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칼기 폭파 공작 1987 KAL 858기 실종사건
김현희 현재 근황 꼬꼬무 100회
[글 포스팅 순서]
1. 공작1987-살아있는 블랙박스
2.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 KAL 858기 폭파사건 개요
3. 대한항공 858편 실종사건 범인
4. 대한항공 KAL 858기 폭파사건 음모론
5. 폭파사건 음모론 ①
6. 폭파사건 음모론 ②
7. 폭파사건 음모론 ③
8. 폭파사건 음모론 ④
9. 폭파사건 음모론 ⑤
10. 칼기 폭파사건 사고 기체 재수색 요청
11. 김현희 근황 프로필 나이 학력 남편 근황
12. 꼬꼬무 시즌3, 100회 게스트 이야기 손님
13. 10.26사태 박정희 대통령 암살 시해사건 김재규 궁정동 안가 가족 자녀 묘지 위치 꼬꼬무 99회 게스트
14. 고시원 방화 살인사건 꼬꼬무 옆방 살인마 묻지마 서울 강남 논현동 98회 시즌3 게스트 재방송
15. 1984년 서울 대홍수 꼬꼬무 소양강댐 집중호우 우리가 살아남은 이유 97회 게스트 시즌3 재방송
공작1987-살아있는 블랙박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시즌3')가 1987년 발생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전했습니다.
'꼬꼬무' 100회는 '공작1987-살아있는 블랙박스' 편으로, 대한민국 여객기를 노린 초유의 비행기 테러 사건을 집중 조명했습니다.
때는 1987년 12월. 스물여섯 살 최창아 씨의 해외 출장 준비는 조금 수상했습니다.
출장지는 극비사항, 준비물은 마우스피스뿐이었습니다.
더구나 신분증과 주민등록증은 모두 사무실에 두고 가라는 지시였습니다.
여권은 개인적으로 소지하지 않으며, 외부 그 누구와도 연락하지 말라는 이상한 출장 지침을 받은 창아 씨.
그녀는 바로 안기부 최초의 여수사관이었습니다.
이 출장 계획은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트린 '그날'의 이야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승객 95명과 승무원 20명을 태운 대한항공 칼기858기가 버마 랭군 상공 위치에서 실종됐습니다.
칼기KAL 858기는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아부다비를 경유하고 방콕에서 중간 급유를 한 뒤, 저녁 8시 40분 김포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다 위에서의 교신을 마지막으로 모든 신호가 끊어졌습니다.
KAL858기엔 중동의 건설 현장으로 돈을 벌러 나갔던 우리나라의 많은 근로자들이 탑승해 있었습니다.
열사의 땅에서 고된 시간을 보내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날 기대에 부풀어 있던 가장들의 귀국행 비행기가 사라졌습니다.
중간 기착지인 아부다비에서 하차한 열다섯 명의 신원과 행적을 조사하던 중, 수상한 동선으로 움직인 두 명의 승객이 포착됐습니다. 일본 여권 소지자인 하치야 신이치, 하치야 마유미였습니다.
외무부는 긴급히 일본에 신원 조회를 요청했고, 두 사람의 여권이 위조 여권이란 걸 알아냈습니다.
바레인 영사는 신속히 두 사람의 행방을 뒤쫓았습니다.
하지만 아는 정보는 이름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부다비의 호텔들에 전화를 돌리다 마침내 이들이 투숙하고 있다는 호텔을 찾아냈습니다.
자신들은 부녀 사이로, 유럽 여행을 하다 날씨가 너무 추워 잠시 따뜻한 중동으로 왔다고 남자는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남자와 필담을 나누던 영사의 눈에 한 가지 이상한 점이 포착됐습니다.
숨 막히는 대치 상황 속에서 영사가 발견한 증거는 무엇이었을까요?
다음날 이른 아침, 급히 호텔을 나서는 신이치와 마유미.
하지만 위조 여권 소지로 출국이 제지되자 그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혼수상태에 빠졌다 깨어난 마유미는 압송됐습니다.
마유미가 압송되었던 날은 당시 대통령 선거 전날이었습니다.
비밀 작전이었던 압송 작전은 만천하에 공개됐습니다.
그렇게 마유미로 관심이 쏠린 사이 기체와 생존자 수색은 종료되었고, 탑승객과 승무원 가족들의 깊은 슬픔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 KAL 858기 폭파사건 개요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 국제공항에서 출항한 대한항공 보잉 707 여객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실종된 사건입니다. KAL기 폭파 사건이라고 하면 보통 이 사건을 의미합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 지령에 의한 공중폭발'로 결론을 지었으며 조사 결과 북한 정권의 지령을 받고 일본인으로 위장한 특수공작원 김승일, 김현희 2인조가 액체 시한 폭탄으로 비행기를 폭파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사건 자체는 북한의 소행으로 명백히 결론났지만 세부적인 의혹이나 떡밥 등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음모론이 돌고 있습니다. 심지어 김현히에게 물어봐도 그녀 역시 모르는 분야라서 더욱 그렇습니다.
