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육룡六龍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古聖)이 동부(同符)하시니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뮐쎄 꽃 피고 여름 하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마레 아니 그칠세 내 이러 바라레 가나니’ -용비어천가 中-
용비어천가의 한 구절입니다. 용비어천가는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에서 태종 이방원까지 조선왕조 창업의 기틀이 된 여섯 선조의 이야기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500년 조선 왕가王家의 가문인 전주 이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성씨가 이씨입니다. 이씨는 크게 전주 이씨 계통과 경주 이씨 계통으로 나누어집니다.
이 외에 중국 계통과 만주 계통, 월남 계통이 있으며 또한 다른 성씨에서 분적한 이씨도 있습니다. 특히 월남 계통의 성씨로는 베트남 최초의 통일 왕조인 ‘리 왕조’의 왕자로 13세기 정란을 피해 고려로 망명한 화산 이씨花山李氏가 있습니다.
전주 이씨의 본관 계통과 분파
전주 이씨는 우리나라 본관별 성씨 인구 순위로 보면 김해 김씨, 밀양 박씨 다음으로 많은 성씨입니다. 전주의 옛 지명이 완산이기 때문에 전주 이씨를 완산 이씨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이 둘을 합하여 267만 8,000여 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전체 이씨에서는 3분의 1이 넘을 정도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김해 김씨 4,456,700명 / 밀양 박씨 3,103,942명 / 전주 이씨는 2,631,643명
전주 이씨는 총 120여 파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 중 후손이 번창한 파는 태종 이방원의 장남인 양녕대군파와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파,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파와 열두 번째 아들인 밀성군파, 그리고 정종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파 등입니다.
또한 전국에 크고 작은 집성촌이 있는데, 몇 군데를 소개하면, 전라남도 영광군 군서면 만곡리 영당마을과 화순군 백아면 임곡리, 화순군 화순읍 세량리,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남하2리와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유전1리에 집성촌이 있습니다.
전주 이씨의 기원
전주 이씨는 시조 ‘이한李翰’ 이후 목조 이안사李安社가 전주를 떠날 때까지 오랫동안 전주의 호족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시조 ‘이한李翰’ 이전의 역사를 통해 전주 이씨 기원을 살펴보겠습니다.
전주 이씨는 토착 성씨라는 주장과 당나라 도래설, 경주 이씨 분적설이 있습니다.
당나라 도래설은 작자와 연대가 밝혀지지 않는 「완산실록完山實錄」과 출처 미상의 ‘이씨 득성의 유래’란 글에서 주장하고 있지만, 자료의 출처가 명확하지 않아 객관적인 신빙성을 부여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경주 이씨 분적설도 있지만 이 설 또한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입니다. 조선 말 무렵 경주 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陜川 이씨 족보에서만 그렇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까지는 시조 이한李翰 이전의 역사를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전주 이씨는 시조 이한李翰 이후 전주를 기반으로 한 토착 성씨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전주 이씨의 시조
전주 이씨의 시조는 신라 때 ‘사공’ 벼슬을 한 ‘이한李翰’이며, 중시조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입니다.
태조 이성계에 비하여 시조 ‘이한李翰’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건지산에는 전주 이씨 시조 묘역인 조경단肇慶壇이 있습니다. 조경단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지 3년째인 1899년, 시조 이한의 묘가 있다고 전해지던 건지산에 조성되었습니다. 정확한 묘의 위치를 찾지 못해 정방형의 제단을 쌓아 이것을 조경단이라고 하고, 제단 뒤 묏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봉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고종 친필의 ‘대한조경단비’가 세워지는데, 매년 4월 10일이 되면 이곳에서 시조에 대한 대제를 올립니다.
전주 이씨 관련 유적
시조 이한李翰 이후 18세손 목조 이안사가 전주를 떠날 때까지 후손들은 대대로 신라에 벼슬을 하면서 전주에 터를 닦고 살았습니다. 조선왕조의 발상지이기도 한 전주, 그래서 조경단 외에도 관련된 유적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유적들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전주 완산구에 있는 한옥 마을에 ‘경기전慶基殿’이 있습니다. ‘경기전慶基殿’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모신 전각입니다. 1410년 태종 10년, 전주·경주·평양에 전각을 짓고 태조 어진御眞을 모시는데, 특히 전주에 있는 것은 ‘경기전慶基殿’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전주의 경기전만 남아 있는데, 여기에 모셔진 어진은 유일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으로 국보 제317호입니다. 또한 경기전 내에는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 부부의 신위를 모시고 있는 조경묘가 있습니다. 조경묘는 조선 영조 때에 세워졌으며, 경기전과 더불어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임을 상징합니다.
