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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는 인류 문명의 젖줄로 불리는 중국 남서부 티베트 고원을 무대로 오랜 세월 동안 고유한 민족적, 문화적 전통을 구축해 온 지역으로, 현재는 중국에 합병되어 ‘시짱西藏자치구’로 남아 있다. 기원전 4세기경 형성된 토번 왕조로 역사에 등장한 티베트 민족은 몽골(원元)과 명明, 청淸 등 중국 왕조들과의 꾸준한 관계 속에서 티베트 불교 문화의 영향력을 신장시켜 왔으나, 청나라 멸망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등장하면서 독립 국가를 이루려는 티베트의 열망은 중국의 무력 점령에 의해 무산되는 아픔을 겪었다.
결국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땐진 갸초)는 인도에 망명 정부를 세우고 비폭력 독립 운동을 주창하며 지속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으나, 티베트의 독립은 아직 요원하기만 하다.
비록 독립 국가는 아니지만,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조화의 땅으로 알려진 티베트의 역사와 전통을 살펴보는 것은 세계의 문화를 보다 폭넓게 이해하는 데 일조가 될 것으로 본다. 이제 티베트의 숨겨진 이야기를 만나러 가 보자.
신비와 조화의 땅, 티베트, 티벳
“하늘의 한 가운데 땅의 중심, 세계의 심장, 히말라야 산맥은 모든 강의 원류이고, 산은 높고 땅은 깨끗하다.
사람은 선을 행해야 함을 알고 심성은 영특하고 용감하며 풍속은 순수하고 선량하다.”
이 말은 『돈황고장문문헌敦煌古藏文文獻』의 일부분이다.
1천여 년 전에 티베트 민족의 조상들이 티베트 고원과, 거기에 살고 있는 자신들에 대해 묘사한 내용이다.
한 세기가 지났으므로 무엇인가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늘날에 와서도 티베트는 천 년 전에 기록한 문자 그대로다.
그렇다고 해도, 미개未開라거나 야만野蠻 따위와 같은 단어를 떠올린다면 또한 오산이다.
그것은 타자와 나를 구분해 놓고, 현대 문명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타자를 보려고 하는 타락된 자들의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티베트Tibet, 티베트.
우리는 티베트로 간다.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티베트는 불가사의不可思議와 신비로움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땅이다.
1) 티베트, 떠나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티베트Tibet를 탐방하려고 할 때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내가 탐방하려고 하는 티베트는 어떤 티베트를 가리키는가? 티베트 망명 정부로 대표되는 티베트를 말하는가? 민족적·문화적·역사적·지리적인 위치로서의 티베트인가? 각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당장에 대답을 구하지 않는다. 각 입장마다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티베트, 이 정도를 기억하고 탐방 길에 나선다.
티베트의 지리적 위치는 어느 정도 구분이 가능하다. 히말라야Himalayas 산맥의 북측, 쿤룬 산맥의 남측에 옆으로 누운 산악지대 티베트 고원을 티베트라고 한다. 민족적이고 문화적인 의미에서 프랑스의 7배 정도인 380만㎢의 면적이다. 한반도의 여섯 배나 되는 광활한 땅이다. 국토의 대부분은 식물 한계선인 해발 4,000m를 넘는 곳에 위치한다.
오늘날 티베트의 주 영역은 중국의 시짱자치구西藏自治區(티베트자치구)에 편입돼 있다. 티베트의 동쪽은 다쉐大雪 산맥으로 중국 본토와 구분된다. 서쪽은 카라코람Karakoram 산맥과 접하고 있다. 이 중 히말라야 산맥을 따른 남쪽과 그 북동으로 뻗친 연장선상에서 남북으로 달리는 계곡으로 중국 칭하이靑海 성省 남쪽과 쓰촨四川 성 서쪽 지역에 사는 민족이 바로 티베트인이다.
인구는 6백만 명이 조금 넘는다. 중국 인구의 0.46%다. 역사적인 의미에서 티베트를 정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티베트 국경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바뀌어 왔다. 8세기에는 실크로드를 따라 둔황敦煌과 윈난雲南 성까지 이르렀다. 라다크는 물론 인도 북부와 네팔의 여러 지역까지 티베트 영토였다. 1959년 수립된 티베트 망명 정부의 입장에서 티베트는 민족적이고 문화적인 총체로서의 ‘티베트’를 일컫는다. 이때 티베트는 ‘뵈 쵤카 숨’이라는 용어로 지칭된다. 우창·캄·암도 등 3개 지역의 티베트라는 뜻이다.
