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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꼬꼬무 유일한 박사 유한양행 요원A의 비밀 냅코 프로젝트 작전 한인 공작원 107회 출연진 게스트

by 충격대예언 2023. 12. 21.

꼬꼬무 유일한 박사 유한양행 요원A의 비밀 
냅코 프로젝트 작전 한인 공작원 107회 게스트 출연진

[글 포스팅 순서]

1. Only one - 요원 A의 비밀
2. 유일한 삶의 개요
3. 유년기 및 청년사업가
4. 유한양행 설립
5. 독립운동, 군인으로의 삶
6. 광복 이후의 삶
7. 유산 및 사회 환원 기부
8. 유일한 프로필
9. 꼬꼬무 시즌3, 107회 게스트 이야기 손님

10.꼬꼬무 강남 S고 잔혹사 상문고 사학비리 사건 학생 투쟁 교사 양심선언 106회 게스트 출연진
11. 히로시마 원자폭탄 꼬꼬무 원폭 히로시마 카운트 다운 피해자 김형률 105회 출연진 게스트
12. 여우고개 포천 자매 살인사건 꼬꼬무 일산 여중생 자매 백골 시신 범인 근황 104회 게스트 출연진
13. 꼬꼬무 911 테러 범인 사망자 한국인 생존자 소방관 비행기 이유 103회 게스트 출연진 재방송
14. 독도의용수비대 꼬꼬무 독도 1954 독도대첩 홍순칠 대장 최후의 의병 기념관 102회 게스트

 

Only one - 요원 A의 비밀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가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를 조명했습니다.
'꼬꼬무'는 'Only one - 요원 A의 비밀' 편으로, 미국 첩보국 최초의 한인 공작원들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때는 1945년 8월 미국의 산타 카탈리나섬. 
인적이 드물어 조용하기만 하던 그곳에서 얼마 전부터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섬 곳곳에서 짐승들의 사체가 무더기로 발견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민들은 입을 모아 얼마 전 입도한 외지인들이 범인이라 말했습니다. 
그들이 온 뒤로 섬에서 총소리, 폭탄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는 것입니다.
외지인들은 날마다 사격 연습을 하고, 잠수정을 타고 나갔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오곤 했습니다.

주민들은 그들을 미군으로 추측했지만, 군인이라기엔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정식 부대라면 있어야 할 부대 마크, 계급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생김새를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 낯선 외모의 조선인들이었습니다.
도대체 그들의 정체는 무엇이고 왜 그들은 머나먼 미국에서 수상한 훈련을 받고 있었던 것일까요?

당시는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때로, 일본의 선제공격을 받은 미국은 그에 반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름하여 '냅코 프로젝트(NAPKO PROJECT)'였다. 일본이 점령한 조선 땅에 최정예 특수요원을 잠입시켜 일본군을 무력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요원으로 애국심이 투철한 조선인을 선발하기로 했습니다. 
좋은 직장에 명문대를 졸업한 기술자부터, 일본군에 강제 징용된 포로까지 미국 첩보국 최초의 한인 공작원들이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그들은 무선통신, 사격, 생존 훈련 등 첩보활동에 필요한 모든 것을 훈련받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요원 한 명은 에이전트 A였습니다. 
요원 A는 50세로, 냅코 프로젝트에 참여함은 물론 그의 사업체를 작전에 이용하는 데 기꺼이 동의했습니다. 
고령임에도 어려운 훈련을 모두 소화해 내고, 조선에서 유명한 사업체를 운영하던 요원 A. 
바로 유한양행의 창업주 '유일한 박사'였습니다. 
의약품 회사를 이끌던 그가 어떻게 냅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것일까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박사는 유한양행의 창업자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종로의 작은 사무실에서부터 시작해 굴지의 제약사가 되기까지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간 주역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알려진 그는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그의 첫 사업은 미국에서의 숙주나물 장사였습니다.
유일한은 이름도 없던 작은 회사를 6개월 만에 수백억 매출 기업으로 키웠습니다.

