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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김용식 축구선수 꼬꼬무 경성축구단의 에이스 138회 게스트 이야기 손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by 충격대예언 2024. 8. 16.

김용식 축구선수 꼬꼬무 경성축구단의 에이스 138회 게스트 이야기 손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글 포스팅 순서]

1. 경성축구단의 에이스
2. 의문의 '축구 할아버지'
3. '까기의 명수'가 깨달은 스포츠맨십
4. 100년 전 축구, 한일전의 시작
5. 베를린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 선발 경기
6. 일제의 차별
7. 유일한 조선인 축구선수
8. 대한민국 이름으로 참가한 올림픽
 9. 축구 지도자로서의 삶

10. 세자매 연쇄 사망사건 살인사건 꼬꼬무 2014 경주 마더 137회 게스트 이야기 손님 시즌3 재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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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축구단의 에이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 시즌3)에서는 '경성축구단의 에이스' 편이 방송되었습니다.

이야기 친구 게스트로는 스포츠 캐스터 배성재, 가수 경서, 개그우먼 김민경이 출연했습니다.

의문의 '축구 할아버지'

때는 1970년, 서울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
한 아이가 백발의 할아버지를 보더니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축구 할아버지'라고 불렸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축구공으로 개인기를 하는데, 묘기 수준이었습니다.

그렇게 45년이 흐른, 2015년. 
한 방송국에서 이 축구 할아버지에 대한 취재를 왔습니다.
그런데, 이 방송국은 한국 방송국이 아니라 일본의 방송국이었습니다.
무슨 이유였을까요?

"2015년 6월 6일 현충일 날이에요.
'요미우리TV'에서 '김용식 특집'을 하는데 김용식 선생에 대해서 한 번 좀 만나고 싶다, 김용식 선생님하고 인연이 있는 분들을 인터뷰 하러 왔다, 그리고 또 당신이 축구 수집을 하니까 한 번 만나러 왔다고 했습니다.
김용식 선생에 대해서 굉장히 깊이 물어보더라고요."

-이재형, 축구 사료 수집가

그 '축구 할아버지'의 성함이 김용식이었습니다.
45년 전,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 할아버지의 개인기를 보고 놀랐던 아이가 바로 이재형 씨였습니다.
재형 씨는 그날 광경을 목격한 것을 계기로, 축구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그 후 축구에 대한 사료를 많이 수집했고, 김용식 선생님의 자료도 찾았습니다.

이 분이 김용식 선생님입니다.
이 사진만 봐서는 잘 모르겠지요? 

오른쪽에 '차붐' 차범근이 있습니다.
김용식 선생님은 1970~80년대에 차붐과 함께 사진을 찍을 정도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럼 보통 분은 아니겠지요?
동네에서 '축구 할아버지'라 불리던 김용식 선생님의 정체는, 과연 뭘까요?

'까기의 명수'가 깨달은 스포츠맨십

과거로 돌아가서, 청명한 가을 한 축구장.
지금 여긴 긴장감이 팽배했습니다.
경신학교와 숭실중학교의 경기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김용식 선수가 소속되어 있던 팀은, 경신학교입니다.
당시 경신은 각종 전국대회를 싹쓸이 하는, 무서운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숭실중학교에만 약했습니다.
당시 김용식 선수는 "타도 숭실!"을 입버릇처럼 외치고 다녔습니다.
1년 전 결승전에서 경실과 숭실중이 맞붙었는데, 1대 0으로 숭실중이 우승했습니다.
근데, 기뻐해야 할 숭실중 선수들의 눈이 뻘겋고 독기가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김용식이 어디 갔어? 김용식 잡아라!"라며 숭실중 선수들이 달려들고, 김용식 선수는 줄행랑을 쳤습니다.

김용식 선수는, 공을 아주 잘 찼습니다.
근데, 공만큼 잘 차는 게 또 있었습니다.
바로, 상대팀의 선수들을 걷어차버리는 것입니다.
이 당시 김용식 선수의 별명이 '까기의 명수'였습니다.

이 사진, 1929년에 찍은 사진입니다.
윗줄 우측에서 두번째 소년이 김용식 선수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사실 1920~30년대 축구는 꽤 거칠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직접 들어볼겠습니다.
우리나라 전직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이자, 김용식 선생님의 제자들인 서윤찬(84), 손경호(86), 정규풍(78) 씨입니다.

