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사고 꼬꼬무 733편
목포 해남 아시아나 항공 사건 86회 게스트
[글 포스팅 순서]
1. 응답하라 733-1993년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사고(목포 여객기 추락사고)
2. 1993년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사고 사건의 개요
3.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의 원인
4. 목포 여객기 추락사고 결과
5. 1993년 아시아나 항공 여객기 추락 사고의 부수적인 내용들
6. 꼬꼬무 시즌3, 86회 게스트 이야기 손님
7. 꼬꼬무 원진레이온 남양주 마을의 숨겨진 살인마 사라진 308명 산업재해 사건 직업병 산재 사태 85회 게스트
8. 꼬꼬무 이춘재 화성 연쇄살인 사건 범인 프로필 63년생 직업 학교 아들 근황 83회 게스트 살인의 추억
9. 꼬꼬무 흥남철수 작전 흥남부두 메러디스 빅토리호 기적 현봉학 성심당 81회 게스트 재방송
응답하라 733-1993년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사고(목포 여객기 추락사고)
'꼬꼬무'는 '응답하라733- 1993년 목포 여객기 추락사고' 편으로, 여객기 추락사고 생존자가 들려주는 조각난 기억과 참혹한 장면들을 통해 30년 전 그날의 일을 이야기 했습니다.
때는 1993년 7월 한여름, 여름방학을 맞아 목포에 있는 할머니댁에 놀러갈 생각에 잔뜩 들뜬 신나라-신준영 남매. 회사 일 때문에 함께 떠나지 못하는 아빠는 가족을 위해 통 크게 목포행 비행기 티켓을 선물했습니다.
비행기 여행이 쉽지 않았던 시절, 어린 남매는 한껏 들떠 아시아나733편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이 가족에게 어떤 비극이 찾아올지 몰랐습니다.
몇 시간 뒤, 나라 아빠의 사무실 전화기가 울렸습니다.
발신자는 형수님, 다급하게 뉴스를 들어보라고 외쳤습니다.
놀랍게도, 아이들과 아내가 타고간 비행기가 행방불명됐다는 뉴스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비행기는 목포 공항 착륙 직전, 관제탑과의 교신이 두절된 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피랍인가, 아니면 추락인가?
납치범으로부터의 연락도, 추락 목격 신고도 없이 시간만 흘러갔습니다.
110명을 태운 비행기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같은 시각, 전라남도 해남군 마천마을 주민들은 한동안 내린 비가 잦아들자 평소처럼 밭으로 향했습니다.
그 순간, 뿌연 안개 속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됐습니다.
모습을 드러낸 건 정체 모를 피투성이의 남자였습니다.
남자는 마을 뒷산에 비행기가 추락했고 자신은 간신히 살아남아 산을 헤치고 내려왔다며 힘겹게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주민들은 놀란 마음을 달랠 새도 없이 닥치는 대로 농기구들을 챙기고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그야말로 처참했습니다.
나뭇가지엔 사람들이 매달려 있고 비행기는 세 동강이 나 산 중턱에 걸려있었던 것입니다.
마을주민들은 비행기 폭파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차분히 구조작업에 나섰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두려움 속에서도 움직이게 만든 것일지, '꼬꼬무'에서 직접 그들을 만나 당시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한편, 이 사고로 아내와 아들을 잃은 승아 아빠는 병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아내와 아들의 시신은 수습했지만, 막내딸 승아가 그 어느 병원 안치실에서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마지막으로 찾아간 병원에서 시선이 한 곳으로 향하는데 붕대를 얼굴에 감고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는 한 여자 아이였습니다. 나이대도, 생김새도 너무 승아와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병상에 붙어 있는 이름표를 확인해보았으나 딸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아이 곁엔 열심히 간호 중인 아이의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승아 아빠는 아이의 얼굴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붕대를 한번 풀어볼 수 있을까요"라고 부탁해 떨리는 손으로 아이 얼굴의 붕대를 풀고 한참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승아 아빠는 '내 딸 승아가 맞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이 곁을 지키고 있던 남자는 "무슨 소리냐? 이 아이는 분명 내 딸이다"라며 발끈했습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아이는 하나, 그러나 본인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아빠는 둘인 상황이었습니다.
과연 아이는 누구의 딸이었을지?
1993년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사고 사건의 개요
1993년 7월 26일, 오후 2시 20분 김포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오후 3시 15분 전남 영암군 삼호읍의 목포공항에 도착 예정인 아시아나항공의 OZ733편 B737-5L9 여객기(기체 등록번호: HL7229)(기장 황인기, 부기장 박태환)가 목포공항 착륙을 위해 접근 중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마산리 화원반도 야산에 추락한 사고입니다.
