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씨 시조 최치원, 최부자집 본관 내력, 최치원의 토황소격문
9대 진사, 12대 만석꾼의 경주 최부잣집은 원래 99칸의 대저택이라고 합니다. 800석이 들어가는 곳간이 7채 있었고, 사랑채는 100여 명의 식객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늘 드나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합니다.
부자는 3대를 못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하지만 경주 최부잣집은 달랐습니다. 3백여 년간 12대에 걸쳐 부를 유지해 오고 있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경주 최부잣집. 사람들은 이들을 서라벌의 정의로운 부자, 참부자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재물은 거름과 같습니다.
재물을 나누면 세상을 이롭게 하지만, 움켜쥐면 썩습니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경주 최부잣집 -
noblesse oblige
최부자집의 내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부잣집이 처음부터 만석꾼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석을 일군 것은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의 손자 최국선崔國璿 대代입니다. 그는 일찍이 이앙법을 도입하여 소출량을 늘리는 데 성공했으며, 당시 8할이던 소작료를 5할로 대폭 낮춰 주면서 오히려 재산은 더 늘어 만석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만석꾼이 된 최국선은 이때부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나눔을 시작하는데, 한 승려로부터 “재물은 거름과 같습니다. 재물을 나누면 세상을 이롭게 하지만, 움켜쥐면 썩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나눔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흉년이 들면 최부잣집은 마당에 큰 솥을 걸어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였고, 옷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옷을 지어 입히는 등, 여섯 가지 가훈을 정해 대를 이어 지켜 왔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경주 최부잣집의 성씨인 경주 최씨慶州崔氏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경주 최씨의 계통과 분파
우리나라의 최씨는, 김씨에서 분적한 수성 최씨와 당나라에서 귀화한 충주 최씨를 제외하면 모두 신라 육촌六村 중 돌산 고허촌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이며, 최치원崔致遠을 중심으로 선대와 후대에서 분관되었다고 합니다. 이 중 경주 최씨는 경상북도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인데, 경주慶州의 옛 지명이 월성月城이기 때문에 경주 최씨는 월성 최씨로 부르기도 합니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경주 최씨는 약 102만여 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데, 전체 최씨에서 절반에 가까운 44%를 차지합니다. 또한 상당수의 최씨가 경주 최씨에 뿌리를 두고 갈라져 나갔기 때문에 경주 최씨는 최씨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경주 최씨 945,005 + 월성 최씨 82,843 = 1,027,848
경주 최씨의 계파에는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 광정공파匡靖公派, 정랑공파正郞公派, 사성공파司成公派, 화숙공파和淑公派, 충렬공파忠烈公派 등을 비롯해서 총 27개 파가 있습니다.
경주 최씨의 집성촌
경주 최씨 집성촌으로 잘 알려진 곳은 대구광역시 동구에 있는 옻골 마을입니다. 대구 국제공항에서 동쪽으로 1km쯤 떨어져 있는 이곳은 20여 채의 고택이 어우러져 있는 전통 마을입니다. 조선 중기의 학자 최동집이 1616년(광해군 8년) 이곳에 정착하면서 경주 최씨 광정공파匡靖公派의 집성촌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일곡리, 고령군 우곡면 봉산리,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지내 마을을 비롯해서 전국에 크고 작은 집성촌이 있습니다.
경주 최씨의 기원
“경주 최씨는 최씨의 대종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유래를 지닌 씨족의 하나다.
최씨의 원조는 신라의 전신으로 경주에 자리 잡은 사로국 6촌의 하나인 돌산 고허촌의 촌장 ‘소벌도리공蘇伐都利公’이시다. 신라를 세운 원훈元勳으로 법흥왕 3년에 충선공忠宣公으로 시호諡號를 받았고 태종 무열왕 3년에 문열왕文烈王으로 추봉追封되셨으며 유리왕 9년에 최씨崔氏로 사성받았다. 이것이 성을 갖게 된 유래이다. 경주 최씨의 시조는 소벌도리공의 24세손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시다. 오늘날 거의 모든 최씨의 분파는 고운 최치원 선생을 1세로 하는 경주 최씨에 그 연원淵源을 두고 있다.” - 대전 뿌리공원 경주 최씨 조형물 中
대전 뿌리공원에 있는 경주 최씨의 성씨 조형물에는 경주 최씨의 핵심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경주 최씨의 ‘원시조’는 진한 6촌의 하나인 돌산 고허촌의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입니다. 서기 32년, 유리 이사금 9년에 6촌이 6부로 개칭되면서 신라 6성이 탄생하게 되는데 이때 최씨를 사성받게 됩니다.
*신라 6성 : 이씨李氏, 최씨崔氏, 정씨鄭氏, 손씨孫氏, 배씨裵氏, 설씨薛氏
경주 최씨의 시조, 고운 최치원
경주 최씨의 시조는 소벌도리의 24세손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입니다.
그는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가 되던 해, 빈공과에 합격합니다.