경기전 내에는 조선의 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전주 사고史庫도 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다른 사고의 실록이 모두 소실될 때 내장산으로 옮겨 보관함으로써 유일하게 보존된 것이 전주 사고의 실록입니다. 2010년에는 경기전 내에 어진박물관을 개관했는데, 여기에 태조 어진을 비롯해 일곱 분의 어진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옥 마을에 있는 작은 언덕 정상에는 오목대梧木臺라는 정자가 하나 있습니다. 고려 우왕 6년 1380년, 이성계가 남원의 황산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돌아가던 중, 자신의 고조부인 이안사가 살았던 이곳에 들러 승전을 자축한 곳입니다. 이것을 기념하여 조선을 개국하고 난 뒤 여기에 정자를 짓는데, 이곳에 오동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오목대梧木臺라고 합니다.
오목대와 더불어 이목대梨木臺가 있습니다. 이목대梨木臺는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이안사가 출생하고 자란 곳입니다. 지금은 오목대 옆을 지나는 왕복 6차선 도로 건너편에 작은 비각 하나만 세워져 있는데, 이 비각은 원래 오목대의 동쪽 높은 대지 위에 있었다고 합니다.
역사에 등장한 전주 이씨
전주 이씨는 전주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지방 호족입니다. 하지만 중시조인 태조 이성계는 함경도 영흥 출신입니다.
전주 이씨는 어떻게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영흥으로 가게 됐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전주에 터전을 잡고 살던 시조 이한의 후손들은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李安社에 이르러 큰 변화에 직면하게 됩니다. 전주 이씨의 터전인 이곳을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전주의 호족으로 성격이 호방하고 용기와 지략이 뛰어난 이안사는 새로 부임해 온 지주사知州事의 탐욕과 포악함을 규탄하다 눈 밖에 나게 됩니다. 그는 지주사知州事의 보복을 피해 가솔들을 포함한 170여 호나 되는 상당한 세력을 이끌고 강원도 삼척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지주사가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온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북쪽으로, 지금의 원산 지역인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옮겨 갑니다. 이때는 원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근 100년간 지배하게 되는 쌍성총관부가 영흥에 설치될 무렵입니다.
결국 이안사는 원에 귀순하여 두만강 변의 알동斡東으로 이주하여 남경오천호南京五千戶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됩니다. 이후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은 원나라의 쌍성총관부가 있던 영흥에서 천호 벼슬을 지내는데, 이때 그는 고려에 공을 세우게 됩니다. 공민왕이 원나라의 국력이 쇠약한 틈을 타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탈환할 때 고려와 내응하여 도움을 준 것입니다. 이때 20대의 이성계도 아버지와 함께 큰 공을 세우게 되는데, 이것을 계기로 이들은 다시 고려의 조정에 돌아오게 됩니다. 1361년 이자춘은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되어 동북면 지방의 실력자로 급부상하고 이것을 발판으로 이성계는 중앙의 무대에 등장하게 됩니다.
전주 이씨의 중시조, 이성계
“이성계가 함경도 안변安邊에 살 때 하루는 수많은 닭이 한꺼번에 우는 와중에 허물어진 집에 가서 세 서까래를 지는 꿈을 꾸게 됩니다.”
이 일화는 태조 이성계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알려진 일화 중 하나입니다. 이성계가 꾼 이 꿈을 해석해 보면, 닭이 ‘꼬끼오~’ 하고 우는 것을 한자로 옮기면 고귀위高貴位가 됩니다. 그래서 ‘꼬끼오~’ 즉 고귀위高貴位는 높고 귀한 자리에 오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허물어진 집에 가서 세 서까래를 지는데 허물어진 집은 망해 가는 고려 왕실을 말하고, 사람이 세 서까래를 지면 전체 모습이 임금 왕王 자가 되기에 이성계가 왕이 된다는 뜻으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성계는 이 꿈처럼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열게 됩니다.
그렇다면 변경 지역의 실력자인 그가 어떻게 왕위까지 오르게 됐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고려 말, 북쪽은 원ㆍ명 교체기여서 그 여파가 고려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홍건적이 쳐들어오기도 하고 원의 세력이 공격하기도 하는 등 외침이 자주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남쪽 또한 점점 규모가 커지고 대담해지는 왜구의 노략질로 고려는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내적으로는 권문세족의 득세로 왕권이 약화되고, 국가 재정도 악화되면서 고려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합니다.
이런 난세는 동북면에 탄탄한 기반을 둔 이성계에게는 무장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활을 잘 쏘고 전술에 뛰어난 이성계는 쌍성총관부를 탈환한 이후 고려 조정에 등장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앞세워 본격적인 활약을 펼치게 됩니다. 반란을 진압하기도 하고, 10만의 홍건적이 수도 개경을 함락시켰을 때 그들을 물리치고 가장 먼저 개경에 입성하기도 합니다. 또한 원나라 나하추의 공격을 막아 내고, 내륙 깊숙한 곳까지 침입하여 약탈하던 왜구의 주력을 황산에서 섬멸하여 기승하던 왜구의 세력을 꺾는 결정적인 승리도 이뤄냅니다. 이처럼 이성계는 고려의 남북을 오르내리며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면서 백성들이 그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마침내 위화도 회군으로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열게 됩니다.
