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포스팅 순서]
1. 총성과 함성, 보스턴 상륙작전
2. 손기정 1936년 베를릴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이야기
3. 손기정 지도자 및 체육행정가로서의 활약
4. 손기정 프로필
5. 꼬꼬무 시즌3, 87회 게스트 이야기 손님
6. 1993년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사고 꼬꼬무 733편 목포 해남 아시아나 항공 사건 86회 게스트
7. 꼬꼬무 원진레이온 남양주 마을의 숨겨진 살인마 사라진 308명 산업재해 사건 직업병 산재 사태 85회
8. 꼬꼬무 이춘재 화성 연쇄살인 사건 범인 프로필 63년생 직업 학교 아들 근황 83회 게스트 살인의 추억
총성과 함성, 보스턴 상륙작전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을 조명했습니다.
'꼬꼬무' 87회는 '총성과 함성, 보스턴 상륙작전' 편으로, 손기정의 그날 모습 뒤 숨겨진 진짜 이야기가 펼쳐졌습니다.
때는 1932년 4월, 일본 도쿄의 한 여관 앞.
일장기를 든 수많은 일본인 사이 여덟 명의 조선 청년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청년이 기다란 무언가를 꺼내드는 순간, 탕! 총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청년은 필사적으로 내달리기 시작했고 수 십 명의 일본인들이 그 뒤를 쫓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일제강점기 도쿄 한복판에서 조선 청년들이 필사적으로 뜀박질을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조선 청년들의 정체는 바로 양정고등보통학교 육상부였습니다.
일본 최대 달리기대회에 유일한 조선 팀으로 참가한 것입니다.
심지어 결과는 우승으로 이날의 일등 공신은 구간 신기록을 달성한 양정의 비밀병기 신예 손기정, 그리고 고참 에이스 남승룡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마라톤 영웅, 손기정이 있기까지 그의 곁엔 항상 남승룡이 있었습니다.
어디서도 공개된 적 없었던 두 선수의 가슴 뜨거운 '마라톤 투쟁기'를 '꼬꼬무'에서 본격적으로 공개했습니다.
이번 방송에서는 당시 올림픽에서 두 선수가 신었던 신발, 손기정의 친필사인, 여행증명서 등 희귀한 자료들이 대거 공개되었습니다.
4년 뒤인 1936년 8월 9일, 올림픽 마라톤 종목 최초 동양인 우승자이자 마의 2시간 30분대를 깨고 세계 신기록을 세운 손기정. 1등으로 들어온 동양인 소년에게 모든 관심이 쏠렸지만, 정작 그는 시상대에서조차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아는 그날의 이야기입니다.
손기정의 베를린에서의 행적들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입니다.
의문의 체육복 사진부터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며 남긴 친필사인까지, 당시 손기정을 기억하는 외국인들은 그의 언행에 특별한 점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또 조선으로 돌아온 올림픽 영웅 손기정이 가장 먼저 한 것은 바로 마라톤 은퇴였는데, 그가 세계 정상에서 마라톤을 포기해야만 했던 진짜 이유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로부터 9년 뒤, 해방이 되자마자 손기정은 동반자 남승룡과 그동안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미국에서 열리는 보스턴 국제 마라톤대회에 참가하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손기정과 남승룡은 이미 고령의 나이였습니다.
서둘러 신예 선수를 발굴해야 하는데, 전국 팔도를 다 뒤져도 마음에 드는 인재가 없었습니다.
과연 두 사람은 제2의 손기정을 찾을 수 있을까요?
보스턴까지 넘어야 할 산은 또 있었습니다.
해방 직후, 여권이며 경비를 지원해줄 정부도 없는 상황에 손기정과 남승룡은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 최초의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들의 짠내 나는 해외 원정기를 꼬꼬무에서 알아보았습니다.
손기정 1936년 베를릴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이야기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까지 활약했던 대한민국의 육상 선수이며, 한국인 운동선수 최초로 올림픽을 제패한 한국 체육계의 선구자입니다.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동갑내기이자 양정고등보통학교 동기였던 남승룡과 베를린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 참가했습니다. 일본 육상계에서는 당연히 순수 일본인을 뽑고 싶어했겠지만, 실력자라는 것에 이견이 없는 손기정과 남승룡을 떨어뜨리기엔 눈치가 보여서 대표팀으로 발탁했습니다.
