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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연개소문 고구려 전권을 장악하다, 그는 누구인가?

by 충격대예언 2022. 3. 8.

*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9백 년 이래의 전통이었던 호족 공화제라는 구제도를 타파하여 정권을 통일하였고, 장수태왕 이래 철석같이 굳어 온 서수남진西守南進 정책을 변경하여 남수서진南守西進 정책을 세웠으며, 그리하여 영류태왕 이하 대신과 호족 수백 명을 도살하여 자기 집안의 독무대를 만들고 서국西國의 제왕인 당태종唐太宗을 격파하여 중국 대륙 침략을 시도하였으니 그 선악善惡과 현우賢愚는 별개의 문제로 하고, 여하간 당시 고구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쟁사에서 유일한 중심 인물이었다.
- 단재 신채호의 연개소문에 대한 대략적인 평가

*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이 당태종唐太宗의 눈을 쏘아 맞히매, 태종이 성 아래서 군사를 집합시켜 시위示威하고, 양만춘에게 비단 백 필을 하사하여, 그가 제 임금을 위하여 성을 굳게 지킴을 가상嘉賞하였다. -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 연개소문은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 하더니 과연 그렇다. 막리지(연개소문)가 살아 있을 때는 고구려와 백제가 함께 건재하였으나, 막리지가 세상을 뜨자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망하였으니, 막리지는 역시 걸출한 인물이로다.
-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왕안석王安石(왕개보王介甫)의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


642년 10월 고구려 수도 평양 장안성 남쪽 벌판의 정변

순식간이었습니다. 100여 명의 고구려 대신들은 열병식이 고조되어 가던 즈음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날선 호각과 북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어 칼과 도끼 같은 병장기를 든 성난 눈빛의 군사들을 보았습니다. 수 제국과 맞서 빛나는 승리를 일군 백전노장들이었지만, 무방비 상태였기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채 쓰러졌습니다. “범과 이리가 문 가까이 왔거늘, 나를 구하기는커녕 도리어 죽이려 하는가?” 하는 큰 소리가 들렸습니다. 정변의 주인공 막리지莫離支 연개소문淵蓋蘇文이었습니다. 열병식장은 피비린내가 가득했습니다.

연개소문은 그대로 병사를 이끌고 궁궐에 난입하였습니다. 태왕을 지키는 시위병은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고, 변고를 들은 영류제榮留帝는 평복으로 몰래 달아나 고추모 성제가 다물도로 삼은 바 있는 송양松壤에 이르러 조칙을 내려 병사를 모집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라 사람이 한 명도 오지 않으니 이에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습니다.
불과 20년 전 수나라 수군을 일격에 섬멸하여 살수대첩의 신화를 만들어 낸 전쟁 영웅 고건무高建武의 최후는 이러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정변의 원인이 된 영류제의 저자세 외교

수나라의 멸망은 중원 정세에 급격한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태원유수太原留守 이연李淵이 남하해 당나라를 건국한 것입니다. 이어 당 고조의 둘째 아들 이세민李世民은 626년 현무문의 변으로 형인 태자 건성建成과 동생 원길元吉을 죽이고 부왕에게서 왕위를 빼앗았습니다. 바로 당태종唐太宗으로 이후 내부 반란을 진압한 후, 돌궐까지 정복해 주변 여러 민족을 복속시켰습니다.

고구려는 수나라와 네 차례 전쟁에서 모두 이겼지만, 전쟁의 장소가 고구려였던 만큼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영양제嬰陽帝가 후사 없이 붕어하자, 이복동생인 고건무가 즉위하니 바로 고구려 제27세 영류제榮留帝입니다. 영류제는 당나라와 화친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전체적으로 저자세의 외교 노선을 견지하였습니다. 물론 수나라와 대전을 겪은 뒤이기에 전략적으로 친선을 도모할 필요성은 있지만, 당에게 고구려의 봉역도封域圖(강역도)를 바친 일(628년)이나, 당이 고구려에 침입하게 된다면 당의 후방을 견제해 줄 수 있는 세력인 돌궐 주력군이 당에 의해 격파되고, 힐리가칸頡利可汗이 사로잡혔을 때 수수방관한 부분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631년 대수對隋 전승기념탑인 경관京觀을 당의 요청으로 헐어 버렸습니다. 이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유가족들에게는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강력한 상무尙武 정신과 주체 의식을 가진 연개소문을 위시한 대당 강경파들의 격렬한 반발을 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642년 정월 영류제는 막리지인 연개소문에게 명하여 장성長城을 쌓는 역사를 감독하게 했습니다. 고구려의 장성은 중국의 만리장성 같은 담이 아닙니다. 만리장성은 한쪽이 뚫리면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는데, 고구려의 장성은 요동 지역에 있던 고구려 성들 사이의 협조와 연락 체계 그리고 몇 겹으로 강화된 방어망 정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고당 전쟁 때 이 효과는 충분히 발휘되었습니다. 연개소문을 이 장성 축조의 감독으로 보내면서 그를 제거하고자 한 이들은 고구려 귀족들이었고, 같은 연씨 집안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영류제도 이를 묵인 또는 동의하였습니다.

