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첫 번째 왕이 된 박혁거세는 모든 박씨의 뿌리가 됩니다. 이번 시간에는 이 박씨 중에서 대표적인 성씨인 밀양 박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박씨의 계통과 분파 (이미지 3~10번)
박씨는 김씨, 이씨에 이어 우리나라 3대 성씨 중 하나로 모두 박혁거세를 유일 시조로 모시고 있습니다. 문헌에 의하면 박씨는 300여 본이 있는 것으로 보이나, 실제 후손이 현존하는 본관은 70여 본입니다. 이 중에 밀양 박씨를 비롯해 반남潘南, 죽산竹山, 함양咸陽, 순천順天, 고령高靈, 무안務安, 충주忠州 박씨 등 8본이 박씨의 주류를 차지하기 때문에 이들을 ‘8박’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번시현本溪县에는 박혁거세 영정을 모시고 한민족 후예라고 자부하며 400년간 뿌리를 지켜 온 ‘번시 박씨’(본계 박씨本溪 朴氏)가 있습니다. 후손들에 의하면 번시 박씨의 선조는 1619년 조선 광해군 때 후금後金 정벌을 위해 명나라와 연합 전선을 펼치면서 강홍립 장군과 함께 참전하였다가 후금의 포로가 되면서 이곳 번시 일대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이 번시 박씨들은 우리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하지만 지난 400년간 자신들의 뿌리를 지켜 왔습니다. 지금까지 16대를 이어 내려 온 족보가 있으며, 자식을 낳으면 우리처럼 돌림자로 이름을 짓는다고 합니다.
박朴·석昔·김金으로 이루어진 신라 56명의 왕 중, 박씨 왕은 초기 7명과 말기 3명을 합하여 모두 10명입니다.
박씨는 크게 파사왕계와 경명왕계로 나누어집니다. 특히 경명왕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 8대군과 후대에 이르러 여러 본관으로 나뉘게 됩니다. 우리나라 3대 성씨 중 하나인 박씨 중 대표적인 밀양 박씨는 경상북도 밀양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밀양의 옛 지명이 밀성이기 때문에 밀성 박씨로 부르기도 합니다. 밀양 박씨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신라의 박씨 왕 : 시조왕 박혁거세 / 2대 남해 / 3대 유리 / 5대 파사 / 6대 지마왕 / 7대 일성왕 / 8대 아달라 / 53대 신덕왕 / 54대 경명왕 / 55대 경애왕
밀양 박씨의 계통과 분파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밀양 박씨는 약 316만여 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이 밀양 박씨는 전체 박씨에서 75% 이상을 차지해 박씨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본관별 인구수로는 김해 김씨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큰 성씨입니다. 또한 밀양 박씨는 10여 개의 본관으로 분적되었으며, 계파는 크게 12파로 나눠지는데 다시 그 아래에 여러 파로 분파되어 모두 90여 공파가 존재합니다.
밀양 박씨의 집성촌과 박정자 삼거리
집성촌은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흑석1리와 경기도 파주시 단현면 오금리,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방천리와 전북 무주군 설천면 기곡리, 전남 진도군 의신면 칠전리를 비롯해서 전국에 산재해 있습니다. 그리고 대전 인근에는 밀양 박씨와 관련하여 잘 알려진 지명이 있는데 대전 유성구에서 공주로 가다 보면 동학사 쪽으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400년 가까이 된 큰 느티나무가 있는데 ‘박정자朴亭子’라고 부릅니다. 행인이 쉬어 갈 만한 정자나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밀양 박씨가 심었다고 합니다.