"옛날에 우리 선배님들 그때는 소위 말하면 똥볼 차는 거예요.
뻥 차고 뛰고 그랬는데, 그때는 주요 목적이 까는 거예요.
그때 축구는. 까서 누가 쓰러지느냐, 내가 누굴 까서 그 사람이 쓰러지면, 내가 최고로 생각하고 그럴 때입니다."
-손경호 전 국가대표, 김용식 제자

"누가 잘 까느냐, 그때는 이기는 거야.
-서윤찬 전 국가대표, 김용식 제자

현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플레이인데, 그때는 심하게 다쳐도 아픈 표정을 하는 것조차 창피하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힘과 깡으로 거친 축구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승부욕의 화신, 18세 김용식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축구를 시작하며 이런 다짐을 했습니다.
'몸에 해로운 술, 담배는 절대 하지 말자'는 것, 또 체력관리를 잘 해서 '40세까지 축구를 계속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짐들, 잘 지켰을까요?

김용식의 선수생활은 보성전문학교로 이어졌습니다.
지금의 고려대학교입니다.
이 시기 김용식 선수는 해외원정을 가게 되는데, 여기서 인생이 180도 바뀌는 일생일대의 변화를 맞았습니다.
1934년 4월 중국 원정길에서 잠깐 틈이 나자 김용식 선수는 서점으로 향했습니다.
축구 관련 서적을 사기 위해서. 당시엔 전문적인 서적이나 자료 같은 게 우리나라에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영국 캠브리지 대학 교수가 쓴 글을 읽게 됐습니다.

"축구야말로 신사적인 운동이다.
이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려 해서는 안된다.
상대방을 고의로 찬다든가 하는 비신사적 행위 등은 절대로 해선 안 된다.
이긴다 해도 그것은 참된 스포츠맨으로서는 만족할 수 없는 승리다."

이 글을 읽고 진정한 스포츠맨십 정신을 알게 된 '까기의 명수' 김용식 선수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플레이 스타일이 너무 매너있고 깨끗하게 변했습니다.
스포츠맨십은 김용식 선수에게 절대적인 신념이 됐습니다.

"그때 배웠던 것이, 지금도 첫 머리는 다 알 거예요.
'You must strive hard to win. But You must never be tempted to win at all costs'.
그러니까 스포츠맨십부터 그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전부 외워야해. 스포츠맨십 알아야 한다고."

-정규풍 전 국가대표, 김용식 제자

"스포츠맨 정신이라고 외웠죠.
그 정도는 알아야 한다고. 우리는 얼마나, 전부 앉혀 놓으면 꾸벅꾸벅 졸아.
그렇게 연습 많이 하고 왔는데 휴식 시간 안 주고 또 앉혀 놓고 공부시키니까."

-서윤찬 전 국가대표, 김용식 제자

"축구선수는 국제신사여야 한다고 해서 항상 옷도 머리도 기름 발라야 해요. 
그때 당시는 머리에 기름 바를 때예요. 
머리에 기름 바르고, 재킷 입고 넥타이 매고 이래야지. 
늘 그 양반이 평소에 그걸 강조하신 분이라고요."

-손경호 전 국가대표, 김용식 제자
100년 전 축구, 한일전의 시작

이 시기에 축구를 하는 건, 어땠을까요?
일제강점기에도 축구 대회가 많이 열렸습니다.
그 중 국내 축구의 꽃은 '경평 대항 축구전'이었습니다.
경성과 평양의 대결이었습니다.
두 지역을 오가며 홈 앤드 어웨이로 경기가 펼쳐졌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남북 대결과 다름없습니다.
EPL로 치면, 맨체스터유나이티드 대 첼시, 혹은 맨시티 대 토트넘 느낌일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국내 최고의 축구 선수들이 경평전에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1933년에는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이 공식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경평전에 사용된 축구공을 보여주겠습니다.
90년 전 실제 사용했던 공입니다.
축구 사료 전문가 이재형 씨가 제공한 것입니다.

지금 쓰는 축구공과 많이 다르지요?
과거엔 조각으로 이어붙인 정도였습니다.
수백명의 원정팬들이 경성과 평양을 오가며 열광적인 응원을 보냈습니다.
관중이 무려 7천 명이 모이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축구 인기가 왜 좋았을까요?

"상황이 일본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는 굉장히 울분에 찬 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가 신체적인 힘으로 무언가를 하는 게 중요하다는 인식이 대중적으로 당연히 있었을 거 같아요.
한국인의 기상, 조선인의 위용을 드러낼 수 있는, 이 축구라는 스포츠에 열광하게 되는 하나의 매력포인트로 작용했던 점은 분명히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과학부 교수

나라를 뺏긴 암울했던 시기.
그 울분과 설움을 풀 방법이 스포츠였고, 특히 축구였던 것입니다.
이런 시기에 일본 선수들과 경기를 한다?
지금도 한일전에 열광하는데 그 당시는 어땠겠어요?

