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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경씨 시조 경진, 청주 경씨 인물 경대승 , 태인 경씨 해주 경씨 분파

by 충격대예언 2022. 4. 7.

청주 경씨 시조  경진, 청주 경씨 인물 경대승, 태인 경씨 해주 경씨 분파

 



나무는 뿌리가 있어 가지와 잎이 무성하듯이 사람도 뿌리가 있어 오늘날의 후손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선조들의 보록譜錄에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고의 아픔을 견뎌 내며 끈질기게 혈맥을 이어 온 조상들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담기게 된다. 이번 호에는 희성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청주 경씨들의 족적을 살펴보자.

 



경씨의 연원

청주 경씨淸州慶氏의 연원을 살펴보면, 청주 경씨 무진보(5회) 서문에 “우리 경씨의 근본은 제나라 공족公族으로서, 이에서 경으로 나뉘어져 성을 경이라 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예로부터 집안 내력으로 ‘강태사姜太師(제齊나라 시조)의 후손’이라고 구전되어 오고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미루어 보건대, 청주 경씨의 연원은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 문헌으로 살펴본 득성 유래는 이러하다.

『중화성씨대전中華姓氏大典』(5-2권)에 의하면 경慶 자字를 쓰는 단성으로 두 경씨가 있다. 「통지씨족략通志氏族略」은 그 연원을 밝혀 이르기를 “경씨는 강씨로부터 생겨났으니, 춘추 시대 제나라 환공의 손자 경극慶克이, 그 이름자로 성씨를 삼았다(出自姜姓春秋桓公有孫名慶克其后以其名爲氏).”라 하고, 「통지通志」에는 “경씨의 근본은 강씨로 제나라 환공의 아들 무휴無虧가 아들을 낳으니 경극慶克으로, 또 달리 경부慶父라고도 일컬었는데, 후에 이름자로 성을 삼았다(慶氏 姜姓, 濟桓公之子無虧之後,無虧生慶克,亦謂之慶父,以字爲姓).”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문헌에서는, 1903년(대한제국 광무 7년)에 박용대 등이 지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이르기를 “본래는 강씨로서 제나라 공족의 후예인 경부慶父가 그 이름자로 성씨를 삼았다.”고 되어 있다.

참고로 제나라 환공의 묘와 사당은 중국 산동성 치박시에 있는데, 이곳에 경씨의 원조인 태공 강상을 비롯하여 정공과 환공이 좌우에 배향되어 있으며, 역내에 이런 저런 이유로 강태공에서 나뉘어 새로 생긴 성씨의 유래비에는 102개의 성씨가 기록되어 있다. 청주 경씨의 득성 시조 경극慶克공은 집정대부를 지냈으며, 제나라 시조 태공으로부터 계대를 살펴보면 13세손이 된다.


득성시조 경극慶克

춘추 시대 중원의 패자인 제환공은 치세하는 동안 장자 무휴無虧를 세자로 세웠으나, 그 뒤 막내 공자 소召를 사랑하여 세자로 삼으려다 병을 얻어 서거했다. 이후 무휴가 임금이 되었으나, 송나라와 싸우다가 죽고 만다. 이에 무휴의 동생인 공자 원元은 소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동생 소는 외세를 끌어들여 승전을 하고 임금이 되니 그가 바로 효공孝公이다. 이러한 왕권 다툼의 소용돌이에서 왕좌가 덧없음을 깨달은 무휴의 아들 경극慶克은 임금이 될 수도 있는 길을 미련 없이 끊어 버리고 이름자로 성을 삼아 중국 경씨의 시조가 된다.

 


청주 경씨의 연원

청주 경씨淸州慶氏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청주를 비롯하여 평택·청풍·부안·보성·장수·남원·경주·안동·상주·하동·정주·경성·경산 등 14본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청주 이외의 나머지 관향은 세거지명世居地名으로 문헌에는 청주 경씨 단본이다.

우리나라의 경씨는 960년(고려 광종 11년)에 노국 공주를 배종하고 건너온 8학사의 한 사람인 경경慶鏡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그 후 200여 년간의 기록을 잃게 되어 고려 19대 명종 때 벼슬을 지낸 경진慶珍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그런데 청주 경씨는 후삼국 통일 직후 청주에 세워진 금석문(당간지주)에서 이미 그 지역의 유력한 호족 집단으로 등장하고 있기에, 가문 자체의 역사는 경진이 살던 무신 집권기보다 적어도 2백여 년은 거슬러 잡을 수 있다.