2) ‘티베트’라는 용어 그리고 ‘시짱西藏’, ‘토번吐蕃’
현재 중국에서는 티베트를 ‘시짱西藏’이라고 한다. 티베트 민족을 ‘장족藏族’이라고 부른다.
‘시짱’이라는 명칭은 중국 청나라 시대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시西’는 티베트 지역이 중국 대륙의 서쪽에 위치한다는 뜻이고, ‘장藏’은 티베트 ‘위짱衛藏’의 줄임말이다.
청나라 강희제姜熙齊 후기에 ‘서정’이라는 단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고 건륭제乾隆帝 이후에 고유명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장’은 위짱 전체를 지칭하는 단어가 됐다.
그리고 중화민국 시기에 이르면 토번吐蕃, 서번西蕃, 번족蕃族이라는 표현 대신 ‘장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어 이것이 티베트 민족의 명칭이 되었다. 티베트인은 자기의 민족을 ‘푀蕃’라고 부른다.
중국인들은 고대 티베트 제국을 토번吐蕃(혹은 투베트, 투보트)라고 불렀다.
14세기경까지는 토번으로 통칭되었다. 고대 튀르크 및 소그드어로 기록된 문헌에는 이지역을 튀퓟Tüpüt으로 불렀다.
학계에서는 이 명칭이 티베트 북부 지역을 나타내는 티베트어 ‘tu phod’나 ‘stod pod’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 발음이 아랍 세계로 전해졌다. 이후 영어권에서 Thibet이라고 불리다가 오늘날 영문 명칭인 Tibet으로 정착됐다.
오늘날 중국 외에서는 ‘시짱’보다는 ‘티베트’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대체로 티베트, 간혹 한역인 ‘토번’을 사용하기도 한다.
3) 인류 문명의 젖줄, 티베트 고원
1억 년 전, 티베트 지역은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였다.
오늘날 티베트 고원에 남아 있는 수많은 염호鹽湖가 까마득히 잊힌 기억을 되살려 준다.
현대의 지질학자들은 그 바다를 그리스 여신의 이름을 가져와 테티스Tethys 해라고 이름 붙였다.
약 4천만 년 전 인도 대륙과 유라시아 대륙이 부딪치면서 히말라야 조산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후 수천 년에 걸친 지각 변동의 결과 테티스 해 한복판에서 히말라야 산맥이 솟아올랐다.
이때 융기된 지각이 오늘날의 티베트 고원이다.
2,500㎞에 이르는 티베트 고원의 남쪽은 히말라야 산맥과 맞닿아 있다.
히말라야 산맥은 티베트 고원과 인도 아대륙印度亞大陸 사이를 가르며 카라코람 산맥에서 미얀마 북부까지 펼쳐져 있다. 티베트 고원 서쪽으로는 히말라야와 카라코람 산맥이 교차한다.
동쪽으로는 암매 마친, 마얀 카라, 미낙 콩가와 민산 산괴로 이어진다.
북서쪽과 북쪽에는 쿤룬 산맥과 차이다무 분지가 놓여 있어 티베트 고원을 중앙아시아와 분리한다.
티베트 고원은 해발 6,000m 이상의 여러 산맥들이 교차하는 지역이다.
트랜스 히말라야 산맥과 니엔첸탕글라 산맥이 대표적이다.
티베트 고원은 아시아 대륙을 거미줄처럼 흐르는 주요 강의 어머니다. 황허黃河 강, 양쯔揚子 강을 비롯하여 메콩Mekong 강, 이라와디Irrawaddy 강, 살윈Salween 강,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 강, 인더스Indus 강, 수틀레지Sutlej 강이 티베트 고원이 낳은 자식들이다. 이들 강물은 아라비아 해, 인도양, 그리고 서해를 지나 태평양으로 흘러간다. 세계 4대 문명발상지 중 두 문명―황허문명과 인더스 문명이 바로 이곳 티베트 고원에 젖줄을 대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하면 인류 문명의 절반이 이곳에 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티베트의 정치
1) 인민정부와 망명정부
티베트 자치구는 중국에 속해 있기 때문에 지역 공산당 위원회의 서기와 주석을 중심으로 정치가 운영되고 있다.
시짱西藏자치구 인민정부의 청사는 티베트 자치구의 수도 라싸Lhasa에 소재한다.
이 라싸와 르카쩌日喀则Rìkāzé(시가쩨Xigazê)는 중국 국무원이 지정하는 국가역사문화명성(1차, 1982)으로 지정되어 있다.
티베트가 중국에 합병된 이후 민족적, 문화적인 억압이 지속되면서 중국의 통치에 반기를 든 티베트인들의 봉기와 유혈 사태가 계속 이어졌고, 고국을 떠나 티베트의 독립을 위해 싸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국외인 인도에서 ‘망명 정부’의 형식으로 집결하였다.
