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포스팅 순서]
1. 히로시마 카운트다운
2.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3. 히로시마 원자폭탄 폭격 한국인 피해자
4. 꼬꼬무 시즌3, 105회 게스트 이야기 손님
5. 여우고개 포천 자매 살인사건 꼬꼬무 일산 여중생 자매 백골 시신 범인 근황 104회 게스트 출연진
6. 꼬꼬무 911 테러 범인 사망자 한국인 생존자 소방관 비행기 이유 103회 게스트 출연진 재방송
7. 독도의용수비대 꼬꼬무 독도 1954 독도대첩 홍순칠 대장 최후의 의병 기념관 102회 게스트
8. 꼬꼬무 군함도 하시마섬 시즌3 사도광산 강제징용 위치 유네스코 등재 역사 왜곡
9. 마이너스 통장 금리 이자 계산 한도 연장 신용대출 금리비교 서류 카카오뱅크 케이뱅크 토스뱅크
히로시마 카운트다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가 1945년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사건과 그 후의 이야기를 조명했습니다.
'꼬꼬무'는 '히로시마 카운트다운' 편으로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실전 투하의 위력과 후폭풍, 그리고 역사의 선택 아래 그 흔적을 평생 새긴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부산에서 태어난 일란성쌍둥이 김형률 형제가 있었습니다.
쌍둥이 동생은, 생후 2년이 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형률이만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한 번 시작되면 멈추지 않는 기침과 수도 없이 재발되는 폐렴증상이 갈수록 심해졌지만, 정확한 병명조차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같은 증세로 막내아들을 떠나보낸 부모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갔습니다.
형률이 25살이 되었던 1995년, 정확한 병명을 알게 된 가족들은 쌍둥이의 질병이 유전 질환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쌍둥이 형제의 희귀질환이 자신의 탓인 것 같아 밤잠을 설친 사람은 형률의 어머니 이곡지 씨입니다.
모자의 운명에 드리워진 그늘은 대체 무엇일까요?.
때는 1945년, 당시 여섯 살이던 형률의 엄마 곡지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살았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경남 합천에서 히로시마로 건너간 곡지네 가족은 힘겨운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런 곡지 가족들에게 운명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로 다시 화제가 된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실은 폭격기가 히로시마로 날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히로시마엔 곡지네 가족 말고도 무려 8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던 한국인들의 머리 위로, 이제 인류 최악의 무기가 떨어질 예정이었습니다.
원자폭탄 투하 임무를 맡은 사람은 미군 조종사 폴 티비츠와 클로드 이덜리였습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고쿠라 등 최종 후보지 세 곳 중 두 사람의 결정에 따라 '리틀 보이'의 투하지가 결정됐습니다.
1시간 먼저 히로시마에 도착한 클로드 이덜리 소령은 폴 티비츠 대령에게 무전을 보내 폭격지를 히로시마로 제안했습니다. 그날 세 도시 중 히로시마가 폭격지로 결정된 이유가 '꼬꼬무'에서 공개되었습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 상공으로 투하된 '리틀 보이'는 지상 550m에 도달한 후 폭발하도록 설계됐습니다. 운명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폭발 순간 엄청난 섬광과 폭풍, 뜨거운 열기가 히로시마 시내를 덮쳤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뒤, 히로시마 하늘에서 검은 비가 내렸습니다.
이 검은 비의 정체는 무엇이고, 파멸의 땅 히로시마에서 곡지 가족과 또 다른 한국인들은 어떤 운명을 맞게 되었을까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Atomic bombings of Hiroshima and Nagasaki, 廣島·長崎原子爆弾投下) 혹은 일본으로의 원자폭탄 투하(日本への原子爆弾投下) 사건은 1945년 태평양 전쟁 당시 승기를 잡은 미국이 일본 제국의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해 일본 제국의 도시인 히로시마(8월 6일)와 나가사키(8월 9일)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사건으로, 현재까지 최초이자 유일한 핵무기의 실전 투입 사례입니다.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당한 이 사건에 대한 윤리적, 법적, 군사적 논란은 오랜 기간 학계에서 양극화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원자폭탄의 사용이 정말로 필요했는지 여부 같은 근본적인 문제는 수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학계를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원래 맨해튼 계획은 나치 독일의 핵개발을 우려하여 이를 선점하고자 미국, 영국 공동계획하에 추진된 것이지 실제로 핵 공격을 수행하기 위해 시작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당대의 핵무기는 아직 시험조차 되지 않은 신병기였으므로 잘못 투하하였다가 불발이라도 나면 오히려 추축국에게 기술만 고스란히 넘겨주지 않을까 우려되었습니다.
