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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 송씨, 여산 송씨 같은 뿌리 송씨와 청주 송씨, 용성 송씨

by 충격대예언 2022. 3. 18.

송씨의 시조와 본관에 대해서 적은 포스팅입니다.
여산 송씨와 뿌리를 같이 하는 은진 송씨등 다른 성씨에 대해서 적은 포스팅과 같이 보시기 바랍니다.

 

여산 송씨 시조 송유익과 여산 송씨 본관 분파, 진천 송씨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역사상 많은 현신賢臣과 석학碩學을 배출했으며, 특히 민족이 국난을 당할 때는 충절과 기개로서 민족 수호에 사력을 다한 우리 민족사에 빛나는 선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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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송씨의 분관

청주 송씨

밀직공密直公의 아들이 송표宋標이고, 송표의 아들 송유충宋有忠이 청주 송씨淸州宋氏의 비조鼻祖가 된다. 청주군淸州君 송유충宋有忠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나라에 공훈을 세워 청원군淸原君에 훈봉勳封되고, 2세 훤暄은 조선 개국에 참여한 공훈으로 서원군西原君에 습봉襲封되었다. 청원과 서원은 모두 지금 청주淸州의 옛 이름이다. 3세 대사성大司成 송승은宋承殷은 계유정란癸酉靖亂 때 빙부聘父 대제학大提學 최연崔淵과 함께 낙향落鄕하여 처음으로 김해金海에 살기 시작하였고, 4세 훈련참군訓練參軍 송숙형宋叔亨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과 함께 김해향약金海鄕約을 제정制定하였다. 5세 송유호宋由浩는 성균관 생원을 지내셨고, 6세 송경宋經, 7세 송창宋昌 두 분은 모두 절제사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양주 송씨

양주 송씨楊州宋氏는 정가공파正嘉公派에 근원하여 분적되었다. 시조 송도성宋道成은 정가공의 현손인데 조선 개국 초에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역임하고 양주에 복거卜居한 후 후손들이 계속 세거하였다. 후에 난을 피하여 공주에 옮겨 살다가 다시 영남 지방으로 옮겨 갔으나, 선조의 세거지였던 양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송도성의 증손 송효지宋孝智가 조선 초에 아들 송희주宋希周와 함께 주부主簿를 역임하여 가세를 일으켰으며, 참봉 송덕림宋德林의 손자 송순령宋舜鈴이 직장을 역임하여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송영호宋永祜와 송재호宋在祜가 뛰어났는데, 김화식金華植, 이봉로李鳳魯, 김창숙金昌淑 등과 더불어 만주와 몽고 지방에서 개간 사업을 일으켜 장기적인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송영호宋永祜는 만주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을 결의하고 국내로 돌아와 자금을 모으다가 피체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송재호宋在祜는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면도칼로 목을 잘라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수개월간 입원 치료를 하면서도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양주 송씨의 가맥을 이었다.


여산 송씨와 같은 뿌리 송씨

용성 송씨龍城宋氏

본관 용성龍城은 수원도호부 남쪽 약 80리 지점을 중심으로 경기 남서부 일대를 관할하던 용성현龍城縣이었다. 고구려 때는 상홀현上忽縣이라 했고 신라 경덕왕 때는 차성현車城縣으로 개칭했다. 고려 태조 때는 차성현이 용성현으로 개칭됐고, 현종 때 수주水州에 편입되었다. 수주는 원종 때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수주목水州牧으로 승격되었다.


용성 송씨는 중국 경조京兆 출신으로 당나라 때 호부상서를 지낸 송주은宋珠殷의 후손으로 전하는 송엄경宋嚴卿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송엄경의 선대는 수원(용성)과 양주揚州 송산리松山里 등지에서 세거했는데, 엄경은 양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성장한 엄경은 문과에 급제하고 관계에 나아가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쳐 경상도사慶尙都事를 역임하였다. 1456년에 군사郡事로서 전공前功에 의하여 상등훈에 책록되었고 이어 창성부사昌城府使(평안북도 북평北平)로서 창성진병마절제사昌城鎭兵馬節制使를 겸임하였다. 재임 중인 1461년 여진족들이 쳐들어와서 선량한 농민을 잡아가고 축생을 죽이는 등 만행을 저지르자 엄경은 그들과 싸우는 한편 회유하여 끌려간 11명을 되돌려받았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엄경은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졌다. 만년에 조야朝野가 시끄러워지자 세상사 덧없음을 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은신할 것을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경상도사 재임 당시 익히 보아 온 빼어난 경관의 오가리五佳里(현 경남 창녕군 길곡면 오호리)에 천거遷居하게 된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곳에 살면서 송엄경을 시조로 받들고 봉군지封君地인 용성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면서 시조의 현손 송가빈宋季賓의 아들 대에서 가세가 크게 번성하여 종파宗派⋅골룡파骨龍派⋅오호파五湖派⋅마천파馬天派⋅광심정파廣心亭派⋅보림파寶林派⋅거창파居昌派⋅옥동파玉洞派 등으로 갈라져서 계대하고 있다.