국책 항공사의 국적기가 공중 폭파 테러를 당해 탑승객 전원이 사망한 항공 사건사고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참사였음에도 대한민국 정부의 대응은 굉장히 미온적이었습니다.
부실한 인력으로 구성된 조사단에, 추락 위치를 잘못 짚어 엉뚱한 곳을 수색했으며 도중에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현 미얀마)과의 대립과 장비 부족 등을 이유로 열흘 만에 수색대를 철수했습니다.
이후 한동안 동체 수색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가 2019년에 들어 대구MBC의 수중 탐사에서 858편으로 추정되는 동체가 확인되었습니다. 이종인 탐사단장과 취재진들은 이것이 858편의 동체라고 확신하고 있다.
당시 대한민국은 6월 항쟁의 결과 10월 27일 9차 헌법 개정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었으며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전두환 정부가 임기를 마칠 즈음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기 불과 보름 전이었습니다.
이에 국가안전기획부는 선거 하루 전인 12월 15일 오후 공작범 김현희를 김포공항으로 압송하고 이를 언론에 대대적으로 중계하는 등의 안보 선전을 했으며 이는 김영삼, 김대중의 단일화 무산과 함께 야권의 대선 패인 중 하나로 작용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 친북 성향 논평에 의해 '북한이 항공기를 폭파한 것이 아니라 남한의 조작극이 아니냐.'는 식의 음모론이 떠돌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음모론은 21세기에는 다수의 증거에 의해 부정되고 있습니다.
역사바로세우기로 전두환, 노태우를 법정에 세웠을때도 이 사건이 자작극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으며 참여정부 시절 과거사위원회에서 재조사를 시행했을 때도 사망자 시신 미발견 등의 의문점이 제시되었기는 했으나 '북한의 소행임을 뒤집을 만한'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김현희가 방송에 자주 나오는 것에 대한 비판은 김현희의 태도에 대한 비판일 뿐 음모론과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 출신 폭파범이 아니라면 김현희의 태도에 대한 비판 자체의 논거가 없어진것입니다.
이는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원회에서 선정한 7가지 사건중 북한과 직접 연관되었음이 확정된 사건이기도 합니다.
중부지역당도 실재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김현희가 폭파했나? | O (본인진술 일치, 참여정부 시절 과거사위원회 조사결과) |
김현희는 북한 소속 공작원인가? | O (북한 방식의 치과치료 흔적이 있음) |
안기부의 폭파자작극인가? | X (증거 없음. 극소수의 음모론) |
안기부가 폭파 계획을 알고도 방치했는가? | X (증거 없음. 극우, 극좌의 음모론) |
북한은 1980년대 들어 1988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여러 작전을 실행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서울-평양 공동 올림픽을 주장하거나 대한민국의 혼란스럽고 불안한 상황으로는 올림픽을 열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음지에서는 남의 나라 국가원수 묘소에 폭탄을 설치해 대한민국 정부 관료를 죽이기도 하고 외국의 테러조직을 포섭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이번에는 대한민국 국적사 항공기를 공중폭파하는 작전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1987년 11월 12일, 김승일과 김현희 북한 공작원 두 명은 평양을 떠나 소련 모스크바로 이동했고 모스크바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이동했습니다. 이후 헝가리에 주재한 다른 북한 요원의 집에서 6일간 머물게 되었고 11월 18일에 자동차를 이용하여 오스트리아 빈으로 다시 이동했습니다.
이때 헝가리에 있었던 안내 요원은 국경을 넘으며 일본 위조여권 두 장을 넘겨주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냉전 시대에 중립국이었기 때문에 북한 여권으로도 입국이 가능했지만 친미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 두 공작원은 일본 여권을 위조해 일본인 행세를 한 것입니다.
이후 빈에 소재한 호텔에 약 9일을 머무르는 동안 오스트리아 항공을 이용하여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바그다드, 아부다비를 거쳐 바레인으로 가는 티켓을 구매했습니다. 그리고 아부다비에서 로마로 가는 또 다른 티켓 한 장을 도피용으로 구매했습니다. 그리고 11월 27일, 오스트리아로 온 다른 북한 요원이 이들에게 액체 폭발물과 기폭장치 등을 건네주었고 이들은 다음 날 바그다드 공항으로 떠났습니다.
11월 28일, 두 공작원은 바그다드에서 아부다비로 가는 비행기에 밤 11시 30분 경 탑승했습니다.
이후 자신들이 앉은 7B, 7C 부근에 폭탄을 설치하고 테러요원들은 중간 기착지인 아부다비에서 내려 도피 계획을 세웠습니다.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 국제공항에서 이륙한 대한항공의 보잉 707 기종의 KE858편(HL7406)이 UAE의 아부다비 국제공항을 거쳐 서울(김포)로 오기 전의 마지막 중간 기착지인 방콕 돈므앙 국제공항으로 비행하던 도중 인도양 상공에서 교신이 두절되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바그다드에서는 99명이 탑승하고 15명이 아부다비에서 내렸고 11명이 아부다비에서 출국수속을 마치고 858편을 탔습니다.
