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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꼬꼬무 기묘한 증발 박태순 열사 의문사 실종 사건 검은 그림자 기무사 꼬리에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 시즌3

by 충격대예언 2022. 9. 2.

꼬꼬무 기묘한 증발 박태순 열사 의문사 실종 사건 기무사 검은 그림자 
꼬리에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 시즌3 

[글 포스팅 순서]

1. 기묘한 증발, 그리고 검은 그림자: 박태순 열사 의문사 사건
2. 감쪽같이 사라진 동생
3.  9년만에 납골함으로 돌아온 동생
4. 물음표만 가득한 태순의 죽음
5. 박태순의 정체
6. 박태순을 따라다닌 검은 양복의 남자들
7. 엇갈린 증언, 끝내 밝히지 못한 진실
8. 진실 규명을 위한 끝나지 않은 싸움

9. 꼬꼬무 두 번의 기적 김복연 할머니 누명 부역사건 무기수 엄마의 비밀 재심
10. 꼬꼬무 봉오동 전투 전설의 타이거 헌터 홍범도 장군 홍대장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3
11. 꼬꼬무 백백교 사건 교주 전용해 머리 동두천 마차산 사건 동굴 위치 40회
12. 꼬꼬무 시즌3 서래마을 영아 살해 유기 살해사건 살인범 미토콘드리아 강남 냉동고 37회
13. 꼬꼬무 시즌3 애기 아저씨 후암동 방화 살인 사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 36회

14.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꼬무 시즌 3 재방송 다시보기 시간

 

 

기묘한 증발, 그리고 검은 그림자: 박태순 열사 의문사 사건


9월 1일 목요일 10시 30분에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3 (꼬꼬무 시즌3, 시청률: 4.0%) 43회에서는 '꼬꼬무- 기묘한 증발, 그리고 검은 그림자' 편으로 박태순 열사 의문사 사건 이야기를 재조명하였습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이윤지, 슈퍼주니어 규현, SBS 조정식 아나운서가 출연했습니다

 

감쪽같이 사라진 동생


때는 1992년 9월 서울, 29살 박영순 씨는 막 해외 출장에서 돌아왔습니다.
영순 씨는 가족에게 줄 선물을 한아름 챙겨 집으로 갔습니.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아내의 표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여보, 도련님이 사라졌어요.


영순 씨의 세 살 아래 남동생이 사라졌다는 것이 었습니다.
당시 동생은 형 영순 씨의 집에서 같이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며칠째 집에 안 들어왔고, 회사에 전화했더니 일주일째 출근을 안 했다고 합니다.
아래가 영순 씨 동생의 사진입니다.


이름은 박태순, 27살. 삼남매 중 막내였습니다.
태순이는 금속재료를 다듬는 일을 하는 선방공이었습니다.
엄청 성실하고 책임감도 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가족들은 태순이를 찾아 나섰습니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태순이가 갈만한 곳을 닥치는 대로 찾아 다녔습니다.
그리고 곧, 태순이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사람을 찾았습니다.
직장동료 김 씨였습니다.

김 씨가 태순이를 마지막으로 본건 8월 29일 토요일이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주6일 근무라, 토요일에도 회사에 출근해야 했습니다.
그날 일이 끝나고 다같이 태순이의 환영식을 해줬다고 합니다.
밤 8시가 넘어 술자리가 끝났고, 두 사람은 같이 1호선 역곡역으로 갔습니다.


당시 지하철 노선도입니다.
지금에 비하면 단순합니다.
태순이의 직장은 역곡역에 있었고, 집은 석수역이었습니다.
태순이가 집에 돌아가려면 구로역에서 한번 환승해야 했습니다.
김 씨는 그날 구로역에서 태순이랑 헤어졌고, 그게 김 씨가 본 태순이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CCTV도 없던 시절, 가족들은 태순이가 집에 오다가 교통사고가 났나, 아니면 퍽치기를 당했나, 여러 가능성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일단 집 근처 파출소부터 찾아 갔습니다.
파출소에 가서 혹시 교통사고 난 거 있냐 물었더니 없다고 했습니다.
이어 역무실에 가서 혹시 무슨 사고가 난 게 있냐 했더니 또 없다고 했습니다.
병원도 알아봤는데, 역시 그런 일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말그대로, 태순이는 완전히 증발한 것입니다.

