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 이야기

1984년 서울 대홍수 꼬꼬무 소양강댐 집중호우 우리가 살아남은 이유 97회 게스트 시즌3 재방송

by 충격대예언 2023. 10. 12.

1984년 서울 대홍수 꼬꼬무 소양강댐 집중호우 우리가 살아남은 이유 
97회 게스트 시즌3 재방송

[글 포스팅 순서]

1.우리가 살아남은 이유-1984 서울 대홍수
2. 1984년 태풍 준의 집중호우
3. 1984 대홍수, 소양강댐 붕괴의 서막?
4. 서울을 사수하라
 5. “발전소, 포기하겠습니다”
6. 예상치 못한 복병 산사태
7. 삶과 죽음의 경계
8. 100일 안에 복구하라
9. 꼬꼬무 시즌3, 97회 게스트 이야기 손님

10. 인천 모자 살인 사건, 꼬꼬무 형사 수첩 속 가족 사진 아들의 기묘한 여정 범인 근황 96회 게스트
11. 꼬꼬무 무적가족과 스물네번째 불 대구 모자 연쇄 방화사건 24번 95회 게스트 재방송
12. 김태촌 뉴송도호텔 폭행사건 꼬꼬무 박검사와 범서방파 두목 조폭 살인청부 진실 권상우 피바다 94회
13. 꼬꼬무 이철수 사건 이상한 나라의 철수리 프리 철수리 유재건 변호사 란코 야마다 93회 게스트
14. 미국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 꼬꼬무 범인 조승희 외톨이가 보낸 소포 90회 게스트

 

 

우리가 살아남은 이유-1984 서울 대홍수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97회에서는 1984년에 발생한 '서울 대홍수'를 다루었습니다.

때는 1984년, 서울 풍납동의 대한유도학교는 LA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의 배출로 온 학교가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학교에는 메달리스트를 꿈꾸는 학생들로 가득했습니다. 
3학년 호룡이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9월 1일, 훈련 시간에 맞춰 눈을 뜬 호룡이는 기숙사 밖 풍경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밤새 비가 많이 오는 것 같더니 어느새 본관 건물 1층까지 잠겨버렸던 것입니다. 
차츰차츰 밀려오던 물은 순식간에 건물들을 집어삼켰습니다.

한편, 모처럼 일찍 퇴근길에 올랐던 국립의료원 외과 레지던트 장윤철 씨도 생각지 못한 광경을 마주했습니다.
윤철 씨 집이 있던 성내동 일대가 모두 물바다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윤철 씨와 가족들은 갖가지 살림살이를 챙겨 높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대피해야 했습니다.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습니다.
비는 그치질 않고 서울 곳곳의 하천이 역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엔 이례적으로 홍수경보까지 발효된 상황이었습니다.
한강 수위가 기록적으로 상승했고 뉴스에선 24시간 수해 특보가 이어졌습니다.
침수와 산사태로 사망자가 무려 100명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최악의 홍수로 기록될 만큼 심각했던 그날. 
물바다가 된 서울의 운명을 쥐고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춘천의 소양강댐이었습니다. 
세계 5위 규모의 사력댐인 소양강댐은 1973년 준공 이래 수도권 지역의 홍수 조절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한강을 책임지는 소양강댐에도 비상이 걸렸습니다. 
춘천 지역의 폭우로 소양강댐의 수위도 점차 한계치에 육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칫하면 소양강댐이 무너질 수도 있는 긴박한 상황. 
그러나 지금 수문을 열고 물을 방류하면 서울은 더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소양강댐을 지키려는 직원들과 서울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한강홍수통제소. 
폭우 속에서 춘천과 서울의 운명을 건 팽팽한 줄다리기가 시작됐습니다.

 

 

1984년 태풍 준의 집중호우

1984년 8월 거대한 비구름을 몰고 한반도에 상륙한 태풍 '준'이 8월 31일부터 9월 2일까지 서울과 경기도, 강원도 등 중부지역에 시간당 50 mm의 집중호우를 뿌렸습니다. 9월 1일 하루만에 서울에 268.2 mm의 비가 내려 이 당시 기상 관측 이래 서울 1일 최고 강수량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또한 속초에도 이 때 3일간 650 mm의 비가 내리는 등 중부지역을 비롯한 전국 대부분 지역에 집중호우가 쏟아졌습니다. 중부권 곳곳에서 200 mm가 넘는 폭우로 건물, 도로, 지하시설, 농경지 침수와 산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 당시 홍수는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남한이 홍수 피해를 입자 북한 측에서 적십자사 간 소통을 통해 쌀 5만 석, 천(옷감) 500 km, 시멘트 100 kt[1]과 기타 의약품 등 수해 구호물자를 보내줬고 이후 남북관계가 한층 훈훈해진 사례가 있습니다. 그 결과 1년 뒤인 1985년 9월에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 상호교환 행사가 서울과 평양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였습니다.

