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종 어씨 시조 인물 어재연 장군 어윤중 선의왕후 어윤희 충주 어씨 연원 파
[글 포스팅 순서]
1. 어씨魚氏의 연원
2. 씨족사의 개요
3. 경종의 계비인 선의왕후宣懿王后
4. 간도가 조선의 땅임을 밝힌 어윤중
5. 신미양요 때 광성진을 지키다 전사한 어재연
6. 우리나라 최초 고아원孤兒院 설립자 어윤희魚允姬
7. 함종 어씨 가문을 빛낸 기타 인물들
8. 함종 어씨 가문의 현대 주요 인물
9. 충주 어씨忠州魚氏
우리나라 어씨는 201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고기 어魚 자를 쓰는 함종 어씨 15,746명, 충주 어씨 2,288명, 기타 어씨 815명으로 총 18,849명입니다.
한편 중앙일보가 1989년 발간한 『한국의 성씨』 자료에 의하면 1985년 현재 경흥 어씨慶興魚氏가 53명으로 조사된 바 있습니다.
어씨魚氏의 연원
함종咸從은 평안남도 강서군에 위치한 지명이입니다.
함종 어씨는 중국에서 계출된 성씨로, 풍익현馮翊縣(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출신의 어화인魚化仁이 남송南宋 영종寧宗 때 난을 피하여 서기 1196년 우리나라에 들어와 강원도 강릉에 뿌리를 내린 것이 시초이며, 황제黃帝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씨족사의 개요
시조 어화인魚化仁으로부터 35세까지 세계가 내려오는 동안 11개 파가 갈렸으나, 그중에도 문정공文貞公・양숙공襄肅公의 2개 파가 가장 융성합니다.
세조, 예종 때 병조판서・좌의정을 지낸 문정공文貞公 어세겸魚世謙과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한 양숙공襄肅公 어세공魚世恭 형제의 후손들이 수도 많고 인물도 많이 배출했습니다.
수에 비해 역대로 많은 인물을 배출한 가문이 함종 어씨입니다.
대표적인 집성촌은 경남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와 가조면 동례리입니다.
경종의 계비인 선의왕후宣懿王后
함종 어씨의 대표적인 인물 중에 조선 경종景宗의 계비인 선의왕후宣懿王后가 있습니다.
선의왕후는 1705년에 태어났습니다.
영돈녕부사 함원부원군으로 의정부영의정으로 추증된 어유구魚有龜의 딸로서, 어유구는 노론 영수 김창집金昌集의 제자이며 일가가 모두 노론계입니다.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영장 이하번의 딸입니다.
어머니 전주 이씨는 중종의 서자 영양군 함의 5대손으로, 증조부는 영양군의 양자 흥녕군 수전의 장남 풍해군 잠이고, 할아버지는 능산군 희입니다.
1718년 14세(만 12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간택되었고, 1720년 숙종이 서거하고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습니다.
1724년 경종이 서거하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불과 20세의 나이로 왕대비가 되었습니다.
영조 2년에는 대비전이 있는 창덕궁이 아닌 경종이 세자 시절 거처하던 창경궁 저승전儲承殿에서 지냈으며, 1730년 경희궁 어조당魚藻堂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거처하던 저승전은 후에 세자궁으로 개조되어 사도세자의 처소가 되었으며 저승전 건너편에 위치했던 취선당就善堂은 세자궁의 소주방燒廚房으로 개조되었는데,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정신 질환을 앓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불길한 저승전에서 자라고 취선당에서 지은 밥을 먹은 탓이라는 설을 남겼다.
간도가 조선의 땅임을 밝힌 어윤중
가장 널리 알려진 어씨의 인물이라면 한말 개화기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인 어윤중魚允中을 꼽게 됩니다.
경기도 용인 태생이며, 어씨의 주요 양대兩大 파 가운데 양숙공 어세공의 후손입니다.
