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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거란 전쟁 강감찬 장군 귀주대첩 고려 현종 낙성대 설화

by 충격대예언 2023. 11. 4.

고려 거란 전쟁 강감찬 장군 귀주대첩 고려 현종 낙성대 설화

[글 포스팅 순서]

1. 고려 현종과 강감찬 관련 연표
2. 1019년 1월 고려 황도 개경의 현종
3. 버림받은 왕손에서 중흥군주로 거듭나는 현종
4. 거란 2차 침입때 당한 현종의 고난과 그 수습
5. 결전決戰- 거란 전쟁 최후의 싸움, 귀주대첩龜州大捷
6. 웅비雄飛-고려와 거란 전쟁이 동아시아 역사에 남긴 영향
7. 별이 된 고려 문하시중 강감찬의 진정한 면모
8. 고려 문하시중 상원수 강감찬 탄강지, 낙성대落星垈
9. 고려 거란 전쟁 서희 외교 담판 강동6주 고려현종 양규 장군 거란족

 

 

고려 현종과 강감찬 관련 연표
●916년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거란 제국 즉 요遼 나라 건국
●918년 왕건王建, 고려高麗 건국
●926년 요, 대진국大震國 멸망시킴
●936년 고려 후삼국 통일
●942년 요, 고려에 사신과 낙타 50필을 보냈으나, 사신은 유배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아래에서 굶겨 죽임(만부교 사건)
●948년 강감찬 금주衿州(현 서울시 관악구)에서 문곡성文曲星 정기를 받고 태어남
●979년 대진국 유민 수만 명 고려에 귀순
●992년 현종, 안종 왕욱과 헌정왕후 황보씨의 사생아로 태어남. 이름은 순詢, 자는 안세安世, 12세에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봉해짐.
●993년 요나라 소손녕 고려 침공, 서희의 활약
●994년 고려 강동 6주 축성과 북방 방어선 구축
●1009년 강조의 변란으로 현종이 즉위함 18세
●1010년 요나라 성종의 고려 친정, 고려 현종 남쪽으로 몽진
●1011년 요나라 개경 함락, 화의 성립 후 퇴각, 양규의 분전
●1018년 요나라 소배압 10만 군대로 침공, 강감찬 흥화진에서 요군 격파
●1019년 요나라 개경 접근, 현종 결사항전을 준비(현종 27세), 요군이 철군하던 도중 귀주에서 강감찬(71세)이 요나라 군대를 격파(귀주대첩龜州大捷)
●1020년 고려 요나라와 강화회담
●1031년 5월 신미일 현종 붕崩, 향년 40세, 재위 22년, 시호는 원문元文, 묘호는 현종顯宗, 능은 선릉宣陵
●1031년 8월 을미일에 시중侍中 강감찬 세상을 떠나 하늘의 별이 됨, 향년 84세, 시호는 인헌仁憲, 충청북도 옥산면 국사봉 기슭에 묘가 있고 그 근처에 사당인 충현사忠顯祠가 있음
1019년 1월 고려 황도 개경의 현종

1019년 정월 개경 및 인근 경기 주민들은 설맞이를 전쟁 준비를 하며 지내야 했다.
2차 침공인 1009년 거란군이 개경을 함락시키고 초토화시킨 후 9년, 겨우 궁을 복원한 지 3년 만에 다시 거란군이 개경에 육박하고 있었다.

 

