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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역사/흑해 요충지 크림반도 러시아 합병

by 충격대예언 2022. 2. 12.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역사/흑해 요충지 크림반도 러시아 합병

유럽 동부와 흑해 연안에 위치한 우크라이나 지역에는 고대부터 여러 종족들이 명멸을 거듭하다가 9세기경 동슬라브 민족의 최초 봉건국가인 키예프 루시Kyiv Rus'가 세워져 우크라니아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13세기 몽고의 지배에 이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은 카자크 집단을 통해 지속적인 독립 운동을 벌였고, 소련 연방에 참여해 사회주의 공화국을 거친 후에 마침내 1991년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하였다.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는 세계가 주목한 오렌지 혁명을 거치며 성숙된 정치 역량을 보여주기도 했으나, 민족과 언어 등에서 이질적인 동부와 서부 지역이 경제정책 및 정치적 입장을 둘러싸고 갈등을 벌여 2014년에 크림자치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하고 러시아와 합병을 선택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여러 국가적 난제들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여 정국 안정과 경제 회복을 이루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우크라니아의 현재를 찾아가 본다.

1. 자연환경과 역사

영토와 자연환경
우크라이나Ukraine(Україна)는 러시아 서부 흑해 연안에 위치해 있는 공화국으로, 유럽 동부와 러시아연방에 접경해 있다. 위도상으로는 북위 44°20´~52°20´, 경도 상으로는 동경 22°5´~41°15´이다. 남북 길이는 총 893㎞이며 동서 길이는 1316㎞이다. 국토 면적은 총 603,550㎢로 유럽 대륙의 5.7%에 해당하며 전 세계 육지 면적의 0.44%에 해당된다. 한반도 면적과 비교하면 약 3.5배 크다. 우크라이나는 서쪽으로 폴란드와 헝가리, 슬로바키아와 인접해 있고 북동쪽으로는 러시아, 남서쪽으로 몰도바와 루마니아에 인접해 있다. 북쪽으로는 벨라루스에 인접해 있고 흑해와 아조프해 쪽의 접경국은 터키와 불가리아, 조지아Georgia이다.

우크라이나의 지형은 국토의 95%가 평지이고, 전 국토의 80%가 경작 가능 지역이며 이 중 60%의 토지가 비옥한 흑토 지대이다. 서부의 카르파티아Carpathian 산맥과 크림 반도 등은 최고 높이 2,061m의 산악 지대이다. 수도 키예프Kyiv를 가로 지르는 드니프로Dnipro 강은 유럽에서 세 번째로 긴 강이다. 주요 천연자원은 철광석, 망간, 우라늄, 석탄, 천연가스, 원유, 마그네시아, 소금, 유황, 흑연, 티타늄, 마그네슘, 고령토, 니켈, 수은, 목재 등이다.


우크라이나의 기후는 전반적으로 대륙성 기후이지만 남부 크림 반도는 지중해성 아열대 기후이다. 카르파티아 지역은 겨울이 온화하고 여름은 우기이다. 겨울 평균 기온은 -5 ~ -10℃인데 남부지역은 0℃이다. 여름 평균 기온은 15 ~ 26℃이며 최고 기온은 39℃이다.

우크라이나의 역사


고대 정착민 역사
현재의 우크라이나 지역은 고대부터 여러 민족들이 명멸하며 이동을 거듭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기원전 3,500년에서 기원 전후에 이르는 기간 중에는 킴메리, 스키타이, 사르마티아 인들이 거주했고, 기원후 첫 1,000년 동안에는 고트족, 훈족, 불가리아인, 아바르, 하바르, 마자르, 페체네그 민족 등이 지배의 역사를 남겼다.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 지역에는 기원전 수세기 동안 타우리,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이 거주했고, 기원후 중세까지는 아르메니아, 슬로박, 제노아, 투르크, 타타르 인들이 거주하였다. 현재도 크림 지역에는 이들의 후손과 문화가 잔존해 있다.

