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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가계도 조선 건국, 위화도 회군의 배경과 고려의 멸망

by 충격대예언 2022. 3. 29.

태조 이성계 가계도 조선 건국, 위화도 회군의 배경과 고려의 멸망

이성계 (초명: 이성계李成桂, 즉위 후 이단李旦 1335년~1408년)

1335년 - 고려 동북면 화령군 영흥 흑석리에서 탄생, 본관은 전주全州
1356년 21세 -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탈환에 협조 후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
1380년 46세 - 지리산 근처 황산荒山에서 왜구들을 소탕함(황산대첩)
1388년 54세 - 위화도에서 회군함
1392년 58세 - 조선 건국, 태조太祖로 즉위함
1394년 60세 - 수도를 한양으로 옮김
1400년 67세 - 왕자의 난으로 양위하고 함흥으로 거처를 옮김(함흥차사)
1402년 69세 - 한양으로 돌아와 태상왕으로 불교에 심취
1408년 74세 -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승하, 능은 건원릉

 

 

황혼의 제국, 몽골과 고려

칭기즈칸 이후 영원할 것만 같던 원元 제국(몽골)은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특유의 야성野性을 잃어버렸고, 황실은 라마교에 빠져 흥청거렸으며, 대신들은 권력 투쟁에 혈안이 되었다. 그 사이 중원대륙 남방에서 시작된 반란은 천하에 혼란을 가져왔고, 원 제국에 의해 유지된 동아시아의 절대적인 힘은 진공 상태로 말 그대로 천하대란, 혼돈의 시절이었다. 기나긴 대몽항쟁과 두 차례의 일본 원정을 겪은 고려는 글자 그대로 껍데기만 남았다. 천자국에서 제후국으로 강등되었고, 원의 내정 간섭을 받았다. 관리들은 원나라에 충성하기에 바빴고, 아예 고려를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성으로 편입하자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입성책동立省策動, 고려 후기 간신인 오잠吳潛과 류청신柳淸臣 등으로 이에 대해서는 환단고기를 참조할 것). 부원附元 권문세족은 고려의 정치, 경제력을 손아귀에 쥐고 민생을 살피지 않아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기 시작했다.

개혁의 실패

이런 상황에서 고려의 새 임금이 된 이가 공민왕恭愍王이었다. 원 조정은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紅巾賊을 감당할 수 없자 고려에 원군을 청하였는데, 이때 최영 등 장수들이 원나라에 파견되었다. 반란을 진압한 후 귀환한 이들의 보고를 통해 정세를 파악한 공민왕은 반원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부원 세력인 기황후奇皇后의 일족으로 권문세족의 수장이 되어 권세를 누리던 기철과 그 일당을 숙청하고, 내정간섭 기구인 정동행성이문소를 혁파하고, 1356년 동북면 쌍성총관부를 탈환하였다.

이때 동북면 지역 유력자 중 1명으로 다루가치(達魯花赤) 관직에 있던 이자춘李子春이 아들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고려에 귀순하여, 고려군 공격에 내응하여 고토 회복의 공을 세웠다. 이성계가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자주권을 되찾고 내정을 개혁해 백성을 편안케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는 공민왕에게 기득권 세력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고, 홍건적들이 원의 토벌에 밀려 고려에 침입하여 한때 개경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1350년 경인년 봄, 고려 해안에 모습을 드러낸 왜구들은 끊임없이 고려를 침범하였다(이들의 침입은 조선 초기까지 대략 50년간 지속되어 약 4백 건 가까이 발생하였다. 1350년에만 5차례 침략이 있었다). 북로남왜北虜南倭! 국토는 전란에 휩싸이고 백성들은 거듭 피난 보따리를 싸야 했다. 공민왕의 개혁은 그 기회를 잃었다. 왕은 불운하였고, 그의 불운은 고려의 불행이 되었던 반면, 한 사내에게는 기회가 되어 주었다.

