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도씨 시조 인물 족보 도미부인 설화 도씨 성
[글 포스팅 순서]
1. 도씨都氏의 연원
2. 씨족사의 개요'
3. 도미都彌 부인의 정절
4. 성주 도씨의 성쇠盛衰
5.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상징, 도응都膺
6. 정신적 버팀목은 학문과 대의명분
7. 성리학자 도여유都汝兪와 네 아들
8. 지극한 효행의 표상 도시복都始復
9. 도씨 가문의 항일 운동
10. 성주 도씨 가문의 현대 주요 인물
11. 그 밖의 도씨, 도陶씨와 도道씨
우리나라 도씨는 201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도읍 도都 자를 쓰는 성주 도씨 53,066명, 성산 도씨 1,479명 다른 한자를 쓰는 도씨 2,305명으로 총56,850명이다.
기타 도씨로는 질그릇 도陶자를 쓰는 도씨가 있다(1,037명).
도씨都氏의 연원
기세조起世祖는 도순都順으로, 고려 명종 때 전리상서를 지냈다.
그런데 〈경술보〉 수성受姓 시조 편에 보면, 시조가 도계都稽라 하였는데, 그는 중국 남월의 재상인 여가呂嘉의 반란을 토평, 임채후臨蔡候에 봉해졌고 도씨라 수성, 이때부터 도씨가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그 후손으로 도조都祖가 고구려 유리왕 때 우리나라에 건너와 왕을 도와 선정을 베풀었다고 하였다.
그 뒤로 도미都彌는 백제의 재상으로, 도유都儒는 신라에서 김유신을 도와 백제군을 격파하는 등 여러 공을 세워 상천후商川候에 봉해졌다고 한다.
또 도진都陳은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 통합에 공을 세워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중시조 도순 이상의 세대는 오랜 일이어서 정확하게 밝힐 수 없어 다만 도순으로부터 기세한다고 하였다.
도씨는 성산星山・성주星州・팔거八莒(지금의 칠곡漆谷) 등 몇 본이 있지만 모두 같은 뿌리이다.
성산은 성주의 옛 이름이고 팔거는 옛날 성주의 속현이었다.
그런데 「전고대방典故大方」과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의 문헌에는 백제 개루왕蓋婁王 때의 정승 도미都彌를 도씨의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이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씨족사의 개요
『삼국사기三國史記』, 『동국열전東史列傳』, 『동국통감東國通鑑』,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 문헌에는 도순都順 이전의 인물로 도도都刀・도두都頭・도공都功・도비都非・도눌최都訥催・도유都儒・도조都祖・도진都陳 등이 등장한다.
그중 도조都祖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의 맏아들 유리琉璃가 이복동생 비류沸流・온조溫祚와 왕권 쟁탈전을 벌일 때 유리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한 공신이라고 한다.
도미都彌 부인의 정절
백제 개루왕蓋婁王 때 사람인 도미都彌는 부인이 아름답고 정숙하기로 소문이 났다.
왕이 그 소문을 듣고 그의 아내를 유혹하려다 실패하자, 도미의 두 눈을 뺀 다음 배에 태워 한강에 띄워 버렸다.
그러나 도미의 아내는 잠자리를 강요하는 왕을 속인 뒤 남편을 뒤쫓아 가 하류의 천성도泉城島에서 해후, 고구려에서 나물과 풀뿌리를 캐 먹으며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현재 도미의 무덤은 경남 웅천熊川에 있는데 이 지방에서는 누구든 8월 초하룻날 제일 먼저 벌초를 하면 득남한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도미 부인의 정절은 우리 역사상 손꼽히는 여절부덕女節婦德의 상징이자 귀감으로, 1984년 5월 창작 무용극 〈도미 부인〉으로 꾸며져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문화 행사 무대에 올려졌고 그 후 18개국에서 1백여 회의 공연을 가졌다.
성주 도씨의 성쇠盛衰
도진都陳은 고려의 개국 공신이다.
태조 왕건은 그에게 정승의 벼슬을 주고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함과 아울러 논밭 8백 경頃을 주었다.