김용식 선수도 일본팀과 경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경신학교 시절에 일본 와세다 대학 축구팀이 조선에 온 것입니다.
그렇게 경신학교와 와세다 대학 축구팀의 경기가 성사됐습니다.
그런데 경기 전, 와세다 대학 팀은 기분 나빠 했습니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경신학교는 중등학교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중, 고등학교 개념입니다.
그래서 와세다 대학 팀에게 '경신학교도 재학생만 뛰는 게 아니라 졸업생들도 포함해 출전할 것'이라며 경기를 진행했습니다. 경기 결과는, 4대 3으로 경신학교의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경신학교에 졸업생은 없었습니다.
재학생들로만 출전해서 일본 대학 팀에게 승리를 거둔것입니다.

조선 축구의 승리, 단지 운이었을까요?
1928년도에는 평양의 숭실중학교가 전 일본 중등학교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결승전에는 백의인 천여 명이 하나가 되어 9천 명의 일본 응원단과 대항했고, 6대 1이라는 스코어로 대승하고 보니까 동포 응원단이 미칠 듯이 기뻐하고 있었다. 선수 일동도 이 모습을 보고 감격과 환희 이상으로 이상한 감상이 가슴에 북받쳐 운동장이 눈물 터가 되고 말았다."

-숭실중 축구단 인솔자 강봉우 회고담

일본에 있는 동포들은 "너희들은 축구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려주러 왔다"라고 당시에얘기했다고 합니다.
 축구 하나만큼은 조선이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고, 결과도 좋았던 것입니다.

"특히 일제가 한국을 지배하게 된 시점부터는 축구 경기에서 일본팀을 많이 이겼어요.
조선팀이. 조선이 일본을 전반적으로 축구 부분에서는 일제시기에 압도했다.
식민 지배를 하는 국가의 어떤 스포츠 종목에서 이런 팀들을 이겼을 경우에 굉장히 많은 울분도 해소할 수 있고요, 조선에서는 그런 의미에서 축구가 저항의식을 상징하는 그런 대표적인 스포츠였습니다."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과학부 교수

독립운동가들이 나라를 찾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했다면, 체육인들은 경기로 투쟁을 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일본팀에 맞서서 승리하고자 하는 DNA는 이 때부터 새겨진 게 아닐까요?

베를린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 선발 경기

그리고 1935년, 드디어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릴 기회가 왔습니다.
바로 1년 뒤에 개최되는 1936 베를린 올림픽.
그 올림픽에 나갈 축구 대표 선발을 위한 대회가 열렸습니다.
도쿄에서 열린 전 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에 일본의 각 지역 대표팀이 모였는데, 이때 조선 대표로 경성축구단이 참가하게 됐습니다.

사진이 흑백이라 안 보이지만, 빨간색 바탕의 브이 표시가 경성축구단 유니폼입니다.
여기 앉아있는 선수가, 당시 26세 김용식 선수입니다.
그리고 선수단에는 평양 선수들도 몇 명 포함됐습니다.
이 대회 우승팀에서 올림픽 대표가 많이 선발될 거라 생각했기때문입니다.
이 대회에서 경성축구단은 준결승에서 만난 나고야 팀을, 무려 6대 0으로 대파했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결승전에 올랐습니다.
결승전 상대는, 일본 칸토지역 대표 문리대학 축구팀입니다.

휘슬이 울리고 경기가 시작됐습니다.
전반 7분, 경성축구단의 선수가 헤딩한 공이 골대에 꽂혔습니다.
그 순간, 스탠드 절반을 차지한 조선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환호를 질렀습니다.
하지만 전반 16분, 문리대학팀의 허를 찌른 역공에 동점골을 허용했습니다.
경성축구단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습니다.
전반 18분, 44분에 두 골의 추가골을 넣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였습니다.
후반 1분만에 골을 또 터뜨리더니, 후반 5분, 11분에 또 연달아서 골을 넣었습니다.
무려 6대 1로, 경성축구단이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결승에서 이겼으니, 베를린 올림픽에 갈 수 있는 걸까요? 
아직 끝이 아니였습니다.
베를린 올림픽 대표 선발 대회가 아직 남았습니다.
바로, 메이지 신궁 경기대회.

경성축구단의 1회전 상대팀은 와호축구단인데, 경성이 6대 2로 가볍게 이겼습니다.
그리고 2회전 상대는 홋카이도 대표 하코다테팀입니다.

