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대한항공 KAL 902편 격추사건 보잉 707 격추 생존자 근황
111회 출연진 게스트
[글 포스팅 순서]
1. 격추의 시대–1978 어느 생존자의 기억
2. 대한항공 KAL 902편 격추사건 개요
3. 보잉 707 비상 착륙 이후
4. 대한항공 902편 사고원인
5. 사고후 기장 부기장 항법사 근황
6. 꼬꼬무 시즌3, 111회 게스트 이야기 손님
7.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 꼬꼬무 범인 유골발견 미제사건 버니어 1991년 110회 출연진 게스트
8. 권대희 사건 꼬꼬무 수술실의 유령 성형외과 의사 검사 성재호 CCTV법 109회 출연진 게스트
9. 캄보디아 훈 할머니 꼬꼬무 오지 할머니의 비밀 고향 가족 108회 출연진 게스트 시즌3
10. 유일한 박사 냅코 프로젝트 꼬꼬무 요원A 가족 유일선 유일링 유재라 재방송
11. 꼬꼬무 강남 S고 잔혹사 상문고 사학비리 사건 학생 투쟁 교사 양심선언 106회 게스트 출연진
12.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칼기 폭파 공작 1987 KAL 858기 실종사건 김현희 현재 근황 꼬꼬무 100회
격추의 시대–1978 어느 생존자의 기억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가 1978년에 발생한 비행기 격추사건을 조명했습니다.
'꼬꼬무'는 '격추의 시대-1978 어느 생존자의 기억' 편으로, KAL 902편 생존자의 기억을 전했습니다.
때는 1978년 4월 20일, 프랑스 파리에 사는 박춘길 씨 가족은 서울행 KAL 902편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장거리 비행이 낯선지 칭얼대는 두 살 난 아들 동욱이를 달래려 엄마는 창문 밖을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구름을 구경하고 있던 엄마와 동욱의 시야에 다른 비행기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신기해하는 승객들과 달리 이 광경을 본 조종실은 그야말로 초비상이었습니다.
땅에도 길이 있듯이 하늘에도 정해진 항로가 있어 비행 중 다른 비행기를 볼 확률은 극히 희박합니다.
급히 교신 시도를 했지만 묵묵부답이었습니다.
혹시 모를 충돌에 대비해 고도를 낮췄는데, 그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기체가 중심을 잃고 사방으로 흔들렸습니다.
갑자기 흔들리는 비행기에 물건들은 사방으로 쏟아지고, 승객들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넘어졌습니다.
기내는 비명과 울음이 가득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조종실에 있던 김창규 기장은 먼저 비행기 상태를 살피는데, 왼쪽 날개는 잘려나간 데다 설상가상으로 엔진까지 하나 꺼졌습니다. 더 이상의 비행은 무리라고 생각한 그는 비상착륙 하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베테랑 승무원들조차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상황이었습니다.
몇 번의 착륙 시도도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급기야 연료마저 바닥을 보이고 이제 정말 마지막 시도일지도 모를 착륙을 시도했습니다. 승객 109명의 목숨이 모두 김창규 기장의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때, 간절하게 목적지를 찾던 김창규 기장의 눈에 한 장소가 들어왔습니다.
이 장소로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 모아 서서히 기체를 착륙시켰고, 기적적으로 성공했습니다.
902편이 착륙한 곳은, 눈이 잔뜩 쌓인 새하얀 미지의 공간이었습니다.
내려서 착륙한 기체를 직접 본 승객들과 승무원은 아직도 그 모습을 잊지 못한다고 회상했습니다.
왼쪽 날개는 2미터가량 잘려 나간 데에다, 200개가 넘는 구멍까지.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초조하게 구조를 기다리던 그때, 멀리서 사람이 다가온다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에 승객들과 승무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었지만, 곧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총을 든 군인들이 경계 태세를 갖춘 채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던 것입니다.
모두의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게 한 그 군인들의 정체는 바로 구 소련군인(러시아),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사라진 KAL 902편의 위치, 그리고 이 이야기를 직접 '꼬꼬무'에 전달해 준 제보자의 생생한 증언이 공개되었습니다.
대한항공 KAL 902편 격추사건 개요
1978년 4월 20일 파리를 출발하여 알래스카 앵커리지를 경유한 뒤 서울로 도착할 예정이었던 대한항공 902편 보잉 707 여객기가 항법 상의 실수로 앵커리지 대신 소련 영공을 침범해 카렐리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상공에서 격추당한 뒤 불시착한 사건입니다.