이것이 성주星州(팔거八莒)가 도씨의 관향이 된 연유다.
기세조 도순의 아들 충박忠朴은 고려 원종 때 전리상서典理尙書를 지냈다.
3세 도유도都有道・도유덕都有德 등 형제도 공조전서功曹典書와 명경진사明經進仕에 각각 올랐으며 뒤를 이어 4세 도효원都孝源이 전객령典客令, 도효신都孝臣이 판서, 도효안都孝安이 동양창판관東陽倉判官 등을 지냈으며, 도효정都孝貞의 손자 도천우都千遇는 경성수복공신京城收復功臣이 되었다.
고려 때 도씨 인물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도효안의 아들 홍정洪正이다.
그는 공민왕 때 시중에 오르면서 정계의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그의 아들 도길부都吉敷는 우왕 때 찬성사를 역임한 무신으로 당시 세도가 이인임李仁任의 인척이었다.
도길부는 1380년 왜구가 대거 침입해 충청・전라도가 큰 화를 입게 되자 이성계 등과 함께 충청도에서 전투를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왜를 완전히 격퇴했다. 이것이 황산대첩荒山大捷이다.
그러나 이인임이 실각하는 정변에서 그 일파로 몰린 그는 죽음을 당하고, 일족은 풍비박산되어 곳곳으로 흩어지게 됐다.
도씨들은 이 참변을 ‘기사화변己巳禍變’이라 부르고 있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상징, 도응都膺
도길부의 아들 청송당靑松堂 도응都膺은 여말을 대표하는 도씨 인물로, 찬성사를 지냈으며 이성계와 가까운 사이였다.
기사화변 때 장인 우인열禹仁烈의 덕으로 화를 면하였고, 고려가 망한 후에는 홍주洪州(지금의 홍성) 노은동魯隱洞에 은거하였는데, 태조 이성계가 옛정을 못 잊어 상장군에 임명하고 두 번이나 예물을 보내 출사를 권했으나 뿌리쳤다.
그 뒤에도 이성계가 다섯 차례나 불렀지만 끝내 응하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를 지켰다.
감복한 이성계는 청송당靑松堂이란 호와 송절시頌節詩를 내려 그의 절의를 기렸다고 한다.
이때의 왕지王旨 4점과 왕명 1점이 보물 724호로 지정돼 충남 연산連山의 보호각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여말에 절의를 지킨 두문동杜門洞 72현賢의 한 분이기도 하다.
정신적 버팀목은 학문과 대의명분
조선 초기에 도씨 사람들은 여말의 시련 때문에 출사를 꺼려 도하都夏가 문과에 장원 급제, 정언・교리・부사를 지냈을 뿐이다. 조선 중・후기에 이르러서는 15명의 문과 급제자와 무과 등제자들을 배출한다. 특히 도성유都聖兪・도여유都汝兪・도응유都應兪・도경유都慶兪・도신수都愼修・도형都衡・도균都勻 등 이름난 학자가 많다.
도성유都聖兪는 성리학자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군량을 모았고, ‘오경체용합일도五經體用合一圖’와 ‘체용각분도體用各分圖’를 만들었으며 「성리지학性理之學」 등을 저술했다. 도여유・도신수와 더불어 경북 달성 서재鋤齋 용호서원龍湖書院에 배향됐다.
도여유都汝兪는 이괄李适의 난 때 의병을 모집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이 컸고, 병자호란 후에는 은거하여 후진 양성을 낙으로 삼았다.
도응유都應兪는 인조조 이괄의 난 때 의병장이 되어 활약했고 정묘호란 때에는 창의상장倡義上將으로 공을 세웠으며 조정에 〈축성築城 선장選將의 소疏〉를 올리는 등 국방 책략에 조예가 깊었다. 또 예문에도 밝아 「오현예설五賢禮說」을 편찬했다.