따라서 티베트는 중국의 자치구 정부로서 존립하는 티베트와 독립 국가를 지향하는 국외 망명 정부로서의 티베트가 공존하고 있다.
2) 티베트 자치구의 행정구역
시짱 짱족 자치구西藏藏族自治區, 다시 말하면 티베트 자치구는 1965년에 성립되었다.
이 지역을 일반적으로 위짱Ü-Tsang, dbus gtsang 지방이라고 부른다.
중국 서남부 티베트 고원에 위치한 시짱 짱족 자치구 혹은 거기에 사는 토착 민족인 티베트족을 일컫는 말이다.
범위를 확장하여 티베트 고원 전체나 티베트인들의 거주지 전체를 일컫기도 한다.
중국의 티베트 자치 구역은 2개 지구地區와 5개 지급시地級市로 이루어져 있다. ‘지급시’는 성省과 현縣 사이의 행정 구역으로 시市가 시市 및 각종 유형의 현縣급 행정구를 관할하고 있는 체제이다. 티베트 내에서는 위짱 지방과 캄 지방의 일부(참도)만을 포함하고 있으나 넓은 의미의 티베트는 칭하이성 대부분 지역과 간쑤甘肅 성, 쓰촨四川 성, 윈난雲南 성 일부 지역을 포함한다. 티베트 자치구 안에서 공식적인 통용어는 티베트어와 중국어다.
지형적으로 티베트 자치구는 굳이 비유하자면 거대한 물고기 형상을 닮았다.
무슨 고기가 알맞을까.
가물치나 쏘가리, 아니면 꺽지같이 생겼다. 티베트 자치구의 서쪽, 그러니까 물고기 머리통(아가미 위) 부분에는 아리阿里Ālǐ 지구(응아리Ngari 지구)가 위치한다.
면적은 296,822㎢이고 평균 고도가 5천m에 이른다. 대지는 거의 황무지에 가깝다.
나무도 자라지 않는 지역이다. 인구는 95,465명으로 민족 구성 분포를 보면 티베트인 91.7%, 한족 7.7%이다.
중북부 지역, 물고기의 뱃살 윗부분에서 등지느러미 부분은 나취那曲Nàqū 지구(낙추Nagqu 지구)이다.
면적은 391,816km², 인구는 462,382명이다. 티베트인 96.8%, 한족 2.8%이다.
동북쪽, 물고기 꼬리 윗부분에는 창두昌都Chāngdū 시(참도Qamdo 시)가 위치한다.
면적은 108,872㎢이다. 인구는 657,505명으로 티베트인 95.5%, 한족 3.4%이다.
중남부 지역, 물고기 뱃살 윗부분은 르카쩌日喀则Rìkāzé 시(시가쩨Xigazê 시)가 위치한다.
면적은 182,066㎢이다.
인구는 703,292명으로 티베트인 95.5%, 한족 3.7%이다.
약간 동쪽으로 기운 중부 지역은 좀 애매하다.
티베트 자치구의 바깥 지역과는 연결되어 있지 않은 내륙 지방으로 이 지역은 티베트 자치구의 수도인 라싸Lhasa(‘하싸’라고도 발음. 중국어로는 라싸拉萨Lāsà) 시가 위치하고 있다.
라싸는 해발 3,700m에 이르지만 티베트 전체 면적을 두고 볼 때 낮은 지역에 속한다.
라싸의 면적은 티베트 자치구 중에서 가장 적은 29,538㎢, 인구는 559,423명이다.
티베트인 76.7%, 한족 21.6%으로 구성되어 있다.
라싸는 티베트의 중심지다.
정신적 고향이며 문화의 중심지다.
라싸 시 아래쪽, 물고기의 뱃살 뒷부분을 차지하는 지역은 산난山南Shānnán 시(로카Lhokha 시)이다.
면적 79,287㎢에 인구는 328,990명이다. 티베트인 93.7%, 한족 5.6%으로 구성되어 있다.
티베트 자치구의 동남쪽, 물고기의 꼬리 부분 아래쪽 지역은 린즈林芝Línzhī 시(닝치Nyingchi 시)이다.
면적은 113,964㎢, 인구는 195,109명이며, 티베트인 74.1%, 한족 17.3%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와 같이 2개 지구와 5개 지급시로 이루어져 있으나 엄밀히 말하면 현 티베트 자치구 지역은 티베트 내에서는 위짱 지방과 캄 지방의 일부(참도)만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넓은 의미의 티베트는 칭하이성 대부분 지역과 간쑤 성, 쓰촨 성, 윈난 성 일부 지역을 포함한다.