사고 당시 목포공항에는 강한 비가 내리고 있었고, 오후 3시 24분 사고기는 첫 번째 착륙 시도를 실패했습니다.
이어서 4분 후인 3시 28분, 2번째 착륙 시도를 했지만 역시 실패하고 다시 10분 후인 3시 38분, 3번째 착륙 시도 역시 실패로 끝났습니다.
3번째 착륙 시도를 하기 위해 접근하던 사고기는 3분 후인 3시 41분 광주공항의 관제 레이더에서 사라지면서 통신이 두절됐습니다.
요즘은 세 번이나 착륙에 실패하면 착륙을 포기하고 회항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그 당시는 기상 이변으로 회항하면 기장이 시말서를 써야 하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고를 계기로 그 규정은 없어졌다.
2007년 이후에는 3번이나 착륙에 실패하고도 회항하지 않으면 감항 당국에서 보고서를 요구하도록 되어있다.
참고로, KLM 네덜란드 항공은 (시간 지체시) 기장에게 벌금까지 물리는 규정이 있었다.
비행기가 납치를 당해도! 심지어 해고까지 당할 수 있었는데 이런 규정이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항공 사고인 테네리페 참사를 일으키고 나서야 없어졌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의 대표적인 예시다.
충돌 타이밍에 사고기와 교신하고 있던 광주공항 관제탑에서 갱신된 기상정보를 통보하고자 교신을 시도하였으나, 사고기에서 응답이 없었습니다. 레이더에서 사라지고 9분이 지난 3시 50분, 사고기는 목포공항에서 10km 정도 떨어진 해남군 화원면 마산리의 야산에 추락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의 원인
악천후, 공항 시설의 부족, 기장의 무리한 착륙 시도를 꼽을 수 있습니다.
특히 목포공항은 VOR/DME와 NDB만 설치되어 계기착륙장치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소규모 공항이었고, 활주로 역시 1,500m로 민항 여객기가 취항하기엔 아슬아슬한 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악천후로 시야까지 제한되고 파일럿들은 계속된 접근 실패에 조바심으로 서둘러 착륙 시도를 했었습니다.
당시 착륙 허가를 받지 않고 착륙 절차를 수행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결국 거듭된 접근 실패로 조바심이 난 기장은 다소 낮은 고도로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공식 조사 결과에서는 1.5마일 최종 경유지점을 비행컴퓨터(FMC)에 입력하지 않아 실제보다 1.5마일을 더 간 것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실제로 마지막 시도에서 모든 조작이 2마일 가량 일찍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활주로 접근선상에 있는 산을 뒤늦게 발견한 후, 충돌 4초 전 상승하려 했으나 당시 지상과 불과 110여 피트(33.53m)를 남겨놓고 날고 있었던데다 분당 1,000ft(304.8m)로 하강하고 있었고, 더군다나 평지가 아닌 산 위를 날고 있었습니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선 하강을 멈추는 것만으론 부족하고, 산의 경사보다 더 빨리 상승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4초 동안 하강을 멈추고 32피트(9.75m)를 상승하여 762피트(232.3m)까지 올라갔으나, 827피트(252.1m)의 봉우리를 넘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아시아나는 정시 이착륙 세계 1위라는 점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던 때였는데, 이를 사고의 한 원인으로 보기도 합니다. 즉 조종사가 이 기록을 유지하기 위해 무리한 착륙을 시도한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다시 정시 이착륙이 좋은 항공사를 평가하는 척도처럼 부각되는데 대하여 우려섞인 시선도 있습니다.
목포 여객기 추락사고 결과
탑승객 110명, 승무원 6명 중 68명이 사망했습니다.
당시 악천후로 인한 시야 제한으로 목포공항에서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사고기 추락 현장에서 생존한 승객 2명이 기내에서 빠져나온 후 산 아래 마산리 마을까지 내려와 근처 파출소로 가서 신고하면서 사고가 알려졌으며 이후 파출소에서 다시 관할 소방서인 목포소방서에 신고, 목포소방서 해남소방파출소 소방차 및 구급차들이 출동하고 목포소방서 119구조대도 출동하여 구조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산에 비행기가 충돌하는 사고를 당하고도 마산리 마을까지 내려간 것으로 보아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승객이 직접 마을까지 내려가 파출소에 가서 신고한 만큼 사고 현장으로의 소방차 출동은 늦어졌다.
그리고 파출소-> 해남경찰서 보고-> 목포소방서 지령실-> 해남소방파출소로 여러번 전화가 오가야 해서 여기서 시간도 많이 잡아먹혔다.
1990년대 초반에는 현재같이 경찰/소방관서 같이 통합된 시스템이 없어 이렇게 일일이 전화를 돌려야만 했다.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하려던 대한민국 공군 예비역 소령 기장 황인기(당시 48세), 공군 예비역 중령 부기장 박태환(당시 39세) 모두 즉사했습니다.