1019년 1월 3일 개경 북방 40km 지점인 신은현(신계)에 거란군이 나타났다.
이 정도 거리면 거란에게는 하루 여정에 불과했다. 지난 2차 침입 때 현종은 거란군이 개경 근처에 오기도 전에 도주했다. 즉위 1년이었고, 강조康兆에 의해 허수아비로 세워져 기반이 약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현종은 그동안 착실하게 정권 기반을 닦아 갔다. 
중앙 관제는 외삼촌이자 선대인 6세 성종成宗 때 마련되었다. 하지만 지방 관제는 정비되지 않았다. 
이래서는 조세 징수나 병사 징발이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겨우 75개 도에 안무사安撫使를 파견할 정도였다. 
현종은 2차 침입 이후 일진일퇴 공방전을 계속하면서도 지방 행정망을 정비하였다. 
이는 명칭에 다소 변화가 있었지만 조선 시대까지 우리나라 군현제의 기본 골격을 이루었다. 
이와 함께 전비를 증가시켜 거란 침공 대비를 위해 북계에만 10만 이상의 병사를 상주시켰다. 
계속해서 거란과의 크고 작은 충돌로 희생은 있었지만, 그 와중에 유능한 인재들이 발탁되었다. 
마침내 시작된 최후의 전쟁에서 현종은 청야전술淸野戰術로 결전의 의지를 밝혔다. 
개경 주변을 비우고 주민을 성 안으로 집결시켰다.

이번 전쟁에서 거란군은 개전 이후 여러 번의 전투에서 타격을 입어가면서도 진격만 했다. 
그래서 이전에 비해 현전하게 전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전격전으로 밀고 내려와야 했기에 이동에 장애가 되는 공성 기구도 제대로 운반하지 못했다. 거기에 후미에는 거머리처럼 따라붙는 김종현의 부대와 다른 고려군들이 압박을 가했다. 
여기에 여진족을 방어하면서 단련된 고려군 최강 동북면(지금의 함경도 일대) 방어군 3,300명이 개경 방어를 위해 때맞춰 도달할 것이다. 오랜 전쟁으로 고려군 장수들도 상당히 노련해져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 현종은 하루 이틀만 버티면 개경을 방어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섰을 것이다. 
그러나 개경에는 하루 이틀 버틸 만큼의 병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지난번처럼 개경을 버리고 몽진하는 경우 그 후유증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나라 역대 군주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용기로 최후의 시련에 맞섰다. 

이런 배짱이 소배압의 용기와 결단을 꺾었다. 소배압은 최후의 도박으로 척후기병 300명을 금교역까지 파견하였다. 
개경의 군대와 병력 규모를 알아볼 심산이었다. 
거란은 선봉군이 가장 정예한 부대였다. 
이들을 고려군은 100기騎를 출동시켜 몰살시켜 버렸다. 고려도 모험을 한 것이다. 
얼마 안 남은 개경에 있는 군사는 대부분 현종 친위대였는데 이들은 지휘관급으로 수는 적지만 질은 높았다. 
이들을 특전대로 삼아 거란 척후대를 전멸시켜 버렸다.

어떻게 해 볼 엄두도, 시간도 거란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소배압은 회군을 결정했다. 여기서 그대로 더 밀고 내려왔다면 방어력이 약한 개경은 함락되고 현종은 포로가 되어 고려판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거란은 돌아갔다. 
그들이 단 한 번의 공격 없이 스스로 물러서자 개경 주민들은 환호했다. 
그날 개경의 수호신인 송악의 산신에게 제를 올리니, 밤에 송악의 수만 그루 소나무가 사람 소리를 내니 거란군은 지원군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병력을 퇴각했다는 전설이 생겨날 정도였다.

버림받은 왕손에서 중흥군주로 거듭나는 현종

고려 8세 황제 현종! 그는 사생아였지만 혈통은 고귀했다.
부친은 태조의 제5비 신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여덟 번째 아들인 안종安宗 욱郁이었다.
신성왕후 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큰아버지 김억렴의 딸이다.
모친은 5세 황제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였다.
신라와 고려 왕실의 피를 모두 받은 유일한 왕자였다.

헌정왕후는 경종이 죽은 뒤 사가에 머물다 이웃에 살던 아저씨뻘인 왕욱과 사통하여 임신하였다. 
이를 알게 된 6세 황제 성종은 왕욱을 사수泗水(현 사천시)로 귀양 보냈다. 
그 후 임진년인 992년 헌정왕후는 혼자 아이를 낳다가 산욕으로 죽었다. 
태어난 아이 이름은 순詢으로 대량원군에 봉해진다.


