 재판 도중 2007년 병 치료를 이유로 일본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그대로 해외로 도피했습니다.
그 뒤 아직도 잡히지 않은 상태다. 관련기사 나이를 고려하면 이미 사망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 2017년 6월 11일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 출연한 조용래를 통해 넷째 아들인 정한근이 "정태수가 아직 살아 있고, 자서전 초고를 만들었다."고 말한 사실이 보도되었습니다.

2019년 6월 11일에 정태수의 아들 정한근이 체포되었습니다. 
검찰에게 "정태수가 1년 전 에콰도르에서 사망했다"고 증언했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그가 2019년 6월말 현재 기준으로 최근까지 키르기스스탄에 머물렀다고 확인돼 국내 송환을 추진해 왔었다고 밝혔습니다. 어느쪽 말이 맞는지는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가봐야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셋째 아들인 정보근이 아버지 도피를 도왔다는 보도가 나왔으며, 동월 27일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또다시 보도됐습니다.

정태수가 에콰도르에서 사망한 것이 검찰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징역형 등 형벌은 범인의 사망으로 형 소멸이 되었으나, 체납세액은 상속인에게 승계되었습니다.

2020년 4월 1일 정한근은 1심에서 징역 7년과 추징금 401억 3천여만원을 선고받았습니다.

이에 정한근과 검찰이 모두 항소하였으나 2021년 1월 22일 2심 법원은 양측의 항소를 모두 기각하여 1심의 형을 그대로 선고했으며, 2021년 5월 13일에는 결국 정태수의 4남 정한근에 대한 징역 7년의 형과 401억여원의 추징금이 확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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