티베트의 경제
2015년 티베트 자치구의 경제 생산 총액은 인민폐 1천억 위안을 웃돌아 23년째 연속하여 두 자리 수의 성장을 유지했다. 2015년 티베트의 고정자산 연간 투자액은 인민폐로 1,342억 위안에 달했고 대부 잔액은 2,100억 위안을 넘어섰다.
도시 주민 1인당 가처분 소득은 제11차 5개년 계획 실시 기간 종료 무렵보다 66.8% 증가한 25,457위안에 달했고, 농촌 주민 1인당 가처분 소득은 8,244위안에 달해 연속 13년째 두 자리 수 성장을 유지한 것으로 밝혀졌다.
티베트족의 80%는 농목업에 종사하고 있어 빈곤한 지역이 많다.
대개는 말이나 소, 양 등의 목축업을 주업으로 하고 소량의 농사를 짓는 형태로 운영이 된다.
하지만 개방 정책의 영향으로 수도 라싸나 시가쩨, 강체 등을 중심으로 관광업이 현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또한 자치구 내의 농민이나 유목민은 모든 세금이 면제된다.
2000년부터는 중국 국무원의 서부 대개발 정책이 집행되면서 티베트 자치구에서 칭짱 철도나 도로의 건설 등이 이루어졌다.
2004년 티베트 자치구의 수출액은 전년 대비 6.9% 늘어난 13,008만 달러, 수입은 전년 대비 136% 증가한 9,345만 달러였다. 또 개인이 변경에서 실시하는 영세 무역도 전년 대비 31%가 증가한 2억 위안에 달했다고 보고되고 있다.
아울러 대량의 석유, 천연가스나 광물 자원의 존재도 확인되고 있다.
티베트의 종교와 신앙
1) 고유의 신교 신앙 뵌뽀本敎
오늘날 외국인들에게 티베트는 불교와 달라이 라마의 나라로 쉽게 다가올 것이다.
불교 전래 이전에 티베트에는 고유 신앙인 신교神敎가 있었다.
이를 ‘뵌뽀本波(本敎)’라고 한다.
일종의 정령 신앙이고 샤머니즘이다.
티베트인 조상들은 만물에 깃들어 있는 영혼을 믿었다.
주술을 외우고 짐승을 죽여 그 피로 제사를 지냈다.
티베트 역사 곳곳에는 그들이 흑마술黑魔術을 쓴 흔적도 기록되어 있다.
현재도 티베트에는 뵌뽀 무당들이 굿을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뵌뽀에서는 이 세상이 하늘·땅·지하 삼계三界가 있으며, 거기에는 각각의 신이 있다고 믿었다.
질병을 관장하는 용신龍神, 자연재해를 관장하는 땅의 신 등등.
뵌뽀는 교파 출현 시기에 따라 정령 숭배 신앙 뵌뽀, 융드롱(한자 ‘만卍’ 자를 지칭하는 티베트어) 뵌뽀, 신新 뵌뽀로 구분할 수 있다.
제6대 왕인 다크리 짼뽀 시기에 전장 지역에서 귀신과 교통한다는 무당이 스스로 교파를 만들었다.
이 시기의 뵌뽀는 원시적인 자연 숭배 단계였다.
융드롱 뵌뽀는 외지에서 온 신자들이 만든 교파였다.
이들은 신령을 대신하여 무당이 존재하고 특히 조상 숭배를 행한다는 점에서 정령 신앙 단계에서 발전한 신앙 형태를 하고 있었다.
신 뵌뽀는 7세기 불교 전래와 같은 시기에 생겨났다.
외래 종교인 불교에 대항하기 위해 뵌뽀에서는 자체 경전을 제작, 보급했다.
대부분 불교 경전을 겉모습만 바꾸어 뵌뽀 경전으로 탈바꿈시킨 것이었다.
뵌뽀 창시자는 셴랍 미우쩨로 알려졌다.
그는 뵌뽀 신자들에게 불교에서 석가모니와 같이 신성한 존재다.
그가 역사적 인물인지는 아직도 의심을 받고 있다.
뵌뽀 경전에 따르면 하늘나라에 삼 형제가 있었다.
이들은 뵌뽀의 최고 신령을 스승으로 모시고 뵌뽀 교리를 공부했다.