대량원군의 이모이자 헌정왕후의 언니인 헌애왕후, 즉 천추태후는 당시 김치양과 사통을 하여 아이를 낳았다. 
7세 황제 목종은 유약하였고, 헌애왕후와 김치양은 대량원군을 죽여 자신들의 아이로 대통을 이으려 했고, 조정은 엉망진창이었다.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을 강제로 숭교사崇敎寺로 출가시킨 뒤 다시 양주로 내쫓아 삼각산 신혈사神穴寺(현 서울시 북한산 자락 은평구 진관사津寬寺)에 머물도록 했다. 
그리고 여러 차례 자객을 보내 그를 죽이려 했지만, 신혈사 노승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목종은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간파하고, 충주부사 채충순蔡忠順(971?~1036)에게 대량원군을 대궐로 데려오도록 하고, 서경 도순검사 강조康兆로 하여금 병권을 안정시켜 도성의 안위를 도모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강조는 목종이 김치양 일파에게 살해됐다고 잘못 알게 되어 군사를 이끌고 내려왔다. 
하지만 이는 오보였다. 목종은 살아 있었다. 
자칫 반역으로 몰릴 처지에 몰린 강조는 이끌고 온 군대로 순식간에 궁궐을 장악하였다. 
목종을 폐위하여 양국공으로 낮추고 대량원군을 왕으로 세우니 이가 고려 8세 현종으로, 당시 18세였다. 
1009년 2월의 일이다.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거란의 2차 침입이 있었다. 
고려의 주력 30만을 이끌던 강조는 통주에서 성급하게 거란군과 대회전을 펼쳤으나 패하였다. 
이에 현종은 남쪽으로 몽진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고생을 한다. 
하지만 이미 수난에 이골이 난 그였는지, 계속되는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이제 마지막 시련이 될 소배압의 거란군에 대해서 결사 항전의 자세로 개경사수로 맞서서 이겨낸 그. 
이제 고려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마지막 전쟁은 북방 귀주에서 펼쳐질 것이다.

거란 2차 침입때 당한 현종의 고난과 그 수습

1011년 정월 개경을 탈출한 현종의 어가는 말 그대로 온갖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었다.
사생아에 고아로 자랐고, 이모에 의해 죽음의 위협을 당한 현종은 다른 사람과 다르게 이성과 자제력이 남달랐다.
보통 사람의 경우 그런 고생을 하면 성격과 정서가 이상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당시 험난한 여정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현종은 후비들과 몇몇 신하, 호위군 50여 명만을 거느린 채 개경을 빠져나왔고,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숱한 고난을 겪었다. 맞이하여 호위해야 할 역驛의 군사들이 활을 쏘아 습격하기도 하고, 지방의 향리가 위협을 하는 일도 벌어졌다. 
심지어 전주절도사全州節度使 조용겸趙容謙은 평상복으로 왕을 맞이하고 부하들을 시켜 위세를 부리는 무례를 범하였고, 급기야 쿠데타를 벌이기도 했다. 

다행히 지채문智蔡文을 비롯한 몇몇 신하들이 끝까지 호위하여 겨우겨우 나주에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나주는 태조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었기에 고려 왕실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비로소 현종은 이곳에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남쪽으로 몸을 피하면서 현종은 하공진河拱振의 건의를 받아들여 거란에 화친을 청했다. 
거란군이 개경을 점령하고 계속 남진하는 상황에서, 현종은 자신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강화를 청하였다. 
거란 성종은 이를 받아들여 철군하였다. 
이렇게 하여 공식적으로는 2차 전쟁이 종결되었고, 현종은 다시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결전決戰- 거란 전쟁 최후의 싸움, 귀주대첩龜州大捷

① 팽팽하게 대치한 고려와 거란군
과감한 결단으로 개경 직공을 선택했던 소배압과 거란군 최강 전사들은 귀주성 앞에 집결하였다. 
더 이상의 도주는 위험했다. 여기서 최후의 승패를 지어야 했다. 
귀주성 동편에는 두 개의 하천이 교차하는 들판이 있다. 
동문천과 백석천이다.