기껏해야 일본군의 주요 거점이었던 트럭(Truk. 현재의 미크로네시아 연방 추크 주) 제도에 투하해 보자는 의견이 나왔을 뿐이었는데 이것도 해상에 투하해야 핵기술 회수와 습득이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한편 태평양 전쟁과 중일전쟁에서 점차 패색이 짙어지던 일본 제국 수뇌부는 소련을 중재자로 하는 화평 공작을 펴고 있었습니다. 특히 식민지로 삼고 있던 한반도, 중국 동부, 만주, 사할린 등을 깔끔히 포기하고 당장 항복하자는 고노에 후미마로와 같은 강경파는 이미 1944년부터 항복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처음부터 홋카이도까지 정복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할린이나 만주 정도 가지고 항복을 중개할 이유가 전혀 없었고 아울러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 또한 정치적 상징성으로든 군사적 실리성으로든 일본 본토를 반드시 점령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 제국의 화평 공작은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1945년 7월 26일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었지만 일본 제국은 현실 파악을 하지 못하여 국체 보존과 천황제 유지가 불투명한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여전히 소련의 중재를 통해 조약을 체결한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포츠담 선언을 묵살한다는 발표를 일방적으로 해 버렸는데 이렇게 되자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미국은 전쟁 지속 이외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사라지고 마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일본 제국은 1억 총옥쇄를 외치며 끈질길 정도로 저항하였고, 이 저항 때문에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이 두 전투에서 예상 밖의 막대한 피해를 입은 미국은 곧 있을 몰락 작전에 앞서 일본을 압박할 새로운 수단으로써 핵무기를 고려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는 미국의 정치적 요인도 있었는데, 20억 달러나 되는 거금이 들어간 맨해튼 프로젝트가 아무런 성과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군사 비밀로서 그 사용처가 알려지지 않았던 그 20억 달러를 둘러싼 정치적 후폭풍은 상당할 것이 명백했습니다. 이에 관련된 정치인들은 국민의 귀중한 혈세로 헛짓거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즉, 선거는 다가오고 있는 마당에 앞선 상륙 작전에서 유권자들의 아들들은 죽어나갔고 그 와중에 전쟁을 한 방에 끝낼 수 있는 무기를 20억 달러나 들여서 완성했지만 비인도적이라서 쓰지 않았다는 건 당시 유권자들에게는 납득이 되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독소전쟁이 끝나 가면서 미국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얄타 회담에서 소련에게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도록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 그만큼 소련 몫도 늘어나니 태평양에서 소련의 영향을 줄이려면 전쟁을 빨리 끝내야 했습니다.
일본의 종전 묵살이 원폭 투하 결정의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항복하지 않으면 멸망이 확실한 상황이었습니다.
일본 해군은 궤멸 수준을 넘어 구레 군항 공습으로 사실상 강제 해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일본의 국민들은 매일같이 굶주림에 시달렸으며 자원도 없어서 군부에서 준비시키던 본토 결전용 병기라고는 죽창, 활, 일본도 같은 단순한 냉병기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결호작전 문서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일본군은 투석기를 포병으로 편제하는 것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투석기와 죽창을 만들 나무마저도 바닥난 상태였습니다.
일본군은 무사도 정신을 기반으로 죽음과 희생을 비극이라기보단 명예롭고 아름답게 여긴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일본군 수뇌부는 농담이 아니라 모든 국민을 희생시켜서라도 항복하지 않을 각오였습니다.