이후 유일한은 고국으로 건너와 의약품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전염병이 들끓던 조국에 제대로 된 의약품을 보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잘나가던 숙주나물 회사까지 모두 정리하고 조국을 위해 돌아온 천재 사업가.
하지만 조선 사람들에게 그의 약은 그저 '검은 머리 이방인이 파는 이름 모를 약'일 뿐이었습니다.
시장에는 수상할 정도로 효과가 좋은 일본 약들이 넘쳐나고, 유일한의 약 창고에는 나날이 먼지만 쌓여가던 어느 날, 유일한은 또 한 번 운명을 바꿀 선택을 합니다.
과연 조국을 위해 모든 걸 버리고 온 그의 진심은 통할 수 있을 것인지, 유일한의 허를 찌르는 기지가 '꼬꼬무'에서 공개되었습니다.

유일한 삶의 개요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시기의 기업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회사업가. 유한양행의 창업주입니다.
197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 197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국에서 모범적인 기업인,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1895년 1월 15일 평안도 평양부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시기 유년기에 미국 유학을 떠나 자립하면서 미시간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식품사업가가 되었으며, 귀국한 후 제약업을 선택하고 1926년 서울에서 유한양행을 설립하여 직접 차를 몰고 홍보와 보급에 나서는 등 식민지 조선의 전국 각처에 의약품과 생활용품 등을 공급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시행하고 후생복지시설을 세우는 등 회사의 임직원에게도 복지를 챙겨주었습니다.
또한 조선의 독립운동에도 힘써 맹호군 창설을 주도하고 냅코 작전에 직접 참여하는 등 재미한인사회에서 여러 활동을 했습니다. 일찍이 식민지 시기에 만주, 중국, 대만, 일본 등 해외 시장까지 진출했으며 광복 후에도 계속 기업을 운영하면서 윤리 경영과 모범 납세, 국익 우선, 정경유착 사절을 원칙으로 삼았고, 전쟁을 거친 기업을 재건하는 수고를 겪기도 했습니다.

이후 이승만, 박정희 시기 정치자금 미납에 대한 보복조치로 세무 조사를 받았으나 탈세 내역이 발견되지 않아서 박정희로부터는 되려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산업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유한공업고등학교와 유한대학교를 설립하거나 보건장학회, 연세대학교를 비롯한 각종 공익재단에 여러 차례 기부를 하는 등 사회에도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그리고 말년에 회사 경영권을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일임했으며, 1971년 세상을 떠나면서 전 재산을 사회와 교육에 기증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제 및 독재정권과의 결탁, 정경유착, 가족 경영, 노동자 탄압, 탈세, 부정 축재 등의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대다수의 대한민국 기업인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위인(偉人)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인물입니다.

미시간 대학교 경영학 학사,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경영학 석사, 스탠포드 로스쿨 법학 박사라는 화려한 학력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말년에 연세대학교에서도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가장 자주 불리는 호칭이 '유일한 박사'입니다.

유년기 및 청년사업가

1895년 1월 15일 평안도 평양부에서 재봉틀 장사로 자수성가한 상인 유기연(柳基淵, 1861~1934. 8. 28.)과 충주 김씨(忠州 金氏) 김확실(金確實, 1873. 5. 22.~1958. 10. 4.) 사이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이름은 유일형(柳一馨)이었습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자 당시 평양부에서 재봉틀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던 아버지 유기연은, 미국 감리회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말을 듣고, 1904년 당시 9살에 불과한 장남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당시 유일한의 아버지는 미국의 수도가 어디인지 몰라, 그냥 그 나라 땅의 중앙이겠거니 하면서 유일한을 미국 대륙의 정중앙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큰 돈이 들 수도 있는 유학을 보낸 이유는, 자신의 자식들이 식견을 넓혀서 민족을 위해 일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유기연은 자식들을 러시아, 일본, 중국에 유학보내서 공부하게 하였습니다. 
배에서 아버지가 환전해 준 미국 돈(달러)을 잃어버린 유일한은 인솔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용만의 배려로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독신자 자매인 태프트 자매에게 입양되었다.

태프트 자매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성경을 읽고 기도한 뒤, 밭에서 하루종일 일하는 성실하고 검소한 삶을 통해 기독교의 노동윤리를 실천했으며, 어린 유일한에게 영어를 가르쳐서 미국 사회에 적응하도록 배려했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일한은 인종차별로 서러움을 겪기도 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강한 성격으로 극복했습니다.