성리학자 도여유都汝兪와 네 아들
서재鋤齋 도여유都汝兪의 아들 신수愼修・신여愼與・신행愼行・신징愼徵 형제는 아버지와 함께 5부자가 당대의 성리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맏아들 신수는 인조 때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함흥부사로 선정을 베풀었고, 말년에는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함흥부사로 부임했을 때 억울하게 투옥된 백성을 모두 방면하자 밝은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렸고, 세인들은 이를 ‘설원우雪寃雨’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둘째 신여愼與는 효종 때 문과를 거쳐 예조정랑, 성균관 사예司藝 등을 지냈으나 재임 중에 사망하자 한 사람의 동량을 잃었다고 아쉬워하며 영이靈輀(요즘의 영구차)까지 내렸다고 한다.
넷째 신징愼徵은 현종・숙종 때 활약한 학자로 유림에서 명망이 높았으며 특히 예제에 밝았다.
그는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효종비)가 죽어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가 일어났을 때 대공설大功說(9개월 상복을 입음)로 예론禮論이 기울어지자 이를 맹렬히 반대하여 기년설朞年說(1년 상복을 입음)을 주장, 결국 이를 관철했다. 그 뒤 강릉참봉康陵參奉, 주부主簿를 거쳐 용궁현감龍宮縣監으로 나가 치적을 쌓고 퉁훈대부가 되었다.
도형과 도균 형제는 성주에서 후진 양성에 힘써 성향선정으로 추앙받은 인물이다.
형 도형은 중종 때 현량과에 천거되어 정언 등을 지내다 공조좌랑 재임 중 조광조 일파로 몰려 파직됐다.
낙향 후 균과 함께 후진 양성에 전념하며 「이성회찬理性會纂」, 「효경집해孝經集解」 등 저서를 남겼다.
지극한 효행의 표상 도시복都始復
도都 효자는 이름이 시복始復이고 가난한 농사꾼 도상진都尙震과 강릉 유씨江陵劉氏 사이의 맏아들로 1817년 예천군 상리면 야목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이 마을에는 지금도 도 효자가 살았던 집과 그의 효성에 관한 자취들이 전설처럼 남아서 우리를 깨우쳐 주고 있다.
부모가 혹 몸살이라도 앓게 되면 곁을 떠남이 없이 알뜰히 두루 살펴 온 정성을 다해 간호하고, 식성을 살펴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여 밥상에 반찬이 없을 때가 없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서 쇠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므로 어머니께 쇠고기를 사다가 봉양하기 위해 예천장에 나가 숯을 팔았는데, 그때도 몹쓸 도둑들이 있어서 도 효자의 숯 판 돈을 훔쳐 갔으므로 한숨을 쉬며 길거리에 앉아 탄식을 하고 있었는데, 그 복잡한 길거리에 주저앉은 도 효자 옆에 엽전 꾸러미가 떨어져 있었다.
도 효자는 그것을 주워 들고 ‘이 돈을 잃은 사람도 나처럼 얼마나 애를 태울까.’ 하고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저물도록 돈 임자가 나타나지 않자 장꾼들이 한결같이 “그 돈은 도 효자가 잃은 것을 하늘이 갚아 준 것이니, 쇠고기와 약을 사라.”라고 권하였다.
돈 임자가 나타나면 다른 날 갚아 주기로 하고 쇠고기를 사서 지개뿔에 걸고 약을 지어 손에 들고 걸음을 재촉하였는데 갑자기 독수리가 지게뿔에 달고 가는 쇠고기를 채 가지고 날아가 버렸다. 이제 해는 졌고, 다시 쇠고기를 살 돈도 없어 스스로 효성이 모자라서 오늘 같은 일이 생겼다고 한탄하면서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자니 마음은 급하고 걸음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집까지 10리쯤 남았을 때 큰 범이 나타나서(이곳을 업은골이라고 한다) 눈빛으로 길을 밝혀 주어 집에 도착하니 그 아내가 마중하면서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묻기에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하니 아내가 웃으면서 독수리가 우리 집 마당 위에 날아와서 쇠고기를 떨어뜨리고 가길래 그것으로 부모님 저녁 반찬을 했다고 대답했다.
이 외에도 몇 해 뒤에 또 모친이 병이 나서 음력 5월의 무더운 날에 홍시를 먹고 싶다고 하므로 호랑이의 도움을 받아 강원도 강릉 후곡의 김씨 집에서 홍시를 구해다 드린 일, 아버지가 병이 들어 한겨울에 잉어를 먹고 싶다고 하므로 우곡천에서 잉어를 구해다 드린 일 등 효행은 많다.
