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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송씨 시조 송유익과 여산 송씨 본관 분파, 진천 송씨

by 충격대예언 2022. 3. 17.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역사상 많은 현신賢臣과 석학碩學을 배출했으며, 특히 민족이 국난을 당할 때는 충절과 기개로서 민족 수호에 사력을 다한 우리 민족사에 빛나는 선조를 무수히 배출한 대성이다. 

선계先系는 국내 송씨의 도시조라 할 수 있는 송주은宋柱殷의 후손인 송자영宋自英이 슬하에 3형제를 두었는데, 첫째가 여산 송씨의 시조인 송유익宋惟翊이요, 둘째가 은진 송씨의 시조인 송천익宋天翊이며, 셋째인 송문익宋文翊이 서산 송씨의 시조로서 우리나라 모든 송씨의 연원을 이루고 있다.


송씨宋氏의 연원

송씨의 시조는 상商나라(은殷나라) 30대 왕인 제을帝乙의 장자인 미자계微子啓인데, 왕위를 동생 신辛에게 빼앗겼다.
동생 신이 바로 은나라의 마지막 왕이자 폭군인 주紂왕이다. 주周 무왕武王이 혁명을 일으켜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미자계는 상나라 백성들을 살려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주 무왕이 폭군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을 제후로 봉하고 유민을 관리케 했으나, 다시 무경이 난을 일으키자 그를 진압하였다.

하지만 미자계는 무경의 난에 가담하지 않았으므로 은나라의 수도 호경鎬京에 식읍食邑을 주어 유민들을 관리케 하였다. 미자계가 제후로 봉해진 나라가 바로 송宋나라였다. 송나라는 이후 700년간 존속하다가 BCE 286년에 제, 위, 초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송나라 유민들이 송씨宋氏를 성으로 쓰면서 송씨가 생겨났다.




우리나라 송씨의 유래는 당나라에서 온 호부상서戶部尙書 송주은宋柱殷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국내 송씨의 도시조都始祖인 셈인데, 그가 우리나라에 온 이유는 분명치 않다. 그의 7세손인 송순공宋舜恭이 송성용宋成龍, 송흥용宋興龍, 송인용宋仁龍, 송복용宋福龍 4형제를 두었는데, 송인용의 후손이 진천 송씨鎭川宋氏가 되고, 송복용의 후손이 홍주 송씨洪州宋氏가 되었다. 또 장자인 송성용의 둘째 아들 송정열宋正烈의 후손은 신평 송씨新平宋氏가 되었고, 송성용의 장자인 송흥렬에서 야성 송씨冶城宋氏(둘째 송맹영宋孟英의 후손), 김해 송씨金海宋氏(셋째 송계영의 후손)가 갈려져 나갔다. 그 송흥렬의 장자가 송주은의 10세손인 송자영宋自英이며, 그가 송유익宋惟翊, 송천익宋天翊, 송문익宋文翊 3형제를 두어 각각 여산 송씨礪山宋氏은진 송씨恩津宋氏서산 송씨瑞山宋氏로 갈려져 나갔다고 한다.

고문헌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우리나라 송씨의 관향貫鄕은 무려 172본이나 된다. 172개 송씨의 본관 중에서 여산礪山⋅은진恩津⋅진천鎭川⋅남양南陽⋅용성龍城⋅철원鐵原⋅청주淸州⋅홍주洪州 등 20여 본관만이 현존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여산⋅은진⋅진천 세 본에서 전체 송씨의 9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밖의 송씨는 대부분이 여산이나 은진에서 분파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송씨는 근원을 같이 하는 종친으로, 이본異本이라 할지라도 서로 통혼하지 않는다.

씨족사 개요

여산 송씨礪山宋氏의 시작과 부침浮沈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송자영宋自英의 큰아들 송유익宋惟翊을 시조로 하는 성씨다. 
시조 송유익은 고려 때 진사를 지냈으며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되었다. 조선 세종 때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 성씨조姓氏條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성씨조姓氏條를 보면 여산의 가장 대표적인 성씨였음을 알 수 있다. 송유익을 시조로 내세우기는 하지만, 가문의 번창을 가져온 것은 4세 송송례宋松禮에 이르러서였다.

4세손 송송례宋松禮의 자는 입인立仁, 시호는 정렬공貞烈公이다. 고려 원종 때에 완전 항복의 표시인 개경으로의 환도還都 여부를 두고 원종 측과 임유무林惟茂 측이 대립하고 있을 때 왕정복고王政復古에 기여한 공으로 추성익대보리동덕좌명공신推誠翊戴輔理同德佐命功臣의 호를 받았다. 계속 관직이 상승하여 후에 도첨의사사중찬都僉義使司中贊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에 의해서 가문 발전의 기초가 닦인 여산 송씨는 자손 대에까지 계속 번성을 하였다.