1984년 수도권 폭우 당시 정부와 서울시 당국은 '천재'라고 주장했고, 이보다 더 큰 피해가 발생한 이번 폭우에 대해 똑같이 책임을 회피한 탓에 주민들의 혈압을 오르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가장 큰 피해를 두 번이나 받은 망원동 주민들이 시 당국과 수문 시공사 현대건설 등을 상대로 소송을 벌여 1987년 1심을 비롯해 1990년 3월 2심, 동년 8월 대법원 상고심에 이르기까지 전부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망원동 수재사건) 이들이 승리하는 데에는 인권변호사 조영래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가장 큰 문제점은 서울의 치수 시스템이 주먹구구식으로 움직였다는 점과 일기예보가 엉터리였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7월 27일 5시부터 1시간동안 50 mm에 가까운 폭우가 쏟아졌는데 그때까지 서울에는 어떠한 기상특보도 발효되지 않았고 물폭탄이 왕창 쏟아지고 난 뒤에야 호우경보가 발령돼 논란이 됐습니다. 한강 개발공사가 1982년부터 진행중이었다가 이때 1987년의 폭우로 더 속도를 내게되었습니다.

1984 대홍수, 소양강댐 붕괴의 서막?

시간당 50㎜씩 퍼붓는 비는 사람도, 댐도 버티기 어려웠습니다.
준공 11년이 된 소양강댐은 아슬아슬한 생존의 끈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비가 언제까지 더 내릴 지 예측하기 어려웠던 그날.
K-water 소양강댐지사 직원들은 8월 31일까지만 해도 이 비의 여파를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지금 내리는 이 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동양 최대 규모의 사력댐은 준공 11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1984년 8월 말에서 9월 초까지 내린 중부지역의 집중호우는 소양강댐의 안전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습니다.
댐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비가 내렸고, 상류부터 흘러온 물은 소양강댐의 계획홍수위 198m를 넘나들었습니다.
댐 만수위는 203m.
물이 댐을 넘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콘크리트 댐은 물이 넘치는 정도에서 그치지만, 사력댐은 얘기가 다릅니다.
모래와 자갈을 쌓아 만든 터라 댐이 터질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국가안보 차원에서 소양강댐 사수에 나섰습니다.
이미 서울과 한강유역의 침수도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춘천권에선 “소양강댐이 무너질 수도 있다”며 술렁였습니다.
춘천시민들은 통제된 정보 속에 아무 것도 모른 채 며칠 밤을 새워야했습니다.
그 살벌했던 1984년 늦여름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1984년 소양강댐 수문 개방 당시 소양강댐 지사 정문 앞 모습. 바로 옆 도로까지 물이 차 있다. 사진: 강원도민일보

 

 

서울을 사수하라

소양강댐은 200년 빈도의 홍수에 맞춰져 설계됐습니다.
준공 당시만 해도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예측은 불과 11년 만에 여지없이 깨졌습니다.
그 전조는 준공 5년 후 발생했습니다.

소양강댐은 1978년 8월 28일 오후 4시 처음으로 수문을 열었습니다.
당시 늦은 장마로 댐 수위가 188.32m까지 오르자 댐 관리소에서 높이 100m, 길이 13m의 수문 5개를 열어 10분 동안 25만5000t의 물을 방류했습니다. 춘천학연구소가 펴낸 ‘춘천인 증언록 댐과 춘천’을 보면 ‘수문 밑 시멘트 바닥의 낙차 지점에서 30m 높이의 물기둥이 치솟았고 100m의 포물선이 그려지자 무지개가 만들어졌다’고 했습니다.

소양강댐의 본격적인 위기는 준공 11년만에 닥쳤습니다. 
1984년 8월 말 이미 중부지역에는 며칠째 호우가 내린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태풍 ‘준’(1984년 8월28일~8월31일)이 덮치면서 빗줄기는 위협적으로 변했습니다. 
시간 당 50㎜의 비를 뿌렸습니다. 
당시 일 최다강수량을 보면 속초 314.2㎜, 부산 246.5㎜, 울산 233.2㎜, 홍천 215.9㎜, 강릉 204.5㎜에 달했습니다.