사건 초기에는 단순 기체 고장 및 돌풍 같은 갑작스런 기상 악화 가능성이 제기되었는데 특히 이 중에서 기체 고장의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사고기인 HL7406은 사건 10년 전인 1977년 9월 13일에는 부산(김해)을 떠나 김포로 착륙하던 중 유압 장치가 고장나 동체 착륙한 전력이 있었으며 앞에 나온 고장의 10년 후이자 사건 약 3개월 전이던 1987년 9월 2일에는 제주를 떠나 김포로 향하던 기체가 랜딩 기어 앞바퀴가 나오지 않아 동체 착륙을 하는 등의 기체 결함으로 인한 사고 전력이 있었고 수리한 후 첫 출항하여 김포국제공항으로 귀국하는 항공편이 바로 858편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고기의 고장 전력은 폭파 사건 음모론의 중요한 정황 증거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보통 주변 공항 관제탑이나 공용 통신망으로 구조 요청을 하는데 당연히 이 사건에서 조종사의 구조요청은 없었습니다. 결국 이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판단은 테러에 의한 공중폭발. 물론 TWA 800편 추락 사고처럼 전기 합선 등의 원인으로 기체가 폭발하는 현상이 있을 수 있지만 이런 경우에는 이 사건처럼 폭탄이 폭발하는 소리가 나지는 않습니다.
대한항공 858편 실종사건 범인
조사 과정에서, 중간 기항지였던 아부다비 국제공항에서 내린 일본인 남녀 승객 2명이 출국을 시도하다가 위조 여권 사용으로 검거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고, 즉시 이들이 검거되었습니다.
검거된 남성의 신원은 70세의 노인 하치야 신이치(蜂谷眞[구자체]一, 본명은 김승일(金勝一)), 여성은 25세의 하치야 마유미(蜂谷真由美)였습니다. 이들은 부녀지간으로 위장하고 있었는데 검거 후 담배갑에 숨겨둔 청산가리 앰풀을 깨물어 자살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하치야 신이치는 사망했으나 하치야 마유미는 앰풀을 깨물기는 했지만 재빨리 빼앗기는 바람에 자살에 실패했습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위조된 일본 여권을 사용했기 때문에 일본으로 송환되어 조사를 받을 예정이었으나 대한민국 정부에서 청산가리 앰풀을 깨물어 자살하는 것은 북한의 수법임을 증명하여 하치야 마유미를 최대한 빨리 한국으로 압송할 수 있었습니다.
사건 수사를 담당한 안기부는 1988 서울 올림픽 방해를 위한 북한의 테러로 결론지었고 추가 조사 결과 하치야 마유미로부터 자신의 본명은 김현희이며 북한 조선로동당 대외정보조사부의 공작원으로서 지령을 받고 대한항공 858기를 폭파했다는 자백을 받아냈습니다. 또한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비롯하여 김현희가 대한항공 858편에 잠입하기 위해 경유한 나라들에서 정보를 받은 결과 북한의 중앙통신의 베오그라드 지부에서 김현희를 목격한 정보도 확인했습니다.
시한폭탄과 액체 폭발물을 승무원들이 발견하기 어려운 곳에 몰래 두고 중간에 내리는 수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내린 이후 해당 비행기는 시한폭탄에 맞춰진 시간에 도달한 인도양 상공에서 폭파되었습니다.
김현희가 자살에 실패하고 남한으로 귀순하자 김정일은 북한에 남아 있던 김현희의 가족들을 모두 요덕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이는 1995년 성혜림의 언니인 성혜랑이 아들 이한영과의 전화 통화에서 얘기했던 내용이라고 합니다.
당시 신문 기사. 또한 김정일은 자살에 실패하고 남한으로 전향한 김현희의 소식을 듣고 여자는 요물이라는 독설과 함께 김현희가 속했던 대외정보조사부(35호실)에서 여성 공작원들을 모두 방출하고 김현희를 교육한 노동당 조사부간부들까지 요덕 정치범 수용소로 보냈다고 합니다. 김현희의 육촌 친척까지 평양에서 지방으로 추방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규정했고 김현희는 재판에서 형량을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추후 음모론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막고자 일종의 살아있는 증거로 남겨 두려는 목적,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과 관련된 정보를 조금이라도 김현희로부터 더 캐내야 하는 차원에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재량으로 전격 사면을 받았습니다.|
이후 본인의 회고록을 저술하기도 하고 가끔씩 안보 강연에서 모습을 나타내는 등 안기부와 국정원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3년 1월 15일에는 MBC에도 출연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수뇌부에서 특전사, 707특임대를 북한에 침투시켜서 북한의 핵심 표적에 대해 응징하는 보복작전을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작전 계획이 실제로 실시되진 못했습니다.
대한항공 KAL 858기 폭파사건 음모론
김현희는 북한의 간첩이 아니며 KAL기 폭파 사건은 전두환 정권이 노태우를 당선시키기 위해 저지른 날조극이라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합니다.