우크라이나 내 슬라브 민족의 형성
카르파티아Carpathia 산맥 북부 지역이 본거지로 추정되는 슬라브 민족이 7세기 초 사방으로 분산, 이동하면서 7세기경 드니프로Dnipro 강 서안에 동슬라브 민족이 정착했다. 8~9세기에는 동슬라브 민족의 최초 봉건국가인 키예프 루시Kyiv Rus'(키예프 공화국)가 키예프Kiev(Kyiv)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남북으로는 흑해에서 발트해까지, 동서로는 볼가Volga 강에서 티사Tisa 강에 이르는 지역을 영토로 삼았다. 키예프는 1,500년 전에 형성되었으며 10~12세기경에는 인구가 약 15만 명에 이르렀다.

키예프 루시는 9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초반까지 200여 년간 봉건국가로서 발전을 거듭하였으며, 특히 볼로디미르 대공(Volodymyr the Great) 치세(980년~1015년)에는 그리스도교를 수용(988년)하고 비잔틴 문화를 도입하여 문화적으로도 크게 융성하였다.

번영을 구가하던 키예프 루시는 1132년 므스티슬라프Mstyslav 왕의 사후, 왕자들 간의 후계 다툼이 발발하면서 여러 공국으로 분할되었고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1223년부터는 세 차례에 걸쳐 몽고족의 침입을 받았고, 1240년 결국 몽고족에 의해 키예프가 폐허로 변하면서 키예프 루시도 멸망한다. 키예프 루시는 칭기즈칸의 손자이며 킵차크한국의 제 1대 군주였던 바투 칸에 의해 몰락했는데 이후 2세기에 걸쳐 몽고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3세기 이후부터는 현 우크라이나 영토 대부분이 할레치안 볼리니안Halytsian-Volynian 공국의 영토가 되었고 할레치안 볼리니안 공국은 왕국으로 번성하며 14세기 중반까지 이 영토를 다스렸다. 그러던 것이 14세기 중반 이후에는 점차 리투아니아, 폴란드, 터키, 몰도바에 의해 분할, 예속되었고, 1569년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합병됨에 따라 드니프로 강 서안은 폴란드에 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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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민족의 형성
중세에 동슬라브 민족이 확장 분화되면서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지역은 몽고의 지배를 거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인은 러시아인, 벨라루스인과 구별되는 그들만의 독자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우크라이나인은 16세기부터 카자크Cossacks 집단을 형성하였다. 카자크란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일대와 러시아 서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준군사적인 자치 공동체를 이루면서 동슬라브어를 사용하는 부류의 집단을 지칭한다. 우크라이나 중앙을 가로지르는 드니프로Dnipro 강을 중심으로 한 최초의 무장 조직인 자포로쟈 카자크 시크Zaporogian Cossacks Sich의 주도하에 1648~1654년까지 우크라이나인들의 독립 투쟁이 전개되었다.

우크라이나 민족과 카자크 집단은 상호 깊은 연관이 있지만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민족은 민족성(ethnicity) 개념이고, 카자크 집단은 사회계층적 성격의 집단을 의미한다. 카자크 집단은 제정 러시아 시절 러시아 변방 지역에 대한 수비 임무를 수행하는 대가로 러시아 정부로부터 자치 및 조세 면제 등의 혜택을 받은 사회 집단으로, 대부분 범법자나 도망한 농노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오늘날 우크라이나 지역에는 자포로쟈 카자크, 러시아 지역에는 돈 카자크와 쿠반 카자크 등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카자크 집단이 존재했었다. 제정러시아 시절 오늘날 우크라이나 지역 내에는 우크라이나인으로 구성된 자포로쟈 카자크 집단이 주류를 형성하였고 대對폴란드 독립 투쟁도 이들 우크라이나인 카자크 집단이 주도했다.