이 일대는 원래 밀양 박씨들이 많이 살았던 곳으로 인근 반포면 학봉리 제석동 뒷산에는 밀양 박씨 3대 묘소가 있습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묘소가 범과 용의 형세를 갖춘 자리이나 앞쪽이 공허한 것이 결함이어서 풍수지리에 따라 느티나무를 심어 허점을 보강했다고 합니다. 이 느티나무가 자라서 박정자가 되었고, 이곳을 ‘박정자 삼거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밀양 박씨의 뿌리공원 조형물
“우리 박성朴姓은 신라를 건국하신 시조왕 박혁거세 거서간을 시조로 하여 2천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왕손으로 만파가 한 뿌리에서 시작된 순수한 단일 혈통이다... 나이 13세에 육부 촌장이 받들어 왕으로 삼고 국호를 서라新羅라 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호를 거서간이라 하니 서기전 57년 4월이었다. 신라는 <박, 석, 김> 3성이 서로 전하여 56왕 992년을 잇는 동안 박씨는 10분이 왕위에 올랐는데... 54대 경명왕 때 8대군이 분봉되시었는데 밀성대군은 첫째 왕자로서 밀양 땅을 분봉받으니 시조왕의 30세손으로 우리 밀양 박씨의 관조가 되신다.” - 대전 뿌리공원 밀양 박씨 조형물 중中
박씨의 시조, 박혁거세
박씨의 시조는 신라의 초대 왕인 ‘박혁거세朴赫居世’입니다. 박혁거세는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신라가 건국되기 전, 진한 땅에는 6촌이 있었다. 서기전 69년 6촌의 촌장들은 알천 남쪽 언덕에 모여 왕을 추대하는 회의를 연다. 이때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아래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오색영롱한 빛이 비치고 백마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촌장들이 한달음에 달려가 보니 말은 간곳없고 자주색 알이 하나 있다.
그 알을 깨뜨리니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동천東泉에서 목욕시키니 몸에서 빛이 나고 해와 달이 맑아진다.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성을 박으로 하고 빛을 내며 세상에 나왔다 하여 아이의 이름을 혁거세라 짓는다. 이 아이는 서기전 57년 13세가 되던 해, 6촌장의 추대에 의해 신라의 초대 왕이 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위의 내용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박혁거세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탄생 신화만으로는 진한 6촌의 촌장들이 무엇 때문에 박혁거세를 시조왕으로 추대하게 됐는지, 그리고 박혁거세의 혈통은 어떻게 되는지 그 진실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 『환단고기』에 나와 있습니다.
斯盧始王(사로시왕)은 仙桃山聖母之子也(선도산성모지자야)라
昔(석)에 有夫餘帝室之女婆蘇(유부여제실지녀파소)가 不夫而孕(불부이잉)하니
爲人所疑(위인소의)하야
自嫩水(자눈수)로 逃至東沃沮(도지동옥저)하고 又泛舟而南下(우범주이남하)하야
抵至辰韓奈乙村(지지진한나을촌)하니
時(시)에 有蘇伐都利者(유소벌도리자)하야 聞之(문지)하고 徃收養於家(왕수양어가)러니
而及年十三(이급년십삼)에 歧嶷夙成(기억숙성)하야 有聖德(유성덕)이라
於是(어시)에 辰韓六部(진한육부)가 共尊(공존)하야 爲居世干(위거세간)하니
立都徐羅伐(입도서라벌)하고 稱國辰韓(칭국진한)이오 亦曰斯盧(역왈사로)라.
-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사로의 첫 임금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옛적에 부여 황실의 딸 파소가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남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이에 눈수에서 도망하여 동옥저에 이르렀다가 또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한의 나을촌에 이르렀다. 그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이 소식을 듣고 가서 파소의 아이를 집에 데려다 길렀다. 나이 13세가 되자 뛰어나게 총명하고 숙성하여 성덕이 있었다. 이에 진한 6부가 함께 받들어 거세간이 되었다. 서라벌에 도읍을 세워 나라 이름을 진한이라 하였고, 사로라고도 하였다.