이렇게 전주 이씨는 조선왕조의 개국과 더불어 왕가의 성씨가 됩니다. 그리고 조선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추앙받게 되는 태조 이성계의 손자이면서 조선의 제4대 국왕인 세종대왕이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전주 이씨 가문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전주 이씨의 인물 ①이원익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명신으로 오리梧里정승 이원익李元翼이 있습니다. 이원익은 태종의 여덟 번째 아들인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의 4세손입니다. 그는 뛰어난 실무적 능력과 식견을 가진 신하였으며, 또한 신념과 원칙이 강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원익은 선조, 광해, 인조 3명의 군왕을 섬기며 무려 여섯 차례나 영의정에 올랐는데, 특히 광해군에 이어 반정으로 즉위한 인조까지 그를 첫 재상으로 선택한 것을 보면 경륜과 인품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원익은 사람과 번잡하게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외출도 잘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고 합니다. 몸은 허약한 편이고 키 작은 재상이라 불릴 정도로 상당히 왜소했지만, 일찍이 이이와 류성룡은 그의 비범함을 알아봤습니다.
이원익은 중국어에도 능했는데, 당시 양반들이라면 꺼렸던 중국어를 그는 임관 초기부터 공부했습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아주 능통하게 중국어를 직접 구사하며 일사천리로 일을 처리하니 역관들이 오히려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임란왜란 당시 이 중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명나라 장수인 이여송과 친분을 쌓으며 평양을 수복하는 데도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성품이 소박하고 과장이나 과시할 줄을 모르는 이원익은 영의정을 여섯 차례나 지냈지만 다 쓰러져 가는 두 칸 초가집에서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를 알게 된 인조는 5칸 기와집을 지어 주고 관감당觀感堂이라는 당호를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관감당觀感堂이라는 당호는 청빈한 삶을 사는 그의 정신을 보고 느끼란 의미로 그렇게 지었다고 합니다. 백성들 틈에 들어가 돗자리 짜는 기술을 배우고 임진왜란 이후 대동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 주는 등 누구보다도 백성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전주 이씨의 인물 ②이수광
이원익과 동시대의 인물로 실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이수광李睟光이 있습니다. 그는 세 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게 되는데, 그때 동남아에서 온 사신들을 비롯해 서양 선교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알게 된 외국 문물과 정보를 기록해 두었다가 훗날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芝峯類說」을 저술하게 됩니다.
이수광은 외가 5대조 할아버지인 유관의 초가집에서 살았는데, 유관은 태조부터 세종까지 4대에 걸쳐 정승을 지낸 인물입니다. 비가 와서 초가지붕에 물이 새자 손수 우산을 받치고 부인에게 “우산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꼬?”라고 했을 정도로 유명한 청백리였습니다. 이수광은 이런 유관과 부친의 영향을 받아 청백리 정신을 늘 자랑으로 여기고 그 유지를 이으며 살아갔습니다
임진왜란 때 이 집이 소실되자, 이수광은 집을 새로 짓고 ‘겨우 비를 피할 수 있는 집’이란 뜻으로 이름을 ‘비우당庇雨堂’이라 짓는데, 이 단촐한 ‘비우당’에서 지봉유설이 탄생했습니다.
전주 이씨의 인물 ③이봉창
“선생님(김구), 제(이봉창) 나이 이제 서른하나입니다. 앞으로 서른한 해를 더 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모두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 온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聖業을 완수하게 해 주십시오.” -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 中에서
1년 뒤 1932년 1월 8일, 이봉창李奉昌 의사는 준비했던 거사를 단행합니다. 일본 제국의 수도인 도쿄에서 궁성으로 돌아가던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진 것입니다. 거사는 실패했지만 이 한 발의 수류탄은 일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됩니다.
이봉창 의사는 원래 남만주에서 철도원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일본으로 들어가 일본어를 익히는 한편 6년여 동안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일인日人 생활을 익혔다고 합니다. 이봉창 의사는 겉으로는 일인 행세를 하며 월급을 타면 술에 취해 사치와 호사를 즐기는 건달 생활을 했지만 김구 선생이 그의 진심을 확인하고 드디어 거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광복 후 귀국한 김구는 당시 미혼이었던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1946년 서울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 의사와 함께 안장하게 됩니다. 이 효창공원 인근에는 이봉창 의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인 ‘이봉창 역사울림관’이 2020년에 건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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