 

 

조선을 개창하다

고려의 바다를 지켜라

1380년 우왕 6년 고려 남부 하삼도下三道(양광도-지금의 경기도와 충청, 강원 영서지역 일부-와 경상, 전라의 3도) 천 리 산야는 피로 물들었다. 산발적으로 해안 지대를 공격하던 왜적은 7월에 들어서자 오백여 척의 병선으로 진포鎭浦(충남 서천, 장항, 또는 전북 군산 인근 바다)에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당시 기록을 보면 “시체가 산과 들에 덮였고 배로 옮기다 땅에 떨어진 쌀만 한 자나 되었다”고 한다.

고려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최영을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를 겸하게 하여 대비하게 하였다. 최영은 최무선을 통해 화약으로 화기를 만들게 하였다. 예성강가에서 출진한 고려 수군 100척은 나세羅世, 최무선崔茂宣 등을 지휘관으로 하여 왜적 격멸을 위해 진포 앞바다에 나타났다. 전함 수나 등선登船 단병접전短兵接戰에 능한 왜적에 전투력은 열세였으나 고려는 비장의 무기 화포가 있었다. 이 전투에는 세계 최초로 화약 무기가 사용되었다.

진포에 정박해 두었던 왜선을 화포와 화통으로 모조리 불태워 버렸으나, 왜적은 공주, 옥주沃州(지금의 충북 옥천)까지 달아났고, 이산현과 영동현을 비롯해 내륙 깊숙이 돌며 더욱 잔혹하게 약탈을 일삼았다. 왜적은 고려군을 격파하면서 북쪽으로 진격해 개경을 공격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에 고려조정은 이성계를 양광, 전라, 경상도 순찰사를 삼아서 왜적 토벌을 명하였다.

 

 

황산에서 왜적을 크게 이기다

삼남 지방을 피로 물들인 왜구

퇴로가 막힌 왜적은 사근내역沙斤乃驛(지금의 함양)에서 고려군을 격파, 박수경, 배언 두 원수가 전사하였다. 왜적은 서진하여 전라도 운봉을 불 지른 뒤 인월引月 근처 황산荒山에 주둔하였다. 열매 맺는 가을, 풍요로운 수확의 계절에 남도 천리의 고려 강산은 적에게 짓밟혀 황량한 폐허가 되었다. 백성들의 목숨은 폭풍 앞의 낙엽같이 무너졌다. 기록을 보면, 왜적은 두세 살 되는 여자아이를 사로잡아 머리를 깎고 배를 가른 후 깨끗이 씻어서 쌀, 술과 함께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삼도의 연해 지방이 텅 비게 되었다고 참상을 전하고 있다.

황산대첩과 이성계

이미 황산 줄기가 동으로 뻗어 인풍과 인월의 두 벌판을 갈라놓은 돌출부에 집결한 왜적은 요해처를 점령하여 이성계의 선봉대를 패퇴시켰다. 이후 여러 번 어려움을 겪은 뒤에야, 이성계, 이지란이 이끄는 주력은 적진을 향해 진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성계는 왼쪽 다리에 활을 맞기도 하고 뒤에서 달려드는 적장의 창에 크게 다칠 뻔했으나 이지란이 먼저 활을 쏴 겨우 무사할 수 있었다. 격렬한 전투였다. 

이때 왜적은 아지발도(우리말 ‘아기’와 용맹한 자라는 몽골어 바토르의 한자 음차 표기인 ‘발도’를 합쳐 어린 영웅이란 뜻)라는 백마 탄 소년 장수가 나타나 이성계 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이때 신궁 이성계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이성계가 아지발도의 투구 꼭지를 맞혀 떨어뜨린 틈에 이지란이 쏘아 죽였다. 장수를 잃은 왜적은 갈팡질팡하다 대패하였다. 이때 죽임을 당하는 왜적의 곡성이 마치 1만 마리의 소의 울음소리 같았고, 냇물이 모두 그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 일주일 동안 물을 먹을 수 없었으며, 포획한 말이 1,600여 필이고 병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했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고 한다. 이 전투로 이성계의 무명武名은 전국적으로 떨치게 된다. 이전까지 이성계는 북방으로 쳐들어오는 홍건적, 나하추 등을 격퇴하는 동북면의 장수였을 뿐, 고려 남부 백성들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이 승첩 이후 이성계는 전국구 무장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요동 정벌과 위화도 회군의 배경, 고려의 멸망