이 사고로 탑승 인원 109명 중 2명이 사망하였고, 나머지 승객들은 조사를 마친 후 별 일 없이 핀란드 헬싱키를 통해 귀국했습니다. 소련은 10만 달러의 배상금을 청구하였으나, 한국 정부는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파리 오를리 공항을 이륙해 앵커리지와 도쿄를 거쳐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902편은 북극 상공에서 갑자기 방향을 크게 꺾어 소련의 무르만스크 방향으로 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종사와 항법사는 지금의 항로가 맞는지를 두고 다투었으나 기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고, 시속 900킬로미터로 비행하는 보잉 707 기체는 순식간에 소련 영공으로 진입하고 말았습니다.
902편이 진입한 지역은 방공기지가 밀집된 소련 해군 북방함대의 모항인 무르만스크 상공이었고 소련 방공군은 20시 54분에 레이더로 영공 400㎞ 밖에서 자신들을 향해 전속력으로 날아오는 대형 항공기를 발견했습니다.
소련 방공군은 이 미확인 기체에 25분간 무전으로 접촉을 시도했으나 별다른 반응 없이 그대로 영공을 넘어오자 21시 11분에 Su-15 요격기를 긴급 발진시켰습니다. 이후 미사일에 피격되기까지의 과정은 902편 탑승자들의 증언과 소련의 공식 발표가 다릅니다.
소련의 발표에 따르면 제431방공군의 아프리칸다(Африканда, Afrikanda) 군공항에서 긴급 발진한 알렉산드르 보소프(Александр Босов) 대위의 Su-15TM이 영공 침범 5분만에 대한항공 902편 조종석에 가까이 접근하여 기체를 좌우로 롤링하는 등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902편은 이를 무시하고 핀란드 쪽으로 급격히 기수를 선회해 달아나려 했습니다.
이를 보고받은 21 방공군의 지휘관 블라디미르 차르코프는 곧바로 10 방공군의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예프 장군에게 허가를 받은 뒤 격추를 명령했고 보소프는 민항기임을 주장하며 몇분간 격추를 거부하다가 결국 21시 42분에 명령에 따라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대한항공 902편 기장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보소프의 Su-15TM를 발견하고 기체 외부의 항법등을 모두 켜고 속도를 줄여서 지시를 따르겠다는 신호를 보냈고 국제 공용 비상주파수 121.5MHz로 계속 접촉을 시도했으나 Su-15TM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핀란드 로바니에미 항공 관제소에 모두 기록됨.
2000년에 공개된 교신 기록에 따르면 미사일에 맞기 전까지 김창규 기장은 대한항공 902편이라는 것을 세번 분명히 전달하였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Su-15TM에는 UHF(300~3,000MHz) 대역 무전기만 설치되어 있어서 해당 주파수를 수신하지 못했을 것이고 보소프는 영어를 못했기에 대응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승객의 입장에서는 일본인 승객 시오자키 세이코가 Su-15TM의 출현부터 비상착륙까지 1시간 42분 동안 발생한 모든 일을 시간대별로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소련 전투기가 나타나 902편의 오른쪽에 바짝 붙어 항공기를 훑어보듯이 기수부터 후미까지 오가며 비행하기 시작했고 바로 항공기 외부의 등이 전부 켜졌습니다.
그 근처에 앉았던 프랑스 승객 쟝-샤를 포리는 승객들이 소련 전투기의 출현을 무서워하지 않았고 다들 밝은 달빛 아래에서 소련 전투기를 구경하고 사진 찍고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보소프도 여객기 창문의 커튼들이 열리고 불이 켜진 객실 안의 사람들이 자신을 구경하며 손을 흔들고 사진을 찍었다고 증언했습니다.
하지만 Su-15TM이 곧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폭발이 있었고 시오자키 세이코의 네 좌석 뒤 왼쪽 동체에 멜론 크기의 구멍이 생겼습니다. 장-샤를 포리는 폭발이 있은 후 앞좌석에 걸어둔 자신의 재킷에 동전 크기의 구멍이 세 개 생겼다고 말했습니다.
