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역 폭발사고 꼬꼬무 하춘화 이주일 1977 원인 사망자
한국화약 신무일 120회 출연진 게스트
[글 포스팅 순서]
1. 1977 사라진 도시와 맨발의 남자
2. 이리역 폭발사고의 원인 & 범인
3. 폭발사건의 여파
4. 폭발 사건 이후
5. 꼬꼬무 시즌3, 120회 게스트 이야기 손님
6. 양양 일가족 방화 살인사건 꼬꼬무 크리스마스의 악몽 범인 119회 출연진 게스트
7. 꼬꼬무 하나회 서울의 봄 1212사태 명단 사진 숙청 해체 척결 근황 118회 출연진 게스트
8. 보성 어부 살인사건 꼬꼬무 오종근 범인 아들 피해자 영화 가족 근황117회 출연진 게스트
9. 가짜 이강석 사건 꼬꼬무 황태자 찰리 채플린 이승만 양자 강성병 처벌 116회 출연진 게스트
10.서커스 소녀 심주희 꼬꼬무 아동학대 사건 근황 115회 출연진 게스트 시즌3 재방송
11.은지원 프로필 이혼 나이 자녀 결혼 와이프 전부인 이동국 집 이혼사유 작업실 mbti 미우새
12. KB국민은행 KB차차차 적금 추천 금리 이율 해지 만기 최고8%이자
1977 사라진 도시와 맨발의 남자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가 이리역 폭발 사고를 조명했습니다.
'꼬꼬무'는 '1977 사라진 도시와 맨발의 남자' 편으로, 지켜지지 않은 원칙들이 모여 터져 버린 역대 최악의 참사와 충격적인 뒷이야기가 공개되었습니다.
때는 1977년 11월 11일 금요일 밤 전라북도 이리(현 익산).
이 도시의 유일한 공연장인 삼남 극장에선 수백 명의 관객들이 오직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9시 정각이 되자 한 여성이 무대에 오르고, 공연장은 환호로 가득 찼습니다.
바로 당대 최고의 여가수 하춘화가 나온 것입니다.
역대급 신드롬을 일으키며 '리사이틀의 여왕'으로 불리던 하춘화는 히트곡 메들리로 공연의 포문을 열었고, 그 뒤를 이어 하춘화의 전속사회자 개그맨 이주일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이주일이 특유의 예측불허 멘트와 제스처로 관객들을 빵빵 터뜨리던 그때, "쾅 콰과광!" 하는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극장 천장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극장 안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됐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건물 잔해에 깔려 신음했습니다.
그 악몽의 밤, 가까스로 생존한 하춘화는 당시를 떠올렸습니다.
하춘화에게 직접 그날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끝없이 흙 속에 파묻히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죽는 줄 알았다.
한편, 처참한 곳은 극장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한순간 시내 길바닥은 유리창 파편으로 온통 하얗게 뒤덮였고, 집들도 절반 가까이 무너져 버려 깔린 가족을 구하려는 간절한 몸부림과 서로를 찾는 울음 섞인 외침이 도시에 가득했습니다.
그때, 사무실에 있던 나훈 기자는 굉음과 함께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들고 건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300kg이 넘는 기차 바퀴가 1km 떨어진 곳까지 날아온 걸 보고 사태를 직감했습니다.
분명 기차역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대혼란 속에서도 차분히 이리역 주변을 살피던 나훈 기자는 경찰보다 먼저, 수상한 한 남자를 발견했습니다.
맨발에 새 운동화를 신은 채 떨고 있던 한 남자는 사고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한순간 이리를 폐허로 만들어 버린 이 사고의 이름은 '이리역 폭발 사고'입니다.
무려 1,4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이 사고는 4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역대 최악의 열차 사고로 불리고 있습니다.
폭발 지점에는 직경 30m, 깊이 10m의 거대한 웅덩이가 파였고, 반경 8km 내 대부분의 건물 유리창이 산산조각 난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고였습니다.
경찰은 30톤 분량의 화약을 실은 인천발 광주행 열차가 이리역에 머물던 중 폭발했다고 사고 경위를 설명했습니다.