송송례의 큰아들인 송염宋琰은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올랐고, 그 아들인 송방영宋邦英은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쳤으며 충렬왕을 보필하여 크게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송염宋琰계系보다는 그 동생인 송분宋玢계가 더욱 세력을 얻어 가세를 떨쳤다. 양의공송분良毅公宋玢은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1300년 우중찬右中贊으로 추성찬화안두공신推誠贊化安杜功臣이 되었다. 그의 네 아들인 송진宋瑨, 송린宋璘, 송유宋瑈, 송서宋瑞는 각각 우부승지右副承旨, 지신사知申事, 낭장郎將, 도첨의우정승都僉議右政丞을 지내, 부자에 걸쳐 모두 현달하였다. 그중에서도 송송례宋松禮 - 송분宋玢 - 송서宋瑞로 이어지는 3대에 걸쳐 상상上相을 역임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 충렬왕파로서 충선왕과 대립 관계에 있었는데, 충선왕이 원정에서 세력을 잡자 송방영宋邦英과 송린宋璘이 주륙誅戮되고, 송분가宋玢家도 적몰籍沒이 되는 정치적 파란도 겪어야만 했다.

여산 송씨의 분파

여산 송씨는 6세손에서 크게 5개 파로 갈라진다. 송휘宋煇계가 원윤공파元尹公派, 송방영宋邦英계가 밀직공파密直公派, 송원미宋元美계가 소윤공파小尹公派, 송린宋璘계가 지신공파知申公派, 송서宋瑞계가 정가공파正嘉公派로 나누어진다.

충렬왕 이후에 정치적 변동으로 가문이 적몰되기도 하였으나, 송씨 가문의 가세는 크게 손상받지는 않고 유지된 것 같다. 조선 개국 후에도 여전히 많은 관직자를 배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신공파知申公派의 11세손인 송현수宋玹壽 대에 이르러서는 단종비端宗妃(정순왕후定順王后)까지 배출하고 있다. 조선 개국 이후 여산 송씨가家의 유명 인물을 파별로 살펴보겠다.

원윤공파元尹公派

먼저 원윤공파元尹公派는 송염宋琰의 아들인 송휘宋煇를 파조로 하며, 그 5세손인 송문宋文에서부터 다시 덕산 송씨德山宋氏로 행세하다 평온을 되찾자 여산 송씨로 환원還元했다.

송거신宋居信은 시호가 충정忠靖이다. 조선 태종의 비 원경왕후와 친척이었으므로 태종 잠저시潜邸時에 수렵에 동행하였다가 호환虎患을 대신한 덕으로 태종이 즉위한 후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봉되었고 내자소경內資少卿, 호용순위사대호군虎勇巡衛司大護軍, 상호군上護軍, 우군첨총제右軍僉摠制 등을 역임하고 여량군礪良君에 봉해졌다.

원윤공의 5세손인 송문은 조선 개국 때 개국공신으로 덕성군德城君에 봉해졌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다.

송간宋侃은 원윤공元尹公의 6세손인데, 세종, 문종, 단종 3대에 걸쳐 벼슬을 하여 관직은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판서刑曹參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단종이 손위遜位하고 세조가 즉위한 후 영월로 노산군魯山君(단종)을 찾아 팔도진무사八道鎭撫使로써 순무巡撫 결과를 복명復命하고 단종이 시해당한 후에 김시습金時習, 조상치曺尙治 등과 함께 계룡산에 들어가 2년간 복상했다. 그 후 흥양興陽(현 고흥)에 은거하였다. 1791년 정조 때에 이르러 그의 유자적儒者的 충절이 인정되어 충강공忠剛公 시호諡號를 받아 서원에 배향되고 증직되었다.

원윤공 8세손 송익필宋翼弼의 자는 운장雲長이요 호號는 귀봉龜峰이다. 문장 도덕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이율곡李栗谷 성우계成牛溪와 더불어 도의로 사귀었으며 8대 문장의 한 사람으로 김사계金沙溪, 김신독재金愼獨齋, 서채봉徐菜峯, 민노봉閔老峯 등 많은 거유를 배출하였다. 후에 대제학을 증직받고 문경공文敬公으로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당진군唐津郡 입한재立限齋와 그 외의 여러 사우祠宇에 배향되었고 많은 유집遺集을 세상에 남기었다.