고종 6년 과거에 급제,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수찬修撰・양산군수 등을 역임하며 촉망받는 소장 엘리트 관리로 그 식견과 능력이 일찍이 드러났습니다.
일찍부터 개화사상에 눈떴고 나름대로 진보적 경세이념經世理念을 체계화했습니다.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 이른바 급진 개화파에 비해 김윤식金允植・김홍집金弘集 등과 함께 온건한 개혁사상가로 꼽힙니다. 그의 개화사상은 1881년 고종의 특명으로 파견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으로 개화 일본의 신식 문물을 보고 난 뒤 더욱 굳어졌습니다.
대원군 집정과 두 차례의 양요洋擾, 개국開國, 대원군의 실각,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신정변甲申政變, 동학란東學亂, 갑오경장甲午更張, 아관파천俄館播遷까지 격랑의 한 시대를 살며 온건・점진적인 방법으로 나라의 근대화를 추진코자 진력했던 인물입니다.
갑오경장 후 제1차 김홍집 내각에서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에 임명된 그를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치고 그의 경제론을 우리나라 근대 경제학의 효시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그의 업적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간도間島 영유권의 최초 확인자라는 것입니다.
고종 20년(1880) 북쪽 변경 문제의 파악을 위해 고종은 그를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파견했습니다.
평안도를 거쳐 함경도에 머무르며 백두산 근방의 지리를 조사하고 청과의 불분명한 국경 확정에 나섰습니다.
한韓・청淸 국경의 명문화된 증거는 숙종 38년(1712) 청나라와의 사이에 세운 백두산 정계비白頭山定界碑였습니다.
그는 비문의 토문강土門江이 두만강과는 다른 송화강의 지류인 것을 밝혀내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미 많이 건너가 살고 있던 간도間島가 조선 영토임을 처음으로 명백히 했습니다.
그는 청나라 측 돈화현에 통지, 함께 정계비 일대의 지리를 탐사해 경계를 확정하자고 제의하는 한편 조정에도 “간도間島는 명백한 조선朝鮮 땅”이라고 보고했습니다.
뒷날 일제에 의해 간도 영유권이 멋대로 청에 넘겨졌으나 그의 앞을 내다본 업적은 장차 빛을 볼 것이 틀림없습니다.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와 토문강土門江]
백두산정계비는 조선 후기 조선과 청국 사이의 국경선을 표시하기 위해 백두산 부근에 세운 정계비이다.
청나라가 간도 지역을 봉금封禁 지역으로 선포한 이후 불모지로 방치되어 국경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충돌이 잦아져 외교 문제화하였다.
이에 양국은 1711년 국경 확정을 논의하고 정계비를 세웠다.
하지만 동쪽 경계의 기준인 토문土門을 둘러싼 해석이 서로 달라 19세기 말에 다시 외교적 현안이 되었다.
간도의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국경 분쟁을 일으켰던 토문강은 송화강과 합류한다. 토문강(오도백하五道白河)은 중국에서 주장하는 현재의 두만강이 아니다.
결국 연변 조선족자치주에 해당하는 토문강 동쪽 동간도 지역의 영유권은 한반도 쪽에 있다는 결론이다.
이는 『조선왕조실록』, 중국의 「요동지遼東志」 등 여러 가지 기록과 정합하는 내용이다.
[조선의 국경선에 관한 토막 상식]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토문은 지명이며 두만강의 북쪽에 있다.”
■요동지遼東志 - “토문강의 근원은 장백산 북쪽 송산에서 시작하며 동쪽으로 흘러서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정계비를 세운 곳으로부터 시작해서 나무가 없으면 돌로 쌓아 표식을 만들고 나무만 있으면 목책을 세우기로 한다.”
■레지선, 당빌선, 본느선 – 1909년 간도협약 체결로 간도 땅이 중국으로 넘어가기까지 수많은 서양 고지도에는 간도가 조선의 영토로 되어 있다.