화약을 실어 나르던 열차는 왜 그날 폭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이리역 폭발사고의 원인 & 범인
이리역 폭발 사고 혹은 폭발 사건은 1977년 11월 11일 21시 15분 전라북도 이리시(現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이리역(現 익산역)에서 발생한 대형 열차폭발 사고입니다.
59명이 사망하고 134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이재민 1647세대 7800여 명이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인천을 출발해 광주로 가던 한국화약의 화물 열차가 정식 책임자도 없이 다이너마이트와 전기 뇌관 등 고성능 폭발물 40톤을 싣고 이리역에서 정차하던 중에 초대형 폭발 사고를 냈습니다.
수사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호송원 신무일이 어둠을 밝히기 위해 밤에 열차 안에 켜 놓은 촛불이 다이너마이트 상자에 옮겨 붙은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이게 큰 사고로 발전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두말할 나위 없는 인재(人災)였습니다.
원래 이런 사고를 막기 위해 폭약과 뇌관은 함께 운송할 수 없으나 이 원칙이 무시되었고 뇌관이 결합된 폭약이 실려 있었습니다.
철도역 화차 배차 직원들이 기관사를 비롯한 같은 철도 직원들에게 '급행료'라는 명목으로 뇌물을 받고자 화물열차를 역 구내에 40시간 동안 강제로 대기시켰습니다.
당시 철도법 제61조상 화약류 등 위험물은 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바로 통과시켜야 하며 지금도 위험물 운송차량은 대통령 전용열차 다음으로 우선순위가 높습니다.
이렇게 대기시간이 기약 없이 길어지자 화가 난 호송원은 술을 마시고 열차 화물칸에 들어갔습니다.
화약을 실은 화차 내부에는 호송원조차 탑승할 수 없고 호송원은 총포 화약류 취급 면허가 있어야 하며 흡연자, 과다 음주자를 쓸 수 없는데 이런 규칙 역시 모두 무시되었습니다.
호송원 신무일은 화차 내에 화기를 들일 수 없는 규칙을 무시하고 그 안에서 촛불을 켜고 잠이 들었습니다.
불이 옮겨붙은 상황에 잠에서 깨어난 호송원이 침낭으로 불을 꺼 보려 했으나 불은 오히려 더 크게 번졌습니다.
위험물을 운반하는 열차에 소화기처럼 유사시 사용할 제대로 된 소화기구가 없었습니다.
화약 열차에 불이 붙었음을 알고 철도 요원들은 모두 도망쳐버렸고, 검수원 7명이 불을 끄기 위해 화차로 달려가 모래와 물을 끼얹었으나 폭발을 막지 못했습니다.
폭발사건의 여파
결국 열차에 불이 붙어 다이너마이트 등의 폭탄 등이 연쇄적으로 터지면서 대폭발이 일어났습니다.
폭발 사고로 인해 이리역에는 지름 40m, 깊이 15m에 이르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고 반경 500m 이내의 건물이 대부분 파괴되었습니다. 기관차 본체는 폭심지로부터 700m 떨어진 민가까지 날아가버렸고 일부 파편은 직선거리가 7km나 되는 춘포면까지 날아갔다고 한다.
역 주변은 큼지막한 건물조차 형체만 남아있는 정도로 대파되었습니다.
역에서 근무하던 철도 공무원 16명을 포함하여 59명이 사망하였고 1343명이 중상 및 경상을 입었으며 이재민 1647세대 7800여 명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는 그때까지 발생한 폭발사고 중 피해 규모로는 최대였습니다.
중요 시설물들도 당연히 피해를 많이 입었다.
이리역 역사(驛舍)를 비롯하여 구내의 객화차 사무소, 보선 사무소 및 구내에 정차 중이던 기관차/객화차 등 117량이 파괴되었고 선로 1650 m가 파손되었으며 주택 675채가 완파, 1288채가 반파되었습니다.
사고의 확대를 막은 뒷이야기도 있습니다.
사고가 나던 때에 승객 600여 명이 탄 여객열차가 이리역 직전 역인 부용역에 정차 중이었는데 이 열차가 제 시간대로 운행되었다면 사고 시각에 이미 이리역에 도착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기관사가 부용역에 진입하면서 통표(운전허가증) 회수에 실패하는 바람에 부용역 통과 허가가 나지 않아 통표를 획득할 때까지 계속 멈춰있어야 했습니다.
