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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

꼬꼬무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학살 사건 사망자수 원인 실종자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3 재방송

by 충격대예언 2022. 5. 20.

꼬꼬무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학살 사건 사망자수 원인 실종자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3 재방송

[글 포스팅 순서]

1. 우리나라 군인들에게 맞아 죽은 사람들
2.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시대적 배경(10.26사태, 12.12사태)
3. 거리로 나온 광주 시민들, 완전히 고립된 광주
4. 시위대=빨갱이, 정신교육까지 받았던 군인들
5. 무차별 시민 학살, 살기 위해 총을 든 시민들
6. 전남 도청에 남은 최후 결사대, 주검으로 돌아온 아들 재학이
7. 결국 세상에 드러난 광주의 진실
8. 40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 광주 민주화 운동 이야기

9. 꼬꼬무 시즌3 빙고호텔 윤석양 이병 양심선언 보안사 민간인 사찰 폭로사건 VIP룸 비밀 캐비닛
10.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사건 정리/범인 기관사,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3
11. 군함도 하시마섬 시즌3 사도광산 강제징용 위치 유네스코 등재 역사 왜곡
12. 꼬꼬무 시즌3 최은희 신상옥 납치 탈출 사건, 26회 톱스타와 비밀 테이프, 재방송 시간

 

5월 19일 목요일 10시 30분에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3 (꼬꼬무 시즌3, 시청률: 3.8%) 29회에서는 '나를 잊지 말아요, 오월이 오면 라는 제목으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시 재조명했습니다.
이날 이야기 친구로 마마무 휘인, 강훈, 배우 송영규가 출연진으로 나왔습니다.

 

우리나라 군인들에게 맞아 죽은 사람들

1980년 5월 19일, 평범한 주부인 길자 씨는 당시 고등학교 1학년 아들 재학이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친구 집인데 군인들이 사방에 있어서 무서워서 집에 못 가겠다며 데리러 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어머니 길자씨는 아들을 데리러 친구집에 갔고, 거리에 총을 둔 군인들이 사방에 포진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눈에서 왠지모를 살기가 느껴지는 군인들을 피해 아들과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 졌습니다.
군인들에 의해 29세 청년 김경철 씨가 군인들에게 무차별한 폭행을 당해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결혼한지 얼마 안 된 새신랑이었습니다.


사망하기 며칠전에 딸 백일잔치도 했습니다.
직장 동료들과 식사를 하러 가는 길 다짜고짜 군인들에게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두들겨 맞았던 그는, 청각장애자로 그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은 경철 씨 말고도 더 많았다고 합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시대적 배경(10.26사태, 12.12사태)

우리나라 군인이 우리 국민을 백주 대낮에 대로변에서 무차별한 폭행을한 사건이 바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입니다.
당시에 이를 목격한 기자는 이를 '인간사냥'이라고 불렀습니다.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몇 개월 전 10월 26일에 10.26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당시 정희 대통령은 그의 충복인 김재규에 의해서 총에 맞고 사망하였습니다.
그들 모두 유신 독재체제 권력의 중심이었고 10.26은 독재 정권의 균열되어 스스로 무너졌음을 의미했습니다.

기나긴 독재 끝을 국민들은 민주화에 따뜻한 봄이 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1979년 12월 12일, 박정희를 롤모델로 삼았던 당시 군 보안사령관이자 중앙정보부 서리였던 전두환은 정권을 잡는 방법마저 박정희 대통령에게 그대로 배워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전두환이 이끌던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당시 대통령은 최규하 대통령이었지만, 실권은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내세웠던 명분은 정권이 불안정한 시가에 북한의 침략 위험이었고, 학생들이 폭동을 일으켜 질서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이 되면서 대학생들과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더욱더 강렬하게 표출되었습니다.
이에 전국적으로 시위가 벌어졌고, 그 중심에는 대학가가 있었습니다.


대학생들은 전두환의 퇴진과 계엄령 철폐를 외쳤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지켜볼 수 없었던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북한의 침공 가능성을 명분으로 비상계엄을 확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전방으로 향해야 할 군부대는 상당수 대학가로 향했고, 모든 국민들의 정치 활동을 중지시켰습니다.