공부를 끝낸 삼 형제는 셴라 오카르 신神(뵌뽀 최고의 신. ‘흰빛의 지혜의 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흔히 오른손에 갈고리를 들고 코끼리 위의 왕좌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에게 인간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셴라 오카르 신은 3단계의 교리 과정을 수련해야 하는데, 이 과정이 끝나면 불교의 부처에 해당하는 큰 스승이 된다고 했다.
삼 형제 중 첫째는 1단계 수련을 끝냈고 불교의 전세불前世佛과 같은 경지의 스승이 되었다.
둘째는 2단계 수련을 끝내고 불교의 현세불과 같은 경지의 스승이 되었다.
그가 바로 뵌뽀 창시자 셴랍 미우쩨이다.
셋째는 3단계 교리를 익혔다.
그는 미래를 관장하는 미래불이 되었다.
셴라 오카르 신은 셴랍 미우쩨의 수호신이다.
신은 셴랍 미우쩨로 하여금 장중 왕국의 왕자로 태어나게 해 주었다.
기원전 5세기 인간의 세상으로 내려온 셴랍 미우쩨는 뵌뽀를 창시했다.
기록에 따르면 고대 장중 왕국과 토번에는 신교 형태의 다양한 뵌뽀가 있었다. 셴랍 미우쩨는 이러한 원시적 뵌뽀를 통일하여 융드릉 뵌뽀를 만들었다.
2) 티베트 불교는 ‘종파불교’
불교가 티베트에 전해진 것은 7세기였다. 중국의 불교 전래보다 600년이 늦고 한국의 불교 초전初傳(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보다도 약 300년이 늦었다.
티베트는 불교 발상지 인도·네팔과 인접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 전래가 늦은 이유는 두 지역(티베트와 인도·네팔)을 가로막고 있는 히말라야의 설산 고봉 때문이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티베트의 나라 세움이 그만큼 늦어진 탓도 있다.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두 갈래 길이었다.
7세기 중엽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해진 중국계 불교와 인도·네팔계 불교가 그것이다.
중국 불교가 조금 앞서 전래되어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나 티베트인들은 늦게 전해진 인도 불교를 채용했다.
불교는 티베트에 도입된 이래 몇 차례에 걸친 탄압 운동도 있었으나 곧 뿌리를 내리게 된다.
티베트 불교의 국교화를 이끈 왕은 제38대 임금 티송데쩬(742∼797)이다.
티베트 불교에는 한국인(신라인)의 영향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제37대 임금 치데죽짼(재위 705∼754)은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 진흥책을 썼다.
750년 인도와 당나라로 불경을 구하는 외교 사절단을 동시에 파견했다.
인도로 간 사절단은 히말라야를 넘지 못하였다.
상시桑喜를 단장으로 하는 당나라로 간 사절단 5명은 장안에서 『금강경』, 『도간경稻芉經』 등 불경 1천권을 입수했다.
귀국하는 길에 상시 사절단은 쓰촨四川 성 성도成都에 있는 정중사淨衆寺에 들렀다.
그곳에 있는 유명한 선사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가 바로 당시 정중사 주지로 있었던 무상無相 김화상金和尙(684∼762)이다.
그는 고국 땅에서 까마득히 잊힌 존재였으나 중국 선종사禪宗史에서는 태산북두처럼 높이 떠 있는 인물이다.
무상대사는 신라 사람이다. 정확하게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재위 702∼737)의 셋째 왕자였다.
그는 728년 당나라로 건너갔다. 장안에 도착하여 당 현종唐玄宗의 인도를 받아 선정사禪定寺에 머물렀다.
이후 쓰촨 성 자중현資中縣 덕순사德純寺(寧國寺)로 가서 당대의 큰 선사 처적處寂의 제자가 되었다.
무상은 2년 동안 처적의 가르침을 받고 이후 12년 동안 용맹정진했다.
743년부터 20년 동안 정중사 주지로 있으면서 국적을 가리지 않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는 당나라 인민들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숭앙받는 큰 선사였다.
토번 왕국 외교 사절단 상시 일행은 정중사에서 두 달 동안 머물면서 무상대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떠나는 상시 일행에게 무상대사는 앞으로 토번 왕국에 인도 불교가 흥왕할 것을 예언하며 불경 세 권을 선물로 주었다.
상시 사절단 가운데 셀랑拔(塞囊)이 당시 일화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무상사 주지 큰 스님을 ‘니마尼瑪(‘태양’이라는 뜻이다)’라고 적었다.
후학들은 고증 끝에 ‘니마’가 무상대사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무상대사와 하직하고 상시 일행은 756년 라싸로 돌아왔다.
치데죽짼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뒤를 이은 임금이 티송데짼이었다.