사건 2년 뒤인 1989년에 대한민국의 사회과학출판사 '도서출판 힘'에서 반미청년회 자주언론팀 수집 자료를 토대로 낸 책 <의혹 속의 KAL기 폭파사건>을 필두로 하여 이후 가톨릭계 뉴스인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는 안기부 소행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내기도 했습니다.
하필이면 13대 대선 직전의 가장 민감한 시기에 터진 테러라서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승리를 위한 대한민국의 자작극이라는 음모론이 많이 퍼졌습니다.
하지만 전직 주영국북한대사관 공사이자 현 국회의원인 태영호에 의하면 북한의 소행이라고 인증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김현희는 북한 대외경제위 소속 김원석의 딸이며 그 당시 "대외경제위 김원석의 딸이 KAL기 사건을 일으켰고, (자살에 실패하며 체포되어서 그런 것인지) 그 가족들은 모두 수용소로 갔다"는 이야기가 북한에 퍼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평양외국어대학과 평양외국어학원은 총장이 동일인물인데 김현희는 평양외국어대학 출신이고 자신은 평양외국어학원 출신이라고 밝힘으로써 이 사건이 대한민국 정부가 스스로 만들어낸 자작극이 아니라는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하면서 음모론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습니다.
초기 음모론은 단순 사고로 실종된 대한항공기를 남한 정부에서 북한의 소행으로 몰고 갔다는 단순한 이야기였는데 점차 음모론이 정교해져서 '사실은 남한에서 일부러 폭파시켰다.'로 확대되었습니다.
실제로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에서 새롭게 조사에 착수했을 때 이러한 종류의 음모론 소설이 난무했습니다.
국민의 정부 당시 월간 인물과 사상에 글을 투고한 전직 공무원 아저씨 등 일부 유족들은 지금도 '김현희를 자신에게 직접 넘기면 진상을 밝히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유족들 앞에 나타난 이철승이 대놓고 빨갱이 드립을 날리다가 스스로 욕처먹을 일거리만 늘린 적이 있습니다.
음모론의 핵심은 대한항공 858기 탑승자의 시체가 한 구도 발견되지 않았고 블랙박스도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출발합니다. 좌우지간 증거가 개인의 증언뿐인데 은폐를 위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비단 공중 폭발이 아니더라도 망망대해에 떨어진 항공기는 파편이라도 발견하면 다행인 경우가 많습니다.
폭파사건 음모론 ①
다른 의문점은 김현희의 폭약의 양에 대한 증언 신빙성입니다.
범인 당사자의 증언으로는 컴포지트 250g이라고 했는데 사실 이 250g이 문제가 되는 것은 폭파 효과가 아니라 은닉 수단이었습니다. 이 폭파 과정에서 언급된 양은 C4 350g을 파나소닉 휴대용 라디오에 숨기고 액체폭탄인 PLX 700cc는 술로 위장했다고 언급을 했습니다.
그런데 C4 350g이면 파나소닉 라디오의 내부를 텅 비워야 간신히 들어갔는데 김현희는 라디오가 정상 작동했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C4 350g 설이 파기되었고 250g으로 줄어들어서 다시 발표되었습니다.
나중에 이 분량이 안기부 추정치로 드러나기도 했는데 당시 수사본부장이였던 정형근 한나라당 전 의원는 김현희에게 들은 것은 '라디오에 고체폭약을, 그리고 술병에 액체폭약을 넣었다.'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발언을 듣고 그럼 고체는 C4이고 액체는 PLX로 결정짓고, 이 정도 폭발이 되려면 얼마나 필요한가를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추정해서 용량을 발표했다는 것입니다.
즉, 비행기가 터질 만한 용량을 설정한 것이 초기의 350g, 700cc였다는 것이고 350g이 라디오에 은닉이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라디오가 정상 작동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용량인 250g이 다시 설정된 것입니다.
이 폭약량의 변화에 대해서는 이후 청문회에서 다시 언급할 정도로 논란의 핵심에 서 있었습니다.
다만 고성능 폭약이라면 250g으로도 항공기 대파가 가능하다는 반론도 있으며 대파되지 않더라도 충분히 치명적이기 때문에 이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순항고도에 오른 항공기는 작은 동체 균열로도 충분히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이 여러 항공사고로 증명되었고 여압이 깨진 것만으로 조종사가 기절하여 추락한 사고도 있었기에 350g이든 250g이든 항공기 폭파라는 사실 자체가 뒤집힐 정도의 오류는 아닙니다.
폭파 지점에서 좀 먼 곳의 승객은 시체가 온전할 가능성은 있지만 폭발 위치 지점은 뱅골만 한복판으로 한국의 서해, 동해, 남해 면적을 합친 것보다 더 넓은 바다이며 게다가 정확히 어디서 폭파되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체를 1구라도 찾으면 그것이 더 용합니다. 블랙박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폭파사건 음모론 ②
또한 문제가 되었던 것이 유류물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비행기 폭파는 확실했고 김현희도 잡아 놓았는데 폭파된 비행기의 파편이 발견되지 않으니 증거가 없던 것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정의당의 똥줄이 타들어가는 상황이었는데, 이 때 증거물 2가지가 발견되었는데 많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미얀마 선적 다곤 1호에서 발견된 KAL 858기 구명보트의 상태에 관한 문제 제기였습니다.