나중에 드러난 결과에 의하면, 황인기 기장은 여객기 운항 시간 자체는 3,022시간을 조종했으나, 고난이도 기술이 필요한 당시 목포 노선 운행은 겨우 2번 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박태환 부기장은 더 문제였는데, 공군 조종시간은 3,000시간에 달하지만 민간 여객기는 고작 24시간을 조종한데 그친 초보조종사였고 그도 목포 노선은 단 2번이 전부였습니다.
위험성이 큰 목포행 노선에 목포공항 경험이 부족한 조종사만 두 명을 배치했으니 사실상의 인재(人災)이며, 둘 중 한 명이라도 목포공항 경험이 어느정도 쌓인 조종사를 배치했다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나마 전화위복이 된 점은 당시 해남 지역에 쏟아지며 착륙을 그렇게나 방해하던 비가, 사고 발생 이후에는 추가 희생자를 줄이는데 도움을 줬다는 것입니다.
추락하면서 항공유가 누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 덕분에 2차 폭발이나 화재는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산중에 추락하는 바람에 119 구급차가 접근할 수 없어서 목포공항에 전개하고 있던 대한민국 해군의 알루에트 III 대잠헬기가 긴급 투입되어 부상자를 수송했는데, 문제는 알루엣 3은 경헬기라 기내에 들것을 놓을 자리가 없었고 구조 헬기가 아니라 들것도 없는 상황이어서 부상자들을 그냥 서 있는 채로 와이어에 매달아 수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척추를 다친 부상자들이 하반신 마비 등의 2차 부상까지 입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들것 없이 매달리는 바람에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
하지만 당사자는 이를 원망하지 않았는데, 모두가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자신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구출에 참여한 사람들도 방법이 잘못된 것을 몰랐던 자신들의 무지가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또 가벼운 원피스를 입은 여성 부상자를 와이어로 매달아 올리면서 원피스가 바람에 날려 위로 젖혀져 여성의 팬티와 브래지어가 노출된 장면을 뉴스에서 모자이크 없이 그대로 보도해 버리는 흑역사도 있었습니다.
특히 가장 먼저 내보낸 MBC는 사고 당일 뉴스데스크에선 모두 3번, 27일 9:40 뉴스 및 저녁뉴스에서 각각 2번 나왔고, KBS도 사고 당일 1TV 23:45 뉴스 및 2TV 10:20 뉴스, 27일 1TV 9시 뉴스에서, SBS도 모두 4번을 각각 내보냈습니다.
신문에서도 사고 다음날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조선일보 4개사가 해당 장면을 게재했으며, 모 조간신문은 아예 사회면에서 선보였습니다. 위와 같이 TV 뉴스에서는 자극적인 해당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주다가 27일 들어 지상파 3사는 방송위원회의 경고를 받고 사과방송을 하기도 하였으며, 28일에 KBS 9시 뉴스에서도 문제의 부분을 편집 방영했습니다.
팬티와 브래지어 노출 장면 외에도 언론의 선정적 보도는 여럿 있는데, 28일 KBS 9시 뉴스에선 위에 언급된 여성 부상자의 성명과 주소를 번지수만 뺀 채 여과 없이 내보냈고, 사고 당일 뉴스데스크에선 부상의 쇼크로 몸을 떨던 어린이에게도 마이크를 들이대는 무신경과 무감정을 드러냈습니다.
게다가 사고 소식이 7월 31일 이후 급속히 줄어들었다는 점에서 '냄비 저널리즘'의 문제점이 제기됐고, 뉴스의 과잉 극화 경향, 동일 정보원을 반복 보도하는 '함께 저널리즘' 등도 도마 거리에 올랐습니다.
그래도 이러한 언론의 추태와 달리 관할 소방서인 목포소방서 119구조대와 해남소방파출소 소방대원/의용소방대원들은 화재 진화작업 및 인명구조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나마 전술했듯 비가 내려 화재가 대부분 진화되어 큰 규모의 불로는 번지지 않은게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당시 목포소방서에는 대불공단 등 공단지대가 있어 화학차가 한 대 있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항공기 사고에 대응하기에는 조금 모자라서 해군항공대 소방대의 도움을 받아야 했으며 만일 화재 규모가 커졌다면 광주광역시의 제1전투비행단 소속 공군 소방대의 도움이 불가피했을 것이었으며 해남소방파출소가 보유한 펌프차, 물탱크차는 항공기 화재를 진압하기엔 어림도 없었습니다.
항공기 화재는 등유 화재인지라 일반적인 물이 아니라 화학약제를 써서 진화해야 한다.