폴란드 점령지가 아니었던 드니프로 강 동쪽은 1654년 잠시 러시아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카자크 지도자 흐멜니츠키Khmelnitsky와 러시아의 황제 차르 사이에 페레야슬라프Pereyaslav 협정이 체결되면서 러시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 지역에 대해 처음에는 카자크를 중심으로 하는 자치권을 인정하였으나 점차 자치권을 억제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18세기 후반에는 카자크 간부에 대한 귀족 특권의 부여, 농노제의 도입 등 러시아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1772년 폴란드가 해체됨에 따라 드니프로 강 서쪽의 폴란드 점령 지역 대부분도 러시아에 편입되었고, 갈리치아, 볼리니아, 이바노프란코프스크 등 일부 지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이곳 드니프로 강 서안의 우크라이나에서는 18세기를 거치는 동안에 폴란드화가 더욱 진행되었고 폴란드 분할로 러시아에 병합된 이후에도 우크라이나 농민에 대한 폴란드계 지주의 지배가 폴란드적인 행정 및 토지제도 등과 함께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이러한 점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로 귀속된 일부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크라이나 볼셰비키 혁명 이후의 역사
그러다가 1905년 이후 제정 러시아 내에서 반 황제 혁명 움직임이 확산되자 우크라이나에서도 노동자, 농민들의 대규모 봉기가 빈발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당시 우크라이나에도 인민대표 회의가 결성되었으며 1917년 12월 25일 하리코프Khar’kov를 수도로 하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지배하에 있던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갈리치아-볼히니아Galicia-Volhynia)은 제1차 세계대전 말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퇴에 따라 1918년 11월 서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폴란드 민족의 봉기와 신생 폴란드 정부의 무력 개입으로 독립에 실패하였고 이 지역은 1919년 7월 폴란드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한편 이바노프란코프스크Ivano-Frankovsk 지역은 신생 헝가리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Greater Ukraine)에서는 1917~1921년 사이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과 볼셰비키파 등 6개 정파 간의 내란이 발생하였고 독립 쟁취에는 실패하였다. 1917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러시아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우크라이나 공화국이 선포되어 활동을 벌였지만 수개월 후 볼셰비키 세력에 패하여 소멸되고 말았다.

그러나 내란 과정에서 일반 국민들의 반反러시아 의식과 민족 의식이 크게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1921년 모스크바 볼셰비키 정부의 전략적 양보 하에 조약체결권과 영사관할권 등이 주어진 제한적 외교 주권을 가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1922년 12월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창설 조약에 서명하여 창립 회원국이 되고, 이로써 외교 주권을 일부 상실하게 되었다. 소련 연방 가입 이후에도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민족 의식은 꾸준히 지속되었으며 모스크바 중앙 정부는 이러한 민족 의식 말살을 위해 강력한 억압 정책을 시행했다. 1932~1933년에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이 실시한 집단 농장 추진 과정에서 인위적인 기아 정책이 집행되어 우크라이나 농민 800만 명이 아사하는 참상이 벌어졌다. 또 전쟁, 기근 등으로 많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해외로 이주하여 1939년 당시 4,100만 명의 인구가 1945년에는 2,700만 명으로 대폭 감소하게 되었다.

1934년 키예프는 소비에트연방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소비에트연방 당시에는 모스크바Moskva,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다음으로 큰 제3의 도시로 성장했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소비에트연방은 폴란드에 귀속된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과 벨라루스, 베사라비아, 북부 부코비나를 병합했다. 이 병합으로 인해 1941년 당시 소비에트연방 내 우크라이나 영토는 56만㎢였다. 한편 1941~1944년 사이에 우크라이나 전역이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다.


우크라이나 공화국은 1945년 소비에트연방 내 러시아, 벨라루스와 함께 국제연합UN(United Nations) 회원국으로 참여하여 유엔 창설 회원국이 되었다. 1954년 소비에트연방 정부는 우크라이나 합병 300주년을 기념하는 선물로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에 이양했다. 1953년 스탈린 사후에는 우크라이나에 로켓, 전자, 화학, 조선 산업 등 중화학 시설이 건설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의 역사
1980년대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Mikhail Sergeevich Gorbachyov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이후 소비에트연방 중앙 정부의 장악력이 약화됨에 따라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는 ‘독립선언법’을 채택하고 1991년 12월 1일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독립을 최종 확정했다.

1991년 12월 5일 레오니드 크라프추크Leonid Kravchuk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1991년 12월 8일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3개국 정상이 소비에트연방 탈퇴 문서에 정식으로 서명했다.