1) "구명보트의 탑재 위치가 김현희와 김승일이 탑승한 좌측날개 7B, 7C에 가까우나 어떻게 무사한가?"
- 이에 국정원 진실위는 국정원에 보관 중인 구명보트를 직접 조사한 결과 첫번째 "구명보트가 좌측날개 7B, 7C로부터 멀리 있었으며, 내부 천장 칸막이가 완충제 역할을 하였음."
2) "구명보트에 왜 폭파흔이 없는가?"
- 두번째 "당시 국과수의 감정대로, 국과수의 감정서에 구명보트에 화약흔이 없었음. 폭발 당시 압력이나, 해상에 떨어질 때 충격으로 내부의 펌프가 훼손된 것으로 추정되나, 이것으로 KAL 858기가 폭탄테러에 의해 폭파되지 않는 증거로 볼 수 없음"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유류품은 사건 이후 2년이 지난 상황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때의 발견품은 기체 파편이었습니다.
가장 발견 확률이 낮은 기체 파편, 그것도 정확하게 증거가 되는 자료만 딱 발견된 것입니다.
일본 아사히 TV에서 미국 MIT 대학 항국우주학과 존 한스만 박사는 이 파편에 대해서 폭발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습니다.그리고 이 자료는 서둘러 폐기해 버려서 또 한 번 의구심을 모았습니다.
폭파사건 음모론 ③
사실 이런 모든 음모론의 원인은 폭파범인 김현희 본인에게도 있었는데 김현희는 철저하게 훈련받은 북한 공작원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말이 오락가락하였고 행적에도 의문이 많았습니다.
앞서 언급한 폭탄 양에 대해서도 김현희의 입에서 나왔고 김현희가 증언한 사소한 개인사는 모조리 거짓으로 밝혀졌습니다. 조작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 거짓으로 밝혀지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습니다.
예를 들어서 북한 내 주소를 평양시 문수구 문수동이라고 했는데 평양에는 문수구역이나 문수구, 문수동이 없었습니다.
부친의 직업을 앙골라 주재 북한무역대표부 수산대표라고 밝혔는데 이 역시 북한에 없는 직책이었습니다.
가장 압권이 김현희 사진조작 사건이었습니다.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라는 주장의 핵심은 당시로서는 북한에서 찍은 사진에 김현희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자서전 초판에서도 출판 직후부터 위의 주소 같은 오류가 수십군데에서 발견되었고 이 오류들이 모두 수정된 재판이 다시 나왔습니다. 이 자서전도 소설가 노수민이 대필한 것이라는 것이 나중에 알려졌지만 기본적으로 김현희의 구술을 받아서 쓴 것인데 왜 이렇게 기초적인 신상명세부터 오류가 많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즉 김현희는 오랜 기간 강도 높은 특수공작원 교육을 받은 엘리트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주 사소한 데서 허술한 측면을 너무나도 많이 드러냈습니다. 이와 같이 굳이 속일 필요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 자신의 유년 시절 및 가족 관계와 같은 정보의 진위성에 대한 의문으로 인해 사건이 정부측에서 꾸민 것인지 여부와는 별개로 일부에서는 김현희를 중심으로 한 사건 진상 재규명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사건을 추적한 일본 기자를 아무런 설명도 없이 한국 입국을 막아 버린 것도 음모론을 부채질했습니다.
여기에 김현희가 어린 시절 화동을 했다고 했다가 논란을 일으킨 사진에 대해서 나중에서야 실수라고 번복했기에 음모론을 정부가 더 만들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김현희가 결혼한 상대가 사건 당시의 수사관인 것과 항공기 폭파 사건을 일으킨 게 사실이라면 왜 사형 당하지 않았냐는 것, 그리고 그 당시 땡전뉴스였던 언론들이 김현희에게 묘하게 호의적이었다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북한이 간접적으로 이 사건을 일으켰음을 시인했다고 합니다.
내용인즉슨 북한의 리근 외무성 미국 국장이 남한 측 관계자와 사석에서 대화 중에 "우리는 KAL기 폭파사건 이후로 테러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발언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2022년에는 북한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의원이 북한 외교 라인은 처음에 KAL기 폭파 사건이 본인과 무관했다고 믿었고 그렇게 국제사회에 지속적으로 항변했으나 어느 순간 윗선에서 그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전했습니다.