이 하천을 끼고 고려군과 거란군은 팽팽하게 맞섰다. 
이 싸움은 1010년 강조와 소배압이 부딪힌 통주성 전투에 다음 가는 벌판에서 하는 싸움이다. 
지난 20년간 세계 최강 거란을 상대로 전쟁을 치른 고려군은 전투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여기에 이번 원정에서 거란은 계속 지고 있었다. 과도한 행군으로 지쳐 있었다. 그
렇기에 고려는 더욱더 공세적으로 나왔다. 하지만 거란군은 황제 친위군이라는 자부심과 실력을 갖춘 최정예 부대였다. 이 전투만 잘 치르고 하루만 더 가면 국경이다.

거란군에게 진격 명령이 떨어졌다. 
서로를 향해 진격한 군대는 공평하게 하천 하나씩을 건너 두 하천 사이의 개활지에 마주 보고 도열하였다. 
양쪽 다 배수의 진을 친 것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양측 다 우세를 점하거나 돌격의 전기를 잡지는 못했다. 
사격전을 하고 서로 간에 기병 돌격을 해 보았지만 승패가 나지 않았다.

②회심의 일격 김종현 부대 출현
이때 갑자기 김종현의 부대가 나타났다. 
김종현 부대는 작년 12월부터 소배압 때문에 고생을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은 강행군으로 소배압을 한 달 이상 추격했지만, 번번이 허탕을 쳤다. 
이가 갈릴 만도 했다. 하지만 어쩌면 다행이었다.

단독으로 소배압의 대군과 만났다면, 병력 부족과 무리한 강행군으로 인한 피로감으로 오히려 몰살당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소배압 군을 압박하는데 성공하였고, 거란군과 고려의 정예군이 팽팽하게 대치하는 상황에서 전쟁터에 도달하였다.

피아 균형이 팽팽할 때는 사소한 차이로도 승패가 갈린다. 고수의 세계는 그렇다. 
그런데 1만 명이라는 적지 않은 병력이 싸움터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강감찬으로부터 개경을 구하라는 특명을 받았던 부대다. 
정예 기병에 전력과 사명감이 투철한 최강의 부대였을 것이다. 
또한 이들은 거란군을 추격해 왔기 때문에 거란군 등 뒤에서 출현한 셈이 되었다.

③ 하늘이 도왔다-동남풍이 불다
전세가 일거에 고려군에 유리해졌다. 
여기에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남풍으로 바뀌었다. 
계절로 따지면 북풍이 정상인데, 강한 바람이 남에서 북으로 불기 시작했다. 
이를 『고려사』 강감찬 열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때마침 갑자기 비바람이 남녘으로부터 휩쓸어 와서 깃발이 북으로 나부꼈다. 
아군(고려군)이 이 기세를 타서 맹렬히 공격하니 용기가 스스로 배나 더해졌다.

천재일우!

고려군 20만은 한 세대에 걸쳐 지속한 이 전쟁의 끝을 보려 했다.

여기서 끝을 보지 않으면 이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몰랐다.

강감찬의 진격 명령이 떨어졌고, 진군의 북소리가 높이 퍼져 나갔다.

강민첨 장군

거란군을 향한 고려군의 깃발과 함성은 귀주 벌판에 가득 찼다.

고려군을 맞이한 거란군 전위는 천운군과 우피실군이었다.

이들은 2차 침입 때 통주에서 강조 군대를 격멸할 당시 선봉에 섰던 부대였다.

고려군의 돌격에 거란군은 전열이 무너졌다.

대형은 무너지고, 퇴로를 잃은 천운군과 우피실군은 강으로 뛰어들었고, 이곳에서 쫓아온 강민첨의 고려군에 의해 수많은 병사들이 살해되었다. 고위급 장수들 피해가 커서 천운군의 지휘관급인 천운군 상온 해리, 발해 상온 고청명, 요령 상온 아과달, 객상사 작고 등이 전사했다.