 

 9년만에 납골함으로 돌아온 동생


형 영순 씨는 태순이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렸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깜짝 놀랄 이야기를 했습니다.

"동생 친구들이 그러더라고요. 
동생이 제 이름을 가지고 다른 회사에 취업하고 그랬었다고. 
한 4~5년 정도를 동생이 제 신분증을 가지고 생활했던 거 같아요." 

–형 박영순 씨


그동안 태순이가 형 박영순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용한 이름이 하나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박영순, 조인수, 박상원 등 동시에 여러 이름을 쓰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태순이가 실종 전 친구들한테 "미행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사라진 태순이의 흔적은 여기까지였습니다.
그 뒤로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막내 아들이 갑자기 실종됐는데, 부모님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혹시 어디 다니다가도 비슷한 애가 있으면 우리 태순이 아닌가 하고…
어떨 땐 가다가도 차를 멈추고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그럴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아버지 박종건 씨


부모님은 혹시나 해서 태순이 계좌에 돈도 넣어주고, 이사도 안 가셨다고 합니다.
혹여나 태순이가 돌아올 때 엇갈리면 안되니까요.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무려 9년이 지난 2001년.
드디어 태순이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태순이는, 전혀 뜻밖의 모습이었습니다.


태순이는 실종된지 9년만에 납골함으로 가족 곁에 돌아왔습니다.
가족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준 건,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였습니다.
가족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문사위에 진정을 냈기 때문입니다.
의문사위는 실종 신고가 된 사람들에 대해 신원 확인 절차에 돌입했고, 그 과정에서 태순이를 찾았습니다.

도대체 태순이가 왜 죽은 거냐고 물으니, 달리는 기차에 치여서 즉사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당시 사고 현장에서 찍었다는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람이 김태순이라고 합니다.
전혀 못 알아보겠지요?
사인은 두뇌파열.
얼굴은 형체가 아예 없습니다.
이 사진만 봐서는, 찾고 있는 김태순이인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문으로 확인해보니 태순이가 맞다고 했습니다.
사고 직후에 경찰이 열 손가락의 지문을 찍어둔 게 있었고, 대조해보니 태순이의 주민등록상 지문과 일치했다고 합니다.

"살아 있을 거라 믿고 있었는데 아니라는 결과가 나오니까… 
부모님은 저보다 더 놀라셨어요. 
동생 유골함 보면서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그때 처음 봤어요. 
어머니는 며칠 누워 계셨어요. 
조그마한 희망조차 사라지니까, 맥이 탁 풀리는 거죠." 

–형 박영순 씨


그저 살아 돌아오기만 바랐던 태순이의 죽음에 가족도, 친구들도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 슬픔은 의문으로 이어졌습니다.
태순이의 죽음에 이상한 점이 한 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음표만 가득한 태순의 죽음

 


물음표 하나, 태순은 왜 사고직후 발견되지 않았나?

기차 사고는 태순이 실종된 그날 밤 9시 55분에 일어났습니다.
회식을 마치고 전철을 탄 그 이후였습니다.
태순이가 실종되고 나서 가족들이 경찰서, 역무실, 병원 다 뒤지고 다녔잖아요?
열차 사고가 났으면 당연히 사고가 접수됐을 텐데. 왜 태순이의 사고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까요?


물음표 둘, 태순은 왜 한 정거장 앞에서 내렸나?

태순이의 집은 석수역인데, 사고는 그보다 한 정거장 전인 시흥역에서 일어났습니다.
태순이가 전철을 타고 가다가 중간에 내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김태순이는 왜 집까지 안 오고, 거기서 내렸을까요? 


물음표 셋, 전철을 탔는데 사고는 왜 기차 승강장에서 났나?