옥이 부서진다는 위 표현처럼, 수뇌부 입장에서 국민들의 희생은 피해야 할 비극이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으로 지향해야 할 아름다운 문화였습니다.
미국은 일본에 '1945년 8월 1일까지 항복을 하면 일절 불문에 붙이겠다'는 전쟁사에 드문 관대한 선언을 했으나 일본은 이를 묵살했습니다. 이 당시 추축국의 상황을 보자면 1945년 5월에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과 나치 독일이 항복했으며 일본 제국만이 유일하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1945년 7월 30일에 작성한 '일본의 비밀무기: 자살'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일본군이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간다'며 자살 공격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결국 일본은 일본인의 완전 소멸 또는 국가 존속이 위협을 받아야 항복한다고 결론을 내렸고 이에 따라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과물, 핵 투하를 결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8월 2일이 되자 미국은 전쟁을 어떻게든 끝내기로 결심했습니다.
리틀 보이는 우라늄 235를 이용해서 만들어졌고 팻 맨은 플루토늄을 이용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양자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외형 역시 그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리틀 보이는 2개의 우라늄 덩어리를 충돌시켜 임계질량을 넘김으로써 핵분열을 일으켜 폭발하는 원리였습니다.
1개의 우라늄 덩어리를 다른 쪽 우라늄 덩어리로 발사하여 충돌시키는 포신형 구조를 가지고 있으므로(총류형) 상대적으로 길쭉한 모양을 지녔습니다. 리틀 보이는 너무나도 원리가 간단하기 때문에 불발의 우려가 거의 없었으며 단 한 번의 실제 폭발 실험도 없이 바로 실전에 투입되었습니다.
물론 우라늄 235를 충분히 만들어내지 못한 것도 실제 실험 없이 바로 실전 투입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트리니티 핵실험에서 실험한 것은 팻 맨 모델입니다.
대신 리틀 보이는 한 마디로 비효율적이며, 폭발력도 팻 맨에 비해 낮은 편입니다.
리틀 보이라는 이름은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의 별명이었으며 팻 맨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의 별명이었습니다.
'원자폭탄 목표 선정 위원회'(Target Committee)를 조직하여 '어디를 때려야 잘 때렸다고 소문이 날지'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위원회의 멤버 중에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존 폰 노이만 등의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과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교토와 히로시마가 1순위에 올라있고 나가사키는 아직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토 투하에 대해서 당시 전쟁부 장관(Secretary of War, 현재의 육군부, 국방부 장관에 해당.)이었던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이 제동을 걸었습니다. 스팀슨이 필리핀 총독 부임 당시였던 1920년대에 여러 차례 교토를 방문했으며 일설에 의하면 1893년에 신혼여행을 갔던 도시도 교토였습니다. 교토 방문을 통해 일본 문화에 감명을 받은 스팀슨은 인류의 문화 유산이자 일본 문화의 정수인 교토를 잿더미로 만든다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교토를 원폭 투하 명단에서 제외하자고 주장했습니다.
1945년 7월 교토는 제외되었고 대신 나가사키가 새로운 5대 목표지 투하지역에 추가되었습니다.
나가사키가 대신 선정된 이유는 기준에 부합하는 큰 도시이며, 일본의 전쟁 수행 시설 중에서도 핵심인 미쓰비시 중공업의 조선소와 인근 사세보시에 일본 해군의 주요한 군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요코하마 역시 그동안 재래식 폭격을 많이 받았던 데다 수도 도쿄와 가까웠기 때문에 목표에서 제외되었고 그로브스 소장이 승인하여 트루먼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한 최종 목표는 히로시마, 고쿠라, 니가타, 나가사키의 4개 도시로 정해졌습니다.
