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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의용수비대 꼬꼬무 독도 1954 독도대첩 홍순칠 대장 최후의 의병 기념관 102회 게스트

by 충격대예언 2023. 11. 16.

독도의용수비대 꼬꼬무 독도 1954 독도대첩 
홍순칠 대장 최후의 의병 기념관 102회 게스트

  [글 포스팅 순서]

1. 최후의 의병-1954 독도 대첩
2. 독도 의용수비대 창설
3. 독도 의용수비대 구성
4. 독도 의용수비대 임무 및 활약
5. 독도 의용수비대의 고난
6. 1954년 독도대첩
7. 독도 의용수비대관련 근황
8. 꼬꼬무 시즌3, 102회 게스트 이야기 손님

9. 꼬꼬무 완벽한 타인 존속살인 용의자 딸 장서희 이혼부부 사망 살해사건 시즌3 101회 재방송
10.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칼기 폭파 공작 1987 KAL 858기 실종사건 김현희 현재 근황 꼬꼬무 100회
11. 10.26사태 박정희 대통령 암살 시해사건 김재규 궁정동 안가 가족 자녀 묘지 위치 꼬꼬무 99회 게스트

 

 

최후의 의병-1954 독도 대첩

방송되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뜨거운 마음을 안고 독도로 향한 33인의 영웅들의 험난한 생활기와 일본과의 치열했던 전투를 공개했습니다.

1952년, 대구에 사는 박영희 씨의 집안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한 남성이 영희 씨와 결혼을 하겠다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 남성은 바로 24살의 상이군인 홍순칠 씨입니다.
그런데, 영희 씨는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순칠 씨와 영희 씨는 지인의 소개로 딱 한 번 만났던 사이였던 것이다. 영희 씨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순칠 씨의 한마디가 영희 씨의 마음을 움직였다. 

장미꽃이 활짝 핀 정원에서
책만 읽게 해줄게요!

결국 결혼에 성공한 두 사람.
그런데 결혼식 바로 다음 날, 순칠 씨가 지금 당장 떠나야 한다며 서둘러 짐을 챙겼습니다다.
그렇게 이끌리듯 따라나선 영희 씨가 도착한 곳은 바로 울릉도였습니다.

당시 영희 씨는 울릉도는커녕, 바다도 본 적 없는 스무 살 새색시였습니다. 
외지인 그 자체였던 영희 씨를 반긴 것은 신혼집인 커다란 이층집 한 채뿐이었습니다. 
찬찬히 집을 살펴보던 영희 씨는 집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1층에만 방이 8개, 2층은 전체가 한 칸으로, 보통의 신혼집 같지 않은 구조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웬 남자들이 나오더니 순칠 씨를 향해 경례를 붙였습니다.
그러고는 2층에 모여 회의를 하는 낯선 남자들.
이곳은 대체 어디일까요, 그리고 그들은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일까요?

영희 씨가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된 건 해가 바뀌고 나서였습니다. 
당시는 6·25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습니다. 
한반도의 정세가 혼란한 틈을 타, 일본은 대놓고 독도를 넘보기 시작했습니다.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팻말을 심어놓고, 독도 인근에서 물고기를 잡던 어민들을 위협해서 쫓아내기까지 했습니다. 
울릉도에서 나고 자라 독도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순칠 씨는 직접 독도를 지키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뜻을 모은 청년들과 함께 독도의용수비대를 만든 것입니다.

독도는 우리가 지킨다!

대원들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순칠 씨를 필두로 독도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무인도인 독도에서 지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원들은 일본뿐만 아니라 추위, 굶주림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외롭고 힘겨운 독도에서의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저 멀리 수평선 너머 총과 대포로 무장한 일본의 순시선이 나타났습니다. 

비상!! 비상!!

순식간에 독도를 포위한 일본 순시선들.
곧바로 경계 태세에 돌입한 대원들은 숨죽인 채 홍순칠 대장의 사격 개시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원들은 병력도, 무기도 모두 열세였습니다.
과연 그들은 독도를 무사히 지킬 수 있을 것인지 가장 치열했던 그날의 전투, 독도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뭉친 그들의 뜨거운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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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의용수비대 창설

법적으로는 1953년 4월 20일에 독도에 상륙하여 1956년 12월 30일 국립경찰에 수비업무와 장비 전부를 인계할 때까지 활동한 33명의 의용수비대원이 결성한 단체를 말합니다. (독도의용수비대 지원법 제2조 제1호)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일본은 전란을 틈타 세차례에 걸쳐 불법적으로 독도에 무단 상륙, 1948년 미군의 폭격 연습 과정에서 희생된 한국 어부의 위령비를 파괴하고 독도에 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竹島)라는 나무 표지판을 세우는 등 불법 영토 침략을 공공연히 저질렀습니다.