사고 지점도 이상했습니다.
태순이는 당시 전철을 탔습니다.
시흥역은 기차와 전철이 모두 통과하는 곳인데, 선로는 각각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태순이 사고 지점은 전철이 아닌 기차 승강장 쪽이었습니다.
태순이는 그날 밤 왜 전철에서 내려 기차 승강장 쪽으로 간 걸까요?
혹시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한 걸까요?
유서도 없었고, 그럴만한 징후도 전혀 없었다며 가족과 친구들은 태순이가 그럴 사람이 절대 아니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물음표 넷, 사라진 부기관사

이 사고를 직접 봤다는 유일한 목격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사고 기차의 기관사입니다.
기관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고는 순식간이었다고 합니다.
기차 정면에 비틀거리는 사람이 보여 급제동하고 기적을 울렸는데도, 그 사람이 순식간에 선로에 들어와서 사고가 났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렇게 이 사고는 '신원불상의 남자가 철로를 무단횡단 하다가 그대로 치여 사망'한 것으로 처리됐습니다.

그런데 당시 기관실에는 기관사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기차 운행은 보통 기관사와 부기관사가 2인 1조로 함께 짝을 이뤄 투입됍니다.
사고 기차는 광주행 하행선 무궁화 열차였습니다.
그 방향을 생각하면, 태순이는 기차의 왼쪽에 부딪혔을 것입니다.
그럼 오른쪽에 탑승하는 기관사보다, 왼쪽에 있는 부기관사가 사고를 더 명확하게 봤을 것입니다.

의문사 조사위원회 조사관은 기관사에게 그날 함께 한 부기관사가 누군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기관사는 당시 부기관사가 누군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주말운행이여서 평소 같이 다니던 짝이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같이 일한 동료가 누군지 모른다니, 황당한 답변이었습니다.
의문사위에서 사고 당일 운행 일지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폐기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부기관사를 찾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못 찾았습니다.


물음표 다섯, 사라진 크로스백

여러 의문들 중에서 가족과 친구들이 가장 이상하게 여기는 부분은, 태순이의 소지품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당시 태순이는 신분증, 집열쇠 등을 넣기 위해 검정 크로스백을 분신처럼 메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망 후 발견된 유일한 소지품은 호주머니에서 나온 전철 정액권 한 장이었습니다.
평소 늘 갖고 다니던 지갑조차 없었습니다.
유실물 센터에서도 습득된 물건이 없다고 했습니다.


물음표 여섯, 9년 전에는 확인되지 않은 지문

변사자의 신분이 태순이라는 걸 지문 조회로 알았잖아요? 
의문사위에서 지문 신원조회를 의뢰했더니 하루만에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쉽게 알 수 있는 걸, 어떻게 그동안 확인하지 못했을까요?
황당한 건, 9년 전에도 신원 조회를 했었는데 그땐 신원을 못 밝혔다는 것입니다.
같은 지문인데, 9년 전에는 식별이 불가능했고, 지금은 식별이 가능하다? 너무 이상합니다.

 

박태순의 정체


친구들에 따르면, 태순이는 실종 1주일 전에 미행이 붙어 약속에 늦은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태순이는 수시로 미행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대체 누가, 왜?

태순이가 금속재료를 다듬는 일을 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태순이는 처음부터 공장 노동자는 아니었습니다.


한신대학교 철학과 85학번, 이른바 운동권 대학생이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후 'F1'이라는 서클에 가입했는데, 학교 내에서 비밀리에 시위를 주도하던 언더서클이었다고 합니다.

이 서클이 특히 잘하는 건, '사문서 위조'였습니다.
아래는 김태순이가 위조한 이력서입니다.


이름이 형 박영순으로 되어있고, 나이, 학력을 싹 바꿨습니다.
태순이는 왜 본인이 아닌 형의 이름으로 거짓 이력서를 만들었을까요?
그건 태순이 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친구들도 본인의 이름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이력서를 만들어 취업에 이용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행동한 건, 아래의 사람의 영향이었습니다.