청주 경씨의 1세世조는 경번慶蕃으로 고려 고종조에 문과에 올라 호부상서평장사에 이르고 청주에 세거하였으며 2세는 경수慶綏로 통례문사를 지내고 3세인 경사만慶斯萬은 우대언右代言이었고 4세 경복흥慶復興은 벼슬이 문하시중에 오르고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청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시조 경진

청주 경씨는 고려와 조선 초에 번성한 성씨로, 시조 경진慶珍은 고려 19대 명종 때 서경에서 조위총의 난이 일어나자,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로 이를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중서문하성 서무총괄)를 지내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현 부총리)에 올랐다.

 

 

청주 경씨의 분파

청주 경씨의 후손들은 21개 분파를 형성하여 전국에 분포하였으며, 청주 근교의 세거지는 다음과 같다. 징군파徵君派는 괴산군 청안면, 서봉공파西峯公派는 청원군 문의면, 월송공파月松公派는 충주, 적성공파積城公派는 음성군, 경역공파經歷公派는 청주, 아산공파牙山公派는 청주·충주, 낭성군파浪城君派는 충주, 보성공파寶城公派는 괴산군 연풍면이다.

 

 

청주 경씨의 주요 인물

대장군 경대승

시조 경진의 아들 대장군 경대승慶大升은 청렴결백한 무장으로 역사에 전하는데 그 당시 무신 정권의 정중부와 그의 아들 정균, 정중부의 사위 송유인 등을 제거한 인물로 유명하며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특히 그는 명종 8년에 허승, 김광립 등을 제거하고 조정을 안정시켜 청주 경씨 천하가 되는 듯했으나, 정중부에게 칼을 맞는 꿈을 꾼 후로 조정과 백성을 위해 애쓰다가 약관 30세의 젊은 나이로 그 수명을 다했다.

청주 경씨는 경대승 이후의 계대繼代를 잃게 되어,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정의대부正議大夫로 호부상서戶部尙書를 거쳐, 평장사平章事(현 부총리)를 지냈으며 청주에 살던 경번慶蕃을 1세조로 받들며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사직社稷을 보위한 충신 정렬공 경복흥

고려 공민왕 5년에 권신 기철은 누이동생을 원나라에 바쳐 순제의 황후가 되고, 노책과 권겸은 동생을 황태자에게 바쳐 원나라 황실의 총애를 받았다. 이들은 원나라 황실을 배경으로 세력을 규합하여 대역을 도모하기 위해 여러 도에서 병기를 점검하고 거짓 조서를 만들어 그릇된 말을 퍼뜨렸다. 그러자 왕이 이들의 역모를 알고 재추宰樞(재부의 재신宰臣과 중추원의 추신樞臣)를 불러들였는데, 경복흥慶復興과 황석기黃石奇 등이 진언하여 기철 등을 기습 주살하고, 일당을 모두 처형하는 등 숙청을 하였다.

공민왕 8년에는 원나라 말기의 농민 반란군인 홍건적紅巾賊 3천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와 노략질을 하고 돌아갔는데, 왕은 홍건적이 다시 침입할 것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전열을 가다듬기도 전에 홍건적 장수 모거경毛居敬이 4만의 대군을 이끌고 의주를 함락하고 부사 주영세와 천여 명의 양민을 학살하였다. 이어 정주를 공격하여 도지휘사 김원봉을 죽이고 인주麟州를 함락했다.

급보를 받은 왕은 수문하시중 이암李癌으로 서북면도원수를 삼고, 경복흥을 부원수로, 김득배金得培를 도지휘사로 삼아 최영崔塋, 안우경安遇慶 등 여러 장수를 지휘하여 홍건적을 물리치게 하였다. 다음 해 2월 아군이 힘써 싸워 함종咸從에서 적을 무찔러 2만 급을 참하니, 남은 적 만여 명이 패퇴함에 안우安禑 이방실李芳實 등이 적을 쫓아 압록강 밖으로 격퇴시켰다.

이 외에도 공민왕 13년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우고자 했던 역모 사건에서 경복흥은 덕흥군의 추종자들을 대상으로 포고문을 써서 전세를 돌리는 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또 우왕 3년에 왜구가 착량窄梁에 침입하여 전함 50여 척을 불태우고 주민 천여 명을 살해하는 등 노략질을 일삼자, 경복흥이 강력하게 응징할 것을 진언하였고 수성도통사守城都統使로 활약하여 왜구를 물리쳤다.