*빈공과 : 당나라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실시한 과거
“햇빛이 활짝 비치니 어찌 요망한 기운을 그대로 두겠으며, 하늘의 그물이 높이 벌여져 있으니 반드시 흉한 족속들은 제거되고 마는 법이다.... 헤아릴 수 없는 큰 죄를 지었고 죄를 용서해 주려 해도 착한 일을 조금도 한 일이 없다. 그래서 천하 사람들이 모두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땅속에 있는 귀신들까지도 남몰래 너를 베어 죽이려고 논의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기세를 빌어 혼을 놀게 하나, 일찍이선을 망치고 넋을 빼앗으리라. …”
- 최치원 선생의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中
서기 875년 당나라 말기, 산둥성에서 소금을 밀매하던 황소黃巢라는 인물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반란군의 세력은 점점 커져 낙양에 이어 장안까지 점령당하게 되고 당 황제 희종僖宗은 쓰촨으로 피신을 가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때 이 ‘황소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당시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최치원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라고 하는 격문을 쓰게 됩니다. 이 격문을 읽은 황소가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정도로 간담이 서늘해졌다고 하는 명문장입니다. 절세의 명문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최치원은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겠습니다.
29세(885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최치원은 한림학사, 수병부시랑이 됩니다. 처음에는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자신의 경륜을 펴 보려 했으나, 6두품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한탄하며 스스로 외직으로 나가 여러 고을의 태수를 지냅니다. 이후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고 신라의 국운이 점점 더 기울어지자 진성여왕에게 시무10여조時務十餘條를 올려 나라의 기틀을 다시 바로잡으려 했지만 진골 귀족에게 막혀 그의 개혁안은 실현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그는 40여 세에 관직을 버리고 자연을 벗 삼아 한가로이 지내다가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문인을 기르며 여생을 마치게 됩니다.
당나라에서 문명으로 이름을 떨친 신라 최고의 엘리트 최치원은 큰 꿈을 안고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기울어 가는 신라에서는 꿈과 포부를 펼칠 수 없었습니다. ‘고운孤雲’이라는 그의 호처럼 외로운 구름이 되어 은둔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나 봅니다. 하지만 그의 높은 학식과 뛰어난 문장은 후대에도 높이 평가되어 성균관을 비롯한 234개의 향교에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의 발자취는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최치원의 발자취 ①해운대
지난 2005년 APEC(아시아 태평양 경제 협력체) 정상들이 함께한 ‘누리마루’가 있는 부산 해운대구 동백섬 정상에는 최치원 동상이 있습니다. 1,200여 년 전에 그랬듯이 지금도 아무 말 없이 이곳의 아름다운 절경에 심취해 있는 듯합니다. 더 이상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없었던 신라 최고의 지성은, 자연을 벗 삼아 떠도는 구름이 되어 이곳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너무 아름다운 절경에 감탄해, 그는 동백섬 남쪽 암석에 자신의 호를 따서 ‘해운대海雲臺’라고 새겨 놓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의 해운대란 지명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또한 이 동상 앞에서는 매년 최치원을 추모하는 다례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최치원의 발자취 ②상림공원
경상남도 함양에는 서쪽으로 흐르는 위천이 있습니다. 이 위천에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숲인 상림공원上林公園이 있습니다. 이 숲은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조성한 숲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래 위천수는 함양읍 중앙을 흘렀는데, 홍수가 날 때마다 하천이 넘쳐 피해가 컸다고 합니다. 이에 최치원이 물길을 지금의 위치로 돌려 위천 변에 둑을 쌓고 그 둑을 따라 나무를 심어 홍수 피해를 막았다고 합니다.
최치원의 발자취 ③최치원기념관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최치원을 추모하는 기념관이 있습니다. 부산 해운대구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중국 장쑤성 양저우시 웨이양구에 지난 2007년 최치원 기념관이 개관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외국인 기념관으로는 최초라고 하는데, 이곳은 최치원이 회남절도사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약 5년간 근무한 곳으로 토황소격문을 쓰게 된 곳이기도 합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그곳에서 관직에 오른 유학자입니다. 하지만, 최치원은 유학자라고 해서 유학만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최치원의 글과 행적을 보면, 불교와 도교뿐 아니라 그 근원이 되는 신교에도 깊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가 신라 화랑 난랑을 추모하기 위해 쓴 비문인 「난랑비鸞郞碑 서문序文」을 보면 신교에 대한 깨달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國有玄妙之道(국유현묘지도) 曰風流(왈풍류)
設敎之源(설교지원) 備詳仙史(비상선사) 實內包含三敎(실내포함삼교) 接化群生(접화군생)
나라에 지극히 신령스러운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그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실은 삼교를 포함하고 모든 생명을 접하여 교화하는 것이다.