열악한 노동 현실을 바꾸려 애쓰면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던, 결국 분신 항거로 생을 마감한 전태일 열사입니다. 전태일은 초등학교 밖에 못 나와 한자로 된 근로기준법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주 말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나한테도 대학생 친구가 한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그가 남긴 이 말에 영향을 받은 대학생들이 들불처럼 들고 일어났습니다.
너도나도 "태일이의 대학생 친구가 되겠다"며 노동현장에 직접 뛰어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학생 출신 노동자는 '학출'이라 불렸습니다.
학출들은 공장에 취직해 노조도 설립하고, 학교를 못 다닌 동료들을 위해 야학도 열었습니다.
그 중심에 김태순이 있었던 것입니다.
태순이는 진심으로 노동운동에 나섰습니다.
학교도 자퇴했고, 가족들이 말려도 "목표하는 게 있으니까 이 길로 가겠다"며 자신을 이해해달라 했다고 합니다.

"태순이가 손이 조그맣고 참 고왔어요. 
다른 노동자들 손하고 본인 손하고 너무 비교가 되니까, 그걸 참 고민했었어요. 
그래서 일도 장갑 안 끼고 그냥 함부로 하고. 
손이 거칠어지게. 그랬던 기억이 나요."

 -친구 이창연 씨

 


당시 학출은 빨갱이, 불순세력으로 불렸습니다.
노동운동자는 빨갱이로 낙인 찍던 시대였습니다.
이력서에 대학생이라 쓰여 있으면 바로 탈락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분 세탁은 필수였습니다.
일부러 학력을 낮춰 적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런 위장취업은 운동권의 핫 트렌드였습니다.
1985년에서 87년까지, 3년동안 위장취업으로 해고된 학출이 624명이었다고 합니다.
걸린 게 이 정도면, 안 들킨 건 더 많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학출들 중에는 심상정, 원희룡, 김문수, 송영길, 손학규 등 유명 정치인이 많습니다.
이 사람들처럼 태순이도 위장 취업자였던 것입니다.

당연히 위장 취업은 불법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태순이는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등의 혐의로 1년 6개월형을 선고 받고 교도소에 들어가 징역을 살고 나왔습니다. 그때가 실종 2년 전이었습니다.

 

 

박태순을 따라다닌 검은 양복의 남자들


태순이는 출소하자마자 또 공장에 들어갔습니다.
이러니 수사 기관에서 어떻게 봤을까요?
요주의 인물인 것입니다.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기 시작한 건 출소 직후 부터였습니다.
태순이와 친구들이 어딜 가든 누군가의 미행이 붙은 게 느껴졌습니다.


한 번은 친구들끼리 MT를 간 적이 있는데, 경찰이 다가와서 불심검문을 한다며 신분증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 때 경찰 옆에 있던 검은 양복의 남자들이 어느 회사에 다니냐고 물어 친구들은 별 의심 없이 이름과 직장을 알려줬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태순이 일행을 밤새 감시하고 몰래 촬영까지 했다고 합니다.

MT를 다녀온 후, 친구들은 직장에 위장취업한 사실이 발각됐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이름을 빌려준 친구들 집으로도 확인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신원이 다 들통 난 것입니다.

태순이 후배 철우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둘이 자신을 쫓아오길래 도망쳤다가 잡히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철우에게 "박태순 어딨어!"라며 행방을 물었습니다.
검은 양복의 남자들이 태순이를 찾고 있던 것입니다.

검은 양복들은 철우를 경찰서에 인계하고 사라졌습니다.
그 때 철우를 인계 받은 형사라면, 그 검은 양복의 정체를 알지 않을까요?
그래서 의문사위에서는 그 백철우 사건을 처리했던 합천 경찰서를 찾아가 담당 형사를 만났습니다.
형사가 수첩을 뒤적이더니, 그 검은 양복에 대한 단서를 알려줬습니다.


"군 수사관 상사 장ㅇㅇ"
"군 수사관 6급 이ㅇㅇ"

검은 양복 남자들의 정체는 기무사, 군대 내 정보기관인 국군기무사령부 소속 군인들이었습니다.
김태순은 민간인인데 왜 기무사에서 쫓고 있었을까요?
바로 '마파람 계획' 때문이었습니다.

