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시와 피 윤동주 정병욱 송몽규 일본 생체실험 마루타 34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 재방송
[글 포스팅 순서]
1. 서로를 흠모했던 두 남자
2. 윤동주는 형무소에, 정병욱은 전쟁터에
3. 주검으로 돌아온 윤동주, 그리고 수상한 주사
4. 일본의 만행, 끔찍한 생체실험
5. 스스로 부끄러워 했지만, 절대 부끄럽지 않았던 윤동주
6.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아픈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7. 작전명령 174호 장사 상륙작전 장사리 전투 이명흠 대위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 재방송
8. 살인범의 진실 게임 움막 살인 사건 울산 우도산 박동일 형사 정수호 32회 재방송
9. 삼청교육대 1980 불량배 소탕작전 사건 위치 31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0. 광주 민주화 운동 학살 사건 사망자수 원인 실종자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3 재방송
11. 꼬꼬무 재방송 다시보기 시간
서로를 흠모했던 두 남자
6월 30일 목요일 10시 30분에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3 (꼬꼬무 시즌3, 시청률: 3.2%) 34회에서는 '시와 피'라는 부제로 정병욱 씨의 그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1940년 봄, 경성 연희전문대학교(연세대학교)의 신입생 19살 정병욱 씨가 경남 하동에서 서울로 유학을 왔습니다.
어느날 기숙사 방으로 누군가가 찾아왔습니다.
그를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오랫동안 자신이 흠모해온 선배 윤동주 였던 것입니다.
정병욱이 신문에 기고했던 글을 본 윤동주가 그의 글을 마음에 든다며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오똑하게 쭉 곧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 몹시 단정하고 결백했었다.
그는 한마디로 미남이었다.
정병욱 씨가 윤동주에 대해 묘사한 글입니다.
윤동주는 병욱이보다 5살 많은 학교 선배였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유일한 친우이자 형제처럼 함께 지냈습니다.
이듬해에는 같은 하숙집을 얻어 생활도 함께 했습니다.
같이 지내면서 시 쓰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특히 윤동주는 완성된 시를 세상에 선보이기 전에 병욱게 가장 먼저 선보였습니다.
두 사람은 모든 것을 공유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병욱과 함께 하던 시절 윤동주는 17편의 시를 썼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윤동주 시인의 대표적인 시들은 이때 적었습니다.
'서시'가 나온 1941년해는 일본의 만행이 극에 달했던 시기입니다.
일제 강점기 민족의 암흑기였던 시대에 시를 쓴 윤동주, 그는 19편의 시를 선별해 시집을 만들었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집원고 였습니다.
자필로 쓴 육필원고 3세 중 1권은 본인이 갖고 한 부는 그의 스승님에게 그리고 마지막 한 부는 친우인 정병욱에게 건넸던 것입니다.
윤동주는 형무소에, 정병욱은 전쟁터에
이 원고를 받고 얼마 후, 어마어마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하와이 미군기지 진주만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본격적인 태평양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군인이 더 필요해졌습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우리 청년들을 전쟁터로 끌고 갔습니다.
그런데 조선인에게 총을 들게 하는 게 불안했습니다.
그 총을 자신, 즉 일본에게 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일본은 조선인을 대상으로해서 대한민국 사람들의 정신개조를 위해서 '황국신민화' 정책을 시작했습니다.
조선인을 뼛속까지 개조해서 천황의 충성스러운 백성으로 만들겠다, 딴 생각을 못하게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업이 끝난 학생들은 전교생이 '신사'에 가서 참배를 해야 했습니다.
그 시절 서울 남산에는 무려 12만 8천평 규모로, 일본 천황과 신을 모신 신사가 있었습니다.
특히 일본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아예 없애버리려고 '창씨개명'을 실시했습니다.
창시개명을 거부하면, 학교도 다닐 수 없고, 최소한의 일상생활도 불가능했습니다.
1942년 창씨개명을 한 윤동주, 그의 이름은 히라누마 도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창씨개명을 하기 5일 전에 '참회록'이라는 시를 쓰며 본인의 선택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가.
부끄러움을 안은 채 일본 유학을 떠난 윤동주, 그런데 이듬해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며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당시 일본은 독립운동가를 잡아 넣기 위해 무력 항일 투쟁이 아니더라도, 그런 사상만 갖고 있어도 처벌했습니다.
그는 독립운동가로 지목되며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동주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습니다.
같은 시기, 경성에 있던 김병욱에게는 징집장이 날아오며 일본군에 징집되게 되었습니다.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그는 전쟁터에 강제로 끌려가기 며칠 전 고향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에게는 꼭 지킬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윤동주가 자신에게 준 육필원고를 지켜내야 한다는 신념에 어머니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절대로 일본 순사들 눈에 띄면 안됩니다.
저나 동주형이 돌아올 때까지 소중히 간수해주세요.
한글로 쓰인 이 시집은 그 시대 불온 문서나 다름없었고 이를 지켜내기 위해 어머니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병욱운 어머니에게 전쟁터에 떠나기 전에 원고에 대한 말을 남겼습니다.
