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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거란 전쟁 서희 외교 담판 강동6주 고려현종 양규 장군 거란족

by 충격대예언 2023. 9. 22.

고려 거란 전쟁 서희 외교 담판 강동6주 고려현종 양규 장군 거란족

[글 포스팅 순서]

1. 고려 거란 1차 전쟁: 최대 수훈 공신, 서희徐熙(942~998)
2.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3. 거란전 최고의 방어선 강동 6주
4.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5. 욱일승천하는 거란과 강조의 정변
6. 2차 고려 거란 전쟁- 통주성 회전에서 대패하는 고려
7. 고려 거란전쟁 최고의 영웅, 양규楊規: 양규의 분전
8. 고려 무인의 기개를 보여준 양규와 김숙흥 부대
9. 거란 2차전의 영향
10. 팔관회八關會

11. 신용등급 점수표 신용점수별 등급(NICE, KCB 신용점수) 등급조회
12. 신생아 특공 특례 대출 구입자금 특별공급 전세자금 저금리 대출(특공)

 

 

고려 거란 1차 전쟁: 최대 수훈 공신, 서희徐熙(942~998)

993년 고려 성종 12년 8월 거란 동경유수 소손녕이 자칭 80만 대군(실제는 6만 정도)을 이끌고 기습적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고려와 거란 사이에 벌어진 26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에 고려는 군사를 파견하였으나 봉산 지역에서 선발대가 패배하였다.

봉산에서 패배하자 성종은 당장 서경으로 되돌아가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 주제는 어떻게 싸울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항복하느냐에 있었다.
무조건 항복하자는 안과 그러기에는 염치가 없으니 절령(황해도 평산 자비령) 이북 땅을 떼어 주고 강화하자는 안이었다. 결국 땅을 주고 강화하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서경까지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그만큼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에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고려 조정 전체가 공포에 젖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거란군의 약점을 파악한 이가 바로 서희였다. 
소손녕이 항복만 권유할 뿐, 제대로 된 전투를 회피하고 있으니 실제 병력이나 전투력은 강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이에 서경을 내주면 당장 위기는 극복할 수 있어도 다음을 기약하기 어려우니 일단 한번 제대로 붙어 본 후에 항복이나 다른 대응책을 논의하자고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 거란군은 고려의 결정을 재촉하기 위한 군사행동에 나섰다.
청청강 하구에 위치한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였다.
안융진은 광종 때 쌓은 둘레 755m의 작은 토성이었다.
당시 책임자는 대진국 태자 대광현의 아들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庾方(태조 왕건 때 최고의 명장 유금필의 후예로 추정)이었다.

여기에는 대진국 유민들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진국 유민의 최고지도자 집안이 이끄는 부대였으니, 휘하에는 유능한 장수와 용사가 많았고, 충성심과 단결력 거기에 거란에 대한 투지도 높았을 것이다. 제대로 된 기록은 없지만, 안융진 전투는 고려의 승리로 돌아갔다.
수성전守成戰에서는 고려를 따를 군대가 없었다.
이후 소손녕은 더 이상 군사행동을 하지 못했다.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안융진의 낭보가 전해지자 고려는 강화 회담을 추진했고, 그 대표가 서희였다.
서희는 초반 기 싸움에서 소손녕을 압도하였다.
서희와 소손녕의 회담은 워낙 유명하지만 핵심을 간추려 보면 이렇다.

첫째 주제는 고려가 어느 나라를 계승했고, 만주의 원 소유주가 누구냐는 것이다. 
이 부분은 명분 싸움이고 약간 형식적인 부분이다. 
말 한마디로 영토를 양보하는 국가는 없기 때문이다. 
양국 간 회담의 핵심은 두 번째 주제에 있었다.

두 번째 주제는 서희의 현실적인 제안으로 빛을 발하였다. 
즉 압록강을 경계로 거란과 고려가 동시에 여진족을 공격하여 이 지역을 나누어 점령하자는 것이다. 
거란의 당면 과제는 이때까지도 여진족 평정이었다. 
이전까지 노골적으로 거란과 적대시해 온 고려가 동맹을 맺고 여진을 협공하자고 하니 소손녕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여기에 안융진 전투에서 보인 고려의 전투력이 꽤 만만치 않았음도 작용하였다. 
이 회담 결과로 고려는 강동 6주를 얻었다. 
소손녕은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끝내 몰랐던 것 같다. 
잔치를 베풀고 예물까지 남기고 갔으니 말이다.