공민왕 14년 공은 시중의 지위에 있었으나, 왕이 요승 신돈辛旽의 농간으로 정사를 바로 처리할 수 없었다. 그해 6월 공은 왕에게 ‘신돈을 멀리하고 정사를 바로잡을 것’을 진언하였으나 신돈 일파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후 신돈이 사망하면서 관직에 복귀하였으나, 1380년 탄핵을 받아 청주로 유배되었다가 사망했다.


1389년(공양왕 1년), 왕이 경복흥의 공적을 기려 신하를 보내 묘전에 제사를 지냈는데, 제문에 공의 청덕과 의열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아! 경의 관직은 신하로서 제일 높지만 경성 근처에 한 이랑의 토지도 없고 집안에는 한 말의 곡식도 없었으며 대그릇 밥에 물을 마시고 해진 갓옷과 야윈 말로써 지냈으니, 천만년이 지나간 옛날에서 찾더라도 경과 같은 이가 몇 사람이나 되겠으랴. 경의 충성과 의열은 삼한三韓의 모범이 되고 만세 사람에게 권장할 만하므로, 내가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사자를 보내어 제사를 드리노니, 길이 우리 왕가를 도울지어다.”

조선 <태조실록>에 보면 경복흥과 조선 태조 이성계의 교유가 깊었음을 보여 주는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공은 정토의 명을 받아 출전하는 이성계에게 말하기를 ‘동한의 사직이 장차 손안에 돌아갈 것이니, 전쟁의 괴로움을 꺼려치 말고 능히 나라를 지키는 공을 이루게 하시오.’ 하며 격려하였다. 이 글로 보아 공은 이미 나라가 이성계에게 넘어갈 것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조의 역대 사적을 기록한 국조보감에 태조의 교시가 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교령에 시중 경복흥의 자손은 천만세라 하더라도 천역을 정하지 말라 하였다(侍中慶復興之子孫雖千萬世勿定役敎).

일제에 저항한 인물들

일제日帝에 저항한 인물로는 경석조慶錫祚(1881~1957)와 경권중慶權重(1871~1919)을 들 수 있다. 
경석조는 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에 강점되자 국내에서 저항 운동에 참여하다가 1924년 만주 길림으로 탈출하여 각종 애국 단체에 참여하여 항쟁하다가 해방 후 환국하였으며 1949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의 책임자로 활약했다. 
1991년에 독립 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경권중은 1907년에 의병을 규합하여 전남 구례, 곡산 등지에서 왜병과 항전하였으며,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소수면에서 군중 궐기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고 복역 중 가출옥 후 사망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청주 경씨의 근현대 주요 인물

은행감독원 감사 경석구慶錫九는 1920년대 일제가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회사령會社令을 철폐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회사를 창업할 수 없게 만들자, 이에 반발하여 같은 해 민족 자본의 육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조선물산장려회의 70인 발기인 중 한 분으로 활약하였다. 조흥은행에 입사하여 간부직을 거쳐 지점장 등을 지내고, 뒤에 본점 부장 등을 거쳐 은행감독원 감사를 역임하였다.

북한의 핵공학자 경원하慶元河는 평양고보를 졸업한 후 김일성종합대학 공과대학에 견학해서 열역학을 전공하고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 뒤 소련으로 유학하여 병기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북한에서 최초로 소련식 무기와 탄약을 생산하기 시작한 과학자이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일어나고, 이듬해 미군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이후 대구 미국공보원(USIS)에서 북한의 방송을 분석하는 일을 하다가 1951년 평양고보 동기 동창인 홍종철(당시 문교부장관)을 만나 그의 신원보증으로 해군간부후보생 4기로 입대하였다. 수료 후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5년간 복무하다가 대위로 예편하였다. 1965년 브라질 상파울루 대학에 유학을 갔다가, 197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가 핵무기의 산실이라는 뉴멕시코주 로스알라모스Los Alamos 연구소에서 핵폭탄 제조에 참여하였다.

1972년 캐나다 몬트리올 맥길대 대학원에 유학하여 핵폭발 장치인 ‘구면 가스폭발파의 이론적 연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 뒤 1972년 ‘비엔나 학술회의’에 참석하러 갔다가 친형을 만나 어머니의 육필을 보고, 가족을 만나기 위해 몰래 평양에 들어가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왔다. 이러한 사실이 한국과 캐나다 정보기관에 포착되어 캐나다 정보기관(RCMP)의 조사를 받았다.

