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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민족정신의 산실, 독립운동의 메카 보천교

by 충격대예언 2017. 11. 17.

민족정신의 산실, 독립운동의 메카 보천교

 

 

 

 

2017년 11월 15일, 자칫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듯 했던 보천교가 '일제 강점기 민족운동의 산실 보천교의 재발견' 이라는 주제의 학술대회를 통해 부활의 시간을 맞이했다.

조선총독부 공식 보고 문서와 미 총영사인 밀러의 본국 보고서 상에 신도 수 추산 600만으로 알려졌던 보천교는 그 동안의 오명의 늪에서 다시 깨어나 “민족운동의 산실, 독립운동의 메카”로 우리의 역사 속에 다시 들어왔다.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이번 학술대회는 유성엽의원실(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이 주최, 상생문화연구소가 주관하고 STB상생방송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으며 평소 보천교에 관심이 많았던 일반 시민 600여 명이 현장 참석하여 대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늦게 참석한 참가자들은 빈자리가 없어 통로 옆에 종이를 깔고 앉아 발표자의 강연을 듣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보천교의 본소가 있던 정읍을 지역구로 두고 있는 유성엽 의원은 축사를 통해 “민족 정신의 산실인 보천교의 명예회복과 함께 보천교를 대표하는 상징 건물이었던 십일전의 복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며 “상생문화연구소가 주최가 되어 보천교 역사문화 재조명 토론회를 갖는 것은 보천교 문제를 재정립하기 위해서 아주 큰 계기를 만들어줄 것이라 생각한다.”라고 이번 국회 보천교 학술대회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충북대학교 안병우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1부 발표에서 첫 발표에 나선 노종상 박사 (상생문화연구소)는 월간 차경석의 연구 서설이라는 주제 발표에서 “일제 강점기 때 민족운동의 중심에 있던 보천교의 실체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보천교 재조명은 시작되어진다.”고 하고 일제에 협조했다는 당시 잘못된 정보 내용으로 메이저 언론들이 보천교를 친일단체로 몰아가게 된 배경과 내용 그리고 오늘날까지 언론과 방송에서 제대로 된 사실 검증 없이 예전과 똑같은 내용으로 보천교 관련 기사들이 반복, 재생산 되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따끔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이어진 대전대학교 윤창열 교수는 ‘동학과 보천교 증산도로 이어지는 후천개벽의 맥’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고 상생문화연구소의 유철 박사와 황경선 박사는 각각 보천교 교리 연구에서 ‘교리의 성립과 변경을 중심으로’와 ‘월곡 차경석의 중(中) 개념 이해’라는 내용으로 발표하였다.

이어진 2부 발표에는 중원대학교 김철수 박사의 ‘일제강점기 종교정책과 보천교의 항일민족운동’을 주제로 하는 발표가 있었다. 차월곡의 ‘갑종 요시찰인 편입’이라는 내용 발표에서 조선을 지배하는 식민권력으로 대변되는 조선총독부가 그들의 안정적 식민통치와 영속화에 있어 보천교가 얼마나 심각한 위협이 되었는가를 각종 공문서 자료를 통해 발표했다.
 
이어 상생문화연구소 강영한 박사의 ‘일제의 보천교 탄압과 해체’라는 주제의 발표가 있었다. 이 발표에서 일제가 보천교를 순수 종교로 보지 않고 일제의  치밀하면서도 의도된 식민지 통치전략인 유사종교라는 굴레를 쉬운 내용과 이를 통해 일제는 총독부 학무국에서 공인 종교단체를 관리하게 되고 보천교는 순수종교 단체가 아닌 민족운동. 사회운동을 통해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종의 비밀 결사체로 취급하여 사회법인 보안법, 집회취체에 관한 건의 적용을 받아 단속되었다고 발표했다.