 

 

거란전 최고의 방어선 강동 6주

서희가 얻은 강동 6주.
지금 평안북도에 있는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귀주(구성), 통주(선천), 철주(철산),곽주(곽산) 6개 군을 말한다.
청천강 이북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이 지역은 해안 쪽으로 붙은 도로라고 할지라도 산지가 많고 지형이 험해서 방어에 유리하고 대부대 이동이 쉽지 않다. 한반도 서북 지역 방어에 있어 이 지역은 최고의 방어벽이다.
옛날 고구려와 당의 전투를 보아도 당나라군이 일단 압록강 방어선을 뚫으면 평양까지는 별다른 저항 없이 내려오곤 했고, 조선 시대 방어망도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강동 6주는 지금의 평안북도 지방에 위치했다. 이곳을 회복한 뒤부터 압록강을 경계로 한 국경선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 노력한 고려의 북진 정책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음을 뜻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동 6주 - 서희의 외교로 전쟁 없이 되찾은 옛 고구려 영토 (한국사 사전 1 - 유물과 유적·법과 제도, 2015. 2. 10., 김한종, 이성호, 문여경, 송인영, 이희근, 최혜경, 박승범)

누구보다 이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잘 알았던 서희는 압록강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통로에 있는 요지와 주요 지역에 성을 쌓거나 보강하여 북방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과정은 백성들 처지에서 보면 대단히 고통스럽고 무리한 과업이었다. 
여기에 이를 추진한 서희 자신도 무리해서인지 대업을 마친 후 투병 생활 끝에 사망하였다. 
하지만 이후 전개되는 26년간 대거란 전쟁에서 이런 고생에 대한 보답을 확실히 받았다.

만약 이 방어망이 없었다면 거란군은 그대로 서경 앞에서 전쟁을 시작하였을 것이고, 몇 번이고 개경을 함락하고, 중부 이남 지역까지 진출하여, 고려는 그 명운이 다했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거란 전쟁 최고의 수훈자는 서희였다. 
그가 구축한 완고한 방어선과 험로가 없었다면 강감찬의 귀주대첩도 있을 수 없었다. 
그의 통찰력과 안목이 고려와 후손을 구한 것이다.

고려 최고 전략가 서희

서희는 942년 내의령 서필徐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염윤廉允이고 호는 복천福川이다.
대쪽 재상으로 이름난 아버지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아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자신에게 엄격하며 매사에 절도가 있었다.
960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972년 송나라 사신으로 가서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을 갖추기도 했다.
강동 6주 획득 후 평장사平章事가 되어 북방 방어선 구축에 혼신을 힘을 쏟다가 998년에 57세로 병사하였다.
시호는 장위章威로 성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덕종 2년에 태사太師에 추증되었다.

욱일승천하는 거란과 강조의 정변

1차 고려 침공에서 형식이나마 고려를 신속臣屬시킨 거란은 눈부신 성장을 했다. 
1004년 거란 성종聖宗은 대망의 중원 원정을 단행하였다. 
1005년 허베이성 복양현에 위치한 전연澶淵까지 쳐들어갔다. 
송군의 반격으로 더 이상 밀고 들어가지 못했지만, 송 진종眞宗은 거란과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다. 
중국사 최대 수치로 남는 이른바 전연의 맹澶淵之盟이다. 
송은 거란을 형님으로 모시고, 매년 막대한 세폐를 바쳐야 했다.

거란에게 전연의 맹은 중원 정벌의 제1보였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방에 대해 좀 더 확실하게 다져놓을 필요가 있었다. 
나중에 증명된 바같이 중원으로 진출한 요나라는 배후에서 일어난 여진족에게 멸망당했다. 
이참에 고려에서 일어난 강조의 정변은 성종에게는 천재일우 같은 기회였다. 
단순한 침공이 아니라 친정親征을 통한 정복이 목적이었다.

 

 

2차 고려 거란 전쟁- 통주성 회전에서 대패하는 고려

원정군은 40만. 실제 사령관은 도통都統 소배압蕭排押이었다.
그는 지략과 무용이 뛰어난 장수로 기사騎射에 능했다고 한다.
그의 최대 장점은 탁월한 결단력으로 985년 송이 침공해 왔을 때, 오히려 송군을 격파하였고, 전연의 맹을 이끈 인물이었다. 탁월한 무공으로 부마로 선택된 그는 대송 전선을 지휘하는 인물이었다.

고려도 나름 준비를 하여 30만이란 대군을 소집하였고, 당시 실권자인 강조가 지휘하였다. 
출전하기 전 고려는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팔관회를 재개하여 민심을 하나로 모았다.