1909년 그는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만든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으며, 방학 때는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살았습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는 재미교포들의 항일집회에 참여하여 연설을 하기도 했는데, 항일경력 때문에 고향에 사업차 잠시 입국했을 때 일본제국 경찰에게 연행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이름을 바꾼 계기도 비범한데, 중학교 시절 미국에서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보급소 직원이 이름 일형이 어려워 제멋대로 '일한'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당황했지만 한국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한(韓)'자를 떠올리고 아예 유일한으로 개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에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승낙을 구하였고, 이 요청을 받은 아버지는 일형의 동생들의 돌림자까지 '한' 자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 이후에 태어난 동생들은 처음부터 돌림자가 '한'이 되었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한 유일한은 재미(在美) 중국인 및 중국계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숙주나물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새내기 사업가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유일한은 시내 대로변의 유명한 가게의 쇼윈도에 트럭을 들이받아 일부러 교통사고를 냈습니다. 트럭에 실린 숙주나물이 담긴 병들이 도로변에 죄다 쏟아져 깨졌는데, 이 사건이 숙주나물을 기자들이 소개하도록 하여 미국인, 특히 숙주나물을 조리하여 먹는 중국계 미국인들의 관심을 모아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았던 돈으로 숙주나물 병조림의 단점을 개선한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주)를 설립했습니다.

이후 1925년에 중국계 미국인 소아과 전문의 호미리와 결혼해 1녀 1남 자녀를 얻었습니다. 
미국 철도 회사 고위 임원으로서 중국인 사회에서도 이름 높았던 거부의 딸 호미리는 코넬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우수 재원이었습니다.

한편 독립운동을 하며 자산을 모두 쓴 서재필에게 유일한이 찾아와 함께 New Il-han & Co. 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조선에 있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장 애비슨의 귀국 권유로 연희전문학교 상과(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자리에 유일한을, 유일한의 처 호미리에게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과장 자리를 제의해 귀국하기로 했습니다.
서재필은 유일한이 귀국할 때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CI를 제작하여 선물할 정도로 유일한을 아꼈습니다.

이렇게 청년 사업가로서 바쁜 중에도 1922년에 남가주 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대학원에서 수학하였고, 1929년에 스탠포드 로스쿨(Stanford Law School)에서 국제법을 공부했습니다.

유한양행 설립

1926년에 귀국하여 경성부 종로2정목(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에 유한양행을 설립했습니다.

회사 이름인 유한양행의 양행이 올바른 행동이란 뜻이다'라는 설이 있는데, 바른 행동은 양행(량행, 良行)이고, 유한양행의 양행은 양행(洋行)으로 '외국과의 무역 거래를 중심으로하는 기업'이라는 뜻의 한자어로, 같은 단어가 아니다.

그가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라초이 회사 경영 때 필요한 녹두를 구입하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북간도에 거주하던 부모와 동생들을 만난 일 때문이었습니다.

부모는 장남 유일한이 보내준 돈으로 땅을 사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당시 대다수의 조선 사람들은 빈곤과 기아로 인한 질병에 허덕이며 민중작가 최서해의 소설인 《탈출기》에서 묘사된 것처럼 굶주림으로 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유일한의 아버지는 민족의 미래를 위해 미국으로 아들을 유학보냈으나 식품회사 경영을 하던 아들에게 실망해 "내가 겨우 숙주나물 장사나 하라고 너를 미국에 보낸 줄 아느냐? 큰 공부를 했으면 큰일을 하거라."라고 훈계를 했다고 합니다.

몸소 민족의 현실을 체험한 그는 고민 끝에 1927년 조국에서의 삶을 위해 돌아왔습니다. 
유일한은 당시 한국인들의 건강 유지에 필요한 결핵약, 이전에는 미국에서 약품을 수입하여 팔던 유한양행이 1933년 처음 개발하여 판매한 제품인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혈청 등을 판매했으며 중국계 미국인이었던 처 호미리 여사도 중일전쟁으로 조선의 의약품 부족이 극에 달하자, 소아과 병원을 개업하여 저렴한 가격에 소아들을 치료했습니다.