이 때문에 맥길대 교수직에서 해임되고, 캐나다 정부로부터 추방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1974년 캐나다를 떠나 유럽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갔다. 그런 후 북한 핵 원자로를 비롯한 핵 개발 프로그램에 핵심 과학자로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북한 핵 기술의 아버지’라는 별칭이 붙여졌다.

무용가 경임순慶任順은 경희대학교 무용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체육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육계에 입문하여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 한국무용과 전임강사, 강원대학교 무용과 강사, 명지대학교 강사, 중부대학교 강사,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무용예술전문 강사로 출강하는 한편 서울종합예술전문대학교 겸임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보임되었다. 고전무용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정방춤 보존회’ 상임이사와 KBS 한국방송 대하드라마 무용 감독으로 ‘무인시대·해신·불멸의 이순신·황금사과·서울 1945’ 제작에 참여하였다. 2002년 민족문화예술 한국무용 부문 무용지도자상舞踊指導者賞 및 무용대상을 수상하고 2007년 4월, 민속예능 분야(전통무용) 문화재 전문위원, 2009년 6월 22일 울산무용제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고, 경임순 예술단 단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전통무용계의 인간문화재人間文化財이다.

삼성중공업 부사장 경상현慶相顯은 1967년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교 산업대학원 석사 과정을 이수하였으며, 1999년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건설최고경영자 과정을 수료하였다. 1969년 국영 기업인 한국도로공사에 입사하여 설계사업소 소장, 수도권사업소 소장, 건설1부장 등을 거쳐 건설본부장으로 승임되었으며, 이때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주관하였다. 1994년에는 고속도로관리공단 사장으로 발탁되어 6년간 봉직하였다. 1999년 4월, 삼성중공업(주)에 발탁되어 건설 부문 부사장을 거쳐 2002년 토목사업 담당 부사장으로 전임되었다. 2006년 한국도로공사 고속도로 기술 및 설계자문위원, 건설교통부 부산국도관리청 도로 부문 설계자문위원, 한국터널공학회 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상훈으로 1987년 12월, 고속도로 건설유공으로 산업포장을, 1996년 2월 석탑산업훈장을 수상하였다.

이외에도 청주 경씨 가문에는 풍력기술개발사업단 단장을 역임한 경남호慶南浩, 국회의원을 지낸 경대수慶大秀, 버섯전문가 경상현慶相顯, 여류 미술가 경지연慶智姸 등 다수의 인재들이 포진하고 있다.

기타 경씨

기타 경씨로는 햇볕 경景 자를 쓰는 태인 경씨 3,923명, 빛 경耿 자를 쓰는 충청도 연기현의 토성(『세종실록지리지』 기록)인 경씨 5명, 서울 경京 자를 쓰는 경씨 18명이 통계청이 조사한 결과이다. 이들 중 태인 경씨 외에는 구체적 자료가 미비하여 불가피하게 태인 경씨에 대하여만 기술하도록 한다.

태인 경씨泰仁景氏(시산 경시詩山景氏)의 유래

태인은 전라북도 정읍군에 속해 있는 지명으로 신라 시대의 태산泰山과 고려의 인의仁義를 합한 명칭이다. 태인 경씨는 시산 경씨라고도 하는데, 시산은 태인의 옛 지명이다. 경씨의 본관은 태인과 해주를 비롯하여 충주, 경주, 밀양, 장연, 치등置等(전북 순창), 능향綾鄕(전북 태인), 복흥復興(전북 장수) 등 10여 개의 관향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나 태인과 해주를 제외한 본관은 미상이다.

태인 경씨는 은나라에서 기자와 함께 평양에 왔다고 하는 경여송慶汝松을 입성 시조로 받들고 있다. 그렇지만 삼국 시대를 거치면서 그 세손이 실전되었고, 고려조에 이르러 그 후손 문목공 경차景磋께서 문과에 올라 추밀원부사와 문하시랑 평장사平章事(현 부총리)에 이르고 나라에 공훈을 세우니 태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 아들 충익공 경설정景洩淨 또한 문무 양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나아가 보문각의 대제학에 이르고 북변으로 침입하여 온 외적을 크게 무찌른 무공으로 태산군 호를 세습하니, 문목공을 1세조로 하고 태인泰仁(시산詩山)을 관향으로 하는 태인(시산) 경씨가 창성된 것이다.