경성축구단은 전반전에 한 골을 허용하지만, 후반전에 바로 동점골을 넣었습니다.
하지만 주심이 휘슬을 울렸습니다.
오프사이드 선언이 나온 것입니다.
이후 경성팀이 다시 동점골을 넣었지만, 또 오프사이드를 선언했습니다.
두 골이나 오프사이드 선언이라니, 좀 이상하지요?
마음은 조급해지고 당황한 경성축구단의 플레이는 더 풀리지 않았습니다.
1대0 상황에서 경기는 종반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이대로라면, 예선 탈락이었습니다.
경기 종료가 10분이 채 남지 않은 시점, 페널트 박스 안에서 우리 수비가 파울을 했습니다.
그럼 상대팀 페널티킥이야. 이 골이 들어가면, 일본팀의 승리는 거의 확실시 됐습니다.

우리 선수들은 차마 골문 쪽을 보지 못하고 등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하코다테팀 선수가 강하게 슛을 날렸습니다.
그 순간, 우렁찬 함성이 울렸습니다.
함성은 조선인 유학생 쪽에서 들려왔습니다.
골키퍼 이혜봉 선수가 골을 막은 것입니다.
골키퍼는 그 공을 바로 우리 선수들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이 공격은, 극적인 동점골로 이어졌습니다.
이제 점수는 1대 1이었습니다.
경기 종료를 불과 몇 분 앞두고, 우리 선수가 공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슛.
조선인 유학생 쪽에서 또 함성이 튀어나왔습니다.
골이 들어갔습니다.
경기 결과는 2대 1로, 경성축구단이 역전승했습니다.

준결승 간사이학원대학과의 경기에서 경성축구단은 5대 0으로 대승을 거뒀습니다.
이제 결승전만 남았습니다.
이 결승전만 이기면, 베를린 올림픽 대표 선수 선발전에서 조선팀이 두 번이나 우승하는 것입니다.

결승전 상대는, 일본 최강을 자랑하는 게이오대학 BRB. 게이오대학 재학생과 OB가 섞인 팀입니다.
경기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요?
결승전 결과는, 2대 0으로 경성축구단의 승리였습니다.

이 경기가 끝난 후에, 일본의 한 잡지에는 이런 그림이 실렸습니다.
결승전에서 활약한 우리 골키퍼와 수비수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에 이런 글이 실렸습니다.

"스포츠 조선의 진출은 거대한 발자취를 신궁경기장에 남겼다…
(중략)…
강인하기 짝이 없는 공격수도 그렇거니와, 수비의 풀백과 골키퍼는 막강했다."

일본의 의외의 칭찬이지요?
선수들은 이 그림을 보고 정말 좋아했습니다.
이 분위기라면, 다들 베를린 올림픽 대표 선수로 선발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일제의 차별

운동을 마친 김용식 선수가 집으로 향하던 중이었습니다.
종로2가쯤 지나고 있는데, 한 잡화상에서 라디오 소리가 흘러 나왔습니다.
김용식 선수는 우뚝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사노 리헤이, 우콘 도쿠타로, 카와모토 다이조, 카모 다케시, 카모 쇼우고 이상 25명의 후보 가운데 조선 선수로는 김용식과 김영근 두 명이 뽑혔음을 알려드립니다."

베를린 올림픽 축구대표 1차 후보 명단이 발표된 것입니다.
두 대회를 다 이겼는데도, 조선인은 두 명만 선발됐습니다.
김용식과 김영근. 그럼 김영근 선수는 누구일까요?

김용식과 김영근 선수는 경신학교 시절 함께 뛴 적이 있습니다.
김영근 선수 또한, 아이부터 어른까지 다 아는 스타급 선수였습니다.
김용식 선수는 김영근 선수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나보다 한 수 위였어요. 볼 컨트롤과 드리블, 그리고 패스와 슈팅 등이 가히 천재금이었으니까"라고.

"김영근 씨하고 김용식 씨는 축구하는 스타일이 좀 달라요.
김영근 씨는 원체 기술이 좋아요.
축구 천재라고까지 할 정도고, 김용식 씨는 순 노력파예요."