1010년 11월 거란군은 압록강을 건넜다. 
그들이 처음 만난 곳은 흥화진이었다. 
이곳은 조선 시대 백마산성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병자호란 때 이곳을 지킨 임경업 장군은 수비 적정 인원을 4,235명으로 산정하였다. 
내부에는 물이 풍부하였다. 
이 성에는 서북면 도순검사都巡檢使 양규, 진사鎭使 정성鄭成, 부사副使 장작將作, 주부主簿 이수화李守和 등이 이끄는 고려군이 주둔하였다.

거란군은 7일간 성을 공격하였으나 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호락호락하지 않자 거란군은 공격군의 절반을 남기고 남진하였다. 
남진한 거란군 주력은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정예병을 통주성通州城(지금의 평안북도 선천宣川) 앞에서 대회전을 통해 살육에 가깝게 궤멸시키고 총 사령관 강조를 사로잡았다. 고려의 최대 위기였다.

하지만 고려군은 이후 장기였던 수성전을 바탕으로 통주성을 지켜 냈다. 
거란군은 전략적 요충지 서경 공격에 나섰다. 
서경은 지휘부가 도망쳐 버리는 황당한 상황에서 중간급 간부들이 나섰다. 
통군녹사統軍綠事 조원趙元, 애수진장隘守鎭將 강민첨姜民瞻 등이었다. 
이중 강민첨은 진주 출신 서생으로 무술은 할 줄 몰랐다고 한다. 

하지만 의지가 굳고 과감해서 군사 지휘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이 두 사람은 훗날 강감찬과 함께 종군하여 귀주대첩을 일구어 내는 데 크게 공헌했다. 
동요하는 민과 군을 수습하여 서경 방어에 임하였다.

고려 거란전쟁 최고의 영웅, 양규楊規: 양규의 분전

이때 가장 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서경이 거란군의 치열한 공격을 받고 있던 12월 16일, 흥화진의 포위망을 뚫고 양규와 700명의 결사대가 통주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고려군을 수습한 이들은 맹렬히 진군하여 6천 거란군을 몰살시키고 곽주郭州를 탈환하였고, 생존 주민 7천 명을 모조리 통주로 이주시켜 통주 방어를 강화하였다.
이로써 거란군은 압록강에서 대동강 사이에 있던 유일한 중간 기지를 상실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성종은 충격에 빠졌다.
성종은 과감하게 개경 직공을 선택했다.
서경과 개경 사이에 고려군은 없었다.

1011년 음력 정월 강감찬의 건의를 받아들인 현종은 개경을 탈출하였다. 
현종은 후비들과 몇몇 신하, 호위군 50여 명만을 거느린 채 개경을 빠져나왔고,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숱한 고난을 겪으며, 악전고투를 벌여 가며 도주로를 열어 나주로 향하고 있었다. 

정월 초하루 거란군 본대는 개경에 입성하였다. 
거란군은 도성의 모든 것을 불사르고 약탈하고 초토화시켰다. 
신라 때부터 내려온 귀중한 보물과 소중한 역사서, 자료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고려는 강화를 제의하였고, 성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현종을 코앞에서 놓치는 바람에 그들은 마지막 전략적 목표를 상실했고, 더이상 전쟁을 계속할 여력도 없었다. 
지나온 모든 길이 초토화되었다. 
개경에서 약탈한 물자가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보급품이었다.

거란군은 고려인 포로 수만 명을 납치해 갔다. 
그들은 곽주와 통주를 거쳐 가는 해안 길이 아니라 귀주를 통과하는 내륙 길을 택했다. 
하지만 퇴각하는 거란군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고려 무인의 매운맛을 보여주리라.

 

 

고려 무인의 기개를 보여준 양규와 김숙흥 부대

1월 17일 귀주에 주둔한 별장 김숙흥金淑興과 중랑장 보량保良은 거란군을 급습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양규도 바쁘게 움직였다.
양규와 김숙흥은 사전에 연락이 있었는지 남북에서 동시에 거란군을 강타하기 시작하였다.
양규는 의주 남쪽인 무로대無老代에서 기습 공격하여 고려 백성 3천여 명을 구해 냈다.

이후 양규는 흥화진에서 귀주로 향하는 길을 거꾸로 내려가며 전투를 전개하였고, 김숙흥은 역방향으로 올라왔다.
정황상 양규는 기병 중심의 소수 정예부대를 이끌었던 것 같다.
비록 화친을 맺고 가지만 고려의 정예군이 괴멸되어 있는 상황에서 고려군은 거란군에 특별히 가혹한 징벌을 내려야 했다. 앞으로 거란이 함부로 고려를 침공하지 못하게 하려면 가장 격렬하게 싸워 최대한 타격을 입혀야 했다.

