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태종 이세민 이십사장 이정, 연개소문 제자? 정관의치 실상
24장將 중 병법의 대가인 이정李靖은 연개소문의 제자였다
당태종을 도와 당나라를 반석을 올린 24명의 명장이 있습니다. 이들은 후대에 24장將(이십사장)이라고 불렸는데, 그중에 위국공衛國公 이정李靖이 있습니다. 그는 당나라 북쪽의 돌궐 설연타와 위구르 그리고 츨륵 등 튀르크 계통의 유목 민족을 정벌한 당대 제일의 명장입니다. 그가 저술한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은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하나이며, 조선 시대 무과의 이론 과목 중 하나일 정도로 최고의 병법서입니다.
그런데 단재 신채호 선생은 현재 전해지지 않은 『해상잡록海上雜錄』을 인용해 당나라 제일의 명장 이정이 연개소문의 제자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즉 당태종이 출병하기 전에 이정을 행군대총관으로 삼으려고 하자, 이정은 “제가 일찍이 태원太原에 있을 때 연개소문을 만나 병법을 배워 그 뒤로 폐하를 도와 천하를 평정함이 다 그 병법의 힘을 입었음인즉, 오늘날 신이 어찌 감히 전날에 사사했던 개소문을 치리까?”라고 사양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정은 천하의 모든 군대가 동원된 고구려 침공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당태종은 “개소문의 병법이 과연 옛사람의 누구와 견주겠느냐.”라고 묻자, 이정은 “옛사람은 알 수 없으나 오늘날 폐하의 모든 장수 가운데에는 적수가 없고, 비록 천위天威로 임臨하실지라도(당태종이 친정하더라도) 가히 승리하기 어려울까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태종이 “중국의 거대함과 인민의 수로나 병력의 강함으로 볼 때 어찌 일개 개소문을 두려워하랴.”하고 불쾌해하자, 다시 이정은 “연개소문이 비록 1인이나 재주와 지략이 만인에 뛰어난즉 어찌 두렵지 아니하리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더불어 단재는 본래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에는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운 이야기와 연개소문을 숭앙崇仰하는 어구가 많으므로, 당과 송 시대를 지나면서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사사해 명장이 됨이 실로 큰 수치라고 하여 병법서를 모두 없애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존하는 병법서는 후인의 위작으로 원본이 아니라고 하는 내용을 『조선상고사』를 쓰기 20년 전 서울 명동에서 만난 노상운盧象雲이라는 노인의 구전口傳을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연개소문의 호적수, 당태종 이세민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수나라 개황開皇 18년인 598년 12월에 당국공 이연李淵과 두태후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세민이란 이름은 제세안민濟世安民,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세민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생각함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어떤 상황이 닥치면 과단성 있게 처리하고 작은 일에 구애를 받지 않아서 사람들이 그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수양제가 고구려 침공에서 실패해 전국이 혼란해지자, 이세민은 남몰래 천하를 편안하게 할 큰 뜻을 품고 선비들과 교유하며, 널리 호걸들과도 친분을 맺었습니다.
617년 6월 14일 우유부단한 부친 이연을 설득하여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이세민은 군기를 엄격하게 하여 약탈을 금지하였습니다. 이연은 근거지인 태원太原을 떠나 관중 지방으로 들어가기로 했는데, 수양제가 정예군을 이끌고 남쪽 양도에 있었기 때문에 관중 지역의 중심지인 장안은 비어 있었으며, 제국의 수도인 장안을 점령하는 일은 명분상으로도 우위에 서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연은 막내 이원길을 태원에 남기고 장남 이건성과 이세민을 앞세워 장안으로 진격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수많은 유민, 반란 세력들이 합류하여 주력군을 이끈 이세민의 군사는 3만에서 무려 13만으로 증가하였고, 이연의 전군은 20만이 넘는 대군으로 성장하였습니다. 617년 11월 장안을 함락한 이연은 13세의 양유를 허수아비 황제로 내세우며 스스로 당왕唐王을 자처했습니다. 장안성 점령으로 승기를 잡은 당은 천하 제패의 길에 나서게 됩니다.