12세손인 송대립宋大立은 이순신 휘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순직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기록하고 호조참의兵曹參議의 벼슬을 증직하였다. 송대립宋大立의 아우인 송희립宋希立도 이순신 장군 밑에서 전투에 참가하였다. 충무공이 전사한 바로 그 전쟁터에서 그의 죽음을 감추고 끝까지 독전하여 승전으로 이끌었으며, 뒤에 선무원종공신 1등에 기록되었다. 임진년의 국난을 당하여 많은 충신, 의사를 배출한 것도 당시 가문의 큰 자랑이었다.


밀직공파密直公派

밀직공密直公 송방영宋邦英에게는 완琓, 표標, 군보君輔의 세 아들이 있었다. 송표宋標는 대광첨의大匡僉議 상호군上護軍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졌는데, 그의 아들 송유충宋有忠이 청주 송씨淸州宋氏의 비조鼻祖가 된다. 그는 충숙왕 때에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졌으나 그의 생졸生卒, 배위配位 및 묘소 등에 관한 문헌이 전해지지 않는다.

송승은宋承殷은 송유충의 손자로 단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행성균관대사성行成均館大司成이 되었는데 단종이 폐위되자 외직으로 나갔다. 칠원현감으로 부임하면서 가족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그의 후손들이 김해 서쪽 하계면下界面에 대대로 살게 되었다.

송정남宋廷男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송빈宋賓의 둘째 아들로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지어 조식曺植을 제향하고 수직壽職으로 통정첨지중추부사通政僉知中樞府使를 받았다. 그의 아들 송수는 부모에게 성경誠敬을 다한 것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숙종 연간에 『동국여지승람』을 신증할 때에 본 고을의 고적을 찾아 증보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소윤공파少尹公派

소윤공파는 송원미宋元美를 파조로 한다. 송륜宋倫은 소윤공의 증손인데, 세종 때 이래 광흥창승廣興倉丞으로 있다가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전라도 금구현으로 낙향, 은거하였다. 그의 아들 송극창宋克昌도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거쳐 영광군수로 재직하다가 부친과 함께 낙향한 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송천희宋千喜는 송극창宋克昌의 아들인데, 조선 성종 20년 문과에 급제한 후 삼사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황해도 관찰사, 부승지副承旨,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대사헌, 형조판서,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전선銓選(사람을 골라서 뽑음)에 사私가 없었다는 평을 들었고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소윤공 13세손 송일중宋日中은 시헌時獻의 아들로 호는 송재松齋, 필법이 절륜絶倫하여 명성이 일세에 진동하고 판서判書 이인징李麟徵이 중국 사신으로 갔을 때 그의 초예서草隸書를 보였더니 부신部臣들이 일자천금一字千金이라 이르더라 하였다.

지신공파知申公派

지신공파知申公派는 양의공良毅公 송분宋玢의 둘째 아들인 송린宋璘을 파조로 한다. 지신공의 후손들은 단종의 양위와 세조의 즉위를 둘러싸고 영욕을 번갈아 거치게 된다.

송익손宋益孫은 시호를 양묵襄墨이라 하며 자는 익지益之이다. 단종 원년에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 등을 제거한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이 되었다. 한성부판관, 종부시宗簿寺, 한성부, 예빈시禮賓寺의 소윤少尹을 거치고, 1463년 나주목사가 되어 여산군에 봉해졌다. 예종 원년에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오르고 부호군副護軍,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에 이르렀다. 이와는 달리 송석손宋碩孫은 단종 원년 거사에 반대하였고, 세조가 즉위하자 금마金馬(전북 익산)에 내려가 은거하였다.