히로시마시가 투하 지역으로 높은 우선순위를 받은 이유로, 해당 위원회 보고서는 군 창고가 있고, 항구가 있는 점으로 공격의 가치가 높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도시를 하천이 촘촘이 지나서 소이탄의 효과가 낮은 점, 집중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는 언덕이 많은 점도 꼽았습니다. 보고서에는 쓰여있지 않으나, 위의 나가사키와 마찬가지로 일본 해군의 주요한 군항이 있는 점도 반영되었으리라 봅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직전까지도 509전대 부대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투하할 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원자폭탄'이라는 이름도 몰랐으며, 그냥 무언가 기존의 상식을 벗어나는 최신의 초대형 폭탄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원자폭탄의 원리와 위력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은 부임 전에 로스 앨러모스에서 핵폭탄과 핵물리에 대해 교육을 철저히 받은 부대장 폴 티비츠 대령, 원자폭탄 개발과 관리를 책임진 파슨스 대령, 그리고 원자폭탄 조립과 관리를 담당한 과학자 그룹 정도 뿐이었습니다.
원자폭탄을 투하할 부대원들조차 원자폭탄이 뭔지 몰랐다는 것은 맨해튼 계획과 원폭 투하 작전이 얼마나 철저한 보안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해줍니다. 뒤에 나오지만 대원들이 원자폭탄의 위력을 정확히 알게 된 것은 히로시마 작전 직전의 최종 브리핑이었으며, '원자폭탄'이라는 이름을 들은 것은 히로시마를 향해 출격 비행 중인 에놀라 게이 안에서였습니다.
1945년 8월 6일 새벽 2시 45분 에놀라 게이는 리틀 보이를 싣고 마침내 역사적인 출격을 감행했습니다.
실제 폭탄이 너무나 무겁기도 했고 가득 채운 연료 때문에 이륙 중량 초과였다고 합니다.
더 충분한 활주 속도를 얻기 위해 티비츠 대령은 활주로 거의 끝에까지 가서야 겨우 이륙을 시켰습니다.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은 에놀라 게이가 이륙을 안하고 계속 달려나가자 활주로 끝에서 충돌하는 것 아니냐며 숨도 못 쉬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에놀라 게이 부조종사 로버트 루이스 대위조차도 티비츠 대령이 이륙을 안하자 자신이 조종간을 당길 뻔했다고 술회했습니다.
1시간 먼저 출발한 기상관측기 3대는 각자의 목표 도시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히로시마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제2 목표 고쿠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청명한 하늘은 제3 목표 나가사키뿐이라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히로시마 하늘에서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B-29 스트레이트 플러쉬가 히로시마 상공을 가로지르는 동안 요격기도, 방공포화도 없었습니다.
스트레이트 플러쉬는 기상 상황이 좋으므로 제1 목표에 대한 우선 폭격을 제안하였습니다.
이 무선 보고를 수신한 에놀라 게이의 기장 폴 티비츠 대령은 "폭격 목표 히로시마"를 선언하였습니다.
많은 히로시마 시민들이 고고도에 유유히 떠있는 이 B-29를 목격했습니다.
공습 경보도 울렸지만 방공호로 대피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면 그 당시 일본 시민들은 B-29의 폭격은 보통 수백 대가 들이닥치는 것이고, 한두 대 출현하는 건 정찰 임무 같은 것이라서 별다른 피해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시 일본 군부와 국민들의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폴 티비츠 대령이 호위 전투기도 없이 B-29 두세대만 단독으로 보내서 원자폭탄을 투하하도록 하는 작전을 짜게 된 근본적인 원인과 이유가 되었습니다.
페러비 소령은 히로시마 중심부 아이오이 다리를 조준하여 리틀 보이 투하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항법사 밴커크 대위가 비행일지에 기록한 정확한 투하 시각은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15초.
바로 뒤에 붙어서 따라오던 그레이트 아티스트는 동시에 계측 장치를 투하했으며, 빅터 91은 히로시마 외곽 상공에서 촬영 준비를 마치고 선회하고 있었습니다.
투하 직후 에놀라 게이는 우로, 그레이트 아티스트는 좌로 급선회, 전속력으로 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8시 15분에서 막 16분으로 넘어가려는 찰나, 히로시마 상공 570m에서 인류 최초의 실전 투입 원자폭탄이 폭발했습니다.