어느 해 가을에는 서리가 일찍 내려 농작물에 피해가 많았으나 오직 효자의 화전은 온전했으므로 곡식을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그 이듬해 여름에는 어느 과객이 오늘 오후에는 우박이 내리되 도 효자의 논밭에는 탈이 없을 것이라고 산신령들이 예언하더라고 하더니 과연 우박이 내렸으되 효자의 농토는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적은 거듭되어 이웃 고을에까지 소문이 퍼져 도 효자의 행실은 온 나라 안이 모두 알게 되고 『명심보감明心寶鑑』이라는 당시 어린이들의 학습서에까지도 실리게 되었으며, 75세로 세상을 떠나니 이웃을 비롯하여 예천 장터 사람까지도 하늘이 낸 효자를 잃었다고 슬퍼하였으며, 군 내의 모든 선비들과 고을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유림장으로 장사를 지내 주었다. (출전 : 예계실기효열행지也溪實記孝烈行誌, 효자정려비孝子旌閭碑)
도씨 가문의 항일 운동
일제 시대에 지하 항일 활동을 하다 8.15 광복 직전에 체포되자 왜관 낙동강 철교에서 투신해 순국한 도병철都炳喆, 이상재李商在 등과 연계하여 조선교육협회를 조직했던 도진기都鎭基, 성주에서 3.1 운동을 주도한 도무환都武煥 등이 독립운동으로 가문을 빛냈다.
성주 도씨 가문의 현대 주요 인물 및 연예인
도일규都日圭(1940~현재) - 대한민국 제32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도종환都鍾煥(1955~현재) - 대한민국의 교사 겸 시인 출신 정치인이다.
중등 교사로 재직할 때 쓴 시집인 『접시꽃 당신』이 히트를 치며 이름을 알렸다.
정계 입문 이후에는 제19~21대 국회의원, 제50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도지원都知嫄(1966~현재) - 대한민국의 배우. 한양대학교 무용학과를 졸업 후 국립발레단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1,4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1989년 화장품(드봉) 회사의 모델로 선발돼 광고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연예계에 데뷔하였다. 이후 드라마 〈절반의 실패〉를 시작으로 〈서울 뚝배기〉, 〈일출봉〉 등 많은 드라마에 출연해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2001년 SBS 대하사극 〈여인천하〉에서는 문정왕후를 모함하고 괴롭히는 후궁 경빈 박씨 역으로 열연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그 밖의 도씨, 도陶씨와 도道씨
우리나라의 도씨陶氏는 조선씨족보朝鮮氏族譜에는 본관이 순천 등 11본本으로 기록되어 전해지나, 순천 도씨順天陶氏를 제외한 나머지 관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순천 도陶씨는 시조始祖 도단陶丹으로부터 선계를 기록해 오다가, 중간 계대를 실전失傳하여, 1296년(충렬왕 22년) 원나라 공주를 배행하여 고려에 들어온 도구원陶球元이 순천 죽청리竹靑里에 세거하게 되어 순천을 관향貫鄕으로 삼고 도구원을 세조世祖로 받들며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도道씨는 중국 성씨로 고성固城 단본인데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전고대방典故大方』, 「도곡총설陶谷叢說」에도 보이지 않던 성씨다. 1930년 국세조사에서 비로소 제주도 구우면舊右面 옹포리瓮浦里에 도응선 1가구가 살고 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85년 조사에서는 69가구 382명, 2000년에는 179가구에 609명으로 조사되었다.
[참고 자료]
1) 김동익, 『한국성씨대백과 성씨의 고향』, 중앙일보사, 1989
2) 김태혁, 『한민족 성씨의 역사』, 보문서원, 2015
<참고 사이트)
1) 한국인의 족보
2) 위키백과 성주도씨 등
3) 성씨 정보
4) 뿌리를 찾아서
5) 김성회의 성씨 이야기
6) 통계청 홈페이지
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성주도씨星州都氏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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