혹시 저나 동주형이 모두 죽고 돌아오지 못하면
이걸 연희전문학교에 보내서 세상에 알려달라.
주검으로 돌아온 윤동주, 그리고 수상한 주사
그리고 1년이 지났습니다.
1945년 윤동주가 사망했다며 시신을 찾아가라는 전보가 왔습니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를 찾아가시오.
동주의 아버지와 당숙이 곧장 후쿠오카 형무소로 향했습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한 윤동주의 사망 원인은 뇌일혈.
뇌일혈은 뇌 안에서 출혈이 생기는 뇌출혈과 비슷한 병으로 갑자기 혈압이 높아질 때 혈관이 터지면서 사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뇌혈일이 20대 혈기 왕성한 청년의 사인으로는 석연찮았습니다.
그리고 후쿠오카 형무소 교도관 한 명이 유가족이 오자 다음과 같은 묘한 말을 남겨 의아함이 더했습니다.
유족이 오지 않아서 시신을 규슈 제국 대학으로 옮기려던 참이었다.
시체를 해부용 시신으로 넘기려 했다는 말인데, 여기에도 소름 끼치는 비밀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윤동주의 가족들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났습니다.
푸른 죄수복을 입은 조선인 청년들이 '시약실' 이란 곳으로 들어가려 대기중이었는데, 그때 줄 서 있던 청년 중 윤동주의 고종사촌 송몽규를 만난 것입니다.
그는 윤동주와 같은 해에 태어나 연희전문학교도 같이 다니고 일본 유학도 함꼐 온 후 같은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던 것입니다.
윤동주 가족들은 송몽규의 몰골이 말이 아니라 못 알아볼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송몽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떤 주사인지는 모르겠는데
저 놈들이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됐어요.
동주도 저랑 똑같이 그 주사를 맞고 그리 됐어요.
대체 주사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일본은 주사를 맞을 때마다 암산 테스트를 했다고 합니다.
이는 임상 실험에서 흔히 부작용을 판단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이었습니다.
일본의 만행, 끔찍한 생체실험
이는 바로 생체 실험이었고, 마루타로 유명한 731부대가 생체 실험을 주도했습니다.
일본 관동군 방역급수부는 2차 대전 당시 만주에서 생체 실험을 자행했는데 실험 대상을 일본 말로 껍질 벗긴 통나무라는 의미의 마루타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소량의 가스로 대량살인을 할 수 있는가.
비둘기도 넣고 사람도 넣고 개도 넣고 여러 대상을 넣었다.
실험장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마루타가) 쓰러지는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전731부대 운전수-
동상실험을 했던 마루타를 본 적 있다.
손에 물을 담그고 얼도록 방치한다.
발이 없다든지 손발이 절단됐다든지 그런 상태였다.
-전 731부대 특별반-
살아있는 사람을 해부했다.
-전 731부대원-
이들은 소량의 가스로 대량 학살이 가능한지 실험하고 동상 실험, 살아있는 사람을 해부하는 등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들을 했습니다.
그리고 잔인한 실험의 대상은 전쟁 포로와 독립운동가들이었습니다.
중국 지린성 기록보관소가 공개한 일본 관동군 731부대 관련 자료를 분석한 결과, 일본군이 독립투사 등을 범죄자로 몰아 731부대로 끌고 간 뒤 생체실험 도구로 이용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에 대한 증거나 증언도 모두 남아있지만 일본은 지금도 그 실체가 없음을 발뺌하고 있습니다.
731부대는 있었으나 생체 실험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1945년 5월 일본군에 잡힌 미군 포로들은 생체실험 대상자가 되어 한 대학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미군 포로들에 대한 생체 실험을 진행한 곳이 바로 큐슈 제국대학이었습니다.
윤동주가 있던 형무소와 가깝고, 동주의 시신을 보내려던 곳이었습니다.
이는 과연 우연이었을까요?
당시 이 학교에서는 어떤 실험을 했을까요?
그건 1948년에 열린 미군 생체실험 관련 재판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규슈 제국대학의 의과 교수였던 센바라는 사람이 미국인 포로들의 정맥에 바닷물을 주입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는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수혈용 혈액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혈액을 대체헐 것을 찾으며 바닷물을 주입했던 것입니다.
전문가는 바닷물에는 다양한 오염물질이 있기 때문에 정맥에 바닷물을 주입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소독을 완전히 한다고 해도 뇌혈관에 감염이 일어난다.
뇌일혈 증상과 비슷한 증상이 나온다.
윤동주 또한 같은 실험을 당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후쿠오카 형무소나 규슈 제국대학 등은 기록이 없다는 말만 할 뿐이었습니다.
남은 기록은 후쿠오카 형무소의 사망자수가 해가 갈수록 2배씩 증가했다는 기록뿐이었습니다.
1943년 사망자 수는 64명인데, 1944년 131명, 1945년 259명으로 집계돼 있습니다.
윤동주가 사망한 해에는 무려 259명이 사망했는데 이들 중에서 상당수가 생체 실험에 동원된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이 됩니다. 하지만 진실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있습니다.
스스로 부끄러워 했지만, 절대 부끄럽지 않았던 윤동주
1945년 3월 6일, 두만강 건너편에 있는 동주의 고향마을에서는 동주의 장례식이 열렸습니다.
