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시즌3,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안학수 하사 월북 사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3월 31일에 방송된 sbs 인기 예능 프로그램인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에서는 '알라딘 램프와 땅콩' 편을 통해 베트남전의 실체와 참전 뒤 실종되어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 안학수 하사의 그날을 다루었습니다.
1966년 9월 16일, 이날은 오 형제 중 둘째 아들인 안학수가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오는 날이었습니다.
그는 2년간의 베트남 파병을 마치고 드디어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에 당시 교장 선생님인 학수의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은 서울에 있는 외갓집에서 온 가족은 학수가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해가 다 지도록 돌아오지 않는데... 하루, 이틀 그리고 닷새... 약속한 날이 훌쩍 지나도 감감 무소식입니다.
그런데 돌아오기로 한 아들은 돌아오지 않고 국방부에서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다"라는 말만 할 뿐 학수의 소식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을 전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학수로부터도 국방부로부터도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습니다. 가족들은 오직 학수가 무사하기를 기도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이 흘러가는 어느 날, 동생 용수는 동네 문방구 아주머니가 급히 불러 이끌려 듣게 된 라디오에서 충격적인 내용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비극의 서막이었습니다.
라디오에서 나온 목소리는 너무나 익숙하고 분명한 형의 목소리 였습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형 학수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나왔습니다. 남한이 싫어서 월북했다는 내용의 대남방송이었습니다.
집안은 발칵 뒤집혔고, 안정을 찾을새도 없이, 군의 보안사에서 학수의 가족들을 끌고 가서 취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월북한 학수 때문에 가족들이 간첩 활동을 할 수도 있다며 그들을 함께 의심했던 것이었습니다.
가족들의 잔인한 시간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보안사에서는 시도 때도없이 용수와 가족들을 끌로가서 협박, 폭언, 폭력까지 행사했습니다.
당시 겨우 16살인 아이에게 물고문, 돌림빵, 권총 방아쇠를 잡아 당기는 시늉을 하며 겁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학수가 월북을 했으니 당신들은 잠재적인 간첩이다.
빨갱이 가족이다.
이 사실이 소문이 나자 용수는 학교에서 따돌림, 이유없는 폭력을 당하고, 학교 교장이었던 그의 아버지도 파면을 당했고 그동안 살던 관사에서 쫓겨나 달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보안사의 사찰은 멈추지 않고 1993년까지, 26년 동안이나 지속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안 하사의 월북을 절대로 납득하지 않았던 부모님들은 2001년 차례대로 아들의 생사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숨을 거두시기 전에 아들 용수 씨에게 그동안 안학수 하사에 관해서 모은 자료들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억울해서 눈을 못 감겠다.
너라도 꼭 해결해라.
이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용수 씨는 국방부와 청와대에 계속 민원을 넣어 안 하사의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그렇게 8년이 흐르고 어느 날 용수 씨에게 전화 한 통 걸려옵니다.
외교부 출입 기자가 기밀 해제된 외무부 문서가 있는데 그에게 꼭 확인을 해보아야 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용수씨가 확인한 기밀문서에는 당시 국방부와 청와대가 주고받은 놀라운 진실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귀국 일주일 전 부대 일로 출장을 갔다가 베트콩의 공격을 받아 전쟁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정황상 월북이 아닌 강제 납북된 것이라는 추측이 담겨져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또한, 1976년 한 귀순자의 증언으로 안학수 하사는 북한을 탈출하려다 총살을 당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 또한 정부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왜 그러면 그가 전쟁 포로가 된 것을 숨겨왔을까요?
베트남 파병에 반대가 심했지만 파병을 강했던 정부의 목적은 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국군 포로가 단 한 명도 없다고 선전을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미국측의 자료에 의하면
한국 정부는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한국군 5만여 명을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알라딘 램프로 생각한다.
미군이 한국군에 지급하는 물자와 자금의 총비용은
비슷한 숫자의 미군에 투입하는 양에 비하면
땅콩값 정도다.
한국 정부는 한국군을 볼모로 해서 미국에 소원만 빌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당시 파병 일병의 하루 임금은 미군의 4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에 태국, 필리핀군의 임금에 비해서도 턱없이 적은 금액이었습니다.
가난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라 하더라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청년들이 실종되어 포로로 잡혀갔다면 어떻게든 구해내야하고 그것이 안되더라도 찾을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하는 것이 국가의 도리입니다.
우리 정부는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 오히려 포로가 한 명도 없다고 선전을 해버렸습니다.
안학수 하사의 동생 용수 씨는 확보한 모든 증거를 가지고 민원을 제기했고, 마침내 43년 만에 대답에 돌아왔습니다.
안학수 하사는 월북자가 아니라
북으로 끌려간 우리 국군이다.
안학수 하사뿐만 아니라 베트남 전에 참전해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군인은 17명입니다.
돌아오는 그날까지 이들을 찾을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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