여산 송씨의 후손들 중에서 세조의 즉위를 전후하여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단종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와 그의 부父인 송현수宋鉉壽이다. 송현수의 시호는 정민貞愍이며, 송복원宋復元의 아들이다. 본래 수양대군과는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단종 2년에 그의 딸이 비로 책봉되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使가 되고 여량군礪良君에 봉해졌다. 그런데 성삼문 등의 사육신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수양대군의 두둔으로 무사할 수 있었으나,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가 사사賜死됨에 이르러서는 생명조차 부지할 수 없었다. 세조의 공신들이 중심이 된 양사의 주장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그의 묘소조차 어디인지 찾을 수 없다. 숙종 24년(1698년) 노산군魯山君이 단종으로 복위되자 그 이듬해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추증되고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송현수의 딸로 단종비로 책봉된 정순왕후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됨에 이르러 부인夫人으로 강봉되었다. 그 후에 단종이 영월로 귀양 가자 청룡사靑龍寺에 스님으로 들어가서 일생을 마쳤다. 아버지 이하 일문이 멸족당하는 정치사의 변동 속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쳤을 것이다. 숙종조에 이르러 단종이 복위되자 왕비도 정순왕후로 추봉되었다. 청룡사靑龍寺는 후에 영조의 명에 의해 정업원淨業院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像賢은 송복흥宋復興의 아들로서 157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다. 주서注書, 경성판관鏡城判官을 거쳐 종계판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호조⋅예조⋅공조의 정랑正郞⋅사행감정司幸監正⋅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고 1591년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나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동래부사로 재직하면서 왜병에 항전하다 장렬히 전사한 것은 유명하다. 그의 충절을 기려 이조판서吏曹判書⋅찬성贊成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으며, 동래의 낙안서원樂安書院, 개성의 숭절서원崇節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고부의 정충사旌忠祠에 제향하였다.

송성명宋成明은 숙종 31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대사간⋅대사성⋅부제학을 역임하였는데, 청淸나라에 다녀온 후 도승지⋅예조판서 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지내고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을 편저하였다. 그 동생인 송진명宋眞明은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使를 역임하였고, 학행과 청렴으로 이름이 높았다.

지신공의 19세손인 송종혁宋鍾赫은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낸 송면재宋冕載의 증손이다.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주민을 주동하여 일병에 투석전을 벌이다가 순절하였다. 21세손인 송영만宋榮晩은 무과를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고, 22세손인 송만섭宋萬燮은 고종조에 외직을 거쳐 경주부윤慶州府尹까지 지냈으나,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산속으로 은거하였다.


정가공파正嘉公派

정가공파正嘉公派는 도첨의우정승都僉義右政丞을 지낸 송서宋瑞를 파조로 하며, 여기에서 양주 송씨楊州宋氏가 갈라진다. 정가공正嘉公의 큰아들 송인번宋仁蕃은 봉익대부판사복시사奉翊大夫判司僕寺事에 이르렀고 둘째 아들인 송윤번宋允蕃은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른 반면, 셋째인 송의번宋義蕃은 조선 개국에 반대하여 은거하였다. 송인번宋仁蕃의 아들인 송전宋琠은 가선대부판나주목사嘉善大夫判羅州牧使에 이르렀고, 송지宋祉의 아들인 송유치宋有徵는 공민왕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중보문간대제학門下侍中寶文閣大提學에 이르렀으나 조선 개국 후 전주로 낙향해 버렸다. 송문림宋文琳은 정가공의 5세손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에까지 이르렀다.

숙정공肅靖公 송질宋軼의 호는 취춘당醉春堂, 자는 가중可中이다. 정종조에 과거에 급제한 후 관직에 나아가 경기도관찰사, 우찬성右贊成,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1513년(중종 8년) 우의정을 거쳐 뒤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이 되었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여원부원군礪原府院君에 책봉되었다. 그의 손자인 송인은 중종의 셋째 공주 정순옹주貞順翁主와 결혼하여 여성위礪城尉에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으로 금군禁軍을 통솔하였다. 지은 글이 많았으나 다 없어지고 ‘신암집頣菴集’ 한 권만이 전해지고 있다.

송언신宋言愼은 이황李滉을 사사하여 경의에 관해 문답한 것이 많이 남아 있으며, 대사간⋅도승지⋅대사성⋅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송서의 11세손인 송미현은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고, 영조 4년에 단성현감으로 재직 중 이인좌의 난 토벌에 공을 세웠고, 영조 32년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12세손인 송대길宋大吉은 인조 원년에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경주부윤⋅한성부우윤⋅도승지⋅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노모를 극진히 봉양한 것으로 이름이 있었다.

19세손인 송진희宋鎭熙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아 주자 성리학 연구와 강학으로 일생을 마쳤으며, ‘주자서촬요朱子書撮要’ ‘선현예설유총先賢禮說類叢’ 등을 남겼다. 송주면宋宙勉은 최익현의 문인으로 1910년에 나라가 망하자 물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선생 중에서 면암勉庵(최익현)의 절의를 본받은 의사義士라 하겠다.

고려 후기 원종 때 송송례宋松禮에 의해 가문의 기틀을 다지고 성장하기 시작한 여산 송씨가礪山宋氏家는 조선조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숱한 고관, 대작들을 배출한 대성大姓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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