고려 말 조선 초 요동 정벌 상황

고려 말 조선 초에는 요동遼東 지역 정벌이 여러 번 있었다. 첫 번째는 공민왕 시절로 1356년부터 1370년 경술까지 지속되었다. 그중 1369년 공민왕 18년 이성계를 동북면원수로 삼아 동녕부(遼陽)를 들이치게 했다. 고려군은 파죽지세로 요동을 지나 올랄산성兀剌山城(우라산성于羅山城 또는 오녀산성五女山城)에서 원 잔당들을 공격하였다. 이성계는 화살 70여 발을 연거푸 쏘아 날려 적병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고, 요동성을 공략 함락시켰다. 하지만 왜구들이 고려 땅 곳곳을 유린하였고, 보급 문제로 실질적 지배가 힘들자 철군하고 말았다. 두 번째는 그 유명한 위화도威化島 회군으로 좌절된 1388년의 요동 정벌이고 세 번째는 1397년 조선 태조 6년 정도전에 의해 진행된 요동 정벌 시도였다. 이는 태종 이방원의 1차 왕자의 난에 의해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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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 정벌의 진실

1388년 우왕 14년은 역사적인 해였다. 황산대첩 이후 이성계는 중앙 정계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 시기 정몽주와 긴밀했던 조반趙胖이 당시 집권자 중 한 사람인 염흥방廉興邦과 갈등을 빚은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는 당시 집권자들을 제거하고, 최영과 함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였다(정월). 이 과정에서 집권자들에게 배척을 당해 두문불출하던 조준 등 신진 사대부들이 이성계 세력에 합류하였다. 이성계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면서 정치적으로 부상하자, 그와 여러 면에서 견해를 달리하던 최영은 불안을 느꼈다.

그런 상황에서 원의 잔존 세력을 평정하고 고려와 국경을 접하게 된 명明나라는 원에 속했던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회수하여 철령위鐵嶺衛(현재 만주 심양 부근에 있는 본계시本溪市 부근)를 설치하여 다스리겠다는 뜻을 고려에 통보하였다(2월). 고려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대책을 두고 논란을 벌였다. 즉 요동 공격을 하자는 주장과 외교를 통해 해결하자는 책략이 맞섰다.

명의 철령위 설치는 원에 속했던 군민은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이어받아 관할해야 마땅하다는 원칙을 표방한 것이다. 
따라서 고려 땅에 철령위를 설치하면 유지하기 어렵다는 현지의 보고가 있자, 곧바로 요양 북쪽에 철령위를 설치하였다. 즉 고려 영토가 명에 의해 회수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런데도 우왕과 최영은 요동 공격군을 편성하여 출병을 강행하였다(4월). 무리하고 졸속적으로 서두르는 측면이 있었다.

총병력은 3만 8천여 명으로 좌, 우군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조민수의 좌군은 서경과 양광도, 경상도, 전라도, 계림, 안동 등 넓은 지역에서 병력을 차출한 반면 이성계의 우군은 안주도, 동북면, 강원도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그러한 만큼 이성계는 많은 휘하 친병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요동 공격은 이성계 휘하의 강력한 사병을 합법적으로 제거하려는 최영의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는 명과의 관계 회복에 노력한 정몽주, 정도전 등 문신 세력들에게 정치적 타격을 가할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을 아는 이성계는 소국小國이 대국大國을 치는 것은 잘못이라는 등의 4가지 이유(이성계의 4불가론)를 들어 요동 공격의 부당성을 호소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은 묵살하였다.

5월, 선봉대가 압록강 어귀의 작은 섬 위화도威化島에 도착하였다. 최영은 압록강을 건너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에 불복, 군대를 돌려 거꾸로 수도 개경으로 향했다. 당시 개경에 있던 정도전, 조준, 정몽주는 이성계에 대한 반감, 반대 여론을 무마시켰다(6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대해서 조선 개국이 결국 무인의 쿠데타라는 사실과 함께, 조선의 사대주의 외교의 시발로 보는 견해가 많다. 몽골과의 긴 항쟁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고려의 민족주의, 신흥 강국 명을 치고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진취적 발상 등을 높이 사는 시각에서 볼 때 이 사건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이 많은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요동 정벌 배경 자체가 최영을 위시한 친원 권문세족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는 점과 당시 고려 사회 내부의 사회, 경제적 취약성을 간과할 수 없다. 외적들의 침입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 요동 정벌 같은 큰 전쟁을 위해 백성들을 전쟁의 담보로 삼은 것은 결국 현실성 없는 이상주의적 측면이 많다는 평가도 있다.