보소프가 발사한 R-60 빔펠 열추적 미사일은 첫 발은 빗나갔으나 두번째 발이 왼쪽 날개 끝을 맞춰 4m 가량이 떨어져나가고 파편에 의해 동체에 구멍이 다수 생겼습니다. 이 때 미사일 파편에 머리를 맞은 한국인 승객은 현장에서 사망했고( 방태환, 36세 대우건설 리비아 건설본부 차장, 좌석번호 24E) 어깨와 오른팔에 중상을 입은 일본인 승객 스가노 요시타카(31)(좌석번호 23A)는 불시착 후 소련군의 구조 중에 과다출혈로 사망했습니다.
부상이 심각해 피격 직후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영국인 승객 윌리엄 하워드는 러시아인들의 의료지원이 느리고 부적절해 그가 죽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외에 그의 형 스가노 야스오(33)와 처남 후쿠이 타카마사(25)등 13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피격 직후 동체에 생긴 구멍으로 인해 객실 감압 경보가 뜨자 기장은 즉시 기수를 내리고 분당 5,500피트(1,676.4m)로 급강하하여 고도를 35,000피트(약 10,000m)에서 3,500피트(약 1,000m)로 낮췄습니다.
이때 소련군의 방공 레이더에서도 사라지고 구름을 뚫고 강하하면서 보소프의 시야에서도 사라졌습니다.
그는 대한항공 902편이 추락한 것으로 생각했으나 지상에 아무런 화재나 충돌 흔적이 없어 어떻게 됐는지 확인하지 못했고, 5분이 넘는 급강하 동안 승객들도 추락 중이고 곧 죽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시오자키 세이코의 노트에는 "우리는 이제 다 죽을 것 같다. 우리는 추락하고 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교대를 위해 제265방공군의 포두제미예 기지에서 유리 노보질로프(Юрий Новожилов), 아나톨리 케레포프(Анатолий Керефов), 세르게이 슬로보드치코프(Сергей Слободчиков), 알렉산드르 겐베르그(Александр Генберг)가 탑승한 네 대의 Su-15TM이 발진했습니다. 이 때 미사일에 떨어져 나간 KAL 902의 왼쪽 날개 파편이 레이더에 잡히자 차르코프는 순항미사일이나 버려진 스파이 장비로 판단했고 세르게이 슬로보드치코프가 R-98MR 레이더 추적 미사일을 발사해 공중에서 파괴했습니다.
22시 45분 아나톨리 케레포프 대위의 Su-15TM이 2600피트(약 800미터) 고도에서 저속으로 날고 있는 대한항공 902편을 발견했고 12분 후에는 알렉산드르 겐베르그 소령의 Su-15TM도 따라붙었습니다.
이들은 대한항공 902편을 아프리칸다 군공항으로 유도하던 중 얼어붙은 코르피야르비 호수를 발견하고 강제 착륙시켰습니다. 케레포프의 증언에 따르면 미사일 피격 후 약 1시간 20분간 유도해 가다가 얼어붙은 호수 등 착륙할만한 지형을 발견하고 대한항공 902편의 날개를 자신이 탑승한 Su-15TM의 날개로 계속 눌러서 착륙하라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합니다.
김창규 기장과 이근식 항법사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큰 도로에 착륙하려 했으나 기차가 나타나 급히 기수를 올렸고, 눈쌓인 긴 얼음호수를 발견하고 착륙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창규 기장은 모든 악조건을 뚫고 비상착륙에 성공했습니다.
승객을 가득 태워 무거운 대형 여객기로 미사일에 맞아 한쪽 날개 끝이 잘린 상태에서 마찰력이 거의 없는 얼음호수 위에, 그것도 무려 야간에 비상착륙을 시도하여 부상자 하나 없이 성공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인데, 이는 순전히 김창규 기장의 뛰어난 조종 실력 덕분이었습니다. 역대 전세계 민항기 추락 사고 중에서 인명 피해 없이 불시착에 성공한 극히 드문 케이스입니다. 소련군도 민항기 조종사의 환상적인 기동에 대해 특기할 만한 사례로 분석했다고 합니다.