거란은 수많은 사상자를 냈고,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다.

거란은 이처럼 처참한 패배를 당한 사례가 없다.

그것도 황제 친위군이 전멸하다시피 했다.

역사는 이 전투를 귀주대첩龜州大捷이라고 한다.

웅비雄飛-고려와 거란 전쟁이 동아시아 역사에 남긴 영향


① 거란의 흥망
1019년 2월 2일, 기나긴 거란 전쟁이 끝났다.

거란 성종은 격노하여 소배압의 얼굴 가죽을 벗겨 버리겠노라고 극언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는 차마 하지 못했고, 삭탈 관직만 하였다. 
이후 소배압은 1023년 사망했다.

거란은 먼저 고려와 여진을 평정하고 중원을 정복한다는 전략을 대폭 수정하여 지금까지의 승리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서 이듬해 고려와 우호를 회복하였다.
하지만 현실에 안주하기 시작한 순간 거란은 제국을 형성해 온 목표와 에너지를 잃어버렸다.
현실적으로는 제국의 핵심 세력을 고려와의 전쟁에서 모두 상실하는 타격을 입었다.
결국 거란은 1122년 여진의 금나라에 의해 허망하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② 고려와 현종
개경으로 귀환한 강감찬과 고려군은 거국적인 환영과 환대를 받았다. 
현종은 친히 도성 근교 영파역迎波驛(우봉, 황해도 금천군)까지 나와 연회를 베풀었다. 
현종은 금으로 만든 여덟 가지 꽃을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 주고 그를 위로하고 찬양하였다. 
거란과 전쟁에서 희생한 이들을 위해 24절기의 망종 때 제사를 지냈는데, 이 날이 지금의 현충일顯忠日의 기원이 되었다.

당시 현종은 27세 청년이었다. 
사생아로 태어나 죽음의 공포를 넘나들던 젊은 황제는 비로소 자신의 위치와 인생을 되찾았다. 
이후 현종은 큰 사건이나 잘못 없이 국가를 통치하여 고려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부모를 위해 1020년 현화사를 창건하였고, 거란, 여진과의 외교 관계도 실리적으로 잘 맺어 나갔다. 
군사 제도를 정비하였고, 강감찬의 건의를 받아 개경에 외성인 나성을 축조하였다. 
완성된 성은 둘레가 23km로 18km인 한양 도성보다 컸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너무 큰 고생을 해서인지 1031년 5월에 붕어하였다. 
향년 40세, 재위 22년이었다. 
현종은 총명하고 인자한데다 배움에 능하고 서예와 문장을 좋아했으며 기억력이 비상했다고 한다.
후세의 대유학자 이제현李齊賢은 현종에 대해서 간결하게 자신의 감동을 표현하였다.

“군주가 천명만 믿고 자기 마음대로 제멋대로 법도를 무너뜨리면, 비록 천명을 얻었어도 반드시 잃을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잘 다스릴 때에도 환란을 생각하고 편안할 때에도 위기를 생각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신중하게 하늘이 주시는 복을 기다려야 한다.
현종 같은 분은 공자가 말씀하신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분’으로 아무런 흠집도 찾을 수가 없는 분이도다.”

현종의 파란만장한 삶과 대對거란 전쟁의 승리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후 고려는 120년간 태평성대를 구가하였고, 이후 모든 고려의 황제는 현종의 직계 후손이었다.

별이 된 고려 문하시중 강감찬의 진정한 면모

길고도 치열했던 거란 전쟁을 종식시킨 강감찬은 전후에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이 되었다. 현종 21년에는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에 올랐다.

덕종은 그를 개국후開國候로 올리고 기존의 공신 호에 봉상奉上이란 명칭을 더해 주었다.


강감찬이 살던 시대는 동아시아 국제정치 구도가 근본적으로 바뀌던 때였다. 