마파람, 순우리말로 남풍을 뜻합니다.
군대 내에 있는 좌익 세력을 관리하겠다는 계획입니다.
운동권 학생들도 때가 되면 군대에 가는데, 그럼 이 학생들을 A, B, C 등급을 매겨 문제사병으로 관리를 하는 것입니다.
태순이는 민간인인데 왜 '마파람 계획'의 대상이 됐을까요?
친구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군대에 간 이창연으로 인해, 태순이도 민간인 사찰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창연은 마파람 A급이었습니다.
전담팀이 따로 있을 정도로.
그게 바로 검은 양복, 수사관 장 씨와 이 씨였습니다.

"방위 근무를 하다가 퇴근하려고 사복으로 갈아입으려고 하면, 옷이나 지갑이 흐트러져 있다는 걸 수시로 느꼈어요. 누가 건드렸네 했죠. 

(9년 뒤) 의문사위 실지조사에 나갔는데, 기무사 요원이 저한테 개인적으로 툭 치면서 '1년 반 동안 비싼 경호원 대동했다고 생각해' 그러더라고요. 

그 얘길 듣는데 얼마나 소름이 끼치던지…"

 –친구 이창연 씨

 


이 검은 양복들은 창연이 뿐만 아니라 창연이가 만나는 모두를 감시했습니다.
이들은 감시 대상의 집에 몰래 침입해 뒤지기도 했습니다.
검은 양복 장 씨가 직접 그린 내사 체계도를 보면, 맨 위에 '용의자 이창연', 그 밑에 백철우, 박태순 등의 친구들 이름이 적혀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엇갈린 증언, 끝내 밝히지 못한 진실


태순이의 죽음과 관련된 여러 의문점들. 이 의문점들이 모두 우연의 일치일까요? 


위의 우수열, 문승필, 우종원. 
이 대학생들은 모두 기차에 치여 사망했고, 사건은 자살로 내사 종결됐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세명 모두 운동권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태순이의 죽음도 이와 연관이 있는 걸까요?
진실은 이 사건의 키를 쥔 사람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바로 기무사 수사관, 검은 양복의 장 씨.

의문사위는 기무사 장 씨와 대면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의문사위 조사관이 박태순을 미행했냐고 묻자 장 씨는 방어적으로 대답하거나 답변을 거부했습니다.
어떤 미행이나 감시도 없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왜 내가 미행합니까.
단서가 있습니까?


근데 전혀 예상치 못한 제보자가 나타났습니다.
장 씨와 같이 활동했던, 동료 기무사 이 씨였습니다.
이 씨는 당시 퇴직하고 민간인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씨가 어떤 심경에 변화가 있었는지, 아주 결정적인 진술을 해줬습니다.

 

"장ㅇㅇ이 1992년 9월경, 좌경계 사무실을 방문해 저에게 인사말을 건네면서 '휴가 나와서 들렀다'라고 하면서 이야기 도중에 '전에 우리가 동향 내사하였던 박태순이 전철역에서 죽었다'라고 하여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하였더니, '수원지역의 경찰들을 만나고 올라왔는데 경찰들 이야기가 박태순이 죽었다'라고 하더라며 작은 목소리로 웃음을 띠면서 이야기했다."

 –기무사 이 씨의 진술 中


태순이가 죽은 걸 1992년 9월에 장 씨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태순이가 실종되고 한달도 안 된 시점입니다.
그때는 가족들이 실종된 태순이를 찾아 헤맬 때 입니다.
그런데 태순이가 죽은 걸 장 씨와 경찰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진술이었습니다.


장 씨는 이 씨의 진술이 절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한 명은 분명히 들었다고 하고, 다른 한 명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진술이 엇갈렸습니다.
결국 의문사위는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제안했고, 장 씨와 이 씨 모두 기꺼이 하겠다고 수락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하기 직전, 두 사람 모두 입장을 번복하고 조사를 거부했습니다.
이후 진행된 조사에서 장씨는 끝까지 박태순 미행과 감시에 대해 부인했습니다.

의문사위는 기록을 통해서라도 단서를 찾으려고 기무사, 경찰, 법무부에 박태순 내사 기록 열람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청은 기록이 없다고, 법무부는 대외비라서 협조할 수 없다고, 기무사는 자료를 폐기했다고 했습니다.