보잉 707 비상 착륙 이후
소련 측은 김창규 기장이 대한항공 입사 전에 공군 파일럿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고 합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당시 소련 측이었던 국가의 매체 기사나 당시 인물들의 인터뷰에는 그가 베트남전에도 참전해 소련 전투기들과 싸웠다는 표현이 등장하는 등, 군 조종사 경력을 가지고 김창규 기장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지만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 공군은 수송기인 C-54D로 후방 수송을 담당한 은마부대만 참전했으며, 김창규 기장이 은마부대에서 복무했는지 여부 역시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또한 공군 파일럿이 전역 후 민항기 조종사로 취업하는 것은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너무나 일반적인 일이므로 그가 공군 파일럿이었다는 점을 문제삼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고정 표적이나 다름없는 대형 민항기에 발사된 두 발의 고기동 미사일이 아예 빗나가거나 날개 끝에만 맞아 계속 비행이 가능했던 점 등 운이 굉장히 좋았을 뿐더러, 소련 방공군 측에서 지대공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아 대부분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비상착륙 후 승객들은 불빛 하나 없는 얼어붙은 호수 위에 착륙한 불 꺼진 비행기 안에서 2시간 동안 떨며 앉아 있었으며, 이후 군인들이 나타나자 미군인가 하다가 소련군인 것을 알고는 공포에 빠졌다고 합니다.
다행히 소련군은 승객들을 최선을 다해 잘 대해주었는데, 하마터면 민항기를 격추시켜 민간인들을 대량으로 죽이는 대형사고를 낼 뻔했으니 일을 더 키우지 않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밤중에 군인들이 동원되어 장교 클럽의 내부 집기류가 치워지고 충분한 양의 침대와 담요가 설치됐으며 지역 주민들은 조리 도구와 관을 만들었습니다. 승객의 대부분인 한국인과 일본인들을 위해 쌀을 구해다 밥을 지어주었고 유럽인 승객들에겐 햄버거 패티와 곡물, 삶은 감자가 제공되었습니다.
이렇게 첫날 밤이 지나고 둘째 날에는 승무원과 승객들이 KGB에게 조사를 받았습니다.
조종사를 제외한 탑승자들에 대한 조사는 통상적인 수준 이었습니다.
김창규 기장의 심문에 배석했던 제5방공군의 블라디미르 폴리오친 대령은 김창규 기장은 자신은 소련 국경을 넘는 줄 몰랐으며 전투기가 접근해 동체의 붉은 별을 보여줄 때 알았다고 대답했으나 KGB는 받아들이지 않고 심문과 진술서 작성을 5회 이상 반복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민항기에 첩보 설비를 설치해 승객의 목숨을 담보로 정보 공작을 벌이려 했으며 소련 방공군이 빠른 긴급 발진과 미사일 공격을 통해 정보 공작을 성공적으로 차단했다는 결론의 보고서가 작성되었습니다.
폴리오친 대령에 따르면 KGB의 항공기 수색에서 대한항공 902편 조종석 아래에 숨겨진 강력한 무전 설비가 발견됐고 권총이 포함된 파일럿 생존 키트가 발견됐다고 합니다. 그는 착륙 후 소련군이 접근할 때까지의 빈 시간에 정찰 장비는 숲에 버리고 정찰한 정보를 모두 무선으로 송신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당시 Su-15TM을 긴급 발진시켰던 265항공연대에서 참모장이었던 발레리 볼리닉은 자살 시도가 아닌 이상 그런 식의 정찰을 할 이유가 없고 민간인 승객까지 가득 태우고 그럴 이유는 더더욱 없다고 이를 부정하고 정찰 장비 같은 것은 발견된 적이 없다고 증언했습니다.
인근 57항공연대의 지휘관이었던 비탈리 다이모프도 "발견됐다는 무전 장비는 아마 백업용 통신 장비였을 것이다"고 말하고 승객을 태우고 그런 일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자북극 근처에서 측정 장치가 오류를 일으켜 오토파일럿이 오작동했다 생각한다고 증언했습니다. 종합해 볼 때 KGB의 보고서는 민항기에 미사일을 발사한 일에 대한 명분을 만들고 체제 경쟁에서 이용하기 위해 적당히 만들어낸 주장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승객들은 스파이 혐의가 없다고 판단되어 모두 돌려보내집니다.
당시 대한민국과 소련 사이에는 국교가 수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이 중재했고, 승객들과 객실 승무원들은 팬암의 보잉 727에 타고 우선 중립국인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로 이동한 후, 대한항공이 헬싱키로 보낸 또 다른 707에 타고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습니다.
김창규 기장과 이근식 항법사는 추가 조사를 받은 후 역시 핀란드를 통해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이때 헬싱키로 투입된 비행기는 9년 후, 폭파 사건의 희생양이 됩니다.