가루 형태의 분말로 된 소화약제가 쓰인다. 활주로 상에선 어지간하면 물로 진화하는 화재가 날 일 자체가 없고 거의 기름과 관련된 불이 나는지라 일반 소방차는 대응이 힘들고 화학소방차가 와서 처리해야 한다.
괜히 공항소방대가 따로 있는게 아니다.
이 사고는 아시아나항공의 최초 인명손실 항공사고이자 아시아나항공의 최악의 인사사고이며, 첫번째 국내선 사고이입니다. 사고 이후 OZ733편은 한동안 결번으로 남아 있었지만, 아시아나항공에서 편명 체계를 싹 갈아엎고 현재는 인천발 하노이행 노선의 편명으로 운행 중입니다.
또한 이 사고로 인해 목포공항의 여러 문제점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이를 대체할 공항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는 무안국제공항의 건설로 이어졌습니다.
무안국제공항의 개항 후 목포공항은 폐항되어 현재는 오로지 군 전용 비행장으로만 사용중입니다.
1993년 아시아나 항공 여객기 추락 사고의 부수적인 내용들
- 가수 김경호의 1집 수록곡인 "누명 쓴 아이"는 이 사고로 조카와 이모를 잃은 김경호가 추모하기 위한 노래라 알려져 있습니다.
- 한 생존자는 사고 직후 꿈인지 생시인지 흰옷 입은 사람들이 산 위로 올라가고, 자신은 산 아래로 내려왔는데 그 때문에 산 것 같다는 증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 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1993년 3월)에 이은 문민정부 시기의 대형 참사 2번째(1993년 7월)로, 불과 석달뒤에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1993년 10월)가 일어났습니다.
- 아빠의 수첩이라는 책에서, 목포로 출장을 가던 아빠가 이 사고로 죽습니다. 그런데 추락 직전 가지고 있던 수첩에 유언을 남겼다는 내용은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에서 따온 것입니다.
- 공포라디오 쌈무이에서도 이 사고와 관련된 예지몽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오색 색동저고리 입은 여자가 미친듯이 춤추다가 쓰러졌다고 하는데 이게 당시 아시아나항공 로고였던 것입니다.
- 사건발생 이후 두달이 지난 9월 26일 아시아나항공 측은 보상비(보상금)로 사망자 1명당 1억 7500만원을 지급하기로 유족들과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회사는 과징금 4500만원을 내야했으며 서울-목포 운행을 3달 동안 금지당했습니다.
- 동아원그룹(당시 운산그룹) 입장에서도 비극적인 사건으로 손꼽히는데, 당시 한국제분 사장 이희영이 이 비행기를 탔다 변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부친 이용구 회장이 타계한 지 3개월 지난 시점이었으며 생전 사원과 거래처에게 겸손하고 격식을 따지지 않아왔던 성품을 가진 터라 사원들까지도 통감할 정도였습니다. 그의 장례는 7월 30일 회사장으로 거행되었습니다.
- 사고 당일엔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항공사고중 최악의 항공사고이기도 했으나 2002년에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가 일어나자 밀려났으며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던 항공사고중 2위로 기록되었습니다.
- 이 사고를 계기로 아시아나항공은 보잉 757의 주문을 전량 취소하고 에어버스 A321로 주문을 돌렸습니다.
- 현재 해군 3함대 사령부에 위치한 목포공항에 관련 사건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다고 합니다.
해당 부대 전역자가 이와 관련된 군생활 괴담을 아카라이브 괴담미스터리 채널 에 업로드 했습니다.
꼬꼬무 시즌3, 86회 게스트 이야기 손님
이날 방송에 이야기 친구 게스트로는 가수 겸 배우 한승연, 개그맨 김원훈, SBS 김현우 앵커가 나섰습니다.
한승연은 장현성의 이야기 친구로 다시 '꼬꼬무'를 찾았습니다.
여름방학 이야기가 나오자 활기를 보이며 눈을 반짝이다가도 '꼬꼬무' 에이스답게 가벼운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고 비극을 예견하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장성규의 이야기 친구 김원훈은 '꼬꼬무'를 너무 사랑해서 본인 채널에서 패러디도 해봤다며 촬영장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시작되자 장난기 넘치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진지하게 임해주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SBS 메인뉴스인 '8뉴스'를 진행하는 김현우 앵커는 장도연의 이야기 친구로 출연했습니다.
평소에도 '꼬꼬무' 애청자라는 김현우 앵커는 딱딱할 거라는 이미지와는 상반되게 센스 넘치고 유머 있는 모습으로 제작진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수년간 '8뉴스'를 책임지며 느꼈던 경험들을 토대로 참사보도의 딜레마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며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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