당시 사건 담당 공안검사였던 이상형 변호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철저한 증거주의 및 논리에 입각하여 김현희의 선고가 이루어진 것이며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고 재판에서만 공개된 확실한 증거들은 훨씬 많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특히 사진의 경우 문제가 있었던 건 맞지만 곧바로 제대로 된 다른 사진이 확보되어 실제 증거 확보에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음모론에서 자꾸 물고 늘어지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김현희 압송 시점 또한 대선을 하루 앞둔 것은 바레인 당국에서 압송 허가를 내줬을 때 시점이 하필이면 그때였고, 가뜩이나 어렵게 이뤄낸 허가인데 압송을 곧바로 진행하지 않았다간 기회가 사라질 수도 있다 보니 한국 일정과는 관계 없이 가능한 대로 당장 데려오는 것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김현희를 압송해서 한국 공항에 도착하는 장면을, 그것도 선거 전날에 공개적으로 생중계한 것을 볼 때 이 부분은 대통령 선거를 의식한 작전이었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그리고 사형당할 김현희가 갑작스레 사면된 이유는 '그녀 자체를 살아 있는 증거'로 남기고자 한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판단 때문입니다. 김현희가 재판받을 당시 이미 안기부 측에서 운동권을 중심으로 '김현희는 가짜'라는 내용의 음모론이 퍼지는 것을 것을 감지했으며 대통령의 재량으로 김현희를 사면시켜 안기부의 보호를 받으며 안보강연 등의 활동으로 살아가게 만든 것입니다.
만약 정말 안기부가 그녀를 이용해서 조작을 하려 했다면 차라리 사형 집행을 서둘러 영원히 입막음하는 것이 훨씬 더 완벽했습니다. 만약 당시 김현희가 곧바로 사형되었다면 음모론은 그녀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식으로 변형되어 퍼졌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건 정말 음모론 중에서도 탄탄한 기초가 되기 때문에 실체적 진실을 알지 못하여 미궁으로 빠지고 북한의 테러라고 믿는 쪽과 안기부의 조작이라고 믿는 쪽이 극심한 대립을 하며 사회 혼란만 가중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런 혼란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도 사건이 더더욱 입에 오르내리며 유가족들은 더더욱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다만 살아 있는 증거로 남기고 싶었다면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만 시켜서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죄에 대한 대가는 치르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음모론과는 별개로 '김현희 덕에 선거에서 이겼으니 고마워서 사면해준 것'이라고 비꼬는 의견도 상당합니다. 실제 사면 과정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김현희의 감형안도 거론되긴 했으나 수감 중 심경의 변화가 생길 수 있고 관리가 어려우며 감형 후 다시 사면하는 것은 부담스럽다는 세 가지 이유로 사면되었다고 합니다.
참여정부의 재조사에서도 북한의 명백한 테러로 다시 한 번 결론이 났기에 안기부 자작극 혹은 미국폭파론 같은 음모론을 믿는 사람은 이제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한겨레에서도 2018년 사설에서도 폭파범 김현희씨라고 정확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무고한 민간인들을 대량 살상한 테러범인데도 혼자 살아남아 반공투사처럼 활동하는 김현희의 행동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많습니다.
폭파사건 음모론 ④
김현희가 진짜 북한 간첩인지에 대한 의문에 하나의 답을 줄 만한 사건이 납북 일본인 타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와 관련된 논의입니다.
1970년대부터 일본에서는 기이한 실종 사건이 빈번히 발생했습니다.
대부분이 젊은 20대 남녀였으며 모두 해안가 근처에서 실종되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납북 문제가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1980년 산케이신문의 보도였는데 북한이라는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으며 대한민국 정부 측에서 이 사안에 대해 일본 정부 측에 귀띔을 했지만 일본에서는 사실상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웃어넘길 정도였고 누구도 인정조차 하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에 들어 일본 경찰과 공안 당국은 본 문서의 사건의 주범 김현희의 증언을 시작으로 북한 출신의 탈북자와 망명한 북한 공작원, 북한으로 갔다가 돌아온 재일 한국인, 일본인의 증언을 토대로 북한 정부가 일본인들을 계획적으로 납치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타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 1955-1986?, 당시 22세)는 1978년 6월 29일 납치되었습니다.
도쿄의 음식점 점원으로 1984년 오사카 중국 요리점 요리사였다가 납북된 하라 타다아키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러나 1986년 남편이 병사하고 같은 해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홍수로 묘지가 유실되었다는 것이 북한의 주장이입니다.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주범 김현희가 '이은혜라는 여성에게 일본인처럼 행동하는 법을 배웠다.'고 증언하자 몽타주를 그리게 하여 1988년 일본 각지에 '1980년 이전에 행방불명된 이 여성을 알고 계십니까?'라는 포스터를 붙이고 대대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1991년 들어 1978년에 실종된 타쿠치 야에코가 '이은혜'와 동일인인 것으로 추정했으며 김현희와 공작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던 교관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일본 조사단이 서울에 수감되어 있던 김현희와 직접 면회해 동년배 여성의 사진 10장을 뿌리고 이 중에서 교육관이었던 사람을 찾으라고 지시했을 때 김현희가 타쿠치 야에코의 사진을 보고 정확하게 '이 사람'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타쿠치 야에코=이은혜가 맞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다만 북한은 타구치 야에코가 이은혜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북한이 일본인을 십수 명을 납치하고 간첩 양성 등에 활용한 사실에 대해서는 1980년대에는 한국, 일본 당시 모두 그다지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김현희의 이은혜라는 일본인에 대한 증언 이후 1988년경 일본에서 어마어마하게 큰 이슈가 되었고 본격적인 조사가 들어간 것입니다.