 

거리로 나온 광주 시민들, 완전히 고립된 광주

 


결국 시위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으나 광주만은 그 열기가 가라안지 않았습니다.
이에 5월 18일 공수부대가 광주로 추가로 배치되어 시위를 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시위에 피범벅이 된 사상자가 속출했습니다.
군인들의 무차별한 진압으로 가족과 친구, 연인 등을 잃은 광주의 시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했고 더욱 거세게 반발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만 명이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시위대의 시위는 더욱더 거세졌지만, 언론을 탄압하고 통제한 신군부 세력에 의해서 광주의 소식은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기사는 썼는데 윗선에서 철저히 막아 모조리 삭제되었습니다. 
당시에 기자들이 단체로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사직서에는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 단 한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광주로 통하는 버스, 기차도 전부 운행 중단이 됐고, 시외전화도 다 끊겼습니다.
이에 광주는 홀로 더욱더 고립되어 갔습니다.

그러는 중에 계엄군과 시민들 사이에서는 엄청난 혈투가 벌어졌습니다.
5월 21일 계엄군들은 수백 발의 총알로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계엄군들은 시위대뿐만 아니라 단순한 행인들에게까지 총을 발포해 이날 발생한 사망자만 최소 50여명이라고 합니다.

 

시위대=빨갱이, 정신교육까지 받았던 군인들

당시 계엄군은 왜 그랬을까요?
당시 공수부대원으로 광주에 갔던 최병문씨의 증언을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옛날에 우리가 정말 심했구나.
말도 안 되는 짓을 했구나' 생각하지
당시에는 몰랐다.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위에서는 북한에 의한 '광주 폭동'이라고 생각했다.
빨갱이와 다 똑같은 폭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쟤들은 다 폭도다.
때려도 된다'라고 생각이었고,
그게 옳은 길인 줄 알았다.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투입되기 석 달 전 강력한 정신 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상부에서 부대원들에게 시위대는 빨갱이이자 적이라고 주입시켰고, 이른바 '충정훈련'이라는 시위 진압 훈련도 따로 받았다고 합니다. 충정훈련이란 진압봉으로 사람을 때리는 훈련이었습니다.


어디를 어떻게 때려야 한 방에 제압하는지 집중적으로 훈련을 했습니다.
특히 충정훈련을 할때는 공수부대원들의 외출이나 외박이 전면 통제되었고 잠도 제대로 못자고 24시간 대기하면서 마음속에 서서히 시위대에 대한 독을 품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참상을 만든 것은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인데, 정작 싸우는 것은 광주 시민군과 군인이었습니다.
애먼 청년들끼리 서로 피를 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무차별 시민 학살, 살기 위해 총을 든 시민들

 


14살 박기현 군은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날 자전거 타고 서점에 책 사러 나갔다가 계엄군 진압봉에 머리를 심하게 맞아 사망했습니다.


24살 최미애 씨는 집 앞 골목에 남편을 마중 나왔다가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뱃속에 있던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습니다.


11살 전재수 군은 뒷동산에서 미끄럼 놀이를 하다가 총소리 듣고 놀라서 도망치는 중에 벗겨진 고무신을 줍다 빗발치는 총알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던 시민들은 광주를 지키기 위해서 무력으로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민들은 시민군에 열렬한 박수를 보냈고 한 마음으로 응원했습니다.
또한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혈액을 공급하기 위해서 시민들은 너도나도 병원을 찾아 헌혈을 했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전남 도청에 남은 최후 결사대, 주검으로 돌아온 아들 재학이

계엄군 투입 9일째, 계엄군은 탱크까지 동원한 최후의 진압 작전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시민군은 대표를 만들어 계엄군과 협상을 시도하였습니다.


시민군의 조건

  • 계엄군 병력 철수
  • 무차별한 폭력진압 사과
  • 계엄군에 의해서 잡힌 시민 석방

하지만 계엄군은 어떤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마지막 경고이니 무기를 버리고 모두 해산하라고 했습니다.

시민들은 도청에 남아 마지막을 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민군 지도부는 까까머리랑 단발머리를 불러냈습니다. 어린 학생들만 모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후배들에게 부탁했습니다.

너희라도 꼭 살아남아서
이 일을 기억하고 증언해라.


이에 그중 일부는 떠밀리듯 도청을 나왔고 일부는 남았습니다.

재학이가 돌아오기로 약속한 통금시간이 지났는데 아들 재학이가 집에 돌아오지 않자 엄마는 초조해졌습니다.
그때 재학이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 나 여기서 끝까지 남기로 했어.

엄마가 울고불고 매달렸지만 아들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끝까지 도청을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남은 최후 결사대 200여명은 각자의 마지막을 준비했습니다.
가족에게 전화하는 사람, 유서를 쓰는 사람, 그리고 집에서 깨끗하게 목욕재계를 하고 나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계엄군이 이미 도청을 포위한 새벽 3시 50분, 도청에서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가두방송의 주인공 박영순 씨는 간절하게 외쳤습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모두 도청으로 나오셔서 시민, 학생들을 살려달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다.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는 끝까지 광주를 사수할 것이다.
우리 형제, 자매들을 잊지 말아 달라.