하지만 707 기체는 반환받지 못했으며, 러시아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소련은 이 기체를 철저히 조사하여 자신들의 여객기를 개량하는 데 활용했다고 합니다. 이 러시아 언론은 음모론을 제기하며 김창규 기장이 사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2008년 기사이고 김창규 기장의 근황은 2009년 3월 4일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한항공 902편 사고원인
대한항공 902편을 얼음호수 위에 완벽하게 착륙시켜 소련군에게도 깊은 인상을 준 김창규 기장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대한항공 조종사들은 조종실력 면에서 세계 최고수준으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대한항공의 무리한 운영은 많은 부분 조종사들의 실력으로 커버되고 있었으나 그들은 대한항공으로부터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또한 기수 순서대로 전직 공군 조종사들로만 구성된 철저한 위계질서 때문에 조종사들은 자기 의견을 피력할 수가 없었습니다. 국영 항공사로 최초 출범한 대한민국의 플래그 캐리어인 만큼 교통부는 관리감독 책임을 떠나 회사를 보호하려고만 했고, 정부에서 회사를 통제할 전문성도 없었습니다. 사회전반에 수직적인 군사문화가 만연했던데다 규정위반이나 편법은 신경쓰지 않고 경제성장만이 지상과제였던 당시 사회 분위기도 한몫했습니다.
902편의 항법사였던 이근식씨는 사건 31년 후인 2009년, 902편은 "자이로콤파스가 고장난 상태였으며 비행시간을 지키기 위해 안전을 무시한 비행을 했다", "안전을 위해 회항을 했어야 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문예춘추 1983년 11월호에는 일본인 승객 '오오야'씨가 비상착륙 후 김창규 기장에게 물었을때 "항법사쪽의 계기는 당초부터 고장이 나 있었다"는 대답을 들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당시 조종사들의 수많은 증언들까지 고려하면 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사고의 원인이 된 902편의 급격한 항로변경은 결항이나 지연을 피하기 위해 항법장치가 고장난 항공기를 수리하지 않고 무리하게 운항했기 때문으로, 당시 대한항공의 "규정이고 뭐고 까라면 까라"는 식의 막무가내 운영이 이 사고의 주 원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침반은 당시 902편이 지나던 북극항로가 자북극 근처를 통과하므로 편각이 너무 커져 올바른 방향을 알기 어렵습니다. 902편의 비행 궤적이 자북극 근처에서 크게 틀어지는 것을 보면, 고장난 자이로컴퍼스 대신 나침반을 이용해 방향을 잡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탑승자 269명 전원이 사망했던 1983년 대한항공 007편의 경우, 기장이 멀쩡한 INS를 전혀 쓰지 않은채 나침반으로 계기비행을 하다 소련 영공을 깊숙이 침범해 격추되었습니다. INS 좌표 입력에는 20분 정도가 걸리는데, 이륙 직전 INS 좌표 입력이 잘못된 것이 발견되자 이륙 지연을 피하기 위해 재입력 대신 계기비행을 결정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륙이 지연될 경우 사유서를 쓰고 징계를 받는데다, 조종실력이 뛰어난 기장이 그동안 수없이 비행하며 익숙하던 항로라서 계기비행에 자신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이후에도 대한항공은 1989년 803편 추락사고(악천후 착륙강행 실패로 79명 사망), 1991년 376편 동체착륙사고(시끄럽다고 경고장치를 꺼놓고 비행하다 랜딩기어 전개를 누락), 1994년 2033편 오버런사고(악천후 착륙강행 중 부기장의 복행요청 무시 및 기체 동시조작, A300 전소), 1997년 801편 추락사고(악천후 착륙강행 중 기장의 착각, 228명 사망, 747 대파), 1998년 8702편 오버런사고(기장의 역추진장치 작동 실수, 747 전손), 1999년 8509편 추락 사고(기장석 계기고장 후 부기장의 회항요구 및 조종권 전달요구 무시) 등 대형사고가 계속되며 위험한 항공사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이후 대한항공은 위와 같은 기형적 사내문화를 고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2000년부터는 사망사고가 발생한 적이 없으며 현재는 가장 안전한 항공사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사고후 기장 부기장 항법사 근황
한국 정부의 사고조사결과는 지금도 비공개 상태이나 고 방태환씨의 유족이 대한항공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과정에서 그 요지가 공개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근식 항법사의 과실이라는 것입니다.