회군한 이성계는 개경을 점령하여 우왕을 폐위하고 9세의 창왕을 옹립하여 섭정을 전담하였으며 최영을 제거하여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고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가 혼자 일으킨 쿠데타가 아니라, 신진 사대부가 신흥 무인세력을 끌어들여 구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고, 고려를 멸망하고 조선을 개창하는 단초가 된 사건이었다.

 

 

전제 개혁을 하다

당시 고려는 불교의 세속적 타락과 권문세족의 횡포로 인해 전제 개혁, 노비 변정, 사원 정리 등이 모두 상호 연관되는 핵심 사회 문제였고, 피할 수 없는 정치적 과제였다. 지배층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묵은 세력이었을 뿐이다.

위화도 회군 이후 정권을 잡은 이성계 일파가 제일 먼저 추진한 일은 조준 등을 내세운 전제田制 개혁이었다. 이는 개인이 함부로 토지를 사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권문세족들이 보유한 토지를 몰수하고 새 정권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자금 확보는 물론,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도전은 모든 백성에게 농지를 나누어 주어 지주제를 없애고 자작농을 만드는 것이 목표인 ‘계구수전計口授田’을 주장하였으나, 권문세족들의 반대로 한 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스승인 이색과 친구인 정몽주 등과 의견을 달리하면서 서서히 멀리하는 관계가 되었다.

조준, 정도전 등이 추진한 토지제도는 여러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하여 수조권收組權(관료들에게 나라를 대신하여 조세租稅를 거두어 월급으로 사용하게 한 권리) 측면에서 개혁이 이루어졌다. 당시 지배층들의 토지는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였다고 한다. 권세로 농민들을 억압하여 하나의 토지에서 여러 명의 관료들이 수조권을 행사함으로써 정작 백성들은 농사를 지어도 손에 쥐는 게 없어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관리들에게 수조권을 주되 그 대상을 대체로 현직 관료 중심으로 범위가 제한되었고, 농민의 경작권을 법적으로 보장하였다. 1391년 공양왕 3년 5월 이런 취지를 담은 새 토지제도인 과전법科田法이 반포되었다. 

1392년 3월 초 이성계가 해주의 사냥터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자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몽주에 의해 정도전, 조준 등이 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하지만 4월 10일 이방원, 조영규 등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함으로써,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와해되었다.

태조 이성계 가계도

조선의 태조가 되다

이성계는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1392년 8월 5일(음력 7월 17일)에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공양왕으로부터 선위禪位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고려는 태조 왕건 이래 474년 제34대로 멸망하였다. 왕조 교체기는 대부분 격동의 시간이다. 세상을 바꾸려는 야심에 찬 인재들 간에 죽고 죽이는 모략과 암투가 펼쳐진다. 대규모 전쟁으로 25개 왕조가 명멸한 중국에 비해 우리의 왕조 교체는 상당히 평온한 편이다. 이성계는 개국에 반대한 핵심 인물만 처단하였을 뿐 이외 인사들은 재등용하였다.

 


태조는 민심의 혁신을 위하여 국호의 개정과 천도를 단행하였다. 먼저 국호는 단군조선의 계승자임을 밝히고자 하는 자부심과 사명감에서 조선朝鮮으로 정하였다. 1394년에는 개성 중심의 구질서를 탈피하면서 행정과 수로 교통의 요지이며 주변의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방위에 매우 편리하고 그 전까지 삼국 분열 의식의 색채가 적었던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경복궁, 관아, 성곽, 4대문을 건설하였다. 태조는 정도전 등 소수의 재상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여 왕권의 행사가 강력하였다. 하지만 이는 많은 개국공신과 종친을 소외시켜 제1차 왕자의 난을 부르는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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