태풍은 지나갔지만, 1984년 9월1일~3일까지 강원산간에 폭우가 집중됐습니다. 
소양강댐으로는 설악산과 인제, 양구, 홍천 일대에서 물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춘천을 포함해 소양강댐 상류지역은 8월 말 일주일 동안 200㎜가 넘는 비가 끊이지 않고 내렸습니다.

운명의 9월1일, 인제 상류지역에 하루동안 275.8㎜, 춘천은 260.0㎜의 비가 내렸습니다. 
2일에도 인제는 127.1㎜, 춘천은 103.1㎜의 비가 또 쏟아졌습니다. 
이틀간 내린 폭우로 인해 소양강댐은 한계치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1984년 8월31일부터 9월4일까지 내린 집중폭우로 서울 대홍수가 발생했다. 한강물이 역류해 건물 2만채가 침수되고 9만명이 긴급대피했다. 전국에서 사망 189명, 실종 150명, 부상 103명, 재산피해 2502억원, 이재민 23만명이 발생했다. 사진은 서울 성내동 일대가 물에 잠겨있는 모습. 사진: 한국일보

당시로서는 1904년 중앙기상대가 생긴 이후 최고 기록이고 1945년 해방 이후 세번째 대홍수였습니다.
1984년 대홍수로 재산 피해만 2000억원.
서울을 중심으로 주택 2만채가 침수됐고 9만명이 대피했습니다.
강원과 서울, 경기지역에서 190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무서울 정도로 퍼붓는 비에 한국수자원공사 소양강댐지사는 며칠째 비상근무를 해야 했습니다. 
당시 기능직 6급이었던 박명학(67)씨도 그 중 한 명 이었습니다. 
박명학씨는 1980년 1월부터 2017년 6월30일까지 소양강댐에서 40여 년을 근무했습니다. 
1984년 집중호우 때도 현장을 지켰습니다. 
박명학씨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습니다.

1980년대 당시만해도 제대로 된 체계가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직원들이 현장에 나가서 수동으로 풍선을 나무에 묶어서 댐 수위를 예측하던 때였습니다. 
비는 도무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댐 수위가 190m를 넘어서면 방류를 해 수위를 낮춰야 했습니다. 
소양강댐이 문을 열면 서울을 비롯한 한강 하류 지역이 초토화 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소양강댐 수문 개방 여부는 한국수자원공사 본사와 소양강댐 지사, 한강홍수통제소가 협의해 결정합니다.

이미 서울도 물바다가 된 상황에서 소양강댐은 수도권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소양강댐 정상에는 이미 물이 차 넘실거렸지만 쉽게 수문 개방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전두환 대통령은 “소양강댐에서 최대한 막아보라”고 지시했습니다. 
박명학씨는 “서울에 물이 차니까 ‘소양강댐에서 최대한 좀 막아보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발전소, 포기하겠습니다”

하지만 막을 수 있는 비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도로는 끊겼고 인제쪽 상류 댐 수위를 살피러 간 직원들은 길이 막혀 홍천에서 고립됐습니다.
더 큰 문제는 발전소에 물이 차기 시작했습니다.
물이 들어오는 곳을 막아봤지만 몰아치는 물을 감당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댐이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박명학씨는 “그때 댐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콘크리트 댐이야 물이 월류(越流)하는 정도지만 모래와 자갈을 쌓아 올린 사력댐인 소양강댐은 댐이 터질 수도 있었습니다. 소양강댐 저수량만 29억t, 소양강댐이 무너지면 63빌딩 63층 중 45층까지 물이 차고 춘천의 경우 봉의산 도청 꼭대기만 살아남는 정도라고 알려져있습니다.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소양강댐지사와 한강홍수통제소 간 고성이 오갔습니다.
“책임질 수 있느냐”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결국 한국수자원공사 본사와 전화했습니다.
소양강댐지사는 “발전소, 포기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상황을 파악한 간부진이 “다 열어라”라고 지시했습니다.

1984년 9월 1일 오전부터 화천, 춘천, 의암, 청평댐이 수문을 열었고 소양강댐도 방류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댐 수위는 198m,  소양강댐 만수위 203m를 불과 5m 남겨둔 시점이었습니다.