김현희의 증언으로 몽타주를 그린 이후 일본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조사하다 보니 타쿠치 야에코라는 일본인 실종자와 유사하다는 것이 알려진 것입니다. 이후 1991년 일본의 조사단에 의해서 김현희가 10장의 사진 중 타쿠치를 정확히 찾아냈으니 일본 정부는 타쿠치가 납북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거기에 2002년 북일정상회담에서 북한 측이 납북자 신원을 공개하면서 타쿠치 야에코의 납북도 공식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폭파사건 음모론 ⑤
애초에 진상조사 자체가 유족들의 줄기찬 요구로 시작되었습니다.
참여정부 시기 국정원의 고위관계자는 피해 유족의 지속적인 조작 의혹 제기에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민관합동 조사를 벌여 북한의 지령에 의한 테러로 결론을 냈다고 밝혔습니다.
그 이전에 승객 유가족들의 사고 현장 방문 계획에 대해 정부가 수색에 방해가 된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2009년에 김현희가 자신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준 납북 일본인 가족과 만나고 납북자 인권에 대해 언급을 하는 활동을 했는데 김씨가 유족들에게 사과는 하지 않은 채 납북자 인권을 말하는 데 대하여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고 구제적인 증거를 제시해 폭파사건의 진상을 밝혀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김현희가 '가짜 공작원'설을 언급하며 방송에 자주 출연하자 유족들은 크게 분노했습니니다.
유족들은 김 씨의 '가짜 몰이'에 대해 반박을 하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반응을 보이며 공개토론을 제안했습니다. 김 씨가 직접적으로 사과한 적도 없고 의문점에 대해 답변한 것 하나 없으면서 이제와서 자신들을 좌파 종북으로 몰아간 이유가 뭐냐고 맹공했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자 인수위에 재조사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2017년에도 진상규명대회와 추모제가 열렸는데 김현희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2018년 07월 23일 KAL858기 희생자 가족회와 진상규명 대책본부에서 김현희에 대해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장을 제출할 예정으로 전해졌습니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을 지속적으로 종북좌파로 매도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2018년 11월 20일 KAL858기 가족회와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대책본부는 전면적인 재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당시 사건 조치과정에서 안기부가 사건을 주도했다며 제주 4.3 사건이나 5.18 민주화운동, 세월호 참사에 버금가는 국가적 재난이던 만큼 다른 사건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해야 하며 피해자들의 명예도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칼기 폭파사건 사고 기체 재수색 요청
2018년 11월 20일, 사고 31주기를 앞두고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사고 현지 위치의 전면 재수색과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습니다.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이 사건의 대처 등에 대해 재조명하는 방송을 2018년 11월 29일에 진행했습니다.
이어 KAL858의 사고 잔해로 추정되는 물체를 찾았다고 발표했습니다.
이후 유가족 모임인 'KAL858기 가족회'는 정부에 수거한 잔해의 검증과 사고 지역에 남아 있는 잔해들의 국내 반입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국무총리실에 제출했습니다.
가족회는 “정부와 대한항공사 사장은 지난 1987년 12월과 1993년에도 유해유품잔해들을 찾아 인도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부속서 13에 새로운 잔해와 중요한 잔해가 사고 지역에서 발견될 경우 재수색과 재조사를 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고위관계자는 KAL기 폭파사건이 테러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재수색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말했습니다.
2019년에 대구MBC가 사건 32주기를 맞아 이 사건에 대한 연속 보도를 하면서 사건을 재조명하기 시작했습니다.
2019년 2월 19일 유족들은 대한항공 서소문빌딩 앞에서 사고 지역에서의 재수속을 통해 희생자 115명의 유골과 유품 수색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국무총리실을 중심으로 추가 수색이 가능한지, 수색에 나선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국토교통부, 기획재정부 등과 협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2020년 12월 3일 통과된 2021년 국가 예산 중 KAL 858기 수색 예산 23억 원이 책정되었습니다.
외교부는 여건이 마련되면 동체수색을 시작할 것이라 밝혔습니다.
2020년에 미얀마 안다만 해저에서 KAL 858편 동체로 추정되는 잔해를 32년 만에 최초로 발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2020년 1월 23일, MBC 뉴스데스크에서도 이를 비중 있게 보도했습니다.
취재기자에 의하면 원래는 위안부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미얀마의 위안소에 대해 취재하러 갔다가 의도치 않게 현지의 저인망 어선 어부들을 통해 추정동체가 있는 구체적 사고 위치 좌표를 입수했고 수심 50m 지점에서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또한 동체가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어 블랙박스를 회수할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보인다는 MBC 보도가 잇따랐습니다.
이후 MBC는 2020년 5월 8일자 방송을 통해 지난 2월 탐사에서 KAL858기의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엔진과 동체 잔해를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히며 해당 영상들을 공개했습니다.