그의 경영 철학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1928년 7월 9일에 유한양행 최초의 신문광고를 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제약회사들은 서로 비방하거나 효과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만병통치약' 등으로 얼버무렸습니다. 
약장수가 신문에 진출한 격입니다. 그러나 유일한은 제품의 이름과 용도를 밝히는 것은 물론, 의학박사와 약제사의 이름을 실어 제품을 증명했습니다.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경영할 때 항상 윤리 경영을 실천하고 법인세를 꼬박꼬박 납부했으며, 훗날 유한양행은 박정희 정부 시절에 모범납세법인으로 선정되고 유일한 본인도 동탑산업훈장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꾸준한 납세를 고집했던 이유는 라초이사를 경영하던 시절, 자신과 거래하던 녹두 회사 사장이 탈세를 통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모습에 실망해서 그랬던 것이라고 합니다.
1939년 유한양행은 대한민국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했습니다.

독립운동, 군인으로의 삶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는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1909년 박용만이 설립한 한인 소년병 학교에 입학하고, 1919년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서 독립운동결의문 기초작성위원으로 선임되어 대회장에서 직접 낭독했습니다.

1930년대 후반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1941년 해외한족대회에 참석하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42년 CIA의 전신인 OSS(미육군 전략처)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약하고 재미한인으로 이루어진 한인국방경비대(맹호군) 창설을 주도했으며, 1945년 버지니아에서 12개국 대표 160명이 모인 IPR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전후 일본 처리 문제의 논의에 가담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워싱턴 OSS의 냅코 작전에 1조 조장으로 참가했습니다.
냅코작전에 참여한 공작원들은 OSS의 지휘 아래 강도높은 군사, 첩보훈련을 받게 되는데 이 당시 유일한의 나이 50살이었습니다. 학생 시절 때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었으니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던듯 합니다.

당시 OSS 훈련책임자가 유일한을 평가한 자료가 남아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그는 매우 투철한 애국자이며, 회사 간부들을 보다 투철한 한인 애국자들로 채웠다. 그래서 유사시 이들을 지하조직의 핵심으로 운영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회사의 존망을 무릅쓰고 그의 사업 조직망을 기꺼이 이용하는 데 동의했다." 즉, 자신의 회사 전체를 독립운동에 쏟아부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국내침투 직전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는 바람에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고, 유일한은 살아 생전 이 작전에 참여한 사실을 일절 함구하여 동생 유특한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문에 냅코 작전의 전모와 유일한 등 공작원 명단은 유일한 사후 20년이 지나서야 밝혀졌습니다.

광복 이후의 삶

광복 후 1946년 7월, 미국에서 돌아와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여 피난을 가서 비어있던 유한양행은 물론 온 국토가 쑥밭이 되자, 이를 재건할 인력을 키우기 위해 1952년에는 고려공과기술학교를, 19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철저히 법인세를 냈던 유한양행은 1968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모범납세 법인으로 선정되어 동탑 산업 훈장을 받았습니다. 이 때의 에피소드가 실로 전설적입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부정부패 단속을 위한 시범케이스로 어느 기업을 때려잡을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정권 생각만 그럴 뿐 현실은 그것을 이용한 기업인들과 정치인끼리 정치자금을 대가로 서로 봐주는 상황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현대그룹. 정주영은 철저히 비위를 맞춰주면서 정부의 대규모 토건 정책을 수주받아 대기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일한은 성격상 당연히 정치자금을 주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이런 행동은 결국 좋은 먹잇감이 될 수밖엔 없었고 유한양행은 세무조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세청으로부터 강도높은 세무조사를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처음엔 예고하고, 다음엔 불시에 조사하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유한양행을 조사했으나, 당시 세무조사원이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한톨 안 나는 사람이 진짜 있구나"라고 말할 정도로, 탈세 내역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 술 더 떠 굳이 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세금까지 자진해서 내는 이 회사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김만태 당시 유한양행 세무감찰팀장이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증언한 바에 의하면 20일 정도 조사를 하니까, 무슨 한국에 이런 업체가 있나 싶은 생각이 개인적으로 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여튼 정치자금을 거절한 일종의 괘씸죄로 시범케이스로 걸려 국세청으로부터 수개월 간 세무조사를 받은 셈이니 이건 박정희 정권이 명백히 잘못한 것입니다.