수문을 열어도 수위는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초당 5500t을 내보내지만 상류에서 들어오는 물은 1만2000t에 달했습니다.
나가는 양보다 들어오는 양이 더 많았습니다.
이미 며칠 째 고립됐던 소양강댐지사 직원들은 마지막을 준비했습니다.
비상로로 식량을 조달받기도 했지만 생라면을 부셔 먹으며 버텼습니다.
덮쳐오는 물을 막으려 변전소 밑에 있는 자갈을 쌀 포대에 담아 쌓았는데 급한 마음에 무거운 줄도 모르고 쌀 포대를 날랐습니다. 나중에 비가 그치고 나니 성인 남성 둘이서 들기 버거울 정도의 무게였습니다.

박명학씨는 다음과 같이 말 했습니다. 

  악에 받쳐 일을 하다 보니
무거운 줄도 몰랐다.
그때 허리를 다친 직원들이
적지 않았다.

전기는 끊긴지 오래, 한전에서 긴급 조치를 한 뒤에야 겨우 전기를 쓸 수 있었습니다.

당시 박명학씨와 같이 일하던 부장은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 했습니다.

  댐 수위가 200m를 넘기면
다 나가라.
나 혼자 지키겠다.
내가 죽으면 비석이나 세워달라.

4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박명학씨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눈물을 보였습니다.

박 씨는 “이 때만 생각하면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며 “정말 너무 힘들었다”고 회고했습니다. 
하늘이 도왔을까요?
댐 수위는 198m에서 더이상 올라가지 않았고, 비가 멈췄습니다.
댐 유입량과 방류량도 조금씩 줄기 시작했습니다.

1984년 9월, 수문을 열자 댐 안에 갇혀있던 물은 용솟음치며 주변 산을 덮쳤고 순식간에 산사태가 일어났다. 물은 더이상 고요하지도, 잠잠하지도 않았다. 사진은 1998년 수문을 개방한 소양강댐 모습. 사진: 강원도민일보

 

 

예상치 못한 복병 산사태

1984년 8월말부터 쏟아진 장대비는 태풍 ‘준’과 만나 세력을 키웠습니다. 
서울은 이미 물바다가 됐고 K-water 소양강댐지사와 본사, 한강홍수통제소 간 격론 끝에 소양강댐 수문을 열기로 했습니다. 그때가 1984년 9월 1일이었다.
 이미 이날 오전부터 화천, 춘천, 의암, 청평댐이 수문을 열었습니다.

신금철(84)씨는 당시 소양강댐 수문을 개방한 장본인입니다.
1969년 현대건설에 입사해 소양강댐 공사 때부터 현장을 지켰던 신금철씨는 1974년 K-water 소양강댐지사에 입사, 1998년까지 일했습니다.  신금철씨는 4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재연했습니다.

1984년 대홍수는 소양강댐 안전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장대비가 쏟아지면서 산사태가 일어나고 도시 곳곳이 물에 잠겼다. 소양강댐은 결국 수문을 열고 물을 방류했다. 사진: 춘천MBC

이미 8월 말부터 내린 비로 소양강댐 수위는 만수위(203m)를 위협했습니다.
조금 더 지나면 댐이 터질 수도 있는 상황.
신금철씨는 1984년 9월 1일 오후 11시쯤 수문을 개방하기 위해 이동한 것으로 기억했습니다.
수문 개방은 자정이 다 돼서야 이뤄졌다고 했습니다.
5개 수문 중 3번, 2번, 4번, 1번, 5번 순차적으로 문을 열었다. 초당 5500t이 쏟아졌습니다.

소양강댐이 지어진 후 그렇게 많은 물이 순식간에 쏟아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신금철씨는 “댐이 터질 만큼 비가 왔고 댐 수위는 198m를 넘나들었다. 여수로를 다 열었지만 5500t이 나갈 때 1만2000t이 들어왔다. 도무지 수위가 줄어들지를 않았다”고 회고했습니다.

칠흑같이 어둡던 그날, 소양강댐에 갇혀있던 물은 신북 일대를 집어삼켰습니다. 
폭발적으로 떨어진 물은 용솟음치면서 떠올랐고, 그대로 댐 주변 산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소양강댐은 지금처럼 주변 정리가 잘 돼 있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신금철씨는 “소양강댐 제방길이가 530m다. 5500t이 순식간에 내려오면서 땅으로 꽂히니 물이 떠오르게 되고 바로 옆에 산을 쳤다”고 했습니다. 산사태는 직원들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습니다.