티송데짼 이후에도 몇 차례 불교 탄압이 있었으나 결국 불교는 티베트를 상징하는 종교로 큰 뿌리를 내렸다.
티베트 불교는 843년 고대 티베트 왕조 분열 후 약 2세기에 걸친 혼란기를 경계로 전전기前傳期와 후전기後傳期로 구분된다. 전전기는 ‘국가불교’, 후전기는 ‘종파불교’로 특징지을 수 있다.
여기서 티베트 불교의 사상 및 종파 역사를 소개할 여유는 없다. 티베트 역사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일부 언급한 것으로 대신한다.
3) 티베트를 상징하는 여러 ‘기호’들
오늘날 바깥 세계의 사람들이 티베트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몇 개의 장면이 있을 것이다.
지구촌 곳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유창한 영어로 평화와 행복의 말씀을 전하는 달라이 라마Dalai Lama의 모습도 그 중 하나다.
또 있다.
거의 누더기가 되어 버린 옷차림, 삭정이같이 깡마른 몰골이지만 타는 듯 형형한 눈빛, 피투성이가 된 맨발로 황량한 계곡을 오르며 몇 걸음씩 옮길 때마다 온몸을 던져 넙죽넙죽 오체투지五體投地, 소위 삼보일배三步一拜를 하는 티베트인들의 참 처절할 정도로 근엄한 풍경이 그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프랑스 국립학술원 연구원에서 티베트 역사와 민족학 분야의 연구 책임자인 프랑수와지 포마레Francoise Pommaret는 『티베트 상처 입은 문명』에서 티베트인들에 대한 정체성을 몇 가지로 분석하고 있다.
그는 먼저 티베트인에게 동일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공동의 문화, 즉 방언에 따른 차이와 역사적 분쟁, 복식의 다양함 등을 초월한 동일한 표지를 꼽는다.
티베트의 어느 지역이든, 이들 표지가 있다.
지역적으로 조금씩 차이가 있다고 해도 이 표지는 티베트인으로 인정받기에 충분한 표식이 된다.
어떤 것인가? 즉각적으로 티베트 땅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뚜렷한 흔적의 몇 가지 풍경이다.
바람에 나부끼는 기도 깃발, 길 곳곳에 서 있는 탑, 고갯길 꼭대기에 있는 돌무더기, 바위투성이 산허리며 집 벽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지역 신에게 바쳐진 성소 등이 그것이다.
티베트인들이 살고 있는 가옥에서도 공통의 ‘기호’를 발견할 수 있다.
티베트 일반 가옥의 외관은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내부의 배치는 비슷비슷하다.
말하자면 공동의 기억을 표시하는 기호로 작용한다. 각각의 방은 뚜렷한 구분이 없다.
다만 생활 공간인 부엌, 부엌 뒤편 북쪽의 저장고, 사적인 기도실만은 예외다.
기도실은 집에서 가장 높은 장소에 있다. 이 기도실은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1층에는 가축과 곡식 창고를 두고, 가축용 사료는 지붕 위에 보관한다.
의식을 치르기 위해 연기를 피우는 화덕과 토지신을 섬기는 사당은 지붕 위나 마당에 위치한다.
미개한 상태의 티베트를 상징하며 여자 악귀가 송짼감뽀松贊干布 왕에게 정복당한다는 내용의 이야기 또한 티베트인들에게는 공동의 기억이다.
한국인에게 춘향이 이야기 정도에 해당한다고 할까.
아니, 송짼감뽀 이야기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이야기는 링 왕국의 게세르Geser 왕 서사시와 함께 티베트인의 공동의 기억 속에서 가장 깊이 뿌리박혀 있다.
4) 티베트 망명 정부亡命政府
1959년 인도 북서부 지역에 세워진 티베트 망명 정부는 1950년대 중국에 의해 합병된 이후 나라를 잃은 난민들이 모여 설립하였다. 흔히 ‘티베트 망명 정부’(The Government of Tibet in Exile, Tibetan Government in Exile) 또는 중앙 티베트 행정부(CTA: Central Tibetan Administration)라고 부르며, 공식 이름은 ‘달라이 라마 성하의 중앙 티베트 행정부(The Central Tibetan Administration of His Holiness the Dalai Lama)’이다.
티베트 망명 정부는 티베트에 있던 본래 티베트 정부의 연장선으로, 처음에는 1959년 4월 29일 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데시Uttar Pradesh 주州 무수리에 설립되었으며, 이후 1960년 5월에 인도 북서부 히마찰프라데시Himachal Pradesh 주州 다람살라Dharamsala의 강첸 키숑Gangchen Kyishong(티베트어로 ‘설국의 기쁨의 골짜기’를 의미)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티베트 망명 정부는 자신들이 티베트 내외에 거주하는 티베트인의 유일한 합법적 정부라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으며, 티베트의 독립이라는 정치적 목표와 함께 중국의 침략으로 티베트를 떠나 인도와 네팔, 부탄에 흩어져 있는 13만 난민難民의 안전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고 있다.