① 박혁거세 혈통의 진실
[#“박혁거세를 알기 위해서는 박혁거세의 어머니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를 보면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파소는 부여 황실의 딸, 즉 부여의 공주였다는 것입니다.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의 5세 단군인 고두막 단군의 따님입니다. 또 ‘눈수’에서 출발을 했다고 하는데요 지금도 눈강이라는 강이 있습니다. 흑룡강성과 내몽골자치구 길림성 경계에 흐르는 강입니다. 이 눈강을 통해 동옥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지금의 함경남북도 지역인 동옥저 지역을 거쳐 경주 땅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 경주에 들어와서 박혁거세를 낳았고 박혁거세의 혈통은 단군조선의 정통을 계승한 후기 북부여의 고두막한의 따님인 파소가 경주에 와서 낳은 아드님입니다.” - 대전대학교 한의과대 원전학 교수 윤창렬
② 박혁거세가 시조왕으로 추대된 배경
“『삼국사기』를 보면 경주에 와서 자리 잡았던 6부 촌의 사람들이 단군조선의 후예라고 분명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6촌의 뿌리가 단군조선 유민들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삼성기를 보면 위만이 번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준왕을 내쫓고 위만 왕조를 성립시키자 만주에 있던 삼한의 백성들이 한강 이남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진한의 사람들은 경주에 자리 잡은 후 진한이라 했고, 마한의 사람들은 익산으로 와서 자리를 잡고 마한이라 했고, 번한의 사람들은 김해에 자리를 잡아 변한으로 불렀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여의 고도가 지금의 농안 장춘 지방인데 이곳은 ‘신라고양야新羅故壤也라’, 즉 신라의 옛 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이 진한(북부여)의 땅인 것입니다. 이 진한 땅의 공주가 경주로 왔기 때문에 먼저 진한에서 이주해 왔던 6부의 촌장들은 같은 진한 사람으로서 동질성이 있고 친연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인연과 당시 만주의 진한 땅을 다스리던 분이 고두막한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6부의 촌장들이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 대전대학교 한의과대 원전학 교수 윤창렬
③ 혁거세의 성씨가 박씨가 된 이유
『삼국사기』를 보면 박혁거세가 큰 알에서 태어났고 그 알의 모습이 박과 같이 생겨 박朴으로 성을 삼았다고 설명이 되어 있는데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밝다’, ‘광명하다’라는 뜻을 취해서 박으로 성을 쓴 것이라 보입니다. 우리 배달의 건국이념이 홍익인간, 재세이화, 광명개천입니다. ‘광명한 세상을 만든다’, ‘광명한 나라를 만든다’는 뜻인데요. 우리나라는 국호, 인명, 지명에 전부 광명을 나타내는 뜻을 썼고 풍습에도 해맞이, 달맞이 등 전부 광명을 숭상하는 풍습입니다. 또 혁거세라는 이름도 세상을 크게 광명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박혁거세왕을 불구내弗矩內왕이라고 했습니다. 불구내弗矩內의 뜻은 ‘광명하게 하다’, ‘해와 달이 맑게 빛났다’, ‘일월이 청명淸明이다’란 구절이 삼국유사에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역시 그 박씨 성도 광명을 나타내는 ‘밝다’에서 취해서 성으로 쓴 것이라 생각됩니다.” -대전대학교 한의과대 원전학 교수 윤창렬
④ 박혁거세와 시조왕비를 모신 ‘오릉’
경주시 탑동에 있는 신라 오릉五陵은 시조왕 박혁거세를 비롯해서 개국 초기 4명의 왕과 시조왕비 알영의 능陵이 있는 곳입니다. 오릉 근처에는 박혁거세와 관련된 유적으로 나정과 알영정이 있습니다. 나정蘿井은 서기전 69년 박혁거세가 탄생한 곳으로 오릉에서 가까운 소나무 숲속에 있습니다. 지금은 흙으로 묻혀 있지만 2002년부터 한 발굴 조사에 의하면 국가 제의 시설로 추정되는 신라 시대 팔각 건물지와 유구가 확인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알영정은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閼英 부인이 탄생한 우물인데, 바로 오릉의 숭덕전 뒤편에 있습니다. 알영은 이 우물에 나타난 용의 갈비에서 나왔다고 하며 후에 자라서 박혁거세의 왕비가 됩니다.
밀양 박씨의 시조, 박언침
우리나라 모든 박씨의 시조인 도시조는 ‘박혁거세’입니다. 그렇다면 밀양 박씨의 시조는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신라 54대 경명왕은 8명의 아들인 8대군에게 여덟 지역을 각각 분봉하게 됩니다. 이때 첫 번째 왕자인 밀성대군 박언침이 지금의 밀양 지역을 분봉받게 되면서 밀양 박씨의 시조가 됩니다. 경남 밀양시 내일동에는 밀양 박씨의 시조인 밀성대군의 제향을 모시는 재실인 밀성재가 있습니다.