-손경호 전 국가대표, 김용식 제자

올림픽 대표 선발전 대회에서 두 번이나 우승했잖아요.
근데 25명 중 조선 선수가 단 두 명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세계 무대에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지만, 이 편파적인 선발과 차별에 울분이 차올랐습니다.
일제의 이런 불합리한 처사는 축구에서만이 아니였습니다.
마라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총 3명의 올림픽 출전선수를 뽑는 마라톤 일본 대표 선발전에서 남승룡 선수가 1등, 손기정 선수가 2등을 차지했습니다. 
3명 중 2명이 조선인이었습니다.
그럼 일본은 어떻게 했을까요?
일본 후보 선수들까지 다 데리고 일단 베를린에 갔습니다.
그리고 현지에서 예정에 없던 선발전을 다시 가졌습니다.
마라톤은 체력 소모가 엄청났습니다.
한번 뛰면 몸무게가 4~5kg이 빠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금방 경기를 해야하는 마라토너가, 베를린 현지에서 또 선발전을 한다?
어떻게든 일본인 선수를 더 출전시키려 꼼수를 부린 것입니다.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하는 조선인 선수들은 나라를 뺏긴 설움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습니다.

대한축구협회에서 발간한 '한국 축구 100년사'라는 책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당초 방침과는 달리 일본 선수들만으로 구성한 것은 일본인들의 얄팍한 속셈을 드러낸 처사로 밖에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부당함을 지적한 조선축구협회 여운형 회장은 강력히 항의하는 한편 이를 시정치 않으면 두명의 선수도 보내지 않겠다고 강경하게 맞섰다."

조선축구협회는 보이콧을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축구협회는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어지러운 와중에, 김영근 선수는 대표팀을 나가 버렸습니다.
올림픽 축구 대표팀의 합숙 훈련 중에 벌어진 차별대우를 참을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감독, 코치, 선수 모두 일본인이고, 조선인은 김용식 선수 한 명 뿐이었습니다.
대표팀에서 나가야 할까, 아니면 어떻게든 남아야 할까?
그도 고민이 컸을 것입니다.

"선수생활을 하다 보면, 큰 대회에 나가고 싶은 욕망이 다 있거든요.
선수로서 큰 대회를 나간다는 게 유일한 희망이자 소망이에요."
-손경호 전 국가대표, 김용식 제자

"조선인으로 출전하는 것이지, 조선이라는 나라를 대표해서 출전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측면에서는 조금 두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 같고요."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과학부 교수

고민에 빠진 김용식은 스승 몇 분을 찾아갔습니다.
은사님들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울분은 우선 접고 자네라도 가서 선진 축구 기술을 배워 와야 해.
그게 조선 축구 발전에 도움이 되네."
"그들 속에서 용식이 자네가 더욱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로 그들을 이기는 길이네."

그 당시 김용식 선수의 심경이 담긴 기사가 있습니다.

"조선 축구의 벗들을 남기고 혼자 가기가 너무나 미안하고도 섭섭하나, 이왕 가기로 됐으니 끝까지 중한 광영의 책임을 다하고 우리의 힘과 의지를 만국에 호령할 결심이라고 하였다."

김용식 선수는 베를린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유일한 조선인 축구선수

1936년 6월 21일 부산역. 베를린으로 가는 열차가 출발했습니다.
약 보름간의 긴 여정 끝에, 김용식을 비롯한 일본 축구 대표팀이 베를린에 도착했습니다.
앞으로 현지에서 한달 정도 마지막 컨디션 조절을 하며, 독일 클럽팀들과 연습경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김용식 선수의 연습경기 모습은 어땠을까요? 
알 수가 없습니다.
뛰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가를 안 시키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갔는데 벤치 신세였습니다.
김용식 선수는 코치를 찾아가서 따졌습니다.

"왜 민족 차별을 합니까?
내가 후보가 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난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지금 당장 귀국하겠습니다."

1936년 8월 1일. 베를린 올림픽이 마침내 개막했습니다.
입장하는 일본 선수단 속에는 총 7명의 조선인 선수가 있었습니다.
축구 김용식, 마라톤 손기정 남승룡, 농구 장이진 염은현 이성구, 복싱 이규환 선수였습니다.
개막식 3일 뒤인 8월 4일, 일본 축구 대표팀의 첫번째 경기가 열렸습니다.
첫 상대는 스웨덴이었습니다.

스웨덴 선수가 입장하자마자 관객들 사이에선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그리고 일본 대표팀이 입장했습니다.
그 안에 김용식 선수가 있었습니다.
어쩔수 없는게, 본게임에서는 김용식 선수가 필요하니까, 코치가 항의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김 선수가 한 수기에 당시 심경을 밝혔습니다.

"나는 이 곳에 단 한 사람뿐인 조선인이다. 뼈가 부서지더라도 조선인의 명예를 위해 싸워야 한다."