그중에 가장 권위를 갖는 내용이 청나라의 강희제 때, 프랑스의 지리학자 3명(레지, 당빌, 본느)이 측량을 거쳐 만든 지도에서 조선과 청의 경계를 표시한 것이다.
신미양요 때 광성진을 지키다 전사한 어재연
어재연魚在淵 장군은 19세 때인 조선 헌종 7년(1841) 무과에 급제, 벼슬길에 올라 광양현감光陽縣監・장단부사長湍府使・회령부사會寧府使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이후 부총관 겸 금위영 중군직에 있던 어 장군은 미 아시아 함대의 침입 급보에 강화도 진무중군鎭撫中軍으로 임명돼 양이洋夷의 침입으로부터 서울의 입구를 지키는 중책을 맡게 됐습니다.
고종 8년(1871)에 일어난 신미양요辛未洋擾는 5백 년 쇄국의 단잠을 깨우는 서양의 포성이었습니다.
4월 23일 로저스 제독의 지휘하에 기함旗艦 콜로라도를 비롯, 호위함 3척, 포함 2척, 대포 85문, 병력 1,230명으로 구성된 미 아시아 함대가 강화도에 상륙하면서 시작됐습니다.
미군은 초지진・덕진진을 차례로 점령하고 강화 수로의 마지막 보루인 광성진廣城鎭에 육박했습니다.
마침내 어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비군과 블레익 중령이 지휘하는 미 해병대 간에 육탄의 혈전이 벌어졌습니다.
서양의 신식 병기 앞에 조선의 중세 병기는 도저히 적수가 될 수 없었지만, 양이의 침범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애국심만은 강고하여 장졸이 하나같이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다 쓰러졌습니다.
조선군은 전사 57명, 부상 24명이었고, 미군은 전사 3명, 부상 16명을 기록했습니다.
어 장군은 이 전투에서 동생 재순在淳・겸종傔從, 임지팽林芝彭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1868년 대동강을 거슬러 오르다 격침당한 셔먼호 사건을 문책하려고 포함외교砲艦外交에 나섰던 미국은 이 광성진 점령으로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 철수했습니다.
조선 무사의 투혼을 보인 어 장군 부대의 광성진 육탄전이 양이洋夷를 물리친 결과가 됐지만, 대원군은 이에 자신을 얻어 척화비斥和碑를 전국에 만들어 세우고 쇄국 정책을 더욱 굳게 하려는 계기로 삼았다.
해방 후 광성진에는 어 장군 이하 장병들의 충절을 기리는 비각이 세워졌고, 경기도京畿道 이천군利川郡 율면栗面 산성리山星里 장군의 생가는 경기도 지방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 고아원孤兒院 설립자 어윤희魚允姬
어씨가의 인물 중 이채로운 사람은 우리나라 최초의 고아원을 세운 사회사업가이자 여성 독립운동가인 어윤희魚允姬입니다. 그녀는 12세에 어머니가 죽고 시집간 지 사흘 만에 남편이 동학군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여 16세에 혼자 살게 되었으며, 18세에는 아버지마저 여의는 불행을 겪었습니다.
10대 나이에 고아이며 청상과부가 된 박복한 여인은 좌절에 빠질 수 있었지만, 스스로의 의지로 불행을 극복하고 자신이 목말랐던 사랑을 자신 같은 불행한 이웃에 넘치게 나누어 주는 일에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어윤희는 아버지를 여읜 후 충주를 떠나 개성으로 가서 기독교에 입문하고 신학문을 배웠습니다.
3・1운동 때는 개성에서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고아 사업에 착안한 것은 바로 자신의 뼈저린 체험 때문인데, 일제 말 개성에 세운 유린보육원有隣保育院은 우리나라 최초의 고아원입니다. 해방 후엔 서울 마포로 옮겨 현재는 그가 길러 낸 후배들의 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1961년 80세의 나이로 생을 마칠 때까지 안락의자에 편히 앉아 쉬는 것을 못 보았다고 전해지는 봉사의 일생이었습니다.