2세世 충익공이 세 아들을 두니 큰아들 경상조景祥祖는 직제학, 대사공으로 금구파金溝派의 파조요, 둘째 아들 좌복야左僕射(부총리) 경상록景祥祿은 고부파古阜派와 해주파海州派의 파조이며, 셋째 아들 경록조는 성절사聖節使, 정3품 직제학直提學인데 그 후손들은 알 수가 없다. 첨정공파僉正公派는 17세 경지景止 대에 황해도 해주로 이거하고, 일부가 22세 경천복景千福 대에 황해도 금주衿州 등지로 세거지를 확대하면서 경상록을 분관조로 하여 해주 경씨로 대를 이어 왔다. 최근에는 태인으로 일원화하고 태인 경씨 해주파로 일컫고 있다.

 

 

태인 경씨 세거지의 확대

시산 경씨(태인 경씨) 계묘보를 보면, 1세 경차가 태산부원군에 봉해져 전북 태산泰山(현 정읍)에 터를 잡았으며, 금구파金溝派의 경우 13세 경극중景克中 전후로 전북 금구면 등지로 세거지를 확대했다. 또한 고부파는 12세 경청景淸 대에 전북 정읍군 고부면 등지로 산거해 갔으며, 18세 경유식景惟植 대에 이르러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해 경기도 광주로 이거하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24세 경정윤景正允이 경북 영덕군으로 26세 경덕현景德賢이 전남 광양군으로 27세 경도승景道升이 경북 군위군 등지에서 각각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주요 세거지는 전북 부안군 백산면 하청리 하청 마을이다. 이곳은 시산 경씨 집성촌으로, 좌첨도어사를 지낸 경청이 정읍군 태인면 시산리에 살다가 처음 입향하였고, 후손들도 임진왜란 때 이 마을에 피난 와서 정착하였다.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월전리는 태인 경씨泰仁景氏 동성 마을인데, 한때는 금구 5성씨 가운데 하나로 번창하기도 하였다. 월전리 태인 경씨는 경극중을 입향조로 하는 김제시 세거 성씨 가운데 하나이다. 관련 유적으로는 김제시 금구면 월전리 당월 마을에 효자 경예손景禮孫 정려㫌閭가 있다.


태인 경씨 주요 인물

경인景寅은 경상록의 9세손이다. 산원散員 경광유景光侑의 아들이다. 순유학생諄誘學生으로 1377년(고려 우왕 3년) 진사시 3등으로 합격하여 감무監務를 역임하였다.

경청景淸은 경인景寅의 아들로 전라도 부안에서 태어났다. 경상록의 10세손이다. 1369년(고려 공민왕 18년)에 명나라에서 과거에 응시하여 3등에 급제하였다. 급제 후에는 건문제建文帝를 섬겼으며, 관직은 좌첨도어사左僉都御使에 이르렀다. 1402년에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그의 조카인 건문제를 몰아내고 천자가 되자, 경청은 복수하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연왕에게 복수하려던 사실을 털어놓자, 연왕은 솔직함에 감탄하며 관직을 유지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복수하려는 마음으로 칼을 품고 조회에 참석하였다가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후에 호상湖上에 그의 넋을 기리는 충신사忠臣祠가 세워졌다. 이에 대한 내용은 『명사明史』 권 141 「방효유전方孝孺傳 경청전景淸傳」에 실려 있다.

경응순景應舜(?~1592년)은 조선 중기의 역관譯官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학통사倭學通事로 상주를 방어하고 있던 이일李鎰의 진중에 있다가, 왜장 고니시小西行長에게 포로로 잡혔다. 고니시는 그로 하여금 도요토미豊臣秀吉의 강화를 요청하는 서계書契(일본과의 외교 문서)를 조정에 전달하게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일찍이 선위사宣慰使로 왜사倭使를 접대한 적이 있는 이덕형을 강화 사절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조정의 명에 의하여 이덕형을 따라 다시 충주로 향하여 가던 도중, 충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덕형을 가지 못하게 만류하고 스스로 적정을 살피러 나섰다가 가토加藤淸正의 군사에게 잡혀 피살되었다.

경상현景商鉉은 대한민국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냈다.


[참고자료]
1)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2) 경창선, 「혈맥血脈」, 종중 보관 자료
3) 청주 경씨 을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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