헌데 일본 육상계는 4년 전 1932 LA 올림픽 당시 일본 국적으로 출전했던 조선인 선수 김은배, 권태하가 일본 선수의 페이스 메이커를 해주려던 전략을 무시하고 각각 6위, 9위에 랭크되었던 악몽이 있어서, 일본 육상팀은 이 대회에서는 반드시 일본 선수를 많이 뽑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표 선발전에서 1위에 남승룡, 2위에 손기정이 랭크되자, 일본 대표팀은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 둘을 탈락시키려는 속셈으로 수작을 부렸습니다. 현지에서 컨디션 조절을 하고 쉬어도 모자랄 판에, 그렇게 일본 육상팀의 억지로 전대미문의 2차 선발전 현지 테스트가 열렸고, 이것도 모자라 일본 측에서는 이 둘을 탈락시키기 위해 일본 선수 2명을 더 후보로 추가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꼼수를 부리고도 레이스 내내 일본 선수 2명이 이 둘을 따라잡지 못하자 일본 선수들은 몰래 코스를 이탈하면서 지름길로 가는 반칙까지 저질렀고, 이를 본 손기정과 남승룡은 분노하며 반드시 이기자고 다짐하고 달렸다고 합니다.
결국 2차 선발전에서도 손기정과 남승룡은 사이좋게 1, 2위를 나눠 가졌습니다.
그리고 지름길을 이용해 뒤늦게 들어온 일본 선수들은 분노한 남승룡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합니다.
시원시원하고 활발한 손기정에 비해 남승룡은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까지 했을 정도면 화가 얼마나 났을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당연히 일본에서는 "조선인들이 대일본제국의 대표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라는 반발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 둘이서 별 말 없이 실력으로 찍어내려 주니 그런 의견은 쏙 들어갔습니다.
이후 올림픽 본선 경기에서 '2시간 29분 19초'로 당시 올림픽 신기록을 기록하며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같이 출전한 남승룡은 동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사실, 손기정의 금메달에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남승룡도 막판에 스퍼트를 내면서 무려 30명을 추월하여 3위로 골인하는 대단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손기정은 금메달을 받은 다음 날 아돌프 히틀러와 만났습니다.
그는 이 순간을 "160cm인 내 키에 비해 그의 손은 크고 억셌으며, 체구는 우람했다. 그리고 독일을 이끌어가는 통치자답게 강인한 체취를 풍겼다."고 회고했습니다.
기록된 바에 따르면 손기정은 한민족 인물 중에서 히틀러와 공식적으로 대면한 유일한 인물입니다.
체육인으로서는 최고의 영광이라 할 수 있는 올림픽 금메달을 땄지만, 그가 올림픽 경기 직후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는 "슬프다"(당시 한글 표기로는 '슬푸다')라는 석 자가 쓰여 있어, 많은 한국인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시상식 사진을 보면 1위와 3위로 각각 단상에 올라선 손기정과 남승룡 모두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손기정은 묘목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고 있습니다.
남승룡은 어떻게 해서든 바지를 명치까지 끌어올려 일장기를 가리고자 하였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기뻐해야할 날에 오히려 슬픔에 사무친 나라 잃은 두 청년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콧날이 시큰해질만한 사진입니다. 은메달을 수상한 뒤의 영국 선수의 밝은 표정과 대조적입니다.
동메달을 차지했던 남승룡은 훗날, "기정이가 우승해서 금메달을 땄다는 사실보다, 묘목을 받아 그것으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삭제한 사진을 실어서 동아일보가 정간당한 일장기 말소사건도 유명하다.
이런 판국이니 조선총독부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엄중한 통제와 감시 속에 그를 귀국시켰고, 이 탓에 올림픽 영웅에 걸맞는 환영 인파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손기정이 정말로 찬밥 대우를 받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손기정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 일제 치하 조선의 대중들에게 암묵적으로 큰 인기와 존경을 얻었으며, 이 당시 국내의 신문광고, 특히 의약품, 식품 광고는 손기정의 올림픽 금메달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담는 광고가 많았습니다.
특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과자 광고에는 '이 과자를 먹고 쑥쑥 커 손기정과 같은 사람이 되겠다'라는 식의 카피라이트가 유독 많았습니다.