굳센 맹세를 하며 선발 선수로 출전한 김용식 선수.
일본은 W-M포메이션, 3-2-2-3 전술을 짰습니다.
현재는 잘 안 쓰는 전술이니다.
이 포메이션은, 중앙 4명의 선수가 중원을 장악하는 게 핵심이었습니다.
김용식 선수의 포지션은 그 중 하나였습니다.
LH(Left Half Back), 초창기 축구에서 풀백(최후방 수비수)보다 좌측으로 반쯤 앞에 있다고 하여 불린 포지션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대표팀 스쿼드 가운데 김용식 선생님이 연령, 나이로만 보면 두번째로 나이가 많은 선수였고요.
그만큼 경험도 풍부했고 본인의 포지션 자체가 공격과 수비를 연결하는, 어떻게 보면 일본의 축구 빌드업을 사실은 시작해야 하는 그런 위치에 있었고, 수비에서도 1차 저지선 역할을 굉장히 중요하게 해야하는 그런 포지션이었기 때문에, 역습의 최일선에 서서 진두지휘하는 그런 사령관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런 포지션이었습니다."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과학부 교수

김용식 선수의 포지션은, 수비의 1차 저지선이자 공격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축구 잘하는 사람들이 그런 포지션을 맡습니다.

오후 4시, 휘슬이 울리고 경기가 시작됐습니다.
거구의 스웨덴 선수들이 일본팀을 압박했습니다.
서로 부딪치면 일본 팀이 퍽퍽 튕겨나갔습니다.
전반 24분 첫 골이 터졌습니다.
스웨덴의 득점이었습니다.
첫 골이 터지고 13분 뒤, 스웨덴의 추가골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2대 0, 스웨덴이 압도적인 실력으로 전반전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럼 이대로 스웨덴의 승리가 굳어지는 걸까요?

이어진 후반전, 수비의 선두에서 김용식 선수가 분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반 4분, 드디어 일본 대표팀에게 찬스가 찾아왔습니다.
김용식 선수가 스웨덴 선수에게서 뺏은 공을 앞으로 패스했습니다.
그게 공격수 카와모토까지 연결됐습니다.
그리고 카와모토의 슛이 골망을 갈랐습니다.
일본 대표팀의 첫 득점이었습니다.

후반 17분, 일본은 동점골까지 뽑아냈습니다. 
이제 2대 2 동점.
한 축구 주간지는 이 상황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이 수비는 전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거의 완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드필더 하치하라와 김용식의 끈질김은 스웨덴의 공격적인 플레이가 나오지 못했던 하나의 이유였다."

후반 40분경, 왼쪽 측면에서 이루어진 일본 대표팀의 슛이 스웨덴 골키퍼의 가랑이 사이로 들어가며 역전골이 터졌습니다. 그렇게 종료 휘슬이 울렸습니다.
일본 대표팀이 축구 강국 스웨덴에게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것입니다.

김용식 선수와 경기를 함께 뛴 한 일본인 선수는, 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조선인 김용식이 중반에 보여준 플레이 스타일은 당시의 일본인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김용식은 어깨에 엄청난 타박상을 입은 채로 사자분신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의 가슴에는 일장기가 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조선이라는 조국에 대한 강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일본의 공격이 성공한 것은 김용식의 힘이 컸다."

일본도 인정할 수 밖에 없던 존재감.
일본은 이 경기를 '베를린의 기적'이라 불렀습니다.
그 기적 안에는, 단 한 명의 조선인으로, 조선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김용식 선수가 있었습니다.

세계 무대에 나가 기량을 보여주고, 선진 축구를 몸소 배웠습니다.
하지만 축구는 단체경기입니다.
개인의 승리가 아닌 팀의 승리니까, 개인적으로 많이 복잡했을 것입니다.
팀의 승리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그 팀이 조국을 빼앗은 나라의 대표팀이라는 딜레마가 있었겠요.

김용식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을 때 찍은 사진들이 있습니다.
그 사진들 중, 김용식 선수의 미소가 담긴 건 단 한 장도 없다고 합니다.

그 후 일본 축구대표팀은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8대 0으로 패배하며 올림픽 여정을 마무리 했습니다.

그렇게 올림픽을 마치고 돌아오는 배 안. 
김용식 선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아시아 팀이 유럽이나 남미 팀에 지는 이유가 뭘까, 생각했습니다.
첫 유럽 원정에서 세계 축구에 눈을 떴지만, 어마어마하게 높은 벽을 맞닥뜨린 기분인것입니다.
생각을 거듭하던 김용식 선수는 이런 해결방법을 찾았습니다.