원자폭탄은 측풍으로 인해 원래 조준점이었던 T 모양의 아이오이 다리에서 약 240m 정도 빗나가 시마 외과병원 상공에서 폭발했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꽤 많이 빗나간 것 같지만, 9,000m가 넘는 성층권에서 투하한 폭탄임을 감안한다면 놀라운 정밀도였으며, 만약 단 한 발의 통상 폭탄이었다면 작전 실패였을 것이나 리틀 보이는 일반적인 폭탄이 아니었습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폭격 한국인 피해자
폭탄이 터지는 순간 히로시마 시민들은 엄청나게 밝은 빛을 목격했습니다.
이 빛이 얼마나 강한지 생존자들은 '순수한 흰색'이라고 묘사하고 있으며, 손으로 눈을 가리니 '자신의 뼈'가 보였다고 합니다. 인간의 살은 어느 정도 빛을 투과시키는데, 가시광선만 해도 자기 뼈가 보일 정도로 강력했다는 얘기입니다.
폭심지 근처의 온도는 열복사로 약 3,000~4,000도가 넘었는데 태양의 표면 온도가 약 6,000도입니다.
폭심지 근처는 모든 것이 문자 그대로 초토화되었습니다.
스미토모은행이 열기를 기다리며 은행 돌계단에 앉아있던 사람이 엄청난 열선을 받으며 계단에 찍힌 검은 흔적(원폭 그림자)은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한편 폭탄이 터진 직후 에놀라 게이의 승무원들은 방사선의 맛을 느꼈다고 합니다.
납 맛이었다고 합니다.
체르노빌 사고 당시 주위를 시찰하던 조종사들과 방사성 폐기물을 치우던 인부들도 이러한 금속 맛을 경험했습니다.
화재는 히로시마 시내 중심부 11km2를 모두 삼켰습니다.
히로시마 시 전체는 열로 가득 찼고, 잿빛 대기가 태양마저 가려 사방이 밤처럼 어두운 가운데 사방팔방이 불지옥으로 변한 상태였습니다.
불교의 지옥도나 단테의 지옥에서나 나올 법한, 현실에 나타난 문자 그대로의 '심판의 날'이었습니다.
높은 열로 인해 기온이 치솟은 히로시마의 대기는 지극히 건조해져 도시 전체가 초고온의 건식 사우나 같은 상태가 되었고, 사방에 널린 죽지 않은 부상자들의 신음소리, 비명소리와 함께 물을 달라는 절규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피부가 녹아내린 채 물을 찾으며 방황하는 사람들, 온몸이 불타며 다리 밑으로 떨어져 물에 떨어진 불덩이처럼 산산조각나는 사람 모습 등 끔찍한 참상을 전하는 목격담이 전해져옵니다.
몇 시간 뒤 증발한 수분 및 좁은 범위 내의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유기 생물체가 모였던 상공으로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검은 비였습니다. 원자폭탄으로 모든 것이 타버리고 남은 재가 방사성 분진으로 올라갔다가 비에 섞여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이 시커먼 빗물은 고농도의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있었지만, 타는 듯한 갈증에 사람들은 입을 벌리고 빗물을 받아 마셨다. 예외도 많았지만 이들은 검은 비에 노출된 만큼 더 일찍 죽었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군수 도시였기에 강제로 끌려와 노동에 시달리다가 원폭을 맞은 안타까운 한국인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또한 원폭 투하 후에 일제에 의해 잔해 제거에 우선적으로 강제동원되어 피폭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당시 히로시마 총 인구 약 42만명 중 20만명이 피폭, 9~16만명이 수개월 내에 사망했습니다.
히로시마 인구 중 약 14만명(3분의 1정도)은 조선인이었으며 피폭자는 5만, 그중 약 3만명이 사망, 생존2만명 중 1만 5천은 광복 후 귀국, 5천명은 일본에 잔류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피폭자 후손 등을 모두 합친 히로시마 피폭자 총 집계 74만여명 중 10만명 정도가 한국인이라고 합니다.
거기다가 부상자들은 일제에서는 자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고, 이후에도 제대로 치료도 제공하지 않아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물론 일본에도 비양심적인 인물들만 있는 건 아니고, 사람다운 사람도 있기는 했습니다.