은진 송씨恩津宋氏

은진 송씨의 도시조都始祖 역시 송주은으로 되어 있으나 언제, 어떻게 고구려⋅백제⋅신라 3국 중 어느 나라에 귀화했는지 기록이 없다. 그의 7세손인 송순공宋舜恭의 후손 송자영宋自英이 송유익宋惟翊⋅송천익宋天翊⋅송문익宋文翊 등 세 아들을 두었는데, 송유익은 여산 송씨礪山宋氏의 시조로 송천익은 은진 송씨恩津宋氏의 비조로 송문익은 서산 송씨瑞山宋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은진 송씨 시조 송대원宋大原은 송천익의 후손으로 대대로 은진에서 살아왔으나, 송천익 이후의 대를 알 수 없어 고려 때 판원사判院事를 지내고 은진군에 봉해진 송대원을 시조 및 1세조로 받들고 은진으로 정했다.

은진 송씨 족보에는 시조가 판원사를 지낸 송대원으로 되어 있으나, 실은 백제 말엽에서 고려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 은진군에 봉해진 송천익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설이 있다는 것을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입증하고 있다. 시조 송대원의 6세손인 송유의 후대 송계중宋繼祀⋅송계중宋繼中 형제에서 송계중이 사직공파, 송계사의 아들 송요년宋遙年⋅송순년宋順年이 각각 목사공파牧使公派⋅정랑공파正郞公派로 크게 분파되었고, 후대에서 다시 50여 파로 갈라진다.

여산 송씨 주요 인물

송질宋軼질의 셋째 딸

송질宋軼의 셋째 딸은 남양 홍씨 가문으로 시집을 가 홍씨 가문 영화의 절정을 이루게 한 어머니이자 아내였다. 중종 때 영의정에 오른 남양 홍씨 문희공 홍언필洪彦弼이 그녀의 남편이고, 아들이 홍섬洪暹이다. 홍섬은 선조 때 영의정을 세 번 역임하며 명상이자 청백리의 칭송을 들었는데 부자가 정승을 지낸 드문 기록을 세웠다.

그녀의 아버지 송질은 중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므로, 친정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모두 정승인 ‘세계사상 유일의 복 많은 여성’이다. 당시에도 왕비와 대신의 부인 등 상류사회 부인들의 사교 모임이 있었는데, 왕비는 송씨 부인이 나타나면 꼭 일어서서 마중하며 깍듯한 존경을 표했다 한다. 그 까닭을 묻자 왕비는 자신은 남편이 임금일 뿐이지만 송 부인은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모두 재상이니 어찌 내가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했다. 송 부인은 명문의 여인답게 예의범절에 밝고 부덕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여장부였다고 한다.

군의 정치적 중립을 지킨 송요찬 장군

송서宋瑞의 후손으로 육군참모총장과 내각 수반을 지낸 충남 청양 출신 송요찬宋堯讚도 여산 송씨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송요찬은 군사영어학교를 1기로 졸업하고 수도사단장과 제3사단장⋅육군참모총장⋅계엄사령관⋅외무부장관⋅경제기획원장과 내각 수반을 지냈다. 6.25 한국전쟁 때 함흥 함락 등 동부전선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워 중공군 2개 사단을 섬멸하기도 했다. 육군참모총장 재직 시 좌익 경력 등으로 어려움에 처했던 박정희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특히 자유당에 의한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일어난 4.19 혁명 때는 계엄사령관으로서 군의 정치적 중립을 고수하고 국민에게 신뢰감을 부여함으로써 유혈 사태를 방지하고 4.19 혁명을 성취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선불교 중흥에 이바지한 경허 스님

경허鏡虛 성우惺牛 선사는 조선 말기의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중흥조로 출현하여 무애하고 자애로운 생활 속에서 전등傳燈의 법맥을 이으며, 선불교를 진작시킨 혁명가이자 대승의 실천자였다. 스님의 속명은 동욱動旭, 법명은 성우惺牛, 법호는 경허鏡虛이다. 본관은 여산 송씨로 1849년 전주 자동리에서 부친 송두옥宋斗玉과 모친 밀양 박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9세에 경기도 과천 청계사로 출가하여 계허 스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절에 와 있던 어느 거사에게서 사서삼경을 배우고 기초적인 불교 교리를 익혔다.

이후 당시 교계의 태두였던 계룡산 동학사의 강백講伯 만화보선萬化普善 화상에게 천거되어 불교 경론을 배우고, 불교의 일대시교一代時敎뿐 아니라 유서儒書와 노장老莊 등의 사상을 고루 섭렵하였다. 23세에 스승 만화의 뒤를 이어 동학사 강백으로 추대되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경허 스님은 전국 곳곳에 선원과 선실을 개설하여 새로운 선 수행 풍토를 조성했다. 선풍을 진작시킨 그의 문하에는 한국 불교 선문을 빛낸 만공滿空⋅혜월慧月⋅수월水月 등이 있다.