이 애절한 목소리는 광주시내에 울려퍼졌습니다.

새벽 4시, 도청 곳곳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일방적인 계엄군의 공격이 1시간 가까이 이어졌고, 이에 시민들은 하나 둘 쓰러져갔습니다.
그 속에 군인들을 무서워 하던 재학이와 친구 종필이도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동창인 창근이가 죽은 것을 보고 시신을 수습하는 것을 보고 통행금지 시간 저녁 7시 전에 집으로 가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사늘한 주검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재학이는 16살, 광주상업고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꿈에서라도 아들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단 한번도 꿈에서도 만나지 못한다며 눈물을 흘려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아들,
엄마 안 보고 싶디?
 꿈에서라도 한 번 꼭 보자.
엄마는 너무너무 보고싶어.

재학아,
오늘 저녁에는 꼭 한  번 보자.
하늘나라에서 친구들하고 즐겁게 살아.


그날 새벽 시민군 17명 사망, 200여 명이 체포돼었습니다.
하지만 신군부는 계엄군이 도청 진압을 자축했고, 진압 작전 도중에 사망한 이는 한 명도 없다는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신군부는 정적 김대중을 북괴의 사주를 받아 광주에 폭동 사태를 일으킨 주동자로 만들어, 내란 음모 혐의를 씌웠습니다.

마침내 1980년 9월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였습니다.
국민들 대부분 5.18은 빨갱이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믿고 있어서 전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언론에서는 5.18은 금기어가 되어 버렸고, 언급 시에는 유언비어 유포죄로 검거됐습니다.
추도식을 위해서 유족이나 피해자들이 모일 수도 없었고 이들은 지속적으로 감시받았습니다.

 

결국 세상에 드러난 광주의 진실

하지만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게 되어있듯이, 1987년 여름 독일에서 외교 행낭이 하나 도착했습니다.
장용주 신부님은 자신이 보고 듣고 아닌 진실을 기피해선 안 된다며, 그것을 알리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보고 듣고 아는 진실을 
외면하고 기피해서는 안된다.


5.18의 생생한 기록이 담긴 외신 보도 영상을 장용주 신부님이 독일에 있을 때 직접 구해, 7년이 걸려 우리나라로 들여온 것입니다. 다행히 독일 정부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반입에 성공했습니다.
신부님은 지하 골방에서 2일 동안 천 개 정도의 비디오테이프를 복사해 전국 성당으로 보냈습니다.


그렇게 광주의 참상은 조금씩 세상에 알려졌고, 국회에서까지 상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88년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신군부 수뇌부가 참석한 청문회에서 이들은 변명과 모르쇠로 일관하였습니다.
발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명령한 이는 없고 군인들이 스스로 지키기 위한 자유 발포였기에 정당방위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전두환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도라고 하는 등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서는 발뺌을 했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포기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고 결국 5.18 특별법이 제정됐고, 책임자에 대한 재판이 열려 전두환은 사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수감 2년 만에 국민 통합을 명분으로 특별 사면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2021년 사망 전까지 사죄와 속죄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40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 광주 민주화 운동 이야기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무고한 시민 274명이 사망했고, 3,700여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그리고 계엄군은 23명이 사망, 115명이 부상당했습니다.
또한 시에 신고된 실종된 행방불명자만 400명이 넘습니다.

그중 공식 인정된 피해자는 단 78명 뿐이고, 나머지는 여전히 소문만 무성한 상태이며 행방을 모르고 있습니다.
군인들이 트럭에 싣고 가버렸다, 산 속에 암매장 됐다는 말들어 돌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실종자들을 찾을 길은 막막합니다.
40년이 지나도록 광주 민주화 운동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광수부대원으로 광주에 투입됐던 최병문 씨는 동료들이 용기내 입을 열어주길 부탁했습니다.

옛날 우리 동료들이 한 번 용기를 내줬으면 한다. 
부대원들은 알고 있다, 
관여된 사람은. 현장에 있던 동료들이 나서서 
'그때 어떤 사람 어디에 묻었다' 이런 식으로만 
얘기해줘도 큰 도움 안 되겠나. 
그 사람들 뼈라도 찾았으면 싶은 마음이다.

이에 재학 군의 어머니는 끝까지 5.18을 잊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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