유한양행이 박정희 정권에서 요구한 정치자금을 거절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미리 탈세와 탈루 등 조세포탈 혐의를 낙인찍어 수개월간의 세무조사를 벌였음에도 단 하나의 혐의점도 찾지 못하자 정치자금을 거절한 것을 명분으로 세금을 성실히 납부한 기업을 누명을 씌웠다는 비판이 일어나게 되었고, 게다가 제조한 약품들도 관련 당국에 갖고 가서 이상이 있는지 검사를 해 보니, 약들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조 과정에서 재료의 손실이 생길 것을 대비해 원 재료를 손실분만큼 더 넣어 정량을 딱 맞춰 제조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상을 줘야 마땅하다고 해서 1968년 유한양행에 동탑 산업 훈장을 수여했다고 합니다. 계몽사 위인전(어린이 그림 전기) 유일한 편에는 박정희 정부 당시 조사원이 엄격하고 공정한 세무조사를 했다고 하여 해외 여행 포상을 받았다는 얘기가 쓰여 있으며,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웅진씽크빅)에서도 비슷한 언급(다만 여기서는 1계급 특진)이 된 걸 보면 사실로 추정됩니다.
유일한의 남동생인 유특한이 따로 차린 유유제약도 형처럼 모범 경영을 실천했다고 합니다.

1969년 노환으로 경영에서 은퇴하며 전문 경영인(CEO)에게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계했습니다. 
당시 조권순 전무에게 경영권을 승계했는데, 이 전문경영인 제도가 실시된 건 대한민국에서 유한양행이 사실상 최초라고 합니다.

1971년 3월 11일 오전 11시 40분경 세브란스병원에서 손녀 유일링의 학비 1만 달러를 제외한 자신의 모든 재산을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하고 묘소 주위의 5천 평은 학생들이 놀도록 유한동산으로 가꾸며 아들은 자립하라는 유언장을 남기고 노환으로 사망했고 유한공고에 안장(묘지 위치)되었습니다.

죽기 전에도 유한재단을 통해 유한공고와 유한대학교를 설립했으며, 연세대학교 의료원 세브란스병원에도 주식 12,000주를 기부했습니다. 기부조건으로 주식을 의학과 연구 교육을 위한 활동에만 쓰라고 못박았습니다. 
이는 세브란스병원이 현재의 대형병원으로 발전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유일한과 호미리 부부는 유한양행을 세우기 전에 세브란스의전과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자인 올리버 R. 에이비슨 박사에게 각각 연전 상과 교수와 세브란스 소아과 과장을 제의받았던 인연이 있었습니다.

경영권 인계에도 일화가 있는데, 1969년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던 아들 유일선이 한국으로 와 유한양행 부사장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일한은 처음부터 아들이 회사에 취임하는 것을 탐탁잖게 여겼는데, 임원진들이 유일한에게 록펠러, 포드 등 해외기업의 2세 경영권 인계사례를 그에게 여러차례 보여준 끝에 결국 유일선의 부사장 취임을 승낙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변호사 출신의 유일선을 처음부터 좋지 않게 본 유일한은 결국 의견 차이가 벌어졌습니다.
유일한의 회고에 의하면, 유일선은 부사장 취임 후 오직 기업의 성장에만 초점을 맞췄다고 합니다.
기업인으로써 전혀 틀린 자세는 아니지만, 평생 공공의 이익, 국민건강, 나라를 위해 때로는 모험을, 때로는 손해를 감수하면서 살아온 유일한의 입장에서 아들 유일선의 이러한 의견은 그의 신념과 충돌이 빈번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때문에 회사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해고했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을 비롯한 일가 친척들을 모조리 유한양행에서 해고하고 주식도 처분해서 유한양행 경영에 전혀 간섭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유한양행의 전문경영인 제도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전문경영인 임명도 관례에 따라 모두 내부승진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대 유한양행의 CEO들은 모두 경력이 유한양행 평사원부터 시작했습니다.
 2020년 CEO인 이정희 대표도 1978년에 평사원으로 입사한 인물입니다.
정관에 의해서도 6년 이상은 있을 수 없는데다 유한양행 사원으로서 시작이 자리에 오른 뒤 6년 내에는 퇴사해야하기 때문에 퇴사하여 이후 2021년에는 조욱제 대표가 취임하였습니다.
현재 조욱제 대표도 1987년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지금의 총괄관리 본부장, 부사장을 거쳐 지금의 대표로 취임하였습니다.