且如入則孝於家(차여입즉효어가) 出則忠於國(출즉충어국) 魯司寇之旨也(노사구지지야)
들어와서 가정에 효도하고 나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공자)의 뜻과 같은 것이요
處無爲之事(처무위지사) 行不言之敎(행불언지교) 周柱史之宗也(주주사지종야)
함이 없이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함은
주주사(노자)의 종지와 같은 것이요
諸惡莫作(제악막작) 諸善奉行(제선봉행) 竺乾太子之化也(축건태자지화야)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선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축건태자(석가)의 교화와 같은 것이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조 난랑비 서문」 中
이 「난랑비 서문」을 통해 현묘한 도, 풍류風流는 유불선 이전부터 전해 오는 것으로 삼교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신라 화랑은 단순한 군사 조직이 아니라 나라의 ‘현묘한 도’를 수양하는 주인공이란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최치원의 삶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지금부터 9천 년 전부터 내려오던 인류 최초의 경전인 『천부경』이 그의 손길을 거쳐 후세에 전해지게 됐다는 것입니다. 한민족사를 집대성한 역사서인 『태백일사』에 이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天符經(천부경)은 天帝桓國口傳之書也(천제환국구전지서야)라
桓雄大聖尊(환웅대성존)이 天降後(천강호)에 命神誌赫德(명신지혁덕)하사
以鹿圖文(이녹도문)으로 記之(기지)러니 崔孤雲致遠(최고운치원)이
亦嘗見神誌篆古碑(역상견신지전고비)하고 更復作帖(갱부작첩)하야
而傳於世者也(이전어세자야)라.
천부경은 천제 환인의 환국 때부터 구전되어 온 글이다. 환웅 대성존께서 하늘의 뜻을 받들어 내려오신 뒤에 신지 혁덕에게 명하여 이를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하게 하셨는데, 고운 최치원이 일찍이 신지의 전고비篆古碑를 보고 다시 첩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였다. -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中
최치원은 유학자이면서도 불교, 도교뿐만 아니라 그 근원이 되는 원형문화까지 깊이 체득했기에 천부경을 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최치원이 대문장가로 이름을 떨치면서 경주 최씨는 신라뿐만 아니라 고려에도 크게 세력을 떨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경주 최씨 가문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경주 최씨의 인물 ①최승우, 최언위
최치원崔致遠, 최승우崔承祐, 최언위崔彦撝는 신라의 6두품 출신으로 똑같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빈공과에 급제하고 그 명성을 떨쳤기 때문에 ‘신라 3최’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운명은 서로 달랐습니다. 최치원은 관직을 버리고 은거했고, 최승우는 귀국한 뒤에 후백제 견훤의 일급 참모가 되었습니다. 최치원의 사촌 동생인 최언위는 귀국 후 신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고려가 창건되자 왕건에게 투항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고려 창건 초기에 큰 역할을 하며 요직을 두루 거쳐 평장사까지 오르게 됩니다.
*평장사 : 고려 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2품 관직
경주 최씨의 인물 ②최승로
고려 시대의 인물로는 시무時務 28조로 유명한 최승로崔承老가 있습니다. 그는 신라의 6두품 출신으로 고려에서 수문하시중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서기 935년 신라가 망할 때, 열 살의 최승로는 아버지를 따라 고려 개경으로 가게 됩니다. 그의 나이 불과 12살이었을 때 태조 왕건을 만나 논어를 줄줄 외울 정도로 총명했던 최승로는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나라의 동량으로 성장합니다. 이후 고려 6대 황제인 성종 때, 나라의 전반을 개혁하는 시무책 28조를 올리면서 성종의 절대적 신임을 받게 되며, 그의 공로로 고려는 건국 초기 상태를 벗어나 안정된 국가의 기틀을 갖추게 됩니다.
경주 최씨의 인물 ③최제우
조선 말의 인물로는 동학을 창도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있습니다. 최제우는 경주 최부잣집의 기틀을 놓은 최진립 장군의 후손입니다. 당시 동양에는 서양 제국주의 세력이 물밀듯이 밀려와 국권이 침탈당하던 시기였는데,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어수선한 시기에 최제우는 일찍이 구도에 뜻을 두고, 공부에 전념하며 도를 구했습니다.
고향인 경주 구미산 아래 용담정에 들어가며 ‘뜻을 이루기 전에는 세상에 나서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일심으로 기도에 정진했습니다. 이듬해, 그의 나이 37세이던 1860년 음력 4월 5일, 마침내 최제우는 천주이신 상제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勿懼勿恐(물구물공)하라. 世人(세인)이 謂我上帝(위아상제)어늘
汝不知上帝耶(여부지상제야)아
두려워 말고 겁내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上帝라 이르거늘 너는 어찌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 『동경대전』 「포덕문」 中
이러한 ‘천주님과의 천상문답’을 통해 수운 최제우는 천명과 신교를 받고 도통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오시는 천주님을 모신다’는 ‘시천주侍天主’를 선언하고 ‘다시 개벽’의 새 세상이 열릴 것을 선포하고 동학을 창도하게 됩니다.
이번 시간에는 신라 6성 중의 하나이며 경주 최부잣집의 이야기를 간직한 경주 최씨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밀양 박씨 시조와 박씨 본관에 대해서 포스팅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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