이에 6.25 전쟁에 참전하였으나 부상을 입고 대한민국 육군 특무상사로 전역한 울릉도 출신 홍순칠과 울릉도에 살고 있던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아직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은 시점인 1953년 4월 20일 독도의용수비대가 결성되었습니다.
대장인 홍순칠을 포함한 대부분의 대원들은 한국전쟁 초기 참전 경험이 있는 전투원 출신들이었습니다.

무장 및 장비들은 대장이자 당시 울릉도 최고의 부자였던 홍순칠이 직접 부산으로 찾아가 오징어를 팔아 군자금을 마련해서 각종 무기와 장비를 구입하였으며, 결성 이후에는 대원들의 모금을 통해 구입하였습니다.
또한 경북도경(울릉경찰서라는 이야기도 있다)에서 지원받은 박격포, 중기관총, M1 개런드로 무장했습니다.
이후 목재, 전답, 산을 팔아서 계속 군자금을 보충했습니다.

독도 의용수비대 구성

대장은 홍순칠 본인이 맡았으며, 편제는 각각 15명으로 이루어진 전투대 2조, 울릉도 보급 연락요원 3명,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 등 총 45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 중 3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국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전투원 출신이었습니다. 이후 12명이 탈퇴하면서 최종적으로 수비대에 남은 인원은 33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수비대 대장 - 홍순칠
수비대 부대장 - 황영문
제1전투대 - 대장 서기종
제2전투대 - 대장 정원도
후방지원대 - 대장 김병렬
교육대 - 대장 유원식
보급대 - 대장 김인갑
대원
고성달
구용복
김경호
김수봉
김영복
김영호
김용근
김장호
김재두
김현수
박영희
안학률
양봉준
오일환
이규현
이상국
이필영
이형우
정의관
정재적
정형권
조상달
최부업
하자진
한상용
허신도

독도 의용수비대 임무 및 활약

1) 1953년 6월 일본 오게(大毛) 수산고등학교 연습선 지토마루 호를 독도 서도 150m 해상에서 나포해 이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냈으며, 같은 해 7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이 독도에 접근하자 위협사격을 가해 이들을 격퇴시켰습니다. 
이 싸움이 수비대가 일본에 맞서 벌인 첫 전투입니다.

2) 1954년 6월 홍순칠 대장 등은 독도 동도 바위에 한국령(韓國領)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같은 해 8월 23일, 독도에 접근하려는 일본 순시선을 총격전 끝에 다시 격퇴시켰습니다.

3) 1954년 11월 21일 독도대첩이 벌어집니다.

4) 1956년 12월 30일, 무기와 임무를 국립 경찰에 인계할 때까지 독도의용수비대는 독도를 지키는 데 전념하였습니다.

하지만 개인이 군대를 꾸리는 일은 만만치 않았고 마침내 마지막 남은 재산까지도 수비대 유지에 날려버린 홍순칠은 계속 자신들의 업무를 정부에서 맡아주길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정부에선 근무환경이 너무 열악하다고 난색을 표하기만 했고 배속된 경찰들은 근무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의 항의가 거세짐에 따라 한때 홍순칠이 해적이란 주장이 제기되어 홍순칠을 주한미군이 체포하여 한국 정부에 인계하기도 했습니다. 홍순칠은 자신이 전재산을 바쳐 독도를 지켰다고 국회의 청문회에서 주장했습니다.
이에 청문회는 홍순칠에게 동정적으로 바뀌어 정부가 뭘 했길래 애국자를 해적으로 몰았냐고 내무, 외무, 국방장관에게 항의하는 지경에 이르러 홍순칠은 석방되었습니다.