이 다음으로 인하대학교 남창희 교수의 ‘한미동맹의 민중적 기원 : 보천교와 이승만의 대미 정체성 비교 연구’ 발표가 이어졌다. 남교수의 발표에서는 “일제 하 민중들 속에 유포되었던 속설 및 종교적 교리가 사회적 정체성의 구성 요소로서 한미관계 정체성 형성에 미친 영향에 대한 국내 연구는 전혀 시도된 바 없다.”며 이번 논문은 한때 일제 하 민족종교 세력 중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였던 보천교가 전국적 조직망과 전북지역 정읍 본소를 통해 민중들에게 전파한 독특한 국제관계 정체성과 교리에 착목한 연구임을 밝혔다.

 

남교수는 구한 말 동학을 계승한 차경석의 보천교는 해외 독립운동에 대한 재정지원 정황이 일제에 포착되면서 그 교리 자체가 항일적 요소로 점철된 것으로 파악되고 조선총독부의 특별 사찰대상이 되었다는 내용과 특히 상해 임정의 초기 대통령 재임 시 혹은 그 이후 조우했을 보천교 교리 정보가 반일친미 노선을 추구한 이승만이라는 정치행위자를 통하여 직, 간접적으로 현실 정치에 영향을 주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또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최초 한미동맹의 기원과 개념이 1882년(고종19) 국교와 통상을 목적으로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넘어 한국과 미국의 정치외교나 군사 관계에서 찾지 않고, 민중적 기원으로 대표적 항일 민족종교인 보천교에서 찾았다는 점이 청중들의 주목을 받았다.

 

3부 종합토론에서는 성균관 석전연구원의 한문수 교수와 전 부산카톨릭대 이상원 교수, 대진대학교의 이경원 교수, 동국대학교 원혜영 교수, 숭실대학교 박창호 교수, 청암대학교 성주현 교수 그리고 이화여대 김송죽 교수의 기존 발표자 논문에 대한 열정적인 토론 시간이 이어졌다.
 
끝으로 4부 특별강연 시간에는 상생문화연구소 안경전 이사장의 ‘근.현대사에서 보천교의 위상과 역할’이라는 주제의 강연이 이어졌다. 당일 일정의 마지막 시간이었지만 현장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으며 참석자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고 동학과 보천교 그리고 참동학 증산도로 이어지는 근.현대사의 핵심적인 정리 내용을 통해 학술대회 전체를 정리하는 시간이 되었다.  

행사에 참여한 참가자(정읍, 67세 김OO)는 “정읍에서 보천교 학술대회가 있을 때마다 매번 참석했다.”며 “이번 국회에서의 행사는 보천교의 문제가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고 한민족 독립운동사와 민족종교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천명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고 하였다.

또 다른 한 참가자(대구, 72세 박OO)는 “나 자신이 지금까지도 보천교를 하고 있으며 선친과 조부님께서 보천교를 하셨고 어릴 적에는 보천교에 대한 말씀을 정말 많이 들으며 자랐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보천교는 당시 우리나라의 국교와도 같았다.”고 말했다.

 

학술대회에 참여한 발표자 대부분은 “보천교가 민족의 독립과 함께 민족문화의 정신적인 주체로서 주된 활동을 하였고, 당시 1800만 정도의 인구 중에 600만이 보천교를 신앙하고 있었다는 것을 두려워한 일본에 의해 유사종교로 분류되어 총독부의 직접적인 관리 대상이 되고 결국 민족종교말살정책이라는 문화정책에 의해 그 실체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라는 점에는 뜻을 함께 하였다.

 

하지만 보천교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들이 많이 부족한 상황에서 여전히 연구해야 할 내용들이 많고 좀 더 대중적인 강연회와 학술대회의 개최 필요성이 있는 만큼 이번 국회에서의 학술대회를 계기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연구가 필요하고 국가와 지자체에서도 깊이 있는 관심과 협조의 손길이 필요함을 이구동성으로 전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조직적인 음모로 인해 그 실재가 사라져 버린 보천교와 600만 보천교 구도자들! 그들이 꿈꾸어왔던, 우리가 꿈꾸고 있는 이상적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보천교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알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역사에 진 빚을 갚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김만섭 기자  kmslov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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