이에 반발한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이 정변은 단순한 쿠데타가 아니고 지나친 대당 굴욕 외교로 일관한 영류제와 그 세력에 대한 연개소문과 대당 강경파의 혁명 기의였습니다. 즉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지닌 정치 세력이었다면, 전쟁의 참화를 직접 겪은 영류제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포기하고, 당 제국에 복속됨으로써 존속을 도모하는 정치 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세계관의 차이는 정변을 불러왔고,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고구려 전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은 누구인가?

부정적 인식의 이유
연개소문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임금을 시해한 무자비한 독재자이고, 고구려 멸망에 책임이 있다는 통설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그를 악인으로 만들려는 조직적 작업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그를 다룬 대부분의 사료는 중국 측 자료로, 고구려 측 사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 중국에서 그렇게 자랑하는 당태종의 침략을 보기 좋게 막아 내고, 그의 최후를 만들어 낸 인물이 연개소문이기에 더더욱 후세에 그를 다룬 기록은 연개소문에게 무척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연개소문에 대한 공포는 더 크게 퍼져서 지금까지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 수록된 「태백일사」 고구려본기 편을 보면 연개소문은 본래 우리의 고유한 신교 문화의 상무 정신을 크게 떨친 희대의 대영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연개소문의 조상들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蓋金이라 하고 호는 금해金海입니다. 성은 연씨淵氏이고, 선조는 봉성鳳城 사람입니다. 스스로 말하기를 “물속에서 태어나서 종일 물에 잠겨 헤엄쳐도 더욱 기력이 솟고 피로한 줄 모른다.” 하니, 무리가 모두 놀라서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창해滄海의 용신龍神이 다시 화신化身하였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물속에서 태어났다는 구절에 따라 성을 연淵이라 했다고 합니다.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서 전하는 부친의 이름은 태조太祚이고,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이며 대대로 막리지를 지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세 중국 낙양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큰아들 남생의 묘지명 기록과 정확히 들어맞고 있습니다. 부친 연태조는 26세 영양태왕 때 명을 받고 등주를 토벌하여 총관 위충을 잡아 죽인 공이 있습니다.

출생과 성장
603년 영양제 홍무 14년 5월 10일에 태어난 그는 아홉 살에 조의선인皁衣仙人이 되었습니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 강화군의 향토지인 『강도지江島誌』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강화도 고려산 서남쪽 봉우리인 시루봉 기슭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강화군은 이곳을 향토유적 제26호로 지정하고 하점면 지석묘 앞 고인돌 공원 들머리 큰길가에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유적비’를 만들어 세워 놓았습니다. 연개소문은 몸가짐이 웅장하고 훌륭하였고, 의기가 장하고 호탕하였습니다.