소설 《상록수》의 저자 심훈은 손기정의 우승을 찬양하며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시를 짓기도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시는 심훈이 같은 해인 1936년 9월 갑작스럽게 장티푸스에 걸려 병사하면서 그의 마지막 시가 되었습니다.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은 당시 일본 식민지 치하 조선인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 시골의 아낙들도 올림픽이 무엇인지 알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손기정은 스포츠 영웅이 되어 금의환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술된 사건 때문에 떳떳이 활동할 수 없었습니다.
일장기 말소 사건을 통해 조선 민중의 민족의식 강화를 바짝 경계하던 조선총독부는 아무 죄 없는 손기정에게 사복경찰을 붙여서 감시했고, 손기정은 심적으로 무척 괴로웠다고 합니다.
풍문에 따르면, 의지의 승리를 찍은 영화 감독 레니 리펜슈탈과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까지도 손기정에게 상당히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습니다. 그 이유는 손기정이 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경박하게 굴지 않고 일견 우울한 듯 보일 정도로 과묵한 태도를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올림피아에서 손기정이 꽤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리펜슈탈이 이 동양인 선수에게서 정말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1956년에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편 아돌프 히틀러가 손기정을 '동맹인 일본의 국민'으로 간주해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는 말도 있는데, 사실 이는 잘못된 정보입니다. 전쟁 당시 동맹국이란 것만 알고 있으면 나오는 오류로, 올림픽 당시에는 독일에겐 일본은 적국이었습니다.
1차 대전의 일본 제국은 승전국 포지션으로 이것저것 뜯어갔기 때문에 공산주의와 일본을 견제한다고 중국 국민당군을 정예화 시켜놓은게 독일입니다. 이 군사적 지원 때문에 중일전쟁 초기에 질질끌리게 된 원인 중 하나이니 말 다한 셈입니다.
또한, 히틀러는 출전 소속만 일본으로 되어 있을 뿐 손기정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주지하고 있었습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우승하자 독일 방송들은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Wo der Japanische Sieger Son kommen muss, der Koreanische Student, er hat die Streitmacht der Welt zertrummert, mit asiatischer Fähigkeit und Energie ist der Koreaner durch.
일본의 우승자 손기정이 옵니다, 조선 대학생 손기정은 전세계의 경쟁자들을 아시아의 능력과 에너지로 눌렀습니다.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의 수상자 명패에는 '손기정' 대신 '손 기테이(SON, Kitei)'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사건으로 1970년에 신민당 제7대 국회의원이었던 박영록이 야간에 베를린 올림픽 기념관에 불법 침입하여 기념비에 새겨져 있던 손기정의 국적을 훼손하여 불법 침입, 절도 및 공공재산파손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으나, 체포되기 전에 한국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박 의원이 무엇을 훔쳤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서독 경찰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JAPAN이라는 글자를..." 국적을 한국(KOREA)으로 고치기 위해 이 5개 문자를 다른 우승비에서 떼어모았으니 명백한 기물파손이며 도려낸 일본(JAPAN)의 문자는 그대로 들고 도망갔으므로 절도 혐의도 적용됐지만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송환되어 처벌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는 선수 시절과 은퇴 후의 국적이 달라졌다고 해서 이름이나 국적을 은퇴 후 기준으로 수정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식민지 출신 선수가 종주국 대표로 나와서 메달 딴 건 손기정, 남승룡 말고도 많으며, 그들 역시 종주국 선수로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그 뒤 손기정은 1937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상과(商科)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보전에는 재정학을 가르치는 홍성하(洪性夏) 교수가 체육부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홍 교수는 뜨거운 민족주의자여서 학교 스포츠를 장려하여 학생들의 사기를 진작시키자는 지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지론으로 인촌 김성수(金性洙) 교장을 설득, 1937년에 전조선의 중등학교를 졸업하는 우수 운동선수들 다수를 뽑아 상과에 수용하였습니다.
손기정은 보성전문학교 육상부를 대표하여 1937년 봄에 조선학생육상연맹이 주최하는 2개 대회에 출전, 보성전문의 우승에 기여하였습니다. 그 대회 중 하나는 4월 25일에 거행된 조선학생 수원~경성간 역전경주대회.