수문을 열고 처음에는 산사태가 난 줄도 몰랐습니다. 
발전소로 돌아가려는 데 길이 끊겼습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을 헤집고 기어서 내려가니 그제서야 산사태가 났음을 깨달았습니다. 
주변 산 역시 며칠 간 내린 장대비로 이미 물을 많이 먹은 상황. 
거대한 물보라 앞에 산은 속수무책으로 스러져갔습니다.

문제는 산사태 이후입니다. 
산사태로 물의 길이 막히면서 소양강댐에서 내려온 물은 그대로 발전소를 덮쳤습니다.

1984년 대홍수는 소양강댐 안전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장대비가 쏟아지면서 산사태가 일어나고 도시 곳곳이 물에 잠겼다. 소양강댐은 결국 수문을 열고 물을 방류했다.  사진: 춘천MBC

 

 

 삶과 죽음의 경계

발전소에 물이 차기 시작하자 신금철씨와 직원들은 그야말로 ‘죽기살기’로 매달렸습니다.
발전소 피해 만큼은 줄여야 했습니다.
변전소에서 자갈을 가져와 쌓았고 물이 새는 구멍 곳곳은 옷을 벗어 틀어막았습니다.

신금철씨는 “직원들이 울면서 물을 막았다. 죽어도 여기서 죽겠다고 했다. 얼굴에 흐르는 게 눈물인지, 빗물인지, 소양강댐에서 쏟아져 내려온 물보라인지도 몰랐다”고 했습니다. 포기가 안됐다고도 했습니다. 
신금철씨는 “발전소는 우리한테 밥 먹고 사는 직장이다.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노력을 해봐야지 ‘위험하다, 도망가자’가 안됐다.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1984년 9월 3일, 비는 그쳤지만 K-water 소양강댐지사의 고립은 그 이후로도 계속됐습니다.
발전기가 물에 잠기면서 발전기에 묻은 기름이 떠다녔고 벽면 곳곳에 기름때가 묻었습니다.
이를 다 닦아내는 일도, 물에 잠긴 기계를 복구하는 것도 오롯이 직원들의 몫이었습니다.

소양강댐 지사 옆 사택에 남아있던 가족들은 이미 직원들이 죽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몇 날 며칠을 눈물로 보냈습니다.

신금철씨는 “밥도 못 먹고 날짜가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른 채 일을 했다. 일하다 지치면 좀 쉬고, 다시 기운내서 치우는 일의 반복”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이 신북 일대에서는 ‘댐이 무너져 모래자루로 막았다’, ‘댐이 무너지기 직전이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고립된 직원들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랐습니다. 
1984년 대홍수는 그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갔습니다.

1984년 대홍수는 소양강댐 안전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장대비가 쏟아지면서 산사태가 일어나고 도시 곳곳이 물에 잠겼다. 소양강댐은 결국 수문을 열고 물을 방류했다.  사진: 춘천MBC

100일 안에 복구하라

비가 그치면서 복구 작업이 본격화됐습니다.
소양강댐은 전기를 생산하는 다목적댐입니다.
당시로서는 소양강댐에서 전기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으면 어떤 상황이 일어날 지 아무도 예단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소양강댐은 우리나라 전력의 10%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적은 양이 아니었습니다. 
최대한 빨리 복구해야 했습니다. 
이때부터 ‘100일 작전’이 시작됐습니다.

1980년 1월부터 2017년 6월30일까지 소양강댐에서 40여 년을 근무한 박명학(67)씨는 “당시 전두환 정권 차원에서 100일 안에 끝내야 한다고 했다”고 밝혔습니다.

누군가는 복구에 200일을, 일본에서는 2년이 걸린다고 했던 복구입니다. 
전국 댐에서 전문가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소양강댐은 100일을 며칠 앞둔 시점에 복구가 됐고, 정부에서 100만원 포상금을 받았습니다.

신금철씨는 “하여간에 다들 대단했다. 1984년 수문 개방부터 산사태, 발전소 복구는 소양강댐지사에서 근무했던 40여 년 간의 경험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박명학씨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지금의 소양강댐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명품댐”이라고 합니다.
소양강댐은 이렇게 반세기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꼬꼬무 시즌3, 97회 게스트 이야기 손님

이번 꼬꼬무 97회 이야기 손님 게스트로는 그룹 엘즈업 예은, 소녀시대 효연, 축구선수 조현우가 나섰습니다.