티베트 망명 정부는 일종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망명 티베트인 헌장’을 제정하고 근대적 민주주의 제도와 조직을 갖추어 장래의 티베트 독립에 대비하고 있다.
또한 미국 뉴욕, 인도 뉴델리, 일본 도쿄, 네팔 카트만두, 대만 타이베이,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스위스 제네바, 헝가리 부다페스트, 러시아 모스크바,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리토리아 등에 대표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망명정부를 외교적으로 승인한 나라는 아직 없지만, 일부 유럽국가 의회에서 공식 정부로 인정하는 등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티베트인과 망명 정부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제14대 달라이 라마(땐진 갸초丹增嘉措, Tenzin Gyatso)는 중국정부에 대해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사항을 티베트인들이 관할하는 고도의 자치를 인정해 준다면, 중국의 일부로서 티베트를 수용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외교ㆍ군사적 완전 독립 대신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는 중도 노선을 취하고 있다.
그는 2001년 7월 티베트 망명 정부의 초대 총리를 뽑아 그로 하여금 망명 정부를 이끌게 하고 자신은 일선에서 퇴진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망명 정부는 망명 티베트인들이 참여한 투표에 의해 2001년 8월 티베트 첫 직선 총리로 삼동 린포체Samdhong Rinpoche(1939~ ) 전 국회의장이 선출되었다.
린포체 총리에 이어 2011년 8월에는 55%의 득표율을 기록한 하버드대 법대 출신의 롭상 상게Robsang Sanay(1968~ )가 망명 정부의 새 총리로 선출되어 취임하였다.
5) 전통과 신비로움이 숨 쉬는 참 아름다운 도시 라싸Lasa(拉薩)
●위치: 티베트 남부, 브라마푸트라 강의 지류인 라싸 강이 이루는 넓은 곡저평야
●인구: 559,423명 (2010 추계)
●면적: 29,274㎢
●대륙: 아시아
●국가: 중국
라싸Lasa는 브라마푸트라 강의 지류인 라싸 강 부근, 티베트 히말라야 산맥의 3,650m 고지에 위치한다. 백두산(2,750m)보다 900m나 높지만 티베트 고원에서는 낮은 고도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다.
북쪽으로는 달라이 산맥이 동서로 뻗어 있다.
남쪽은 온골리 산맥이 동서로 굽이치는 가운데 남북 8㎞, 동서 60㎞의 장방형 분지를 이루고 있다.
도시 가운데는 기츄 강이 흐르고 있다. 강 북쪽 기슭에는 붉은 언덕으로 불리는 뜻의 말보리 언덕이 솟아 있다.
그 위에는 위용을 자랑하는 포탈라Potala(普陀落) 궁이 자리 잡고 있다.
라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티베트 불세출의 군주 송짼감뽀 왕이다.
7세기 중반, 토번 왕국을 세계 무대에 알린 송짼감뽀는 이곳을 덮고 있던 호수를 메워 수도를 건설하고 천도하였다.
이후 라싸는 토번 왕국의 수도였다. 842년 왕이 암살된 후 국가 권력이 각 지방으로 분산되면서 수도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싸는 항상 토번의 종교 중심지로서 위치가 흔들리지 않았다.
1642년 라싸는 다시 중앙 정부의 수도가 되어 20세기까지 이 위치를 고수했다.
1951년 라싸와 티베트가 중국에 점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59년까지는 티베트 정부의 통치를 받았다.
1959년부터 중국이 직접 통치하고 있다.
라싸에는 유명한 유적들이 남아 있다.
라싸 중앙에는 7세기 중엽에 건설된 축락캉Gtsuglag-khang 사원이 있다.
4층 건물인 이 사원은 티베트 최고의 성지로 여겨진다.
루캉 사원Klu-khang, 놀북링카Nor-bu-glingka 등이 과거 찬란했던 정신적 위상을 보여 주고 있다.
티베트 최대 사원인 데풍Drepung 사원과 세라Se-ra 사원도 복원되었다.
그중에서도 말보리 언덕에 찬란하게 서 있는 포탈라 궁을 순례하는 것이 티베트 여행에서 백미로 꼽힌다.
포탈라 궁은 달라이 라마의 겨울 궁전이며 1994년에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포탈라의 ‘포탈’은 배, ‘라’는 항구라는 뜻이다. 실제로 포탈라는 범선 형국을 하고 있다.