당시의 학제는 3월 졸업, 4월 입학이었으니까 입학한 지 며칠 되지 않아 5명이 이어 달리는 보전팀 최종 주자로 시흥~서울운동장 간을 역주, 7개 팀 중 최선두를 달려 보전을 우승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6월 5~6일에는 서울운동장에서 조선학생육상대회가 거행되었는데 첫날엔 1,500m, 이튿날엔 5,000m에서 우승하였습니다. 당시 보전엔 박찬규, 백승욱, 인강환 등 장사들이 즐비했습니다.
이들이 포환, 원반, 해머던지기 등에 활약한 데다 손기정의 장거리 우승을 더하여 보전은 종합우승을 달성하였습니다.
이렇듯 손기정이 보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자, 조선총독부는 이를 골치 아프게 생각했습니다.
당시 1930년대 중반에 조선인 학생이 진학할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 가운데 조선인이 교장인 학교는 보전뿐이었고, 교수들 가운데엔 창문을 닫게 하고 한국어로 강의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런 학교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이 재학하면서 육상대회에서 활약하자 그는 하루 아침에 영웅이 되어 보전에는 그를 중심으로 서클이 형성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손기정이 보전에 다니는 것을 꺼렸고, 조선에 있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총독부의 관헌은 손기정을 주야로 감시하였고, 이를 견디다 못한 손기정은 1937년 2학기에 반강제로 보성전문을 중퇴하고 일본 내지로 건너가 도쿄의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과에 편입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쿄에서도 일본 관헌은 손기정이 마라톤을 달리고 육상경기대회에 출전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해마다 양력 정초엔 도쿄~하코네 간 대학대항역전대회가 거행되었습니다.
손기정을 맞은 메이지대학은 그 역전에서 성적을 올리게 되었다고 좋아했으나 그는 달릴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 관헌이 공중 앞에서 손기정이 달리는 것을 금지했던 것입니다.
결국 손기정은 메이지대학 전문부를 졸업한 후 1944년까지 조선저축은행에서 은행원으로 일해야 했습니다.
손기정 지도자 및 체육행정가로서의 활약
해방 이후 10월 조선체육회가 개최한 '자유해방 경축종합경기대회'에서 손기정은 기수를 맡게 되었습니다.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서 슬픈 우승을 해야했던 손기정은 개막식에서 태극기를 들고 감격에 겨워 마냥 눈물을 흘렸습니다.
손기정은 대한민국의 체육계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는 각각 1947년과 1950년에 감독으로서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서윤복과 함기용을 훈련시켰습니다.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손기정의 제자인 서윤복이 2시간 25분 39초의 기록으로 손기정의 기록을 깼습니다.
올림픽 기록은 2시간 29분 19초였는데 당시 올림픽 마라톤에서 처음으로 2시간 30분의 벽을 깼습니다.
훈련법도 무척이나 독해서 발에 무거운 추를 달고 달리기도 했고, 일본 대표팀이 전부 자고 있을 때 새벽에 일어나서 혼자 훈련을 강행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948년에 대한체육회 부회장 겸 1948 런던 올림픽부터 1964 도쿄 올림픽까지 마라톤 대표팀 감독으로 역임했고, KOREA의 이름으로 처음으로 참여한 올림픽에서 개막식 기수로 당당히 태극기를 들고 입장하였습니다.
이후 1963년에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1966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대표단장으로 참가하였습니다. 1971년에는 올림픽 위원회(KOC) 위원, 1981년부터 1988년까지는 1988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을 역임하였습니다.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의 성화봉송 주자로 발탁되기도 했습니다.
LA의 코리아타운을 달렸습니다.
이 때 손기정으로부터 성화를 넘겨받은 인물이 바로 새미 리였습니다.
둘의 우정은 생각보다 오래 됐는데, 1947년에 손기정이 보스턴 마라톤에 제자들을 이끌고 참가했을 때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손기정의 인생 후반부에서 특히 기억되어야 할 장면은 1988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 최종 봉송 주자로 뛴 것을 들수 있습니다. 사실 손기정은 성화 최종 봉송 주자가 아닌 성화 점화자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한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당연히 손기정이 성화를 점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극비에 부쳐져야 할 최종 점화자가 너무나 쉽게 예상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결국, 손기정이 경기장으로 성화를 들고 들어오는 역할을 하고 이후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스타덤에 오른 육상선수 임춘애가 넘겨받은 뒤 최종적으로 1명의 체육인과 2명의 일반인이성화를 점화하였습니다.