"제가 백림올림픽 1936년에 가서 절실히 느꼈습니다.
볼 개인기가 굉장해요.
상당히 떨어진 거 같아요, 우리가.
개인기를 적극 발전시켜야되겠다, 그걸 제일 느꼈습니다."

김용식 선수는 그들에 비해 개인기가 떨어진다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기 훈련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도 '1만일 동안'.
1만일이면, 27년 145일이었습니다.
거의 30년 장기 프로젝트였습니다.
김용식 선수는 귀국 직후인 1936년 11월 15일, 개인기 훈련에 돌입했습니다.
훈련을 할 때마다 훈련 일지를 쓰고 날짜를 체크했습니다.
베를린 올림픽 경험 후 자신과 한 약속, 과연 지켜질 수 있을까요?

대한민국 이름으로 참가한 올림픽

그렇게 시간이 흘러 베를린 올림픽 12년 후, 체육계가 들썩거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1948년 런던 올림픽이었습니다.
광복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런던 올림픽 참가는, 우리 선수들이 태극기를 달고 코리아를 전세계에 알릴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선 IOC 회원국 가입을 해야했습니다.
우리나라 전경무 올림픽 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이, 1947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IOC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 군용기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이 비행기가 추락한 것입니다. 부위원장은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급하게 부위원장의 지인이자, 당시 미국에 있던 이원순 씨가 임무 대행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출국을 해야하는데, 여권이 없었습니다.
이원순 씨는 당시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었고, 이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이라, 여권을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군정청에 부탁하면 되긴 하겠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했습니다.
며칠 후 IOC 총회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직접 만들기로 했습니다.
본인의 여행증명서를 본인이 직접 만든 것입니다.

이름, 나이, 주소, 부모님 성함, 아내 이름, 자신의 눈동자 색까지 기재했습니다.
그리고 본인의 사진을 붙이고 이 종이를 공증까지 받았습니다.
다행히 이원순 씨는 IOC 총회에 참석했고, 만장일치로 우리나라의 IOC 가입이 승인됐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었습니다.
돈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광복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여서 가장 힘들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요?

올림픽 후원권. 우리나라 최초의 스포츠 복권을 발행했습니다.
액면가 100원짜리 복권을 140만 매 발행했습니다.
1등 당첨금은 100만원, 2등은 50만원.
대한민국 최초의 하계 올림픽 출전을 위해 국민들 모두 한마음으로 동참했습니다.
너 나 할 것없이 복권을 구매하고, 후원금도 모았습니다.
우리나라 선수단은 이렇게 기적적으로 올림픽에 참가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진은 런던올림픽 축구 경기를 찍은 사진입니다.
왼쪽에 김용식 선수가 보이지요?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 무대에 오른지 12년 만에, 태극기를 달고 다시 한 번 세계무대에 올랐습니다.
이 때 나이가 만 38세.
당시 김용식 선수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저희 때도 다 태극 마크를 단 사람들이에요.
태극마크를 달았을 때가, 정말 자부심이 강해요.
'이겨야지, 내가 잘해야지' 김용식 선생님도 그런 마음이 있었을 거예요."

-정규풍 전 국가대표, 김용식 제자

그렇게 힘들게 도착한 런던 올림픽.
첫 상대는 멕시코.
멕시코는 지금도 강팀이잖아요.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의 올림픽 첫 출전, 결과는 어땠을까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5대 3으로 우리가 이겼습니다.

"우리 선수들이 일을 낸 거죠. 멕시코도 세계적인 축구 강국인데, 우리가 5대 3으로 격파했습니다."

-이재형, 축구 사료 전문가

그렇게 힘들게 런던에 가서 첫 경기를 이겼습니다.
온세계가 이변이라며 놀랐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경기 상대는 스웨덴이었습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만났던 그 스웨덴을, 이번엔 태극마크를 달고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스웨덴전은, 12대 0으로 패했습니다.
세계의 벽은 역시 높았습니다.
그리고 스웨덴은 런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그 정도로 강팀이었던 것입니다.

일장기를 달고 태극기를 달고, 두번의 올림픽에 출전한 김용식 선수는 1952년 은퇴하게 됐습니다.
18세 김용식 선수가 했던 마흔까지 축구를 하겠다고 한 다짐.
은퇴 당시 김용식 선수의 나이는 만 42세였습니다.
그 다짐을 지킨 것입니다.
선수로서는 은퇴했지만, 그의 축구 인생은 이제 시작이었습니다.

 축구 지도자로서의 삶

한국 최초의 월드컵 본선 진출이 언젠지 아시나요?
1954년 스위스 월드컵입니다.
이때 한국 대표팀 감독이, 김용식 감독이였습니다.
스위스 월드컵 때 김용식 감독은 유명한 어록을 남겼습니다.