이수梨樹에서 거란군을 공격하여 석령石嶺까지 추격하여 고려인 1천여 명을 구해 냈다.
3일 후에는 여리참餘里站에서 세 번이나 전투를 벌여 포로 1천여 명을 구출해 냈다.
양규는 거란군을 타격할 뿐 아니라 고려 백성도 최대한 구해 내려 했다.
값비싼 전리품인 포로를 거란군은 단위 부대별로 배속하여 압록강을 향해 왔을 것이다.
이런 소수 부대를 최대한 찾아내어 공격하고 빠르게 추격하여 거란군이 포로를 버리고 도주하게 하였다.

1월 28일 양규와 김숙흥 부대는 애전艾田에서 새로운 거란 부대를 상대로 한바탕 신나는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둔 직후, 성종이 이끄는 거란군 본대가 불쑥 나타나 이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산줄기가 이어져서, 사면으로 완전히 포위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기에 만약 마음만 먹었다면 탈출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양규와 김숙흥 부대원들은 구출한 포로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 주고자 했던 것 같다. 
진정한 정예부대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자부심으로 그들은 전투를 택했다. 
죽을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들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분전하였고, 전군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거란군은 줄기차게 그들을 괴롭힌 양규 부대를 제거했지만, 압록강을 눈앞에 둔 지점에서 겨울비가 내렸다. 
한겨울 북부 지방에서 내리는 비는 눈보다 더 무섭다. 
밤이 되면 모든 것이 얼어붙고, 비에 젖은 병사들은 피부까지 얼어 버린다. 
한계 상황에 다다르자 그들은 모든 장비를 버리고 강을 도하했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린 것은 흥화진에 있던 본대였다. 
양규 부대의 전멸은 고려군에게 큰 감동과 비애를 함께 안겨 주었다. 
그들은 교과서적 방법대로 반쯤 도강한 거란군을 매우 맹렬하게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거란 2차전의 영향

고려 무인의 매운맛과 자존감을 보여 준 참군인 양규는 후에 공부상서로 추증되었다.
아내 은율군부인 홍씨에게는 종신토록 매년 벼 100섬을 주게 하고 아들 양대춘은 교서랑으로 임명하였다.
양대춘은 문무를 겸전한 인재로 후에 재상을 지냈는데, 일생 동안 고려가 평화와 안정을 누려 장수로서 활약할 기회는 가지지 못했다. 김숙흥에게는 장군직을 추증하고 모친에게 매년 벼 50섬을 주게 하였다.
현종은 두 사람을 공신으로 삼았고, 건국 공신과 다름없는 공을 세웠다는 의미로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에 추봉하였다.

현종은 교서에서 양규를 이렇게 평가했다.
“병사들을 지휘하매 그 위엄은 사기를 앙등시켰고, 원수들을 추격하니 그 위력은 강토를 평안히 하였다.”
문종은 두 사람의 초상을 공신각에 봉안하게 하였다.

거란군은 전쟁 초기 놀라운 기동력과 세련된 부대 운영으로 고려 수도를 침공하고 큰 승리를 여러 차례 거두었다. 
하지만 압록강 이남에 단 한 개의 성도 자신의 영토로 만들지 못했고, 정예군 5만 정도의 희생을 치러야 했다. 
고려는 현종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는 결과를 낳았다. 
거란과 치러진 26년간의 전쟁 중 이때가 거란군 규모가 가장 크고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고려는 아슬아슬하게 이 위기를 넘겼고, 최고 용장 양규를 잃었다. 
그렇지만 이때의 전투 경험과 실전을 통해 발굴한 젊은 장수들은 고려가 대對거란 전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는 밑거름이 되게 하였다.

팔관회八關會

신라 때 시작된 팔관회에 대해서 태조 왕건은 천령天靈 및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을 섬기는 대회라고 성격을 규정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천지신명을 받들어 온 우리의 고유 신교神敎문화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고려 때 팔관회는 개경에서는 11월 15일 즉 중동仲冬에, 그리고 서경에서는 10월 15일에 베풀어졌다.
봄에 하는 연등회가 축제의 성격이 강한 반면 팔관회는 국가 의례의 의미가 강해서 신하들이 글을 올려 하례하였다.
송나라나 여진, 탐라耽羅의 사절이 축하의 선물을 바치고 무역을 크게 행하는 국제적 행사였다고 한다.
팔관회는 987년 성종 6년에 폐지되었다가 현종 원년인 이때 부활되어 고려 전 시기에 걸쳐 행해지던 중요 국가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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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포스팅 순서] 1. 재테크의 중요한 신용등급 2. 신용등급제에서 신용점수제로 변경된 신용평가 3. 신용점수 산정 기준: ① 상환이력 4. 신용점수 산정 기준: ② 부채수준 5. 신용점수 산정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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