함종 어씨 가문을 빛낸 기타 인물들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가르친 일세의 대유 어숙권魚叔權은 세공世恭의 서손庶孫입니다.
김창협의 문하인 어유봉魚有鳳이 또한 성리학의 대가로 숙권과 함께 함종 어씨가 낳은 조선조의 대표적 학자로 꼽힙니다.
무武에서는 임진왜란 때의 용장 어영담魚泳潭#이 있습니다.
광양현감으로 있다 난을 만나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그를 도와 옥포 해전・노량 해전 등 숱한 전투에서 무공을 세우고 나라의 남쪽 관문을 지켰습니다.
선조조의 화가 어몽룡魚夢龍은 예술에서 어씨가를 빛낸 인물입니다.
벼슬은 현감을 지냈으나 그림, 특히 매화 그림에 뛰어나 당시 황집중黃執中의 포도, 이정李霆의 대[竹] 그림과 함께 삼절로 불렸다. 작품으로 ‘묵매도’, ‘월매도’ 등이 유명합니다.
함종 어씨 가문의 현대 주요 인물
어청수魚淸秀(1956년~현재) - 동국대학교 졸업 후 제28기 경찰 간부 후보생 시험에 합격하여 경찰 공무원으로 근무하였습니다. 경남 지방 경찰청장, 부산 지방 경찰청장, 경기 지방 경찰청장, 경찰대학장, 서울 지방 경찰청장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자 2008년 2월부터 2009년 1월까지 경찰청장을 역임하였습니다.
2008년 촛불 집회 때의 과잉 진압, 명박산성 배치 논란, 개신교 측에 우호적인 종교 편향 행위, 올림픽 성화 봉송 당시 중국인들에 대한 폭력 비호 등으로 논란이 되었습니다.
이후 2011년 10월부터 2013년 2월까지 청와대 대통령 경호처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어윤태魚允泰(1946년~현재) - 대한민국의 기업인 출신 정치인, 기업인으로 LG그룹 고문을 지냈으며 제36⋅37⋅38대 부산 영도구청장을 역임했습니다.
어윤대魚允大(1945년~현재) - 대한민국의 경영학자이자 금융인, 사회기관단체인이며 고려대학교 총장, KB금융지주 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1978년 미국 미시간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79년에는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교수로 임용된 후, 고려대학교의 모든 요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한국국제경영학회 회장, 외교통상부 외교정책 자문위원, 한국금융학회 회장, 금융발전심의위원회 위원, 한국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대외 경력을 갖고 있으며 2003년 2월에 고려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해 2006년 12월까지 역임했습니다.
충주 어씨忠州魚氏
「기묘보己卯譜」 세록世錄 편에 따르면, 충주 어씨忠州魚氏의 시조 어중익魚重翼은 본래 충주 지씨忠州池氏였으나, 기이한 체모와 겨드랑이에 있던 세 개의 비늘 때문에 고려 태조가 어씨魚氏를 하사하였다고 하는 신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충주 지씨의 시조가 고려에 온 것은 광종 11년(960)이라고 하므로 이 시조 신화가 시기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어중익은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습니다.
「지씨천년사池氏千年史」에 의하면, 그가 충주백忠州伯에 봉해졌다고 하였으므로 충주를 본관으로 삼은 것입니다.
하지만 어중익 이후의 세대를 실전失傳하였으므로, 고려 말에 성균진사成均進士에 오른 후손 어승진魚升震을 1세 조상으로 하고 본관을 충주로 삼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려 중기에 활동하던 익안공翼安公의 묘소를 본향本鄕인 충주시 이류면에 모시며 충주 어씨 대종회 세보를 잇고 있습니다. 어승진의 증손 어유소魚有沼는 조선 세조 때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토평하여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에 오르며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졌습니다.
[참고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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