"다 져도 좋다.
 한 골만 넣자. 
그래야만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 속이 좀 시원하지 않겠냐."

한국 전쟁 후 1년 만의 세계대회였습니다.
당시 한국 대표팀의 결과는, 헝가리에 9대 0으로 패하고, 터키에 7대 0으로 참패했습니다.
경기를 중계하던 외국 아나운서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한국 대표팀은 전쟁이 끝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나라의 선수들입니다.
그들은 엄청난 투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응원을 부탁합니다."

여러모로 부족했던 한국 대표팀.
당시 한국 축구는 전술, 전략, 훈련 등 체계적인 시스템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김용식 감독은 그 후에 책을 한 권 썼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축구 지도서입니다.
당시 자비로 출판했다고 합니다.

"29년간의 분투노력으로써 축구에 대하여 보고 듣고 읽고 체험한 모든 것을 기록하여 자라나는 후진들의 축구 발전 향상에 한 도움이 되고자 한다."

-김용식, 저서 '올바른 축구의 지동' 저자의 말 中

김용식 감독은 체계적인 훈련법과 전술을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합니다.

"허들을 제작해서 놓으면 허들 뛰어넘고, 밑으로 가고, 또 옆으로 돌고. 
그때만 해도 그렇게 하고, 이렇게 물 놓고 뛰어가서 주워오고 또 주워오고 이런 거…
셔틀런이라고, 그때 벌써 우린 시작을 한 거예요."
-손경호 전 국가대표, 김용식 제자

"작전을 한 두 가지 한 게 아니라, 72가지를 했어. 
72가지 작전. 
그걸 다 외워야 해 선수들이. 
축구를 학술적으로 연구해서 문서로 남긴 사람이야 그 분이."
-서윤찬 전 국가대표, 김용식 제자

"작전이라던가 축구의 흐름이, 김용식 씨 덕으로 많이 발전됐고 바뀌었다. 
그것만은 분명히 사실이다,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손경호 전 국가대표, 김용식 제자

항상 외국 서적을 보며 연구하고, 후배들을 지도하고.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엔 이걸 세계 무대에서 시험했습니다.

1960년 제2회 아시안컵 우승.
감독이 김용식 감독님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마지막 아시안컵 우승 기록입니다.
1962년 칠레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전에선, 감독으로 일본을 꺾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축구팀인, 할렐루야 축구단 사진입니다.
가운데에 앉은 김용식 감독님.
이때 연세가 70세셨습니다.
김용식 선생은 일평생을 축구선수로, 지도자로 사신 것입니다.
이런 김용식 선생님이 한국 축구에 대해 남긴 말이 있습니다.

"한국이 그만큼 활약해서 아시아 어딜 가든지 코리아 풋볼 하면 엄지손가락을 누구나 꼽습니다."
"소질은 있으나 노력이 절대 필요하죠."

그가 했던 다짐들 '술, 담배를 하지 않겠다', '40세까지 축구를 계속 하겠다', '1만일 동안 개인기 훈련을 하겠다'는 것.
일단 40세까지 축구하겠다는 다짐은 지켰습니다.
다른 것도 다 지켰을까요?

"술 담배요? 그 사람은 일절 안 해요."

-서윤찬, 손경호, 정규풍

술 담배를 금하겠다는 다짐도 지켰습니다.
마지막으로, 1만일 동안의 개인기 훈련은?

1979년 1월 15일, 서울에 위치한 한 아파트 놀이터. 
이 곳에서 1만일의 그 엄청난 목표가 달성됐습니다.
훈련 시작하고 무려 42년 2개월만이었습니다.

말년에 김용식 선생님에게 남은 건, 스무평이 안 되는 작은 아파트 하나 뿐이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그를 인터뷰한 내용이 있습니다.

기자: 혹시 윤택하게 사실 방법도 있지 않으셨나요?

김용식: 물론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내가 갈 길은 오직 축구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남기고자 한 건, 한국 축구의 발전이 아닐까요?
많은 축구인들이 그를 '한국 축구의 대부', '한국 축구의 아버지'라 부릅니다.
김용식 선생님 묘소의 비문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한평생 외골수로 살면 얼마만큼 기량을 닦을 수 있는가를, 한 사람이 진실로 최선을 다 한다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를 당신은 몸소 뚜렷이 보여주었습니다.
끊임없는 수련으로 스스로의 도를 완성한 만인의 스승. 우리의 위대한 선배, 김용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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