손기정의 외손자인 이준승의 회고에 따르면 손기정은 본인이 당연하게 최종 성화 점화자로 선택될 거라 생각했는데 대회 직전에 이게 뒤집히자 의자까지 집어던지며 격노했다고 합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성화봉송 때 자신이 있었고 멋있게 달리기 위해 1년이나 훈련했다고 합니다.
당시 영상을 보면 손기정은 가슴에 당당하게 태극 문양의 1988 서울 올림픽 엠블럼을 달고 정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면서 펄쩍펄쩍 뛰며 성화봉송을 했습니다.
손기정의 영광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는 그 순간, 손기정이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황영조가 마라톤에서 우승한 날과 손기정이 우승한 날은 8월 9일로 똑같습니다.
'''황영조가 결승점에 골인하는 순간, 바르셀로나 올림픽 공식 중계방송은 관중석에 있던 손기정을 '손기정'이라는 이름과 함께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라는 자막과 함께 비춰줬습니다.
그야말로 한국 올림픽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황영조는 손기정이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또한 시상이 끝난 직후 경기장에서 지켜보던 손기정이 황영조를 만나 격려하는 장면도 유명합니다.
이때 황영조의 두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이는 손기정의 사진은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당시 은메달이 일본, 동메달이 독일 선수라 폐막식 때 태극기 양 옆으로 일장기와 독일 국기가 나란히 올라갔는데, 이걸 보고 손기정은 "56년 전 그날, 한국인인 내가 일본 국기를 달고 독일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그 3개의 국기가 나란히 올라갔다"고 감격하기도 했습니다.
1936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우승의 부상으로 그리스의 한 신문사가 손기정에게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를 주려 했으나 당시 IOC 규정이 메달 이외의 부상을 수여할 수 없는 걸로 바뀌는 바람에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일본조차 식민지 청년이 더 유명해지는 걸 원하지 않아서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독일 박물관에 보관하다가 그리스 언론사의 주선을 받아 인수를 시도한 지 10년이 지난 1986년 베를린 올림픽 50주년을 기념해서 손기정 선수 본인이 인수하였습니다.
이후 손기정 옹은 집에서 이 투구를 보관하다가 1994년 대한민국에 기증하였습니다.
이 투구는 현재 대한민국 보물 904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손기정 프로필
생년월일(출생일): 1912년 10월 9일
고향(출생지): 평안북도 신의주시 민포동
사망: 2002년 11월 15일 향년 90세
본관: 밀양 손씨
학력: 양정고등보통학교 졸업, 보성전문학교 상과 수료,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학 졸업
주종목: 마라톤
신체: 170cm
종교: 기독교 → 천주교(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상훈: 체육훈장 청룡장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 10호
꼬꼬무 시즌3, 87회 게스트 이야기 손님
이번 '꼬꼬무'에는 조정식 아나운서, 방송인 조나단, 배우 이미도가 이야기 게스트 친구로 나섰습니다.
최근 당당히 출'사표'를 던진 SBS 前 아나운서이자, 이제는 만능 엔터테이너 '방송인' 조정식이 장성규의 이야기 친구로 '꼬꼬무'를 찾아왔습니다. 프리한 아나운서 두 명이 모인 만큼, 남다른 케미를 선보인 장면이 있었는데, 바로 마라톤 경기 장면입니다. 조정식은 스포츠 중계 전문가다운 면모를 뽐내며 장성규와 함께 대본에도 없는 즉석 중계를 펼치며 그날의 감동을 생생하게 전했습니다.
'대한 외국인' 조나단이 장도연의 이야기 친구로 등장했습니다.
평소 한국 역사에 관심이 많아 소위 '한국사 덕후'라는 수식어가 있을 정도로 박학다식한 조나단.
그런 그조차도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인 남승룡 선수는 잘 몰랐다며, 놀라운 이야기들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배우 이미도가 장현성의 이야기 친구로 '꼬꼬무'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체육인 배우'를 자부하며 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이야기에 200% 공감하던 그녀는 두 선수의 목숨을 건 투쟁과 노년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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