다섯 자루 칼의 진실
또한 몸에 다섯 개의 큰 칼을 차고 다녔으며, 혹자는 이를 오만한 독재자의 모습으로 묘사하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즉 고구려 남성들은 허리에 은띠를 차고, 왼쪽에는 숫돌을 오른쪽에는 칼 다섯 자루를 달고 다닌다는 『한원翰苑』의 기록을 통해 본다면, 이는 고구려 남성들의 일상적인 풍습이었습니다. 상무적 기상이 충만했던 고구려였고, 사냥 등 생활 속에서 각종 무예를 연마해야 했기에 당연히 이 정도의 칼은 가지고 다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대인의 풍모를 지닌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늘 병사들과 함께 섶에 나란히 누워 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셨으며,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자신이 최선을 다하였고, 일이 혼란하게 얽혀 있더라도 미세한 것까지 분별해 내었습니다. 하사받은 상은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상대방의 진심 어린 마음을 헤아려서 거두어 품어 주는 아량이 있었습니다. 또한 온 천하를 잘 계획하여 다스리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감복하여 딴마음을 품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항상 자기 겨레를 음해하는 자를 소인이라 여기고, 당나라 사람을 능히 대적하는 자를 영웅으로 여겼습니다. 기뻐할 때는 신분이 낮고 미천한 사람도 가까이할 수 있지만, 노하면 권세 있고 부귀한 자도 모두 두려워하니 진실로 일세를 풍미한 시원스러운 호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적인 면모와 영웅적인 면모를 함께 지닌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을 운용할 때는 엄격하고 명백히 밝히어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다스렸습니다. 만약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록 큰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조금도 놀라지 않고,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눌 때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또한 『금해병서』를 저술하기도 한 당대 최고의 병법가로 당태종을 도운 이정李靖의 스승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자주적이고 공명정대한 성품을 지닌 병법가였던 것입니다.

내정을 안정시키다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킨 뒤 영류제의 아우 대양왕의 아들 보장제寶臧帝를 제위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법을 공정 무사한 대도로 집행함으로써 자신을 성취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고(성기자유成己自由), 만물의 이치를 깨쳐 차별이 없게(개물평등開物平等) 되었으며, 조의선인들에게 이 계율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무조건적인 강경책을 펴지는 않았습니다. 당의 국교인 도교 수입을 자청하여 독자적인 천하관을 유지하면서도 전술의 유연성을 택하는 정치가의 면모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후 내정을 안정시킨 뒤 당태종과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여 승리로 이끈 출중한 지용智勇과 비상한 통솔력統率力을 지닌 영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개소문의 외교정책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은 강성해지는 당나라에 대비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외교정책을 펼쳤는데, 우선 백제의 상좌평 성충成忠과 함께 양국이 병존하는 방안을 세웠습니다. 성충은 연개소문과 만나고 의자왕에게 보고하길 “만약 연개소문이 10년만 일찍 고구려 대권을 잡았으면 능히 당나라를 멸망시켰을 것”이라며 연개소문을 높게 평가하였습니다.

연개소문이 보기에 만일 성충과 계백 등이 있는 백제를 적으로 돌린다면 백제와 당의 수군이 서해에서 연합함대를 형성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큰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고구려 멸망 때의 상황을 살펴보면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 연합군이 이런 방식으로 평양성을 포위하였습니다. 만약 백제가 멸망하지 않았다면 고구려의 멸망도 다른 형태였을 것입니다.

그 무렵 남쪽에는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보장제와 비슷한 시기에 즉위한 의자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서부 40여 성을 빼앗았고, 장군 윤충允忠은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지키는 요충지인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성주 김품석 내외를 죽였습니다. 이때 계책을 낸 인물이 노련한 전략가인 성충입니다. 김품석은 바로 김춘추의 사위로 김춘추는 사랑하는 자신의 딸 고타소랑을 죽인 백제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게 되고, 바로 이 일이 삼한일통三韓一統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백제의 거듭된 공격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게 되어, 김춘추를 고구려로 파견하였습니다. 이에 연개소문은 자신의 집에 그를 머무르게 하고 다음과 같이 권유하였다고 합니다.

당나라 사람들은 도의에 어긋나고 불순하여 짐승에 가깝소. 그대에게 청하노니, 모름지기 사사로운 원한은 잊어버리고 이제부터 핏줄이 같은 우리 삼국 겨레가 힘을 모아 곧장 장안을 무찌른다면, 당나라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승리한 후에는 우리 옛 영토에 연합 정권을 세워 함께 인의仁義로 다스리고,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약속하여 그것을 영구히 지켜 나갈 계책으로 삼는 것이 어떠하겠소?

즉 삼국이 연합하여 당나라를 정벌한 뒤에 배달국, 단군조선 때의 중국 본토 내 조선족의 본고장이요 본래 우리 땅이던 황하와 양쯔강 중류 이동에 연합 정권을 세워 함께 다스려 나가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세 번 권유하여도 김춘추는 딸을 잃은 원한과 당에 대한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끝내 듣지 않았습니다. 그 후 김춘추는 당태종과 밀약을 맺었고, 백제와 고구려는 내부 분열과 나당 연합군의 침입으로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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