2011년 10월 3일 도요나가 게이자부로가 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40년간 지원해준 공로로 외교통상부 장관 표창을 받았습니다.
그러고도 일제는 하시마 섬에 강제로 끌려가 노역을 했던 조선인들이 원폭이 터진 나가사키에 강제로 다시 끌려가 잔해를 치우는 작업에 동원되는 끔찍한 일을 자행했습니다. 이들은 심지어 아무런 방호복 없이 맨몸으로 사역을 당했는데, 당연하게도 많은 이들은 오래지 않아 피폭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습니다.
당시 피해자들에 따르면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피가 계속 분출했습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한국인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가 서있습니다.
유명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꼽는다면, 대한제국의 황족인 이우도 이 투하로 인한 피폭으로 사망했고, 또한 일본프로야구의 유명인인 장훈의 큰누나 역시 원폭으로 강한 전신 화상을 입었고 제대로 치료도 못해 12살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2016년에야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2017년부터 시행되었는데, 이미 피해자의 대다수가 사망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 실질적인 피해 보상이 이루어질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한편 원폭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자식들도 '원폭 피해 2세 환우'가 되어 진상 규명과 의료지원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활동가 김형률을 중심으로 2000년대 초반 결성된 '한국원폭2세환우회'는 다른 시민단체들과 함께 계속된 투쟁을 해왔습니다. 2세의 경우 투하 당시 태아 상태가 아니면 의료비 지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2021년 10월에 추진된 지 30년 만에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들어섰습니다.
2023년, 윤석열 대한민국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이 히로시마 G7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공식 참배하였습니다.
그래도 원자폭탄을 실전에 민간인을 대상으로 쓰는 건 너무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그래서 일본 정부에 사전 경고와 더불어 성층권 정도의 고공에서 원자폭탄을 터뜨려서 위력을 시연해 보이거나 인구 밀도가 희박한 마을에 투하하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성층권에서 거대한 핵불꽃이 터지고 실제 피해는 미미하다면 과연 일본 지도부에서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라는 의견처럼 효과가 미지수여서 묻혀버렸습니다.
애초에 미국은 도쿄대공습을 통해 일본에게 경고 했음에도 일본이 무시하자 핵 폭탄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쓴 것입니다.
꼬꼬무 시즌3, 105회 게스트 이야기 손님
이번 '꼬꼬무'의 이야기 친구 게스트로는 SBS 김다영 아나운서, 배우 정상훈, 댄스크루 '홀리뱅'의 리더 허니제이가 나섰습니다.
아나운서 김다영은 장성규의 이야기 친구로 '꼬꼬무'에 처음 찾아왔습니다.
어색하고 신기한 듯 세트장을 둘러보던 김다영은 녹화 시작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습니다.
지성과 해맑음을 동시에 갖춘 그저 완벽에 가까운 리스너인 줄 보였던 김다영은 간혹 튀어나오는 황당한 답변으로 드러난 은은한 허당미(?)가 오히려 매력을 더했습니다.
정상훈은 장현성의 이야기 친구로 '꼬꼬무'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화면이 못 따라가는 실물과, 다소 수줍은 보조개 웃음으로 등장했던 그는, 이야기가 시작되자 미간을 찌푸리며 바로 집중 모드에 돌입했습니다. 끝이 다가올수록 답답함에 한숨을 푹푹 쉬던 정상훈은 결국 눈물을 보였습니다.
허니제이는 장도연의 이야기 친구로 '꼬꼬무'를 다시 찾았습니다.
한층 익숙해진 모습으로 녹화장을 둘러보며 장트리오의 자리를 넘보는 야망을 드러낸 허니제이는 다채로운 리액션과 공감 능력뿐 아니라 차분하게 날리는 돌직구 멘트로 이번 이야기를 풍성하게 채웠습니다.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투하 작전에서 잊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할 '꼬꼬무-히로시마 카운트다운' 편에서 함께한 게스트 이야기 손님의 활약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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