서울지법과 고등법원 재판부는 정부의 사고조사결과를 근거로 대한항공 과실로 방태환씨가 사망한 것을 인정하였으나 소 제기 시점이 바르샤바 항공운송협약상 항공사고 손해배상 청구기한인 2년이 지났으므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고 방태환씨의 유족에 따르면 대한항공측이 배상금을 주고 합의할 것처럼 시간을 계속 끌다가 2년이 지나자 갑자기 소송하라며 협의를 중단해버렸으며, 유족들은 대한민국 민법상 제소기한인 3년이 되기 전에 서둘러 소를 제기하였으나 바르샤바 협약상 기한이 2년이라는 것은 중에 재판 중에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즉, 항공기의 자이로컴퍼스가 고장나서 방향을 잃은 것이 근본 원인이나, 이를 수시로 체크하여 바로잡았어야 할 항법사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이러한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2009년 2월에 사건 발생 30년이 경과해 비밀이 해제된 당시의 정부 비밀 외교문서에도 항법사의 과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이 공개되자 2009년 당시 78세였던 이근식씨 본인은 "사실과 다르며 상당 부분 날조됐다"면서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논란 속에서 김창규 기장의 조종사 자격은 취소되었고 책임을 느낀 김 기장은 대한항공에 사표를 제출했지만, 이는 수리되지 않고 대신 지상 근무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9개월 만인 다음해 1월에 다시 조종사 자격에 응시, 합격했으며 곧바로 동형기인 707기 기장으로 복직했습니다.
5월에는 대한항공 최고 영예인 창공금상을 받고 7월에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에서 AVG-CNAC 항공인상을 수여받는 등 책임을 덮어씌우기는커녕 뛰어난 조종 실력으로 비상착륙에 성공시켜 대참사를 막은 공로를 인정받아 그 공로에 맞는 명예로운 대우를 받았습니다.
부기장과 기관사, 항법사 역시 김창규 기장과 함께 사표를 제출했으나 항법사 이근식만 사표가 수리되어 떠났고, 부기장과 기관사는 조사가 끝난 뒤 전원 복권, 복직되었습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영향으로 2022년 3월부터 한국 국적기들이 러시아 영공진입을 중단하면서, 2023년 현재의 대한항공 901/902편은 중국-카자흐스탄-튀르키예 방면으로 우회 운항 중입니다. 남측으로 우회하는 경로 대신 제트기류를 타고 동쪽으로 우회하는 길이 더 효율이 좋은 일본 출발 서유럽행 항공편들은 일본 출발편에 한해 냉전 당시처럼 앵커리지 방면으로 우회운항하나 중간 경유는 하지 않습니다.
꼬꼬무 시즌3, 111회 게스트 이야기 손님
이번 '장트리오' 장도연X장성규X장현성의 이야기를 들을 이야기 친구 게스트로는 프로야구 LG트윈스의 주장 오지환, 배우 곽시양, 모델 송해나가 출연해 탑승객 109명의 생존기에 몰입했습니다.
LG트윈스에 29년 만의 우승을 안겨준 캡틴 오지환은 장도연의 이야기 친구로 '꼬꼬무'를 찾았습니다.
등장부터 녹화장을 들썩이게 한 오지환은 MVP 트로피와 우승 소감을 공개하며 힘차게 오프닝을 열었습니다.
평소 "'꼬꼬무'에 나오고 싶었다", "너무 좋아하는 프로다" 라고 말한 오지환은 장도연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비행기 탑승 경험, 또 아이가 있는 아빠의 마음으로 놀라운 공감력을 보여줬습니다.
곽시양은 장현성의 이야기 친구로 '꼬꼬무'를 방문했습니다.
곧 공개될 SBS 새 금토드라마 '재벌X형사'에서 아버지와 아들로 등장하는 두 사람은 '꼬꼬무' 녹화장에서의 재회에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야기가 시작되자, 곽시양은 비주얼만큼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호탕한 리액션과 정답 행진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송해나는 장성규의 이야기 친구로 '꼬꼬무'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비행기 실종 이유에 대한 다양한 영화적 추측을 하던 송해나는, 막상 이어지는 착륙 이후의 이야기에 놀라며 "거의 두 번의 죽음을 맞이한 기분일 것 같다"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꼬꼬무'의 '격추의 시대–1978 어느 생존자의 기억' 편에서의 이야기 손님 게스트의 활약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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