추가 탐사 결과 비교적 비행기 동체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해당 보도에 나온 전문가들은 1980년대 말 정부 발표대로 기체가 공중폭발하거나 조종성 상실 후 통제불능 상태에서 급강하했다면 형태가 이렇게 보존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엔진이 날개에 붙어 있는 것으로 볼 때, 폭발로 인해 기체에 이상이 생겼지만 조종성은 조금이나마 유지되어 비상착수를 시도했으나 비상착수에 실패해서 추락했을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물론 동체가 온전하게 남아 있다는 이유만 가지고 이것이 테러가 아닌 기체결함으로 인한 추락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단적인 예로, 이집트 상공에서 테러로 추락한 코갈림아비아 항공 9268편 테러 사건에서도 기체가 전소되었지만 동체는 보존되었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라디오 속에 숨겨들어온 컴포지트 250g이라는 폭약의 양이 너무 작아서 과연 폭파가 사실인가 싶은 의문이 나왔던 만큼 폭약 양이 적어서 파손은 있었지만 큰 손상은 없어서 비상착수를 시도했으나 실패해서 추락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20년 11월 27일 MBC는 정부가 30년만에 KAL기 858사건을 재조사에 착수해 10달간 이어진 미얀마 정부와의 협의 끝에 동체가 발견된 현지에 수색조사단을 파견하기로 합의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김현희 근황 프로필 나이 학력 남편 근황
김현희의 나이 및 생년월일은 1962년 4월 15일생으로, 현재 61세입니다.
고향은 평안남도 대동군 청룡면이라고 합니다.
김현희 학력은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과 같은 학교 동문 격이라고 합니다.
평양외국어대학과 평양외국어학원이 대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장 아래 공동 운영되는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김현희 근황은 1997년 12월 29일 자신의 경호를 맡았던 안기부 직원과 결혼하였습니다.
4년 연상의 정모 사무관은 2년 전 김현희가 그에게 "You는 왜 결혼하지 않으세요?"라고 물었고 이에 정모 사무관은 김현희에게 "You에게 마음 뺏겨 정신이 없다. 다른 여자를 쳐다보지 못할 것 같다"면서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이에 김현희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숙였다고 합니다.
김현희와 결혼하려면 사표를 내야 한다는 안기부의 지침에 따라 정모 씨는 결혼 직전 사표를 제출하였습니다.
결혼 이후 1남(나이: 2000년생 추정) 1녀(나이: 2002년생 추정)를 출산했다고 합니다.
이후 맨 위에 나온 마유미의 삶 인터뷰에 출연하는 등 가끔 인터뷰나 강의에 참여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안기부(옛 국정원) 사무관 출신인 정모 씨는 본래 김현희 수사에 참여했던 남편의 근황은 2021년 사망했다고 합니다.
1993년 자신의 자서전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 의 출판기념회 참석을 위해 미국 비자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특별사면과는 별개로 미국의 출입국 규정은 테러리스트들의 비자 발급을 금지하기 때문입니다.
2014년 말레이시아 항공 370편 실종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연합뉴스TV와 TV조선에서 이 사고를 다루며 김현희를 전문가라고 모셔와 방송해서 상당한 욕을 얻어먹었습니다.
아직 피해자들의 유족들에게는 트라우마가 남아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연시켜 각종 커뮤니티와 SNS 등 인터넷에서는 '연쇄 살인사건 발생하면 유영철을 전문가로 부를꺼냐' 등 엄청나게 난리가 났지만 김현희를 초청한 언론사들은 이렇다 할 입장 표명이나 기사 삭제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비는 양재시민의 숲에 있습니다.
김승일의 유해는 파주 적군묘지에 묻혔습니다.
묘비에는 '무명인'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김승일이라는 이름 자체도 가명일 가능성이 있어서 이름을 표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훗날 드러난 사실은 김승일은 '이 공작은 성공하기 어려울 뿐 만 아니라 실패할 경우 "공화국"에 큰 타격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작전에 대해 반대했다는 것입니다. 작전 지시를 하는 '최 과장'에게도 "작전을 시행하는 자신과 김현희 뿐만 아니라 공화국 전체가 곤란한 입장이 됩니다.
당신이 책임을 질 것이냐"라고 대놓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 과장 역시 명령에 따를 뿐이라며 김승일의 기를 꺾었고, 김승일은 체포 직후 자살했으나 결국 그의 예측대로 일이 돌아갔습니다.
꼬꼬무 시즌3, 100회 게스트 이야기 손님
100회를 맞은 '꼬꼬무'에 이야기 손님으로 배우 이정은, 이이경, 옥주현이 방문했습니다.
이정은은 장현성의 이야기 친구로 찾아왔습니다.
'그날'의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한 이정은, 연신 안타까움을 표하다 결국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옥주현은 장도연의 이야기 친구로 등장했습니다.
옥주현은 사건의 실체가 밝혀질 때마다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장성규의 이야기 친구는 이이경입니다.
날카로운 통찰력과 판단 능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이야기의 퍼즐을 맞추는 모습을 보인 이이경.
하지만 그런 그조차 '그날'의 이야기에 충격에 빠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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