“박씨는 시조왕으로부터 10왕이 탄생하게 됩니다. 경명왕의 첫째 아드님이신 밀성대군은 밀양을 식읍지로 받게 되어 밀양 박씨의 본이 형성되게 됩니다. 지금은 밀성대군의 단소는 밀양 영남루 앞에 있고, 그 건너편에 재실인 밀성재가 있습니다. 이 밀성재에는 밀성대군의 아드님과 손자를 포함해서 3대가 모셔져 있습니다.” - 박씨대종친회 홍보이사 박영택
신라 왕가의 후예인 밀양 박씨는 고려 시대에 와서 한때 수난을 겪기도 합니다. 삼별초의 난에 동조하였다는 이유로 밀성 지역이 반역의 땅으로 낙인찍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후세에 더욱 번창하여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게 됩니다. 밀양 박씨 종문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밀양 박씨의 인물 ①박연
조선 전기의 인물로는 문신이자 음악가로 잘 알려진 난계蘭溪 ‘박연’이 있습니다. 그는 고구려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꼽힙니다.
어렸을 때부터 피리 신동으로 불린 그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가야금을 연주하면 새와 짐승들이 와서 소리에 맞춰 춤을 출 정도로 연주 실력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지금의 충북 영동에서 태어난 박연은 28세인 1405년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집현전 교리를 거쳐 사헌부 지평, 시강원 문학을 거쳐 후에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습니다. 세자 시절에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세종대왕은 그를 악사樂事를 맡아보는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합니다. 이후 그는 악보와 악기를 정리한 악서를 편찬하고 율관 제작을 통해 우리 음악에 맞는 편경을 새로 제작하는 등 궁중음악을 개혁하고 조선의 음악 체계를 세우는데 큰 업적을 세웠습니다. 76세 때인 1453년(단종 1년)에는 계유정난으로 인해 그의 셋째 아들이 처형되면서 가문이 멸족의 위기에 처하게 되지만 세 임금을 모신 그의 공이 참작돼 가까스로 화를 면하게 되었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피리를 불며 남은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조선의 예악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그의 업적을 기려 현재 고향 영동에는 국악 전문 박물관인 ‘난계국악박물관’이 들어서 있고, 해마다 가을이 되면 ‘영동난계국악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밀양 박씨의 인물 ②박은식
1910년 국권을 상실한 이때 국혼을 부르짖으며 우리 역사를 지키는 데 혼신을 다한 인물이 백암 박은식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낸 백암 박은식은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입니다.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난 그는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교우하면서 문장을 겨루는 등 두 사람은 황해도의 양兩 신동이란 평을 듣기도 했습니다. 자라면서 그는 서북 지방은 물론 중앙에까지 성리학자로 이름이 알려졌지만, 정약용의 문인들에게 학문을 배우고, 양명학과 독립협회의 영향을 받아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성리학과 위정척사사상에서 개화사상으로 전환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 활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일제에 의해 국혼國魂이 들어 있는 역사책이 모두 압수, 소각되는 상황에 처해지자 1911년 4월, 독립운동과 국혼이 담긴 역사서를 쓰기 위해 망명을 결행하게 됩니다.
그 후 박은식은 독립운동 최전선에서 한 날 한 시도 붓을 놓지 않고 많은 전기와 역사서를 저술하는데, 이 중 대표적인 저서가 <한국통사韓國痛史>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입니다.
이 책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죄상을 낱낱이 비판하고, 동포들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높여 주었으며 독립 투쟁 정신을 크게 고취시켰습니다. 평생을 국권 회복과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헌신하다 상하이에서 생을 마감하는데, 지난 1993년 그의 유해는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국혼國魂은 살아있다
국교國敎 국학國學 국어國語 국문國文 국사國史는
국혼國魂에 속하는 것이요,
전곡錢穀 군대軍隊 성지城池 함선艦船 기계器械 등은
국백國魄에 속하는 것으로
국혼의 됨됨은 국백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은 살아 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한국통사 중中>
지금까지 경상북도 밀양을 관향으로 삼고 있는 밀양 박씨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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