결국 첫번째 의문사위 조사에서는, '진상규명 불능'이란 결과가 나왔습니다.

 

"상식에 비춰볼 때 상당한 의문이 남는 지점이 있다는 거죠.
구체적으로 공작했던 사건 기록, 내사였든 사건화했던 기록이든, 그 기록에 접근할 수만 있었어도 좀 더 진상 규명에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아쉬움이 남습니다."

-당시 의문사위 조사관 정상영 씨


박태순 의문사 사건은 2003년 2기 의문사위가 했던 1년간의 두번째 조사에서도 '불능', 2005년 진화위(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한 4년 7개월간의 세번째 조사마저도 '불능'이 나왔습니다.

 

 

진실 규명을 위한 끝나지 않은 싸움


어느날 갑자기 증발해버린 태순이는 가족과 친구들 곁으로 돌아와서 마석 모란공원에 묻혀습니다.
거기에는 "대학생 친구가 한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했던, 그 전태일 열사가 묻혀있는 곳입니다.
김태순은 전태일 열사 곁에 묻힌 것입니다.


부모님은 9년만에 돌아온 아들을 자주 보러 가셨습니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겠지요?
유족 입장에선 사인이라도 밝히고 싶을 텐데, 그 한이 얼마나 클까요?
30년이 지난 지금, 아버지는 9년 전에 막내 아들 태순이 곁으로 가셨습니다.
아흔을 앞둔 어머니는 기력이 많이 쇠하신 상태입니다.

형 영순 씨와 태순의 친구들은 지난해 3월, 또 한번 진상규명을 요청했습니다.
이번이 네번째입니다.
이들이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요?
태순이가 떠난 이후, 남겨진 사람들은 마음의 빚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좋은 친구였고 훌륭한 친구였기 때문에, 내가 그럼 뭐라도 그 길에 뭔가를 더 해야한다. 
태순아 내가… 조금이라도 어쨌든 열심히 해 볼게. 
네가 어쨌든 내 안에 살고 있다."

 -친구 정훈록 씨

 

 

"저도 속상하게 생각하고 미안하게 생각하는 건, 제가 너무 불철저하게 생활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벌써 태순이가 죽은 지 올해가 30년째인데, 30년동안 어깨에서 떠나질 않아요. 무거워요." 

-친구 이창연 씨

 

 

"도움이 될 만한 그런 게 있어야 하는데, 동생한테 특별하게 뭔가 해준 게 없는 거 같아요. 
제가 뭐 해준 게 하나도 없는 거 같아서… 미안하죠 가슴 속엔 항상.
 사고가 왜 났는지, 어떤 이유에서 그 일이 벌어졌는지 그런 사실들은 저희가 알아야 하지 않나." 

–형 박영순 씨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박태순 의문사에 대한 조사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이번엔, 가족과 친구들에게 새겨진 물음표가 마침표가 될 수 있을까요?

이건 노동운동가 박태순 열사 공장에 다닐 때 쓴 시입니다.

 

제목 <마석 모란공원에 가 보지는 못했다>

전태일과 박영진과 문송면이 강민호가 있는 곳
그리고 또 다른 이름들이 있는 곳
거기에 묻혀질라고 두런거려 본다
비가 우둑거리면
받쳐 든 우산이
그 우산에 가려진 얼굴들에 그늘이 드려지겠지
하다못해 꽃 한 송이 조금 들고 울어줄 친구라도
다른 동지들을 찾기 위해 왔다 들려줄 것이다
...
-1991년 6월


노동운동 동지들이 묻혀 있는 모란공원에 대한 시입니다.
박태순도 운명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그 곳에 함께 묻혔습니다.

'꼬꼬무 시즌3' 인터뷰에 응한 친구들은 하나같이 기꺼이 나서줬다고 합니다.

우리 태순이 일이라면!


그만큼 태순이가 좋은 사람이었단 거겠지요?
박태순 의문사 사건, 아직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진실이 밝혀지길 바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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