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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 1차,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조선의 3대 국왕으로

by 충격대예언 2022. 3. 28.

태종 이방원 1차,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조선의 3대 국왕으로

태조 이성계


태조는 둘째 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를 총애
했다. 강씨는 젊고 총명했으며 친정이 권문세가였기에 힘이 되어 주었다. 태조의 집권 때에도 직접 참여하여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여기에 정도전 등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급기야 신덕왕후는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기를 간절히 소망하였고 태조 역시 방석을 총애하여, 첫째 부인 한씨 소생의 장성한 왕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막내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방석의 세자 책봉에 가장 불만이 많았던 이는 정안군 이방원李芳遠이었다.
그는 고려조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학문적 소양도 있었고, 부친 이성계의 자랑이기도 했다.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해 조선 개국에 큰 공을 세웠고, 왕대비 안씨를 강압하여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즉위시킨 주인공이었다. 그렇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왕후와 정도전에 의해 군권을 상실하고 개국공신 책록에서도 제외당했다. 태조는 이런 아들의 불만을 간과하였다.


1398년 무인년 8월 25일 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 소생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불의에 습격하고 세자 방석과 동복형 방번을 죽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1차 왕자의 난, 무인정사戊寅靖社였다.

삼봉 정도전

조선 건국 후 지위가 급격히 올라가고 실권을 쥔 이가 정도전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한나라 장량에 비유하면서 한고조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했다면서 이성계보다 자신이 더 개국의 주역임을 내세우곤 했다. 그는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주장하였고, 재상을 최고 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 지배체제를 이상적인 정치제도로 보았으나 이런 정치관은 왕조사회에서는 대단히 위협적인 내용이었다. 태조는 정도전을 너무 신뢰하였다.

일련의 골육상잔 과정을 지켜본 태조는 크게 상심하고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芳果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어 일어난 2차 왕자의 난을 겪고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함경도로 들어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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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원나라에서 태어나 철들 무렵 고려인이 되었고, 전쟁 영웅으로 당시 상대할 수 있는 모든 세력과 싸워서 이겼고, 나라를 창업하였다. 하지만 자랑스러운 아들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나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어버린 채 말년에는 쉬이 죽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쓸쓸히 한탄하는 모습도 보였다.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 사진: KBS

1401년 한성부로 돌아와 태상왕으로 7년을 더 살며 먼저 간 이들을 위한 염불삼매로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태종 8년인 1408년 음력 5월 24일에 지병이던 중풍이 악화되어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아들 태종을 두 번 쳐다본 뒤 74세로 승하하였다. 승하하기 전 태조는 자신을 고향인 함흥에 묻어 달라고 했지만, 태종은 차마 왕조의 개창자이기도 한 아버지의 무덤을 함흥에 묻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양 근교 현 구리시 건원릉建元陵에 모시고, 함흥의 흙과 억새풀을 가져다 무덤을 덮었다. 현재도 건원릉에는 다른 능과 달리 억새가 무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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