1956년 12월 30일 마침내 기존의 업무를 국립경찰 소속 독도경비대에 인계함으로서 이들의 기나긴 임무는 끝이 났습니다. 이 공로로 홍순칠은 1966년 5등 근무공로훈장을, 나머지 대원들은 방위포장을 수여받았습니다. 
10명의 의용수비대는 경찰 소속으로 전환하여 그 뒤로도 근무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임무를 마친 뒤에도 이들은 독도 방파제 설치를 정부에 건의하는 등의 독도 지키기 및 독도 가꾸기 운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독도 의용수비대의 고난

일본과의 교전 중에선 사상자가 없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전달한 위문품을 받는 과정에서 위문단 한 사람이 놓고 온 카메라집을 가져다 주던 중에 허학도 대원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허 대원은 경찰을 지망하고 있었는데, 사망 후 그의 귀신을 봤다는 대원들이 나타나자 경찰 정모와 근무복을 구해와 그의 위령제를 지내주고 나서야 목격담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독도에 수비대원들이 지낼 막사와 계단 등을 만드느라 허위로 징용영장을 만들어 울릉도의 목수와 기술자들을 불법으로 징용하여 수비대 기지를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기술자 몇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또 군자금의 부족이 심각하여 제주도 해녀들을 불러 해물을 채취하여 팔아서 군자금을 마련하려 했지만 인건비도 나오지 않을 정도라서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이들은 1969년과 1972년 독도개발 계획서를 경상남도에 제출하며 실효적 지배 강화를 거듭 촉구했지만, 당시 정부는 이들의 존재가 일본과의 관계 악화로 이어질 것으로 여기며 부담스러운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결국 홍순칠 대장은 1974년 12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사흘 동안 고문을 당했습니다. 
중정의 요구는 더 이상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떠들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하도록 그의 오른손을 부러뜨리기도 했다고 부인 박영희 여사가 전했습니다. 
그가 고초를 겪었음에도 언론은 정권의 통제로 보도하지 못했고, 훗날 '국가정보원 진실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도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신군부는 1980년대 초 그가 독도 지킴이로 북한 방송에 소개되자, 그를 즉각 체포해 극렬한 고문을 가하여 간첩 조작을 하려 했습니다.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홍 대장은 1985년에 서울로 이주했고, 1986년, 폐암으로 숨졌습니다. 
박정희 때처럼 일본 등 외국 차관에 의존했던 전두환 정권은 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민간인 출입을 막았고, 심지어 노래 ‘독도는 우리땅’을 방송 금지곡으로 지정하기까지 했습니다.

2006년 오마이뉴스에서 독도수비대에 대한 위와 같은 내용이 사실은 과장되었다는 보도를 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이미 2000년부터 김점구 독도수호대 대표가 울릉도-독도 학술 뗏목탐사 당시 '가짜 대원설'도 주장했고, 2007년에 감사원이 재심사 처분을 시사하여 국가보훈처 산하에 '독도의용수비대진상규명위원회'가 꾸려졌으나 별 성과 없이 이듬해에 활동을 멈췄습니다.

독도의용수비대의 창설시기가 1953년이 아니라 1954년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국토보호를 목적으로 1954년 정부 보조없이 단독으로 울릉도 출신 대원 30명을 모집하여 다액의 사재를 들여 1956년 8월까지 독도를 수비하여 3차에 걸친 교전을 통하여 일본의 일본의 침입을 방지함으로서 대한민국 영토수호에 헌신 노력하였음" - 총무처 작성, 1966.4.6

그러나 국가보훈처는 1953년 4월부터 1956년 12월까지 독도경비대원으로 활동했다는 주장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2017년 10월 27일, 국가보훈처는 울릉도에서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개관식을 열고,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기념사를 했습니다. 기념관은 1953년 4월부터 1956년 12월까지 활동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1953년부터 1956년 까지 3년 8개월 동안 33명이 활동"했다는 내용은 당시 수비대장이었던 홍순칠의 수기 <이 땅이 뉘 땅인데>에도 기록돼 있으며, 홍순칠의 수기는 병적기록, 경찰인사기록, 외무부 발행 독도문제개론, 영토표석 관련 문서철(국가기록원 소장), 경상북도 경찰국 조사보고서 등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1954년 독도대첩

1954년 11월 21일 대한민국 독도의용수비대가 일본 해상보안청의 독도 침입을 격퇴한 전투입니다.