이전까지 중국을 차지하던 힘은 서북쪽에서 나왔다. 흉노족이나 돌궐족의 근거지가 그랬다. 
하지만 대진국이 멸망한 10세기 이후로는 동북쪽 즉 지금의 만주 지역으로 힘의 중심이 이동했다. 
거란의 요나라가 그 서막을 열었다. 거란이 중원을 안정적으로 정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려를 굴복시켜야 했다. 

요동의 지배자가 중원까지 지배할 경우 동아시아 균형이 깨지기 때문이다(이는 훗날 여진의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복하기 전 반드시 조선을 굴복시키려 했던 점을 비교해 보면 극명해진다). 
그래서 줄기차게 고려를 침공했지만, 귀주대첩을 계기로 고려와 거란은 관계는 평화적으로 전환되었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는 고려-거란(요)―송나라의 세력 균형이 공고해졌다. 
거란에 이어 요동의 새로운 지배자로 떠오른 여진족의 금나라도 이런 구도를 깨지는 못했다. 
이런 구도는 약 250년 뒤인 13세기 몽골제국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강감찬은 단순히 구국의 영웅을 넘어 동아시아 평화 구도를 정착시킨 성웅으로 부각될 수 있으리라!

 

고려 문하시중 상원수 강감찬 탄강지, 낙성대落星垈

대거란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둔 고려 문하시중 강감찬은 현재 서울특별시 관악구 낙성대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금주衿州로 현재는 관악구와 광명시 등으로 나뉘어 있다.
그가 태어난 날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고 해서 낙성대라고 부른다.
낙성대는 서울뿐 아니라 개성에도 있었다.
즉 강감찬 일가가 본래부터 세력을 가지고 있던 남경에 있던 곳이 서울 낙성대이다.
이후 관직에 오른 뒤 당시 수도 개경에 있던 집을 개경 사람들은 또 낙성대라고 불렀다.
궁성 남쪽 양온방으로 태평관 근처였는데, 여기서는 강감찬이 사망할 때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낙성대는 관악산의 정기를 그대로 받는 곳에 위치해 있다. 
관악산은 한남정맥이 수원 광교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져 한강 남쪽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우뚝 솟아오른 산이다. 
그 봉우리가 마치 큰 바위 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이 갓 모양을 닮아 ‘갓뫼’ 또는 관악冠岳이라 하였다. 
빼어난 수십 개의 봉우리와 화강암 바위들이 많고, 오래된 나무와 온갖 풀이 바위와 어울려 철따라 변하는 산의 모습이 마치 금강산 같다 하여 ‘소금강小金剛’이라 하였다. 

예부터 이곳에서 기우제와 산제를 지냈다. 
뾰족한 봉우리가 멀리서 보면 마치 붓을 거꾸로 세웠다 하여 문필봉文筆峰이라고 한다. 
과연 그 기운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문곡성의 정기를 받아서인지 과거에 장원급제한 강감찬이 탄생했고, 그 자락에는 서울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낙성대는 1960년대 초 보수 공사가 시작되었고,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73년부터 이듬해까지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진행되었다. 
본래 출생지에 있던 삼층 석탑도 이동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강감찬의 옛 집터를 알리기 위해서 13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높이 4.48미터의 사리탑 형식으로 남면으로 향한 탑신에 ‘강감찬낙성대’라고 새겨져 있다. 
원래 이 탑은 현재 낙성대 위치에서 북쪽으로 약 300미터 떨어진 봉천동 농가 마당에 서 있었다. 
고고학자 김희경金禧庚의 오랜 수소문과 현지 답사 끝에 발견되어 1960년 세상에 소개되었다. 
석탑이 있던 본래 자리에는 유허비를 세웠다. 
‘안국사安國祠’라는 사당을 지어 매해 10월에 제향을 모시고 있다.

한편 강감찬의 묘소는 의외에 장소에 있다. 
즉 강감찬의 29세손인 강우건姜祐根씨 형제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끝에 1963년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 구암동 국사봉 뒤쪽 기슭(현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國仕里 산 26-2)에서 묘지석을 발견함으로써 묘역으로 비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현재 보라매공원(옛 공군사관학교 자리)이 본래 묘역이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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