독립 후 1994년 3월과 1998년 3월, 2002년 3월에 각각 제 2, 3, 4대 총선이 있었으며, 1996년 6월 28일에는 ‘신헌법’이 채택되었다. 1994년 5월 제2대 대통령으로 레오니드 쿠치마Leonid Kuchma가 당선되었으며, 그는 1999년 10월에 제3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2004년 11월에 치러진 제4대 대통령 선거는 부정 선거 시비가 발생했다. 이 선거에 대해 야권이 불복함으로써 대대적인 저항이 유발되었는데, 시민들은 야당을 상징하는 오렌지색 옷이나 목도리, 깃발 등을 휘두르며 대규모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이어갔다. 온통 오렌지색으로 뒤덮인 시위대의 물결이 전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 ‘오렌지 혁명Orange Revolution’의 결과, 세 차례나 대통령 선거를 치른 끝에 2005년 1월 야당 후보 빅토르 유셴코Viktor Yushchenko가 제4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우크라이나는 성숙된 역량을 과시하며 평화적인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이후 201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가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러시아 혈통으로서 친러시아 성향을 갖고 있던 야누코비치는 취임 이후 가장 중요한 국정 사안이었던 우크라이나의 재정 위기 타개를 위해 나섰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외환보유고 부족으로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EU의 경우 200억 유로의 차관을 제공하되 재정건전성을 높이기 위해 강도 높은 개혁을 할 것을 조건으로 걸었고, 러시아는 조건 없이 150억 달러의 차관 제공 제시와 함께 저렴한 가격의 가스 공급을 제안했다. 이에 야누코비치는 친러시아 쪽으로 정책 방향을 틀었고, 우크라이나 정부는 2013년 11월 21일 유럽연합EU과의 경제 협력 추진 백지화 정책 실시를 공표했다.

이에 대해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가 수도 키예프에 있는 ‘독립광장’(우크라이나어로 ‘유로마이단Euromaidan’)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유럽연합에 편입되길 희망했던 시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야누코비치는 EU와 다시 협상하겠다고 선언했다가 번복을 하고 반정부 시위를 막기 위한 '반시위법' 제정을 추진했다. 이에 시민들이 크게 반발하여 시위가 격화되었고 정부는 강경 유혈 진압으로 대응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결국 야누코비치는 축출되어 키예프를 떠나 도주하기에 이르렀다. 이 ‘유로마이단Euromaidan 사건’의 결과 여당도 야누코비치에게 등을 돌렸고, 국회는 인권침해와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탄핵을 가결해 그는 대통령직을 상실하였다. 2014년 2월 우크라이나 검찰은 야누코비치와 측근들을 직권을 이용한 공금 횡령 및 탕진혐의로 기소하였으며 2015년 1월에는 인터폴에 의해 국제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야누코비치는 현재 러시아에 망명 중이다.


최근의 우크라이나 정세
유로마이단 사건과 야누코비치 축출로 혼란에 빠진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우크라이나 선거관리위원회는 2014년 조기 대선을 결정하였고, 한때 전 총리이자 야당의 지도자인 율리아 티모셴코Yulia Volodymyrivna Tymoshenko가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으나, 2014년 5월에 치러진 대선의 승리는 54.7%의 지지율로 당선된 페트로 포로셴코Petro Poroshenko에게 돌아갔다.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한 포로셴코는 ‘쵸콜릿 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우크라이나 7위의 재벌로서, 정치적으로 중도 성향을 보이고 있어 분열된 우크라이나를 통합시킬 수 있는 인물이고 외교적으로는 친서방적 성향으로 러시아로부터 독립적인 우크라이나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대통령으로 평가받은 것이 선거에서 승리한 요인으로 분석되었다.

하지만 포로셴코는 친러 성향의 분리 독립 운동에 대응한 평화 회복 문제와 침체에 빠진 국가 경제 회복 문제 등 주요 현안에 대해 효과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특히 야누코비치를 축출한 유로마이단Euromaidan 사건으로 촉발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의 분리 독립 움직임은 우크라이나의 장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요소로 회자되고 있다. 

이미 EU와 러시아, 미국 등 강대국들의 정치 경제적 이해 관계가 맞물린 흑해의 요충지 크림반도(크림 자치공화국)가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러시아와의 합병하는 사태가 발생, 이후 도네츠크와 루칸스크 등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의 분리 독립 운동도 격화되는 등 쟁점으로 부상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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