1954년 11월 21일 아침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 대장이 독도를 점령하려는 목적으로 상륙을 시도하려는 1천톤급의 일본함정 PS 9, 10, 16함 총 3척의 함정과 항공기를 발견하고, 휘하 지휘관과 대원들에게 알려 전투태세를 갖추라 명령했고 이후 일본함정을 향한 경고총성과 함께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전투가 시작된지 얼마 안되어 6.25때 특무상사 출신 명사수인 제1전투대 대장 서기종이 쏜 박격포 제1탄이 PS 9함에 명중되어 선수에서 몇 사람이 나가떨어졌고 잠시 후 검은 연기를 뿜으며 예인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독도의용수비대는 당시 일본 순시선에 비해 열악한 무기로 무장한 상태였으나, 수비대는 독도 정상쯤에 큰 통나무에 검은 칠을 해 가짜 대포를 만들어 일본 함선의 눈을 속이는 기지를 발휘해 일본 함정의 접근을 막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후 3척의 함정이 퇴각한 이후에는 일본 군용기가 하늘 위에서 맴돌다 결국 퇴각했습니다.
해당 목포(木砲)는 이미 이전에도 일본 함선을 격퇴하는 데 도움을 준 바 있으며, 일본이 한국 정부에 항의서한을 보낼 정도로 제대로 속인 상태였습니다.

NHK 정오 뉴스에 그들의 소위 '독도'에서 한국경비대가 발포를 해서 일본 해상보안청 함정들이 피해를 입고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즉각 한국 정부에 항의각서를 제출하고, 당시 독도우표가 첨부된 우편물을 일본에서 한국으로 반송했다고 합니다.

홍순칠 대장의 수기에 따르면 1953~1956년 3년 동안 독도에서 독도의용수비대와 일본 해상보안청 함정 사이에 세 차례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최완근 차장/국가보훈부 “독도대첩의 이러한 전과는 현재 우리나라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라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독도 의용수비대관련 근황

한국 정부는 이들의 공로를 인정해 1996년 4월 홍순칠 대장에게 국가보훈 삼일장을 추서하고, 나머지 대원에게 보국훈장 광복장을 수여했습니다. 2005년에는 독도의용수비대 지원법이 제정되었으며, 이 법을 토대로 2008년 독도의용수비대 기념사업회가 공식 출범했습니다.

현재 순직하거나 세월이 흘러서 작고한 독도 의용수비대원들의 유해는 현재 국립대전현충원 독도 의용수비대 묘역(묘지)에 잠들어있습니다. 33명중 17분이 안장되어 있으며 2023년 현재 생존자는 5분이 남아 계시다고 합니다.
나머지 11분의 경우에는 각자 다른곳에 묻힌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80년에 방송작가 김교식이 실화소설 <도큐멘타리 독도수비대>를 낸 바 있습니다.
해당 도서는 2005년 제이제이북스를 통해 <아, 독도 수비대>로 재발매됐습니다.
1989년에는 MBC <TV 피처>를 통해 '독도수비대'란 제목으로 드라마화된 바 있습니다.
1996학년도부터 초등학교 사회과 탐구 4학년 2학기 교과서 p104~105에 독도의용수비대의 이야기가 처음 수록됐으며, 제7차 교육과정 초기이던 2002학년도부터 초등학교 5학년 <생활의 길잡이> p110~111에도 수록됐습니다.

꼬꼬무 시즌3, 102회 게스트 이야기 손님

장도연의 이야기 친구 게스트로 ‘타고난 입담의 소유자’ 개그맨 지상렬이 첫걸음 했습니다.

“꼬꼬무 맥 좀 잡으러 나왔습니다!” 오프닝부터 재치 있는 말솜씨로 녹화장을 웃음 짓게 했습니다.
하지만 곧 일본이 세워놓은 팻말 문구를 보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분노하며 큐카드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방송에서 처음 이야기한다고 하며 6.25전쟁 참전용사였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었습니다. 

최근 화제가 된 드라마 ‘신병‘ 시리즈에 출연, 군인 전문 배우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배우 김민호가 장현성의 이야기 친구로 첫 출연했습니다.

연예계에 데뷔하기 전 대학생 시절 sbs ‘스타발굴 로드쇼 강력추천’에 얼굴을 내비췄던 김민호는 13년 만에 sbs로 금의환향하며 남다른 감회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평소 꼬꼬무의 팬이었다고 첫 출연 소감을 밝힌 그는 이야기를 들을수록 가슴이 뜨거워진다며 독도의용수비대원들에게 존경심을 표했습니다. 

아나운서들의 롤모델로 꼽히는 방송인 박선영이 장성규의 이야기 친구로 등장했습니다.

2012년 뉴스 보도 중 ‘다케시마라는 섬은 없다. 오직 독도가 있을 뿐’이라는 소신 발언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던 그녀는 녹화 중 공개된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의 생전 인터뷰 영상을 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편 당시 홍순칠 대장과 함께 독도를 지켜낸 대원들이 들려주는 그날의 이야기, '최후의 의병 ? 1954 독도 대첩'에서 함께한 게스트 이야기 손님의 활약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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