유산 및 사회 환원 기부

중고등학교 일부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로, 유일한이 손녀 유일링의 등록금 1만 달러만 제외하고 자기 재산을 기부해서 나온 액수는 토탈 407억 원입니다. 대기업 회장 재산이 뭐가 이리 적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1971년 시점에서 407억 원입니다.

2021년 기준 7,900억원에 달하는 거금입니다.
시간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407억 원이면 돈 걱정이 없는 수준이고 8천억이면 평생 놀고먹으며 지내도 다 쓰지 못할 정도로 많은 돈입니다. 로또 1등 당첨금이 약 30억원 대인데, 사실 이것만으로도 집을 사는데 쓰거나 큰 지출이 있지 않은 이상 어지간하면 돈이 부족할 일은 없습니다.
당장 100억만 있어도 1년에 1억씩 쓰면 100년이 걸리는데 8000억원이라는 돈은 말 그대로 몇 대가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먹어도 남는 돈입니다. 이를 다 사회에 헌납한 셈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는 사실이지만, 더 감동적인 건 유일링의 아버지인 유일선은 이 재산마저 거부하려고 했습니다. 
유일선이 "아버님께서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고 유언하셨는데 만약 제가 손녀의 학자금 명목이라는 이유로 1만 달러를 받으면 세상이 저를 욕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받은 딸의 등록금도 그나마 반만 쓰고 남은 돈 전부를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또한 딸 유재라에게는 유한공고 내에 있는 묘지 주변의 땅을 상속하긴 했는데, 이는 땅을 '유한동산', 즉 공원으로 만들어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유재라 본인도 1991년 미국에서 죽기 전에 모든 재산을 유한재단 측에 기부했습니다.
유재라의 묘소도 이곳에 안치되었습니다.

손녀 일링 유는 미국 예일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유한양행에서 무급으로 영어회화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꼬꼬무 시즌3, 107회 게스트 이야기 손님

이번 '꼬꼬무'의 이야기 친구 게스트로는 가수 최예나, 배우 이병준, 래퍼 겸 음악프로듀서 라이머가 함께 합니다.

장도연의 이야기 친구 최예나는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꼬꼬무가 1순위'라며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녹화 내내 통통 튀는 리액션으로 모두를 웃음 짓게 한 최예나는 녹화가 끝나고 어린 MZ세대 친구들에게도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소감을 전했습니다.

이병준은 장현성의 이야기 친구로 '꼬꼬무'에 첫 걸음을 했습니다. 
이탈리아 예술 고등학교 교장(?) 성대모사를 하며 등장한 그는 '꼬꼬무' 최고령 게스트 대열에 합류해 기막힌 연륜으로 정답 행진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조차 녹화 중 공개된 유일한의 천재적인 아이디어에 "나랑은 수준 차이가 크게 난다"라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장성규의 이야기 친구 라이머는 '브랜뉴뮤직'을 설립해 대표로 있는 만큼 누구보다 오늘의 이야기에 집중했고, 유일한의 행보에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며 존경을 표했습니다. 그는 이야기가 끝나고 자신도 '유일한 정신'을 이어 사회적인 활동들을 해나가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유능한 사업가이자, 존경받는 독립운동가, 교육자였던 유일한 박사의 이야기가 담길 '꼬꼬무'의'Only one - 요원 A의 비밀' 편에서 함께한 게스트 이야기 손님의 활약을 기대해봅니다.

유일한 프로필

생년월일(출생일): 1895년 1월 15일(음력 1894년 12월 13일)
고향(출생지): 평안도 평양시
사망: 1971년 3월 11일(향년 76세)
묘소(묘지): 서울특별시 구로구 경인로8 유한공업고등학교
본관: 진주 류씨
학력: 미시간 대학교 경영학 학사,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대학원 MBA
          스탠퍼드 대학교 로스쿨(J.D.)
종교: 기독교 장로회
아내(배우자, 와이프, 부인): 호미리(중국계 미국인 소아과 의사)
자녀: 딸 유재라, 아들 유일선
손녀: 유일링
남동생: 유중한, 유명한, 유동한, 유특한
여동생: 유선한, 유신한, 유순한
서훈: 동탑산업훈장 수훈,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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