당이 천하의 대세를 장악하자, 이세민의 공적은 하늘을 찌르게 되었습니다. 이에 형인 태자 이건성과 동생인 이원길의 불안감이 높아졌습니다. 양측이 대립하던 중 626년 이세민은 태극궁 북문인 현무문에서 형과 아우를 제거하는 이른바 ‘현무문玄武門의 변’을 일으켰고, 이후 당고조의 양위를 받고 30세의 나이에 대당 제국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연
호는 정관貞觀이었습니다. 그는 현무문의 변에서 자신의 반대편에 섰던 위징을 비롯한 여러 인재를 포용함으로써 개국 초기의 혼란을 잠재웠습니다.
이후 당태종은 돌궐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런 당의 위세에 압도된 유목민 집단들은 당태종을 유목 세계의 패자라는 뜻을 지닌 천가한天可汗(텡그리 카간Tengri qaghan)으로 추대하였습니다. 국왕 앞에 하늘을 뜻하는 ‘텡그리’ 자가 붙은 이 호칭은 최고의 존칭입니다. 돌궐 패망과 함께 그간 돌궐의 세력에 예속되어 있던 거란, 해, 습飁 등 동부 내몽골의 홍안령 기슭 일대에 거주하던 유목 민족들이 당나라에 투항하여, 당태종은 중원(천자)과 초원(가칸) 양쪽 모두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동으로 서해에 이르고, 서로는 언기焉耆, 북으로는 고비사막, 남으로는 임읍林邑에 이르는 지역이 모두 당의 주현으로 편제되었습니다. 이제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 중 대적할 수 있는 나라는 오직 고구려만 남게 되었고, 이에 고구려를 침공하였지만, 그 결과는 처참하게 패배한 것입니다.
정관지치의 실상
그의 정치는 이상적으로 평가받아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의 치세는 수 제국의 업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수양제 대업 2년인 606년 전국 호구는 890만여 호였습니다.
정관 시대보다 무려 세 배 가까이 되었습니다. 당현종唐玄宗 시기인 천보 13년(754년)의 호구가 907만 호였다고 하니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는 데 150년의 시간이 걸렸던 셈입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알려 줍니다. 수나라 때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수당 교체의 혼란기와 무리한 고구려 원정 등으로 인해 무수한 백성들이 희생되었다는 점입니다.
객관적으로 정관지치를 지나면서야 비로소 수 제국의 전성기 수준을 회복할 수 있는 물꼬가 열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 제국인 당 제국의 초석을 닦은 태종 이세민
그렇지만 탁월한 정치 수완과 그가 이룬 업적을 경시할 수는 없습니다. 돌궐을 복속시키면서 농경과 유목 지역을 통괄하는 최고 통치자가 되어, 세계 제국의 위치를 공고히 하게 되었습니다. 경제 제도인 균전제均田制, 조용조租庸調 제도로 세금을 걷으면서 국가 재정은 풍족해졌고 민생은 안정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뛰어난 인재를 곁에 두고 수시로 조언을 들으며 이를 정책에 반영하여 군신이 함께 지혜를 모아 치국평천하에 임하는 자세를 중시하는, 이른바 천하위공을 펼쳤습니다. 당태종 때는 예악과 인의, 충서, 중용 등 유가가 강조하는 덕치가 꽃을 피웠습니다. 그의 치세에는 유교와 불교 도교 등 삼교가 정립하는 형세로 사상적인 자유와 그 내용이 풍성해졌습니다.
중앙 통치제도인 3성 6부제와 인재 등용 방식인 과거제는 동아시아의 기본적인 통치 체제로 자리 잡게 하여, 모든 제도가 제 기능을 발휘하는 통치의 전범을 세웠습니다. 당태종 시기에 당나라는 국제적인 개방성과 실질성과 실용성을 숭상하는 특징과 함께 여러 민족의 문화를 하나로 녹여 새롭게 변용한 문화를 만들어 내고, 낙천적이며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는 대범한 자세를 견지하였습니다. 이런 그였기에 고구려 불세출의 영웅 연개소문의 호적수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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