사고 발생 약 5분 후 통표를 회수하여 출발이 가능해졌음을 무전으로 보고하던 중 "이리역에 대형화재가 발생하였으니 진입하지 말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본인의 실수 탓에 열차를 지연시킨 기관사는 초조해져서 "화재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진입해도 되지 않느냐"고 재차 문의했지만 이리역 측은 "상황이 심각하니 무조건 대기하라"고만 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기관사는 통표를 얻었으니 운행을 강행하기로 하고 결국 열차를 이리 방향으로 출발시켰습니다.
한편 이리역 역무원 송석준은 폭발 때문에 기절했다가 간신히 의식을 되찾은 뒤 해당 열차가 들어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철로를 따라 1km를 달려가 이리역으로 진입하려던 열차를 향해 윗옷을 펄럭이며 정지 신호를 보내어 가까스로 열차를 세웠다고 합니다. 이 일 때문에 송석준 역무원은 2013년 코레일 철도안전 명예의 전당에 등재되었습니다.
또한 사고 당시 이리역 구내에 석유를 가득 실은 유조화차로 조성된 열차가 대기 중이었는데 마침 이리역 인근 모현동에 살던 기관사가 화재가 발생하였으니 열차를 신속히 이동하라는 긴급연락을 받고 달려나와 열차를 황등역으로 신속히 이동하였습니다. 만일 유조 열차가 구내에 계속 남아있었다면 그마저 폭발하면서 역 일대가 완전히 불바다가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이리역(현 익산역)은 철도교통의 요충지로서 그 중요도로 말미암아 신속한 복구작업이 전개되어 사고 다음날인 11월 12일 열차 운행을 재개하였고 11월 20일에는 모든 선로의 복구를 완료했습니다.
폭발 사건 이후
사고가 발생하자 당시 한국화약그룹의 현암 김종희 회장(한국화약그룹 창업주이자, 현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부친)은 즉각 대국민 사과를 하였고 당시 자신의 모든 재산이었던 약 90억 원을 모두 피해자와 이재민들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한국화약그룹의 모든 직원들을 피해자들을 위해 헌혈시켰으며 이리역에 직접 파견을 나가게 했다고 합니다.
또한 한국화약그룹의 모든 직원들에게 회사에서 지급된 보너스를 다시 반납시켰고 직원들의 11월 급여 중 2%를 재해 기금으로 갹출(醵出)하였습니다.
사고 때문에 이리역은 1년 뒤인 1978년 11월에 당시의 위치에서 떨어진 곳에 신설되었습니다.
이후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하여 익산시가 출범하자 역 이름도 익산역으로 바뀌었는데 이리시가 익산시로 바뀌게 된 이유가 이리 하면 이리역 폭발 사고가 연상되기 때문이라는 카더라 사실도 있습니다.
사실 1995년 2차 시, 군 통합 당시 통합에 부정적인 분위기가 우세했던 군 지역의 여론을 달래기 위한 측면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익산군은 익산이란 명칭을 이리에 뺏긴 셈이 되어 버렸습니다.
'익산'이라는 명칭이 붙었던 여러 기관들이 그 이름을 이리에 있는 동종 기관에 넘겨주고 새 이름을 써야 하기도 했고 이리시와 익산군은 1994년 1차 시군 통합 당시 익산군 지역의 반대 여론이 과반이었기 때문에 무산된 적이 있습니다.
폭발 사고의 당사자인 호송원 신 씨는 사고 직후 도주했다가 검거되어 이듬해 2월 법원은 부작위에 의한 폭발물파열죄를 인정해 형량을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1987년 만기 출소하였습니다.
시민들은 신 씨로 말미암아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장에게 선처를 호소하고 이후 복역하던 신씨를 면회하는 등 의외로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사고로 집을 잃은 이재민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이듬해(1978)에 이리시 최초의 주공아파트인 모현주공아파트를, 또 이듬해(1979)에 창인주공아파트를 건설했습니다. 이 중 모현주공1단지는 재개발 공사로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대림산업에서 익산 e-편한세상 아파트가 들어섰다. 창인주공아파트도 재개발 승인이 났습니다.