27년 1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생을 마감한 윤동주 시인.
그날 그가 쓴 '자화상'이라는 시가 낭독되었습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자화상'-
대부분의 윤동주 시에는 부끄러움이라는 정서가 많이 깔려있는데 이는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 없다는 것에 부끄러워했던 것이 아닐까 추측이 됩니다.
마지막 순간 윤동주의 모습은 판결문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동주의 죄목이 세세히 적혀있습니다.
- 첫째, 조선민족을 해방하고 독립국가를 건설하려 한 죄
- 둘째, 조선인의 민족성을 향상하여 독립운동의 가능성을 키우려 한 죄
- 셋째, 일본의 패전을 바라고 조선 독립을 결의한 죄.
판결문 마지막 장에는
판시 사실은 피고인의 공술에 의하여 이를 인정한다.
윤동주가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법정에서 당당하게 조국의 독립을 이야기 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증거가 없어서 "난 그런적 없다."고 빠져나갈수 있는데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끝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떠났던 것입니다.
그가 사망하고 6개월 후 독립이 왔습니다.
전쟁터로 끌려갔던 병욱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맡겨 둔 윤동주의 육필원고를 찾았습니다.
병욱의 어머니는 집 마루를 뜯고, 그 밑에 묻은 독에서 명주 보자기를 꺼냈습니다.
그 안에는 소중히 간직한 윤동주의 육필원고가 있었습니다.
본가 마루 바닥 아래 윤동주의 원고를 숨겨뒀던 어머니 덕분에 원고는 무사히 되찾을 수 있었다.
윤동주가 처음 만든 원고는 총 3부.
윤동주가 소장하고 있던 건 일본 경찰에 뺏겼고, 스승님에게 드린 건 행방이 묘연합니다.
세상에 일하게 남겨진 윤동주의 원고는 정병욱에게 준 원고였습니다.
정병욱과 그의 어머니가 아니였다면 윤동주의 시는 세상 밖으로 못 나왔을 것입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아픈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그렇게 윤동주의 시는 살아남았고, 윤동주의 3주기를 앞둔 1948년 첫 시집이 발간됐습니다.
유족과 친구들, 지인들이 나서서 시집을 펴냈던 것입니다.
초판에는 윤동주의 시 31편이 실렸고, 그 중 19편이 병욱이의 육필원고에 있던 시였습니다.
이는 바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시집이었습니다.
첫 장을 넘기면 우리가 잘 아는 '서시'가 나옵니다.
'서시'는 책의 '서문' 같은 개념입니다.
동주는 서문을 시로 적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윤동주가 사랑했던 하늘, 그를 뒤흔드는 바람, 그를 위로해주던 별, 그리고 그가 끝까지 고민했던 시인으로서의 길.
그 모든게 '서시'에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시집의 제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아닐까합니다.
그런데 윤동주가 남긴 육필 원고에는 쓰였다 지워진 글씨 흔적이 있었습니다.
'병원'이라는 글의 한문이었습니다.
사실 윤동주는 본래 시집 제목을 병원으로 붙이려고 했었던 것입니다.
환자 투성이의 세상에 자신의 시가 병원이 되길 바랐던 것입니다.
정병욱에게 이 원고를 줄 때 윤동주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제목을 '병원'이라 붙일까 했어요.
지금 이 세상은 환자 투성이니.
혹시 이 시집이 아픈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정병욱은 문학가로서 윤동주의 친우로서 사명감을 갖고 평생 대학교 교수, 국문학자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정병욱의 여동생과 윤동주의 남동생이 결혼하며, 서로를 흠모하던 병욱과 동주는 진짜 가족, 사돈이 되었습니다.
또한 정병욱은 윤동주의 시 중에 있던 흰 그림자(백영, '흰 백(白)' 자에 '그림자 영(影)) 를 호(號)로 만들어 윤동주에 대한 마음을 영원히 새겼습니다.
그런데 병욱은 윤동주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님은 윤동주 시인에 대해서는 말씀을 잘 안하셨다.
윤동주 시인을 후세 사람들이 자유롭게 읽고 또 이해하도록 해야지, 자신이 윤동주를 소개하는데 자꾸 부연설명하고 얘기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신 거 같다.
세미나 같은 곳에서도 윤동주에 대해 발표하신 분이 '잘 아시니 말해달라' 해도, 추억에 잠기신 그런 표정으로 가만히 계셨다."
-정병욱 교수 차남 정학성 씨-
후세가 윤동주와 그의 시를 스스로 느끼고 이해하길 바랬던 것입니다.
그리고 병욱은 82년 6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병욱은 죽기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평생 윤동주와 함께 했습니다.
오늘날 나에게 문학을 이해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인생의 참뜻을 아는 어떤 면이 있다고 하면은
그것은 오로지 그가 심어준 씨앗의 결실임을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가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윤동주에 대한 마음을 평생 품었던 정병욱.
전남 광양에 있는 그의 고향집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보존돼 있습니다.
윤동주와 정병욱, 이 두 분이 같이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유일하게 남은 한 장의 사진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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