예은은 장성규의 이야기 친구로 자리했습니다. 
예은은 장성규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잔뜩 몰입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날, 소양강댐의 활약에 감명받은 예은은 준공 50주년을 맞은 소양강댐에 "축하해"라며 인사를 건네는 엉뚱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장도연의 이야기 친구로는 효연이 등장했습니다. 
효연은 그날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연재해의 무서움을 다시 한번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예상치 못한 상황을 대비해 집에 늘 구명보트와 오리발을 구비해 놓는다고 말해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장현성의 이야기 친구로는 '국가대표 수문장' 울산 현대 소속 골키퍼 조현우가 등장했습니다. 
이날 조현우는 그날의 주인공들이 고군분투 끝에 먹었던 '이것'을 장현성과 함께 나눠먹었습니다.
 조현우는 '이것'을 먹으며, 당시 주인공들의 감정이 느껴져 뭉클하다며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984년, 예상치 못한 9월의 대홍수와 대홍수를 이겨내기 위한 사람들의 고군분투를 담은 '우리가 살아남은 이유-1984 서울 대홍수' 편에서 함께한 게스트 이야기 손님의 활약을 기대해봅니다.

 

 

인천 모자 살인 사건, 꼬꼬무 형사 수첩 속 가족 사진 아들의 기묘한 여정 범인 근황 96회 게스트
 

인천 모자 살인 사건, 꼬꼬무 형사 수첩 속 가족 사진 아들의 기묘한 여정 범인 근황 96회 게스트

꼬꼬무 인천 모자 살인 사건, 형사 수첩 속 가족 사진 아들의 기묘한 여정 범인 근황 96회 게스트 [글 포스팅 순서] 1. 형사 수첩 속 가족 사진 – 아들의 기묘한 여정 2. 인천 모자 살인사건의 개요

choonggyuk.tistory.com

꼬꼬무 무적가족과 스물네번째 불 대구 모자 연쇄 방화사건 24번 95회 게스트 재방송
 

꼬꼬무 무적가족과 스물네번째 불 대구 모자 연쇄 방화사건 24번 95회 게스트 재방송

꼬꼬무 무적가족과 스물네번째 불 대구 모자 연쇄 방화사건 24번 95회 게스트 재방송 [글 포스팅 순서] 1.무적가족과 스물네 번째 불 2. 유령가족 모자 연쇄방화사건 개요 및 범인 근황 3. 꼬꼬무

choonggyuk.tistory.com

김태촌 뉴송도호텔 폭행사건 꼬꼬무 박검사와 범서방파 두목 조폭 살인청부 진실 권상우 피바다 94회
 

김태촌 뉴송도호텔 폭행사건 꼬꼬무 박검사와 범서방파 두목 조폭 살인청부 진실 권상우 피바다

김태촌 뉴송도호텔 폭행사건 꼬꼬무 박검사와 범서방파 두목 조폭 살인청부 진실 권상우 피바다 94회 게스트 [글 포스팅 순서] 검사와 조폭-N호텔 살인청부의 진실 뉴송도호텔 폭행 피습사건 김

choonggyuk.tistory.com

꼬꼬무 이철수 사건 이상한 나라의 철수리 프리 철수리 유재건 변호사 란코 야마다 93회 게스트
 

꼬꼬무 이철수 사건 이상한 나라의 철수리 프리 철수리 유재건 변호사 란코 야마다 93회 게스트

꼬꼬무 이철수 사건 이상한 나라의 철수리 프리 철수리 유재건 변호사 란코 야마다 93회 게스트 1. 이상한 나라의 철수 리 2. 이철수 사건의 배경과 구명운동 3. ‘프리 철수 리’ 한인 이민자 이

choonggyuk.tistory.com

미국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 꼬꼬무 범인 조승희 외톨이가 보낸 소포 90회 게스트
 

미국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 꼬꼬무 범인 조승희 외톨이가 보낸 소포 90회 게스트

미국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 꼬꼬무 범인 조승희 외톨이가 보낸 소포 90회 게스트 [글 포스팅 순서] 1. 외톨이가 보낸 소포-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2. 총기 난사사건 조승희 범행 과정 3.

choonggyuk.tistory.com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