한편 당시 가수 하춘화가 이리역 앞 삼남극장에서 공연 중이었는데 공연을 시작한 지 약 15분 만에 폭발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폭발 사고가 일어난 직후 극장 지붕이 무너져내리고 정전이 되어 사방이 암흑 천지였는데 이때 같이 있던 코미디언 이주일이 본인도 피를 흘리면서 하춘화를 업고 뛰어 가까스로 사고 현장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리 시내에는 종합병원 규모의 의료 기관이 없었던지라 이들은 군산으로 이동하여 도립 의료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나서는 서울로 올라왔는데, 이때 외부와 연락이 두절된 관계로 언론에서는 한바탕 하춘화가 실종되었다는 속보를 내보냈고 이 때문에 한때 하춘화의 생사 여부가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고 다음날 현장에 내려온 박정희 대통령도 하춘화의 생사 여부와 관련된 보고를 수시로 받았다고 합니다.
하춘화의 당시 인기는 요즘의 어지간한 톱가수들 이상인 '국민 가수'급이었습니다.
하춘화는 6살 때 데뷔했는데 그때부터 스타였고 이 시점에는 이미 데뷔 16주년이었습니다.
하춘화의 생존이 언론을 통해 공식 확인된 것은 사고 다음날(12일) 저녁이었습니다.
한편 상경한 이후 한양대 병원에서의 정밀진단 결과 하춘화는 다행히 큰 부상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이주일이 두개골이 함몰되는 중상으로 4개월 이상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후 이주일은 '하춘화를 구한 남자'로 유명해져서 1980년대 들어서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사망자 중 역무원이었던 한인석 씨는 부친 역시도 철도공무원이었고 광주역에서 무단횡단하던 어린이를 구하려다 순직한 바 있습니다. 이후 정부는 유가족에게 재건된 역의 매점운영권을 주었습니다.
이 사고로 최경록 교통부장관이 경질되었고 후임에는 민병권이 임명되었습니다.
씁쓸한 후일담이지만 사고 이후 이리역 주변 아이들 사이에서 '보물찾기'가 유행했다고 합니다.
폐허가 된 집 근처에서 목걸이나 반지 같은 패물을 주워 횡재한 아이들이 나오면서 아이들이 너도나도 보물을 찾겠다고 폐허를 뒤적거렸는데 보물뿐만 아니라 인체의 조각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훗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에서도 재현된 풍경입니다.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장률 감독의 영화 이리가 2008년 개봉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다룬 소설로 기찻길 옆동네의 1부가 있습니다.
꼬꼬무 시즌3, 120회 게스트 이야기 손님
이번 '꼬꼬무' 이야기에는 가수 신성, 오마이걸 유아, 김다영 아나운서가 이야기 친구 게스트로 나섰습니다.
신성은 장현성의 이야기 친구로 '꼬꼬무'에 첫걸음 했습니다.
등장부터 "잘생겼다"라는 장현성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던 그는 가요계 대선배 하춘화의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을 아끼지 않는 성대모사로 녹화장을 웃음 짓게 했습니다.
또한 신성은 녹화 중 공개된 하춘화와 이주일의 사연을 듣고 "정말 대단하시다"라며 존경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오마이걸 유아는 장성규의 이야기 친구로 자리했습니다.
유아는 자신도 무대 도중 겪었던 아찔한 에피소드를 공개해 녹화장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유아는 한순간의 선택으로 생과 사, 운명이 뒤바뀐 이들의 사연을 들으며 안타까워하기도 했습니다.
장도연의 이야기 친구는 '꼬꼬무' 방문이 두 번째인 김다영 아나운서입니다.
남다른 집중력과 공감 능력으로 이야기에 몰입하던 그녀는 열차가 폭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듣고 분노를 참지 못하는 한편, 희생자 유족 인터뷰에 "감히 심정이 상상이 안 된다. 너무 처참하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끔찍한 참사의 기막힌 진실, 그리고 희생자 유족들이 전하고픈 이야기에서 이야기 친구 게스트의 활약을 기대해봅니다.
양양 일가족 방화 살인사건 꼬꼬무 크리스마스의 악몽 범인 119회 출연진 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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