일본불교 예속화 정책 막아낸 만공 스님

만공 스님의 속명은 도암道巖, 법호는 만공滿空, 법명은 월면月面이다. 만공 스님은 속세의 성이 경허 스님과 같은 여산 송씨이다. 전라북도 태안에서 부친 송신통과 모친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3년 13세가 되던 해 김제 금산사에서 불상을 처음 보고 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공주 동학사로 출가하여 진암 문하에서 행자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경허 스님을 따라 서산 천장사로 와서 태허泰虛 스님을 은사로 경허를 계사로 사미십계를 받고 법명을 월면이라 하였다.

경허 스님의 법을 이은 스님은 덕숭산에 와서 금선대를 짓고 수년 동안 정진하면서 모여든 납자들을 제접하며, 수덕사修德寺⋅정혜사定慧寺⋅견성암見性庵을 중창하고 많은 사부대중을 거느리며 선풍을 드날렸다.

스님은 일제 강점기 선학원禪學院의 설립과 경제적 자립을 위한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 운동에 지도자로 참여하였으며, 마곡사 주지로 있던 1937년 조선총독부 데라우찌가 개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불교를 일본불교화하려는 일본의 한국 불교 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우리 불교계를 지켰다. 이는 일제 치하의 치욕스런 불교 정책을 쇄신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만공 스님은 또 31본산 주지 중에서 유일하게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여산 송씨 효부 송기태⋅서점순 부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행동도 고귀하게 한다.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조용히 실천해 온 경기도 안산 옥산동에 세거하던 송기태는 선고(부친)의 유업을 이어 온 효자로 알려져 있다. 한국이 산업화로 접어들던 1950년대부터 영농을 해 가며 4남 1녀를 서울로 보내 공부시켰고, 동네의 어려운 이웃을 찾아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여산 송씨이다.

특히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는 전쟁사에 남아 있는 금화지구 전투의 숨은 영웅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송기태는 국가의 보상도 거절하였고, 국민으로서 당연히 조국을 지키기 위해 참전했고 더구나 전우들이 모두 전사한 마당에 홀로 참전 용사 대우를 받을 수 없다며 끝내 보상도 거절한 채 사망할 때까지 몸속에 총탄이 박힌 채로 살아왔다고 하며, 오히려 동네의 어려운 이웃을 찾아다니며 그들 몰래 양식 등을 나눠 주는 선행을 펼쳐 왔다고 한다.

송기태의 이러한 선행을 어려서부터 보아 온 막내딸 송천숙도 아버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살고 있다. 송기태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도움의 손길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여산 송씨의 현대 인물

내각 수반 송요찬, 국회의원⋅민주당 최고위원⋅제5대 인천광역시장 등을 역임한 송영길, 경기대 교수 송하성, 전 고법 부장판사 송영천, 초대 민의원을 지낸 안성 출신 송우태, 안성시 의원을 지낸 송우태의 아들 송형근, 파독 간호사 출신 송은숙, 경기도 안성에서 효자⋅효부로 이름난 송기태⋅서점순 부부, 한국화학연구원 본부장을 역임했고 2014년 현재 울산화학연구소 본부장으로 재임 중인 송봉근, 그리고 경기도 안성 옥산동의 농업경영인 송윤근, 공수부대 장교 출신으로 교편을 잡고 있는 송승근 씨 등이 여산 송씨를 빛낸 현대 인물들이며, 이외에도 수많은 여산 송씨가 사회 각계에서 활약 중이다.

[참고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여산 송씨 세계도

본관지 여산은 어떤 곳인가?

여산은 여량礪良과 낭산朗山이 합쳐져 생긴 지명이다. 여량현은 본래 백제의 지량초현只良肖縣이었는데,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여량으로 바뀌어 전주도독부 관내 덕은군德殷郡의 영현이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년)에 전주에 속하였다. 낭산현은 본래 백제의 알야산현閼也山縣이었는데, 경덕왕 때 야산野山으로 바뀌어 전주도독부 관내 금마군金馬郡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년)에 낭산으로 고쳐 고려 시대에는 전주에 속하였다가 1400년(조선 정종 2년)에 여량의 속현으로 되었다. 1404년(조선 태종 4년)에 여량의 ‘여礪’ 자와 낭산의 ‘산山’ 자를 따서 여산현으로 하였다.

여산은 전라도와 서울 방면 간의 길목으로 관내에 양재역良才驛이 있었고, 병자호란 때에는 이곳에 의병청義兵廳이 설치되었다. 충청도 접경의 작지鵲旨에는 매년 7월 15일에 부근 지역의 양도 주민들이 모여 수박희手搏戱로 승부를 다투며 즐기는 풍속이 있었다. 또한 접경 지대의 황화정은 전라도의 신구 관찰사가 교대하는 곳이었다.

정순왕후

송현수의 딸이자 단종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는 부인으로 강등되어 흥인지문 밖의 동망봉(서울 종로구 숭인동)에서 초가집을 짓고 시녀와 살다 청룡사 스님으로 입산하여 82세까지 홀로 살다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었을 당시 멸문지화로 시신을 거둘 친척조차 없어 올케인 경해공주 시댁(해주 정씨)에서 시신을 거두고 장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지금도 그녀가 살았던 동망봉(단종이 유배된 동쪽을 바라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지금의 숭인공원)과 함께 단종과 이별을 했다는 청계천 영도교(영이별다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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