이 도시를 몇 차례나 여행하고 돌아온 순례자 김규현은 여행 견문록 『티베트의 신비와 명상 · 포탈라에서 수미산까지』에서 이 포탈라 궁전의 형국에 대해 이렇게 썼다.
마치 미래의 어느 날, 천지가 개벽할 때 피안의 니르바나로 떠날 준비를 끝낸 상태에서 그때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라싸의 경제는 중국이 점령하기 전에 중국·인도·네팔·부탄으로 통하는 역사적 교역로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수공예품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 무기 제조 및 조폐가 주요 산업이었다.
1980년대 이후 라싸는 새로운 경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대외 무역을 위해 라싸를 개방하였다.
라싸 외곽에는 실험 농장을 설립하여 목축업의 과학화를 장려하고 있다. 중소기업 위주이지만 각종 화학 제품, 전기 모터, 제혁, 울 가공, 약품 및 비료, 융단·양탄자, 시멘트 등이 다양하게 제조, 생산되고 있다.
라싸로 가는 길은 4개의 코스가 있다.
①방콕을 경유하여 네팔, 카트만두 코다리에서 국경을 넘어 징무로 들어가는 코스다.
징무에서 여행사를 통한 허가증을 요구한다. 5,000m 상당의 고개 도로를 세 개나 넘어야 한다.
팅리에서 에베레스트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설렘이다.
②쓰촨 성 성두에서 항공편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개별적인 여행은 불가능하다. ‘여행사를 통해’ 단체로 들어가는 길만이 가능하다.
③신강 위구르의 카슈가르喀什까지 가서 다시 두 가지 코스 중 하나를 택하는 방법도 있다.
하나는 기차로 우루무치까지 가서 버스로 카슈로 가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파키스탄을 경유하여 쿤제랍 고개를 넘는 방법이다.
카슈에 도착하면 예청葉城까지 가서 공안국으로부터 허가증을 얻으면 히치하이킹을 할 수 있다.
쿤룬 산맥을 넘어 티베트 서부의 아리에 도착한다.
④칭하이 성의 거울무를 거치는 방법이다.
참 아름다운 도시 라싸로 가는 코스 가운데 어느 길을 선택하든 만만찮은 비용과 체력, 정신력이 요구된다는 것이 경험자들의 충고임을 잊지 말자.
6) 티베트로 가는 길(티벳 여행)
현재 티베트는 중국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으로 남아 있다.
중국 정부는 인구동화 정책을 계속 추진 중이다.
소상공인, 운전사, 건설 및 철도 노동자 등 50만 이상의 한인들이 이주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한인들이 티베트 지역으로 이주해 온 것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이익이 중국 현지보다 3배나 높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덕택에 칭하이의 거얼무와 라싸를 잇는 칭짱 철도靑藏鐵道가 건설되었다.
오늘날 티베트로 가기 위해서는 중국 비자 외에도 티베트 입경허가서가 있어야 한다.
라싸나 시가체 등 개방 지역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추가로 공안이나 군에서 발급하는 여행허가서가 필요하다.
개별 관광은 사실상 금지되어 있다.
현지 차량을 이용한 차량 기사, 가이드를 동반한 관광은 허가된다.
상황에 따라 외국인의 티베트 출입 자체가 금지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티베트로 가는 경로는 칭짱 철도 외에 칭짱 도로靑藏道路, 쓰촨 성―티베트 도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티베트 도로 등 3개 코스가 있다. 칭짱 철도는 2006년에 완공되었다.
해발 평균 4,500m 높이에 총 길이 1,142km에 걸쳐 건설된 이 철도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역을 다니는 하늘길이다.
워낙 높은 지역을 달려야 하므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객실에는 산소마스크가 준비되어 있을 정도다.
칭짱 도로는 칭짱 철도보다 더 높은 길을 달려야 한다.
쓰촨 성―티베트 도로는 쓰촨 성 청두에서 서쪽으로 산을 타고 올라가서 라싸에 이르는 도로다.
이 도로 역시 험난하기는 마찬가지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티베트 도로는 쿤룬 산맥을 지나는 2개의 도로 중 서쪽 219번 국도가 아크사이친을 통해 신장의 예청과 티베트의 라체를 잇고, 동쪽 109번 국도는 라싸와 거얼무 사이를 잇는다.
칭짱 철도와 칭짱 도로를 타고 가는 여행객들의 눈에는 삼보일배하며 라싸의 포탈라 궁으로 가는, 참으로 진지한 모습의 티베트인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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